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16화 (16/86)

#16. 그래서 좋아해

2017.06.25.

토요일 아침, 오늘도 늦잠에 실패한 모단은 한 손에 꽃무늬 목욕가방을 들고 엄마와 터덜터덜 동네 목욕탕을 나섰다.

새벽에 비몽사몽 끌려갈 때만 해도 짜증이 밀려왔는데 막상 때를 밀고 나오니 개운하긴 했다.

“모단이 너, 지난번에 맞선 볼 때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뭔 짓이라니?”

“여자분이 너무 순수해서 부담스럽다니, 말이 돼? 네가 나간 거 맞아?”

“딸이 순수하다는데 말이 안 된다니, 엄마가 할 말이야?”

모단은 젖은 머리카락 위에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썼다.

‘버섯 먹였다고 일러바칠 줄 알았더니 저도 찔리는 게 있긴 했나 보네.’

“난 나름 최선을 다했다니까? 꾸미고 나간 거 엄마도 봤잖아. 안 떨던 내숭을 떨어서 그래. 수위 조절에 실패한 거지.”

“얼씨구.”

“밥도 복스럽게 잘 먹었고, 먼저 말도 많이 했고, 잘 챙겨주는 모습도 어필했다니까.”

상대방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근데 후식도 나오기 전에 일어나더니 자기 볼일 있다고 알아서 집에 갈 수 있으시죠? 하고 가는데 나보고 뭐 어쩌라고.”

“그게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물론 남자가 꼭 데려다주라는 법도 없고 바라지도 않았지만, 태도가 불쾌했다고. 난 정말 잘못한 거 없어. 나 먹은 밥값까지 당당히 냈구만.”

혜숙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은 모단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걸고넘어지면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는데 지금까지 찬 게 있어서 넘어가는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수고 많으셨다고 여사님께 전해 드리고, 이제 다시는…….”

“아니, 뭐 그런 놈을 내보냈다니? 네가 하도 아니다 아니다 하니까 당해보라고 그런 거야, 뭐야?”

모단은 슬금슬금 몸을 움츠렸다.

내 새끼는 까도 내가 깐다고, 딸 얘기를 듣고 나니 혜숙도 적잖이 맘이 상한 듯했다.

죄송스럽긴 했지만, 이제 와서 사실을 밝혔다간 등짝에 구멍이 뚫릴 게 뻔했기에 모단은 굳게 입을 닫았다.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자. 아직 열두 개의 중매 수첩이 남아 있다면서 주말마다 시간 비워놓으랬으니까, 다음에 한 번 더 보고 그때도 아니면 엄마도 가만 안 있을 거야.”

“뭔 소리야, 그게!”

이번에야말로 해방되나 했는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엄마, 현실을 직시해. 내 또래의 진짜 괜찮은 남자는 이미 아내 손잡고 아이 안고 마트에서 카트 밀고 있을 거라고!”

아직 그 정도로 늦진 않았지만, 엄마의 기대를 하루라도 빨리 무너뜨려야 했다.

“그리고 나 이제 주말에 시간 못 내.”

“왜? 술 사 먹을 돈이 모자라서 주말 알바라도 하기로 했어?”

“알바? 내가 알바를 왜 해! 투잡을 왜 뛰냐고! 내가 아무리 돈이 궁해도, 응?”

얼마면 되느냐던 어처구니없는 말을 떠올린 모단이 바락 흥분했다가 수상한 눈빛을 받고 찔끔했다.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주말에…….”

뭐라고 해야 하나.

‘뭘 배운다고 할까? 그러면 학원 영수증 가져오라고 하실 것 같고. 공짜로 배우는 거라고 하면 되려나? 동호회 같은…….’

모단은 번뜩 뇌리를 스치는 단어를 낚아챘다.

“동호회! 사내 동호회에 들기로 했어.”

“사내 동호회?”

“응. 회사 차원에서 지원도 많이 해줘서 저렴한 비용으로 취미 활동을 즐길 수 있고 인맥도 많이 쌓을 수 있대.”

동호회 같이 하자며 효림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혜숙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모단은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자원봉사 동호회인데, 괜찮은 남자 직원들도 많대. 주말마다 만나며 친목을 쌓을 수 있다고…….”

“그런 거라면 열심히 해야지! 자원봉사라니, 아휴, 기특해라.”

내 그럴 줄 알았지.

모단은 비로소 한시름 놓았다. 대충 주말마다 어디 나가는 척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여사님한테 제발 그만하시라 그래.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고.”

“알았어. 근데 너 동호회 얘기 엄마한테 뻥친 거면 알지? 은규한테 물어볼 거야.”

“뻐, 뻥은 무슨. 진짜야…….”

은규는 모단이 아는 사람 중 가장 거짓말에 서툴렀다. 모단은 감히 엄마를 얕보고 스스로 제 무덤을 팠음을 인정했다.

‘일단 동호회에 들어는 놔야겠다. 효림 쌤 말로는 매주 하는 거 아니랬으니까 적당히…….’

한숨을 내쉰 모단이 혜숙의 팔을 잡았다.

“근데 엄마는 왜 나 결혼 못 시켜서 안달이야? 나 시집가면 자주 못 볼 텐데 서운하지도 않아?”

“기집애. 시집가면 친정에 코빼기도 안 비칠 기세네.”

“아무래도 지금만 하겠어? 서울 남자 만난다는 보장도 없잖아. 난 그냥 엄마랑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은데.”

혜숙이 제 팔을 잡은 모단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고리타분하게 들리겠지만, 살아보니까 남편이 있는 거랑 없는 거랑 참 다르더라.”

“엄마는 남편이 있다가 없으니까 그렇지. 거기에 혼자서 애까지 키웠으니까. 나처럼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으면 다른 거 못 느끼고 살 수도 있어.”

“그건 그렇지. 엄마도 가끔 그런 생각은 들더라. 내가 좋았다고 해서 너도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는데.”

웬일로 수긍을 하신대.

모단이 입꼬리를 비쭉 내렸다가 툭 뱉었다.

“나는 결혼 안 믿어. 난 누가 뭐래도 엄마 딸이지만, 생물학적인 유전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

혜숙이 걸음을 멈췄다. 모단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나도 결혼해서 애 낳고 그 여자처럼 되면 어떡해.”

잡고 있던 팔을 홱 빼낸 혜숙이 짝 소리가 나게 모단의 등짝을 후려쳤다.

목욕가방을 떨어뜨릴 뻔한 모단이 몸을 배배 꼬았다.

“아우, 이 나이에 길바닥에서 얻어터져야 되겠냐고!”

“그러게 누가 맞을 소리를 하래?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도 마! 난 너 그렇게 안 키웠으니까.”

혜숙이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아무리 꿈틀거려 봐도 화끈대는 데까지 손이 닿지 않아 포기한 모단이 종종걸음으로 뒤쫓았다.

“엄마아.”

뒤에서 혜숙의 어깨를 덥석 안은 모단이 드물게 콧소리를 냈다.

“저기 편의점 가서 바나나우유 사 먹고 가장.”

“살쪄, 기집애야. 보니까 배하고 옆구리에 군살이 한 주먹 붙었드만. 그러게 밤에 맥주 좀 작작 먹으라 그랬지?”

“치사하게 먹는 거 가지고 그래. 오늘은 나가서 먹을 거야!”

“또 어딜 나가려고!”

“오랜만에 고등학교 애들 보기로 했어. 수민이 생일이라. 아무튼 목욕 후엔 바나나우유가 진리지. 얼른 가자!”

***

쪼오옥.

견의 손안에 야무지게 잡힌 바나나우유 통에서 빈 공기 빠는 소리가 났다.

“섭호야.”

“야.”

“오늘은 왜 월요일이 아니야?”

견의 말끝에서 심심해 환장하겠다는 뉘앙스가 뚝뚝 떨어졌다.

자세에서부터 잉여로움이 넘쳤다.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걸치고 반쯤 누워 한쪽 다리를 등받이에 올리고 있었다.

본래의 긴 팔다리였다면 소파가 꽉 찼겠으나 지금은 남아돌았다.

“어린이집 빨리 가고 싶은가 보구먼유.”

“그냥, 뭐. 쪼그만 애기들이 감자를 심는다니까 신기해서.”

섭호는 보던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감자 그까이거, 씨감자 두어 번 동강내서 땅 파구 구녁에다 묻기만 허믄 알아서 크는 거. 기저귀 차고도 심는 거 아뉴?”

“너야 무슨 농사인들 못 짓겠니.”

견의 휴대폰이 울렸다. 자연스럽게 대신 들었던 섭호가 번호를 보고 바로 내려놓았다.

“뭔데?”

“스팸이유.”

“저녁은 따끈한 밥에 스팸 한 조각.”

“아무말 풍년이구먼.”

이번에는 문자가 왔다.

―오빠까지 연락 안 받기야? 나 본가까지 갔다가 지금 오빠 집 앞에 왔거든? 둘 다 집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더 열 받게 하지 말고 얼른 전화해!

발신인 황금지, 까지 읽은 섭호가 눈썹에 힘을 주었다.

“무슨 문자야?”

“오빠 뭐 해? 나 완전 후끈후끈. 전화해∼”

“그놈의 스팸. 날려 버려.”

섭호는 조용히 삭제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또 문자가 왔다.

―추워 죽겠다고! 나 이렇게 추운 줄 모르고 봄옷 입고 왔단 말이야!

“이번엔 또 뭔데?”

“오빠∼ 나 지금 뭐 입고 있게?”

“번호를 바꾸던가 해야지.”

그 문자마저 삭제한 섭호가 책을 덮고 일어섰다.

“어디 가?”

“다른 책 좀 가져오려구유.”

2층으로 올라간 섭호는 곧장 견의 방 바로 옆에 있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가려둔 커튼을 살짝 열고 내다보았다. 1층 거실에서는 담에 가려 안 보였는데, 2층에서는 밖이 보였다.

정말로 대문 앞에 작은 인영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얇아 보이는 노오란 치맛자락과 뽀얗게 드러난 다리가 눈을 찔렀다.

긴 한숨을 내쉰 섭호는 옷장을 열어 코트를 꺼내 들고 방을 나섰다.

“뭐야. 치사하게 혼자 어딜 나가!”

“스팸 사러유.”

“아이스크림도.”

“야.”

섭호가 나간 후, 견은 소파에서 내려와 제 휴대폰을 켜보았다.

문자는 지웠지만 부재중 통화 목록에는 금지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견은 쓰게 웃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스팸 아니었으면 뭔 핑계를 대고 나갔으려나…….”

철커덩.

거대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금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문만 열어준 줄 알고 냉큼 뛰어 들어가려는데 섭호가 불쑥 나왔다.

“악!”

“조심하셔야죠.”

섭호가 등 뒤로 대문을 닫았다. 만면에 웃음을 띤 금지가 섭호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잡았다!”

3초쯤 뻣뻣하게 굳었던 섭호는 금지의 어깨를 잡고 멀찍이 밀어냈다.

“제가 포켓몬입니까? 잡긴 뭘 잡습니까.”

“얼굴 보기 너무 힘들다. 엄청 보고 싶었는데. 나 안 보고 싶었어?”

대답 없는 얼굴을 올려다보던 눈꼬리가 새초롬해졌다.

“전화까지 안 받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전화하신 줄 몰랐습니다. 수신차단을 해놔서.”

“세상에! 날 이렇게 대한 남자는 처음이야!”

“굉장히 식상하네요.”

“그래서 좋아해.”

헤헤 웃는 얼굴을 보다가 헛숨을 흘린 섭호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코트를 건넸다.

“도련님께서 매우 저기압이십니다. 신경 쓰이니까 이거 입고 집에 가시랍니다.”

“흐응.”

코트를 받아 든 금지가 코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대고 눈을 감았다.

“오빠 냄새 나는데.”

제 옷에 반쯤 파묻혀 있는 뽀얀 얼굴을 본 섭호의 뺨에 희미한 홍조가 스쳤다.

“오빠 거지? 오빠가 신경 쓰인 거잖아. 나 얇은 옷 입고 있는 거 보고 걱정돼서 나온 거지?”

금지가 얼른 코트를 걸쳐 입었다. 옷이 어찌나 큰지 거의 종아리까지 내려왔다.

“따뜻하다. 잘 입고 나중에 돌려줄게. 그거 핑계로 만나자고 할 거야.”

“직접 주실 필요 없습니다. 아예 안 받아도 되구요.”

“꽤 비싼 옷 같은데. 견이 오빠가 월급 많이 주나 봐?”

“또래에 비해 적진 않습니다.”

“그래도 노블그룹 사위가 되는 것만큼 부와 명예를 얻는 자리는 아니잖아.”

“그만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도 없는 자리지요.”

섭호는 웃음기 하나 없는 차디찬 얼굴로 내뱉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가씨처럼 뭐든 다 가지고 싶어 할 거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이 가장 좋습니다.”

금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오빠 말대로 나는 뭐든 다 가지고 싶어 하는 애라 위섭호까지 가져야 행복할 것 같은데. 어쩌지?”

“아가씨 행복은 아가씨 스스로 찾으셔야죠.”

섭호가 한 걸음 물러섰다.

“이만 들어가십시오. 감기라도 걸리시면 회장님과 오라버님들께서 적잖이 걱정하실 겁니다.”

“아빠랑 오빠들? 신경 안 써도 돼. 각자 자기한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만한 집안에 나 팔아먹으려고 혈안이 돼서 싸워대는 사람들인데, 뭘. 그래서 내가 한국에 잘 안 오는 거잖아.”

섭호의 눈가에 안쓰러운 기색이 스쳤다. 금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찰나였다.

“나 구해주고 싶은 생각 없어?”

“그럴 힘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후회할 텐데.”

섭호는 그렁그렁해진 눈을 차마 더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빨개진 코끝을 간신히 지났으나,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에서 걸려 더 이상 내려가지 못했다.

“나 지금 바로 택시 타고 이태원으로 갈 거야. 그리고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1차로 마시고, 그다음엔 클럽 M에 가서 문 닫을 때까지 놀다 뻗을 거야. 누가 나가자고 해도 절대 거절 안 할 거야.”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섭호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런 말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하는 건 내 마음이야! 관심 없으면 안 들으면 되잖아! 매번 듣는 척도 안 하는 것 같으면서 다 듣지 말고 진심으로 무시하라고!”

두어 걸음 물러선 금지가 홱 하니 몸을 돌렸다.

“그럼 진짜로 떨어져 줄 테니까.”

메마른 구두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주먹을 꽉 쥐었다 편 섭호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냈다.

“……그게 됩니까.”

***

그날 저녁, 모단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하는 일이 제각각이라 자주 보진 못해도 누군가의 생일 즈음에는 되도록 시간을 맞춰 만나곤 했다.

“우리 오랜만에 클럽 갈래?”

수민이 불쑥 말을 꺼냈다.

새윤을 포함해 결혼했거나 아이가 있는 친구들은 아까 일어나고, 늦도록 남은 셋은 모두 미혼이었다.

“그럴까?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옷 입고 오는 건데.”

“아무리 꾸며봤자 20대 파릇한 애들은 못 이긴다. 근데 우리 들여보내 주긴 한대?”

“왜 이래. 아직 만으로 20대인데. 아, 수민이는 오늘 생일 돼버렸으니까 빼고.”

“퍽이나 큰 차이 나십니다. 근데 정모단 얘 어떡하지? 티 쪼가리에 청바지에 운동화 어떡하지?”

“나 빼고 가, 그럼.”

둘이 동시에 에이, 했다.

“아, 이러면 되겠다! 모단이가 내 옷을 입고, 난 아까 너희가 선물해 준 원피스 입을게. 그럼 어때?”

“오, 좋다!”

“나는 안 좋은데? 그게 치마냐, 빤스냐?”

“노인네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화장실로 따라와. 아직 내 생일 안 지났으니까 내 맘대로 할 거야!”

“몇 분이나 남았다고…….”

얼결에 옷을 바꿔 입고, 화장까지 고치자 제법 그럴듯해졌다. 하이힐 대신 스니커즈를 신은 것도 계속 보니 묘하게 어울렸다.

근처에 주차해 둔 수민의 차 안에 갈아입은 옷이며 짐들을 놓고, 가벼운 몸으로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 이태원 M 앞이요.”

어제 산 신상 립스틱으로 입술을 새빨갛게 칠해주겠다는 수민에게 턱을 붙잡혔을 때만 해도 마냥 귀찮았는데, 막상 나서니 슬슬 신이 나기 시작했다.

늙었다고 안 잘리고 무리 없이 클럽에 입장하자 괜한 자신감과 함께 기분이 더 올라갔다. 시끌시끌한 열기에 파묻히니 흥도 폭발했다.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도 많았던지라, 모단은 아까 저 빼고 가라던 사람 맞나 싶을 만큼 신나게 마시고 놀았다.

“수민아!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시끄러운 음악 소리 속에서 대강 손짓을 한 모단이 걸음을 뗐다.

사람이 워낙 많아 발을 내딛기도 쉽지 않았다. 진이 쪽 빠져 돌아왔는데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여기 맞았던 것 같은데.’

두리번거리던 모단은 현기증이 일어 잠시 바를 짚고 몸을 기댔다.

되는대로 던져 놓은 시선 끝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주위를 살핀 그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러더니 앞에 놓인 술잔에 탁 털어 넣고 휘저었다.

‘나 지금 뭐 본 거지?’

순간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술에 수면제나 흥분제, 마약 같은 걸 타서 기절시킨 후에 몹쓸 짓을 저지른다던 기사를.

머리끝에서부터 조르르 소름이 돋았다.

‘빨리 애들 데리고 나가야겠다.’

두 손으로 제 뺨을 세게 두드린 모단은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반쯤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들었다.

“야, 어디 가! 여기잖아. 이리 와.”

모단은 소스라쳐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한테 한 말이 아니었다.

딱 봐도 많이 취해 보이는 여자가 휘청휘청 지나치려다가 남자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남의 옷을 주워 입은 것처럼 질질 끌리게 생긴 큰 코트를 걸친 그녀가 초점이 안 맞는지 눈을 잔뜩 찡그렸다.

“나? 나 말이야?”

“그래. 좀 전에 같이 한잔하기로 했잖아.”

여자를 끌어당겨 제 옆에 앉힌 남자가 큭큭 웃었다.

“더우면 술이 더 오를 텐데. 옷 좀 벗지?”

“싫어!”

대뜸 소리를 지른 여자가 코트 앞을 꼭 여몄다. 움직일 때마다 비틀거리는 게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그대로 떨어질 것 같아 위태위태했다.

“아, 알았어. 너 완전히 갔구나? 존X 귀엽네.”

몸을 기울인 남자가 제 앞에 있던 술잔을 들었다.

“이거 마시고 오빠랑 좋은 데 갈래?”

치열하게 고민하던 모단은 이를 꽉 악물고 뛰어들었다.

남자가 여자의 입 앞에 멋대로 갖다 댄 술잔이 기울어지기 직전, 모단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잔을 낚아챘다. 출렁 넘친 술이 손을 적셨다.

“뭐야!”

고함을 친 남자가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모단이 더 빨랐다.

“너나 가세요, 좋은 데.”

독한 술이 남자의 머리 위로 남김없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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