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17화 (17/86)

#17. 칠세미남 옴므파탈

2017.06.28.

“너나 가세요, 좋은 데.”

뭐가 들었는지 모를 술이 남자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소리를 내지르며 우르르 물러났다.

꼴이 엉망진창이 된 남자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런 미친X이! 죽고 싶어?”

“딱 보니 사람 죽일 흉악범까진 못 되고 끽해야 양아치 잡범 몽타주구만. 허세 떨지 말고 좋은 데 갈 준비나 하세요. 경찰서라든가, 감방이라든가.”

모단이 빈 술잔을 흔들어 보였다.

독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머리카락을 마구 털어낸 남자가 쌍욕을 뱉고는 손을 치켜들었다.

“꺄아악!”

주변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단은 찔끔 감았던 눈을 떴다.

제 앞을 막고 선 웬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어깨는 두 배인 데다 제 옷보다 몇십 배쯤 비싸 보이는 차림을 한 남자와 맞닥뜨린 양아치 잡범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저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에겐 강하고 반대의 경우엔 한없이 찌질한 게, 모단의 몽타주 분석 그대로였다.

“괜찮으십…….”

돌아선 남자의 눈과 모단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아는 얼굴이자, 여기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던 얼굴이었다.

“어? 오빠! 오랜만이야!”

등 뒤의 여자가 모단 옆으로 다가왔다. 모단은 취해서 잘못 본 거길 바랐으나, 여자가 확인사살을 했다.

“오늘은 지협이 오빠네. 맨날 견이 오빠가 잡으러 왔었는데.”

‘견이 오빠?’

반사적으로 심장이 쿵쾅했다.

모단은 여자를 다시 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다 느꼈던 게 연예인처럼 예쁘게 생겨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듯했다.

‘그래, 레스토랑에서 봤던 여자! 맞는 것 같은데……!’

“일단 나와, 황금지.”

금지라 부르며 여자를 챙긴 지협이 시선을 틀었다.

“……정모단 선생님도요.”

“어어, 둘이 아는 사이야?”

혀가 잔뜩 꼬였다가 아직 덜 풀어진 소리로 물은 금지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모단은 대답 대신 아직까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고, 지협도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제 일행은 따로 있으니까 먼저 가세요.”

“여기 위험한 곳입니다. 방금 겪으셨듯이.”

미미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모단은 어쩐지 혼나는 기분이 되었다.

“안 그래도 갈 생각이었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고개를 꾸벅한 모단이 자리를 피하려 했다. 갑자기 금지가 모단의 손을 꽉 잡았다.

“같이 가요.”

“네? 내가 왜?”

“고마우니까요. 언니가 아까 너무 박력 있게 도와주셔서 반했어요.”

‘몇 살인지도 모르면서 언니라네. 내가 더 어리면 어쩌려구.’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볼수록 참 작고 어리고 예뻐 보이는 여자였다.

“언니랑 2차 가고 싶어요. 나가요, 우리.”

“뭐요? 2차요?”

클럽에서 예쁜 여자한테 2차 가자는 말을 들어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됐고요, 일행 왔으니까 나도 이만 내 친구들한테…… 어억!”

덩치는 한참 작은데, 취해서 그런가 힘이 무지막지하게 셌다. 모단은 얼결에 끌려갔다.

지협은 굳이 말리지 않고 두 여자를 보호하듯 뒤에 서서 따라 나왔다.

바로 문 앞에, 전에 한 번 타본 적 있는 차가 세워져 있었다.

“오빠는 오늘도 진짜로 안 오네.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구.”

중얼중얼 대는 금지를 뒷좌석에 밀어 넣은 지협이 손짓을 했다.

“타세요. 댁까지 모셔다 드리죠.”

“아뇨, 저는 일행이.”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정모단, 어디야! 아까부터 너 찾았는데!]

“나 여기 입구…….”

[그래? 잘됐네!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어떤 남자들이 술 마시자고 해서 같이 나가는 중이야.]

뜨악해진 모단이 얼른 둘러댔다.

“미안해. 나 머리가 아파서 먼저 가야 할 것 같아. 옷은 나중에 드라이클리닝 해서 갖다 줄게.”

얼른 전화를 끊은 그녀가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시간에 여기서 택시 잡기 쉽지 않아요. 타세요.”

맞는 말이긴 했다. 더군다나 여기서 알짱대다 친구들에게 걸리면 꼼짝없이 싫은 자리에 합류해야 했다.

모단은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뒷좌석에 올랐다.

지협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댁이 어디십니까?”

모단은 견에게 그랬듯 집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역 이름을 댔다.

대화가 뚝 끊겼다. 차 안은 시동이 걸려 있는 건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조용했다. 옆에 앉은 금지는 그새 잠이 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숨 막히는 어색함을 견디다 못한 모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사내 자원봉사 동호회 하고 계신다고 들은 것 같은데.”

“네.”

“유효림 선생님께 권유를 받았거든요. 저도 들어갈 수 있나요?”

“네.”

민망하리만치 짤막한 대답만 되돌아왔다.

나한테 뭐 화났나, 했던 모단은 아차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회사에서 백견보고 변태라고 한 거, 그리고 걷어찼다는 것까지 다 들었으면 당연히 좋게는 안 보이겠지!’

동호회 얘기는 하는 게 아니었는데.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미칠 듯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데 정모단 선생님.”

치맛자락만 움켜쥐고 있던 모단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린이집 교사가 그런 차림으로 클럽에 드나들어도 되는 겁니까?”

모단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고개가 삐딱하니 기울었다.

“그럼 이런 차림으로 클럽에 드나들지, 어린이집을 갈까요?”

핸들을 잡은 지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이 근무 시간이었던가요? 아니면, 다음 날 술 덜 깨고 담배 냄새 배서 출근할 가능성이 있는 일요일 새벽쯤 되나요?”

조용하던 차 안에 화를 누르려 애쓰는 목소리가 울렸다.

“백견 씨도, 백지협 이사님도, 직원의 퇴근 후 사생활에 참 관심이 많으시네요. 모든 직원들에게 그러시는 건지, 저한테만 그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모단은 운전석 뒤를 발로 뻥 차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얼마 후, 지협이 낮게 말했다.

“……제가 말이 과했네요. 사과드립니다.”

모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과라면 요새 하도 받아 지긋지긋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아이라 찾으면서 많이 걱정했거든요. 그래서 금지를 야단친다는 게 선생님에게까지 튀어버렸습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아이라.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아무리 스쳐 봤자 어차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게.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괜찮아요. 놀라셨을 만하죠. 이 아가씨는 혼 좀 나야 되겠더라고요. 위험하게 그런 델 혼자서.”

“원래 금지랑 아는 사이였습니까?”

“아뇨. 하룻밤 인연이요.”

지협이 짧게 웃었다. 더 궁금한 눈치였으나 묻지는 않았다.

“저기 역 앞에서 내려주세요. 얼마 안 되니까 걸어가면 돼요.”

“집 앞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너무 위험해서. 옷도 얇아 보이고.”

‘안 그렇게 생겨서 꼰대 같기는.’

“제가 꼰대 기질이 좀 있어서요.”

뜨끔한 모단은 스쳐 가는 가로등이 몇 개인지 세어보느라 못 들은 척했다.

“집에 들어가시는 것까지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어디로 가면 되죠?”

얼마 후, 지협의 차가 모단의 집 앞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갑자기 금지가 번쩍 눈을 뜨더니 모단을 붙잡았다.

“언니! 2차 가야죠! 같이 한잔해요!”

“아뇨! 나 집에 갈 거니까 얼른 가요!”

모단이 최대한 덜 매정해 보이게 손을 뺐다. 금지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고마워요, 언니. 내가 다음에 꼭 은혜를 갚을게요. 언니 전화번호 따도 돼요?”

“썸탈 것도 아닌데 번호를 뭐 하러 따요. 은혜는 됐고, 다음부턴 혼자 놀지 말고 여럿이 놀든가 해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기서부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지. 도망치듯 내린 모단이 잽싸게 집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지협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섭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견이 저 대신 클럽 M에 가서 금지를 데려와 달라고 했다고 했다. 누가 거기서 봤다는 연락을 해줬는데 지금은 갈 수가 없다고.

섭호가 굳이 저에게 연락한 이유를 알고 있기에 두말없이 알겠다고 하고 나섰다. 그런데 느닷없이 맞닥뜨린 모단이라니.

겁도 없이 남자를 상대하던 것도, 금지와 같이 있던 것도 놀라웠다.

더 놀란 것은 그녀에게서 풍기던 고혹적인 분위기였다.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섹시한 차림의 그녀가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아마 금지를 찾으러 온 게 아니었다면, 그리고 모르는 여자였다면 분명 다른 남자들과 비슷한 시선으로 돌아보았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는 게 당혹스러워서, 그걸 덮는다는 게 화를 내고 말았다.

내 동생이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데, 그럼에도 당신을 보겠다며 어린이집까지 갔다는데, 저런 차림으로 클럽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원망도 없진 않았다.

지협이 핸들을 꺾으며 말을 던졌다.

“금지 너, 정신 똑바로 안 차려? 네가 세 살짜리 애야? 관심받으려고 사고를 치게?”

금지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얼핏 봐도 자는 척하는 거라는 게 티가 났다.

“겁도 없이 그런 데서 모르는 남자가 주는 술을 받아 마시려고 했어? 거기 뭐가 들어 있을 줄 알고? 노블그룹 딸이 클럽에서 마약 했다는 기사라도 뜨면 끝이야.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무모해?”

“집안 믿고.”

“뭐?”

“그런 기사 떠서 회사 이미지 추락하게 잘도 내버려 두겠다. 아빠랑 오빠들이.”

금지는 눈도 뜨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러게 진작 내가 좋다는 남자한테 시집이나 보내줬으면 조용히 살았을 거 아냐.”

지협의 입가가 비틀렸다.

“섭호 좀 그만 괴롭혀. 너만 좋아 죽으면 뭐 해? 상대방은 그냥 죽겠다는데. 그러면 놔줘야지.”

한참 만에 뾰족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래서 오빠는 바보같이 놔주고 파혼당했구나?”

“황금지!”

“나는 안 놔줘. 내 거야.”

허리를 세우고 앉은 금지가 그때까지도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과 작은 소지품들을 꺼낸 그녀는, 그중 새빨간 립스틱 하나를 다시 코트 안주머니에 넣고는 잘 개켜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코트 섭호 오빠 거니까 전해줘.”

***

견만 빼고 모두에게 파란만장했던 주말이 지나가고, 견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월요일이 되었다.

“와, 초은아! 오늘 머리 너무 예쁘게 묶었다. 옷도…….”

일단 칭찬을 건넨 모단이 슬쩍 덧붙였다.

“……예쁘긴 한데, 텃밭 가기에는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난 이게 좋아요.”

초은이의 엄마가 넌지시 귀띔해 준 바에 따르면, 오늘 옥상에 가면 왕자님을 또 만날지도 모른다며 굳이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치마를 입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했다.

“그래. 조심해서 활동하면 되지.”

모단의 시선이 슬그머니 옆으로 향했다.

텃밭과는 눈곱만치도 안 어울리는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등원 2일 차, 백무탈.

내복을 입고 와도 잘생겼을 것 같은데, 웬만한 어른들보다도 훨씬 옷을 잘 입었다.

역변 없이 저대로만 큰다면 분명 훈남의 정석이 되고도 남겠다 싶었다.

다른 반 선생님들이 기웃거리며 ‘절세미남, 아니지. 칠세미남이네’ 했던 거나 ‘무탈이는 옴므파탈계의 새싹이라서 무탈이인가’ 하고 속닥이던 게 얼마간 공감이 갔다.

아이에게 외모에 대한 칭찬을 자주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에 말은 삼가고 있었지만.

“선생님! 옥상 언제 가요? 빨리 가요!”

“알았어. 자, 그럼 자리에 앉아보자. 선생님 앞으로 모이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앉았다. 그 와중에 몇몇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무탈이 옆자리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해빛이 승리를 쟁취했다.

“오늘은 옥상 텃밭에 감자를 심을 건데, 선생님하고 이야기 나누기를 먼저 하고 올라갈 거예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모단에게로 모였다.

“씨씨씨를 뿌리고∼ 하는 노래 알지요?”

한 사람을 뺀 나머지가 네! 했다. 견 혼자만 정말 그런 노래가 있느냐는 듯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 노래처럼, 많은 식물들은 씨를 뿌려서 싹이 나게 한 후에 쑥쑥 키워요. 근데 감자는 씨를 심지 않고 감자 그대로를 땅에 심어요. 씨앗 대신 심는 이 감자를 씨감자라고 하는데…….”

미리 잘라서 그늘에 말려둔 씨감자를 실컷 만져 보고 살펴본 후에 어린이집을 나왔다.

“두 줄로 나란히 서자. 옆 친구 손잡고.”

바로 이 타이밍을 노리고 견의 옆에 섰던 해빛이 씨익 웃었다. 그러나 견은 쏜살같이 맨 앞으로 향했다.

“선생님.”

“응?”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모단은 헙, 했다.

세상 순수하고 영롱한 눈망울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견이 살포시 손을 뻗었다. 모단은 홀린 듯 그 손을 맞잡았다.

‘하, 너무 귀여워……! 손도 어쩜 이렇게 작을까!’

손은 작지만 흑심은 누구보다 크다는 걸 알 리 없었다.

홀로 남은 해빛이의 손은 바로 뒤에 있던 동후가 냉큼 잡았다. 그렇게 다 같이 옥상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 농부가 되는 거야. 두둑으로 절대 올라가지 않고 고랑으로만 다니기로 약속. 알겠지?”

“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쭈그려 앉아 씨감자를 손에 쥐었다. 구멍은 선생님들이 파주었다.

“여기 자른 부분이 땅에 닿도록 놓고 흙이불을 덮어주는 거야. 토닥토닥.”

“토닥토닥∼”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토닥토닥 거리는 통에 따라 할 뻔한 견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맨손으로 흙 만져 보는 게 얼마만이더라.’

어렸을 땐 서슴없이 흙도 만지고 모래도 만지고 돌도 만졌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손에 들려 있는 거라곤 기계 아니면 종이, 기껏해야 커피 정도다.

견은 잡생각을 털어내고 집중했다.

손에 닿는 물씬하고 부드러운 흙의 감촉과 축축한 냄새.

쭈그리고 앉은 등 위로 내리쬐는 오전의 햇볕.

신이 난 아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견은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아이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열심히 찍고 있던 모단과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모단의 심장을 또 아작 냈다.

‘미안해, 무탈아! 선생님의 하찮은 폰과 빌어먹을 수전증 때문에 너의 사랑스러움을 미처 다 담지 못했어! 한 번만 더 스마일……!’

누가 보면 파파라치인가 싶을 만큼 열성적으로 사진을 찍어대는데, 견의 오른쪽에 있던 해빛이 기겁을 했다.

“으아아! 끼약! 지렁이!”

씨감자를 놓으려던 데서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대고 있었다.

견이 얼른 팔을 뻗어 해빛의 어깨를 감쌌다.

안 그래도 박은규 사원의 딸이자 밖에서는 모단을 이모라 부르며 따르는 사이라는 걸 알고 해빛에게 유난히 잘해주려고 마음먹었던 터였다.

“괜찮아, 애기…… 아니, 해빛아.”

아까 손 안 잡아준 것 때문에 살짝 삐졌던 해빛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무탈이 오빠, 소리가 턱 끝까지 올라왔다.

견의 왼쪽에 있던 초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왕자님 찾느라 입구 쪽만 기웃대다가 해빛의 고함에 돌아봤는데, 존잘 무탈이 품에 해빛이가 폭 안겨 있는 게 아닌가.

마침 뭔가를 발견한 초은은 목을 가다듬고 빼애액 외쳤다.

“꺄아아! 달팽이!”

그 순간, 해빛이 견의 팔도 뿌리치고 벌떡 일어섰다. 쭈그리고 앉아 있던 견은 균형을 잃고 뒤로 풀썩 넘어졌다.

일어난 건 해빛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아이들이 순식간에 초은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디? 어디어디! 나도 달팽이 볼래!”

“달팽이야∼ 달팽이야∼”

“초록 똥, 주황 똥을 싸는 달팽이야∼”

이게 아닌데, 하는 초은을 괴력에 가까운 힘으로 밀어낸 해빛이 맨손으로 달팽이를 살포시 잡았다.

“우아아! 너무 귀여워!”

얼른 뛰어온 모단이 견부터 일으켜 주었다.

“무탈아, 괜찮아?”

대체 달팽이가 뭐기에 멀쩡히 감자 잘 심던 꼬마 농부들을 일제히 봉기하게 만든 건가.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에 별 꼴을 다 당한 견이 모단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다친 데는 없지?”

언젠가 놀이터에서 우는 아이에게 그랬듯, 모단이 한 팔로 견을 감싸 안고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다 놀란 목소리를 냈다.

“어어, 해빛아! 씨감자를 밟으면 안 되지! 얘들아, 자기 자리로 돌아가세요. 달팽이는 흙으로 돌려보내 주고.”

바로 귀 옆을 스치는 목소리와 숨결에, 견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선생님! 이 달팽이 바다반에서 키우면 안 돼요?”

“교실보다 여기에 달팽이가 좋아하는 게 훨씬 많은데?”

“그래도! 그래도요! 키우고 싶어요!”

“해빛아. 어느 날 갑자기 이따만 한 달팽이가 나타나서 너 너무 귀엽다면서 흙 속 달팽이집에 데려가서 키운다고 생각해 봐. 엄마 아빠도 없고 친구들도 없고 장난감도 없는데, 해빛이는 거기서 사는 게 좋겠어?”

“이잉…… 아니요…….”

“달팽이 곱게 보내줘라.”

“네에에…….”

가만히 안겨 듣고 있던 견은 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말하는 동안 견을 계속 안고 있었음을 깨달은 모단이 팔을 풀었다.

“어휴, 예쁜 옷에 흙 다 묻었네.”

모단이 옷자락을 털어주려는데, 견이 손을 뻗었다.

“선생님.”

“응?”

견이 조금 전까지 바로 제 코앞에서 간질거리던 모단의 머리카락을 살짝 쥐었다.

“선생님한테서 나는 향기 너무 좋아요.”

그러더니 앙증맞은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미끄러뜨렸다.

“샴푸 뭐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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