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20화 (20/86)

#20.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2017.07.09.

“선생님.”

하루에도 수백 번은 듣는 부름이 조금도 앳되지 않은 목소리를 타고 날아들었다.

모단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뵙네요. 희한하게 어제까지 본 것 같은 기분이지만.”

섬섬한 눈매와 맞닥뜨린 순간, 모단은 코끝을 찡그렸다.

‘백견 이 인간, 잊고 있었는데!’

요 며칠간 참으로 조용했다.

걷어찬 이후로 안 나타나기에 역시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구나 했었다.

백화점에서 마주친 날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했던 걸 잘 전해주었구나 싶어 섭호에게 내심 고맙기까지 했는데.

“나 당연히 안 보고 싶었겠죠? 난 보고 싶었어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견이 웬 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이것만 드리고 갈게요. 말로만 하는 사과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모단의 윗입술이 픽 솟았다 내려왔다.

“이번엔 콩다방 카드인가 보죠? 필요 없으니까 넣어두세요.”

“그런 건 선생님 돈으로도 살 수 있잖아요. 이건 그럴 수 없는 거니까 일단 받아보세요.”

어디서 들은 말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견이 씩 웃었다.

“진심이 담긴 편지예요.”

“편지요?”

황당함에 목소리가 커졌다.

며칠 전에는 돈으로 때우려 들다가 이번에는 손편지라니. 대체 감성이 어느 쪽이란 말인가.

“네. 거짓말 아니고 진짜 마음만 담아서 썼어요. 글씨도 얼굴만큼 깔끔한 편이라 보기에 나쁘진 않을 거예요.”

눈썹 하나 까딱 않는 모단을 내려다보던 견이 편지 든 손을 느릿느릿 올렸다.

“지금 받기 곤란하시면 집으로 부칠게요. 허락 없이 집 주소를 알아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이 미친놈이 또 시작이네!’

까치발을 한 모단이 편지를 홱 뺏어 들었다.

이 남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파악했다. 어처구니없는 말일수록 진짜로 실행에 옮기는 경향이 있다는 거.

“받아줘서 고마워요.”

뭘 받은 건 저인데, 오히려 견이 큰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 보였다.

“남자한테 정성 어린 손편지 받은 거 오랜만이죠? 혹시 처음인가?”

‘그러고 보니 첫사랑 이후로 처음인 것 같…… 어휴, 정모단! 말려들지 말라고!’

편지를 들지 않은 모단의 손이 정류장 밖을 가리켰다.

“가라고요?”

모단이 고개를 까닥했다.

“물론 이것만 주고 간다고 그러긴 했는데.”

견의 눈꼬리가 슬슬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 가면 그거 버릴 것 같아서 못 가겠어요. 버릴 거예요?”

“…….”

“왜 대답이 없지? 사람 마음 막 찢고 버리고 그러면 저주받을 텐데?”

“…….”

“영 불안하단 말입니다. 차라리 지금 꺼내서 읽어보는 건 어때요? 내가 많이 쑥스럽더라도 참아볼게요. 네? 선생님?”

‘귀찮아 환장하겠네!’

이토록 거대하고 부담스러운 껌딱지라니! 무탈이는 귀엽기만 했는데!

속으로 비속어를 외친 모단이 거칠게 봉투를 열었다.

단정하게 접혀진 종이 두 장이 나왔다. 그중 하나를 펼쳐 들었다.

“정모단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아니! 그렇게 소리 내서 읽는 게 어디 있어요!”

견이 황급히 모단의 입을 틀어막았다. 모단은 읍읍거리며 견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따끔한 손길에 데고 주위에 있던 이들의 따가운 시선에 찔린 견이 손을 치웠다. 모단은 도끼눈을 떴다.

“지금 꺼내서 읽어보라면서요?”

“눈으로 읽어도 되잖아요! 묵독 몰라요?”

“묵독을 하든 낭독을 하든 구연동화를 하든 내 맘이지.”

모단이 이소룡 코 비비듯 엄지손가락으로 제 입가를 야무지게 훔쳤다. 견은 빨개진 손등을 문지르고는 삐딱하니 섰다.

“와, 어떻게 이렇게까지 대우가 다르지? 예쁘다 귀엽다 해줄 땐 언제고.”

나직한 혼잣말을 귀신같이 들은 모단이 펄펄 뛰었다.

“내가요? 언제요? 미쳤어요? 꿈꿨어요?”

“그래요. 봄날의 꿈이었나 봅니다.”

“한 번만 더 내 허락 없이 내 꿈 꾸면 가만 안 둘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그게 멋대로 돼요? 그리고 내 꿈인데 나만 유쾌하면 됐지.”

혀를 차던 견이 멈칫했다.

“잠깐. 난 가만 놔두는 것보다 가만 안 놔두는 걸 더 좋아하는데? 그럼 오늘도 꾸려고 노력해 볼게요. 뭐 어떻게 할 건데요? 꿈에서 몇 시에 볼까요?”

“가요, 가. 가라고. 안 가?”

팔꿈치와 무릎을 치켜드는 것을 본 견이 얼른 몸을 사렸다.

“저 정말 많이 고민하면서 쓴 거예요. 그거 읽고 부디 오해만이라도 풀어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만 남기고는 잽싸게 도망쳤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안 보였다.

마침 버스가 왔고, 모단은 뻣뻣해진 뒷목을 붙들고 자리에 앉았다.

“가지가지 한다, 정말.”

치솟았던 혈압을 겨우 가라앉힌 후에 다시 편지를 펼쳐 보았다. 과연 필체가 깔끔한 게 눈에 쏙 들어오긴 했다.

‘근데…… 대체 이게 다 뭐야?’

짤막한 인사 후, 번호를 붙인 문장들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었다.

간단한 개인정보에 학력과 경력, 자격사항과 어학능력 수준까지 적혀 있는 게 딱 이력서였다.

‘계열사 대표까지 맡았다면서, 의외로 최종학력이 고졸이네.’

거기까지만 봤으면 낙하산도 이런 낙하산이 없구나 했을 텐데, 그 외의 다른 스펙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수준급이다.

검정고시로 1년 만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남들 수능 준비할 나이에 일을 시작해 몇 년 만에 이뤄낸 성과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맞다. 경영천재 소릴 들었다고 했었지.’

어느새 혹 빠져든 모단은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그에 대한 인상이 조금쯤 바뀌려는 찰나, 마지막 한 줄이 속을 발칵 뒤집었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전에도 말씀드렸듯 아픈 것도 보여 드렸으니까 다른 거 다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안 궁금해! 안 궁금하다고! 제발 묻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은 거 보여주지 말란 말이야!’

전에 모단의 이력서를 본 게 찔려서 제 신상도 털어놓은 거라는 걸 알았다면 당장 버스에서 뛰어내려 견을 잡으러 가고도 남았을 터였다.

구기듯 종이를 접어놓고 나머지 한 장을 펴보았다.

‘이력서 다음은 자기소개서냐?’

이걸 봐 말아, 하면서도 읽어 내려가던 모단의 눈빛이 점점 심각해졌다.

―……부딪힌 그날 이후로 없던 병이 생겼어요. 온갖 약을 다 써봐도 소용없었고요. 간신히 중학교는 졸업했지만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군대도 가지 못했습니다.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글들은, 정말이지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때 부딪힌 여자를 찾아서 옆에 두면 바로 나을 거라고. 한 달에 일주일씩 앓지 않아도 된다고.

미신 같아서 우습죠?

솔직히 저도 그렇게 찾아 헤매면서도 다 믿진 않았어요.

그런데 지난달에 사고가 났을 때, 모단 씨가 나를 안아줬잖아요.

나, 그 주에 아프지 않았어요.

다른 때였으면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냈을 텐데, 일주일 동안 잠만 자고 멀쩡히 일어났어요. 이제 푹 쉬라고 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매달린 거고, 처음부터 이런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아서 자꾸 다른 소리만 하다 보니까 오해를 산 거라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부탁할게요.

한 달에 딱 하루만이라도, 그냥 내 옆에만 있어주면 돼요.

툭 닿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거예요.

그래서 차라리 때리기라도 하라고 난리를 쳤던 건가 싶었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도와주세요.

나한테는 당신이 마지막 끈입니다.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편지를 접어 가방에 넣은 모단은 창틀에 손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가로등이며 오가는 차, 간판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연신 시야를 긋고 지나갔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마지막 끈…….’

상황은 다를지언정, 궁지에 몰려 절박해진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다 비슷한가 보다.

‘정말일까?’

상식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얘기다.

한 달에 한 번씩 코피를 흘리며 쓰러져 일주일 동안 앓는다는 증상 또한 희한하거니와, 누군가와 같이 있기만 해도 괜찮아진다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데, 이게 진짜여야 말이 되고 앞뒤가 맞는 상황이라는 거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그렇지, 뭐 하러 이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까지 정성껏 꾸며내서 작업을 건단 말인가.

객관적인 조건이 달리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아쉬운 사람도 아닌데, 관심이 있다면 평범하게 접근하면 되지.

‘그럼 오늘까지 보이지 않았던 게, 그날 코피가 난 후에 내가 손도 대지 않고 도망쳐 버려서 또…….’

모단은 괴고 있던 턱을 퍼뜩 들었다. 그러고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내가 왜 미안해야 하는데? 그 인간 아픈 걸 왜 걱정하는데!’

주위에 있던 몇몇 승객이 이상한 눈으로 흘끔거렸다.

헛기침을 하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모단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외쳤다.

“으악, 우리 집 지나쳤잖아!”

***

‘참말로 혼자 보기 아깝구먼.’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은 섭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팝콘이라도 씹어가며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광경이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단정히 앉아 손에 쥔 휴대폰을 주시하고 있는 견.

표정은 또 어찌나 비장한지, 무슨 계시라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편지에다 그렇게 썼거든. 맨날 내 맘대로 들이대서 미안하다고. 정모단 씨가 편한 시간에, 얘기하고 싶을 때에 연락 달라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그러면서 종일 손에서 폰을 놓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오늘따라 문자 한 통이 안 오…… 어엇!”

또롱, 하고 울리는 알림 소리에 견이 허겁지겁 문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나 소파로 덤벼들었다.

“야, 위섭호! 너 진짜!”

‘접니다’ 세 글자로 손쉽게 견을 우롱한 섭호가 얻어맞으며 킬킬거렸다.

“공연히 지꺼정 숨넘어갈 것 같아서 그랬슈. 지금껏 만난 여자가 몇인디 쑥맥처럼 그류? 여자 전화 처음 기댕겨 보남?”

“당연하지! 예의상 한 번 본 후에 더 만나고 싶고 계속 보고 싶은 여자가 없었으니까! 내가 누구 전화를 기다려 본 적이 있을 것 같아? 기다리게 한 적은 많겠지만!”

“승깔을 내든 잘난 척을 하든 하나만 해유.”

“이렇게 피 마르는 건 줄 알았으면 무작정 기다린다고 하지 말 걸 그랬다 싶던 차에 제대로 열 받게 하네!”

견이 본격적으로 섭호의 목에 팔을 감고 고급 레슬링 기술을 시전하려는데, 섭호가 급히 외쳤다.

“도련님, 전화!”

좀 전에 팽개친 휴대폰이 목 놓아 주인을 부르고 있었다.

견이 빛의 속도로 뛰어가 낚아챘다.

“모르는 번호인데?”

“일단 받아보셔유.”

섭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을 가다듬은 견이 적당히 낮으면서 알맞게 허스키하고 은근히 섹시한 음성이 나오게끔 성대를 울렸다.

“여보세요.”

[오빠!]

소파까지 들릴 만큼 짜랑짜랑한 금지의 목소리가 견의 고막과 뒤통수를 단번에 후려쳤다.

“황금지. 너 이……!”

[나 폰 바꿨어. 섭호 오빠한테는 알려주지 마. 또 수신차단하면 안 되니까.]

“나 지금 심각하게 기다리는 전화 있거든? 끊어.”

[나도 심각해. 섭호 오빠랑 딱 1분만 통화하게 해주라.]

“옆에 없어. 안 끊으면 내가 끊는다.”

[알았어. 그럼 내 립스틱 언제 돌려줄 거냐고 전해줘. 직접 안 주면 안 받을 거고 못 받으면 내 입술 닿았던 거 소중히 간직하는 걸로 간주하겠다고.]

“그딴 헛소리 전해주라고 내 입이 있는 게 아니야. 끊어.”

[오빠!]

처음 ‘여보세요’ 할 때와는 생판 다른 목소리로 통화를 마친 견이 섭호를 힐끗 보았다.

“황금지 립스틱은 또 언제 받았어?”

섭호의 안색이 칙칙해졌다.

지협을 통해 돌려받은 코트 안에 앙큼하게도 숨어 있던 립스틱.

하필 색깔마저 어찌나 도발적인지,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덥지근해지는 것 같았다. 발견하자마자 책상 서랍 안에 던지듯 넣어두고 열어보지도 못했다.

“그거 안 주면 지 입술 소중히 간직하는 걸로 알겠대. 직접 안 주면 안 받을 거고.”

가뜩이나 선이 굵고 짙은 섭호의 눈썹이 크게 꿈틀했다.

“그런 거 없슈. 무조건 모른다구 전해유.”

“쌍으로 뭘 자꾸 전하래? 내가 견우직녀 도킹하라고 정수리 내주는 까마귀로 보이냐?”

“싫음 땔쳐유. 지는 절대 강요 같은 건 안 하니께. 그까이거 안 전한다구 누가 뒤지기야 허겄슈? 끽해야 도련님이나 들들 볶이겄지.”

“차라리 강요를 해라, 강요를!”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견은 누군지 보지도 않고 받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야, 이 기집애야! 섭호한테 연락하라고!”

[……백견 씨 휴대폰 아닌가요?]

한 번에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견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정모단 선생님?”

단박에 상황을 파악한 섭호의 입에서 푸흡 소리가 튀어나왔다.

노려볼 겨를도 없이 모단의 핀잔이 귀를 찔렀다.

[백견 씨랑 통화하려면 비서님께 먼저 연락드려야 하는 줄 몰랐네요. 그럼 애초에 봉투에다가 비서님 번호를 적으시던가.]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방금 전에 통화하다 끊은 사람인 줄 알고.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쿨한 대답에, 그리고 그녀와의 첫 통화에 감격한 견의 가슴이 뒤늦게 엇박자 바운스를 타기 시작했다.

갑자기 존재감 폭발하는 심장 소리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느라 미친 듯이 돌아가는 뇌 소리까지, 온몸이 시끄러웠다.

그 소란들이 모단의 한마디에 깔끔하게 폭발했다.

[만나서 얘기했으면 하는데. 언제 어디서 볼까요?]

***

모단의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서 좀 떨어진 곳의 커피숍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고 난 후, 견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뭘 입을지부터 얼마나 일찍 나가야 하는지까지, 모든 게 다 고민과 긴장의 연속이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오죽하면 섭호가 여자 처음 만나느냐고 했을까.

남자 대 여자로 처음 단둘이 만난 여자가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에 없지만, 그때도 이러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나 이제껏 남자만 만나고 다닌 건가?’

결론이 이상한 쪽으로 가려다가,

‘쓸데없는 수고를 17년이나 했네. 코에 점 있는 여자를 찾을 게 아니라, 심장 뛰게 만드는 여자를 찾았으면 되는 거였어.’

제법 그럴듯한 쪽으로 되돌아왔다.

커피숍 문이 열렸다. 코에 점 있고 심장 뛰게 만드는 여자가 들어오는 것을 본 견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네. 먼저 오셨네요.”

모단이 맞은편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저를 보고 소스라치거나 눈을 부릅뜨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견은 이미 행복했다.

“저도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커피는 먼저 시켜놓으려다가…… 또 제멋대로 고르면 안 될 것 같아서.”

견이 나 잘했죠, 하는 눈으로 웃었다.

하마터면 같이 웃으며 ‘와아, 잘했네’ 할 뻔한 모단은 직업병 유발하는 위험한 눈에서 얼른 시선을 떼어냈다.

“잘하셨네요. 전에 얻어먹어서 오늘은 제가 사려고 했어요.”

“제가 만나자고 한 거니까 제가 사야죠.”

“백견 씨는 내 연락을 기다린 거고, 만나자는 말은 내가 했죠. 아메리카노? 시원한 걸로?”

견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뜨거운 사약이라 해도 모단이 건넨다면 홀린 듯 받아 마실 기세였다.

각자 앞에 커피가 놓이고, 얼마간 침묵이 감돌았다.

모단은 견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틈을 타 그를 힐끗 훔쳐보았다.

무려 다섯 번만의 성공이다. 눈앞의 남자가 어찌나 빤히 저만 보는지, 앞의 네 번은 곧바로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어색하게 고개를 틀어야만 했다.

이마를 살짝 덮은 머리카락 사이로 내리깐 눈매가 엿보였다. 미끈하게 뻗은 콧날과 얇게 다물어진 입술이 서늘했다.

꽤 낯설다 싶었다가, 이런 얼굴을 한 번 본 적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내가 원하는 건…… 지금처럼 내 영역 안에 당신이 있는 겁니다. 항상.”

나직이 귀를 긁던 목소리와 짓누르던 시선.

마침 견이 고개를 들었고,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것 다음에 바로 뜨거운 걸 먹은 것처럼 찌릿찌릿해져서, 모단은 눈을 찡그렸다.

“……편지 잘 읽었어요.”

“글씨 괜찮죠? 미남과 천재는 악필이라는데 저는 예외거든요.”

오싹할 만큼 위압적이던 순간을 떠올린 게 방금 전인데, 글씨 자랑하면서 생긋대고 있다.

한숨을 폭 내쉰 모단은 ‘그래, 너 견석봉이다’ 하는 눈빛을 날려주고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근데 백견 씨, 날 어떻게 믿고 그런 편지를 썼어요?”

“네?”

“내가 거기 적힌 내용을 어디 가서 떠들기라도 하면 일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는 거잖아요.”

견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느릿하게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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