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당신이 아니면 안 되니까
2017.07.12.
날 어떻게 믿고 그런 편지를 썼느냐니.
견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느릿하게 사그라들었다.
진심일까, 아니면 그냥 떠보는 것일까.
실망한 걸까, 혹은 상처받은 걸까.
투명한 거미줄 같은 시선이 둘 사이를 바투 얽었다.
꼭 붙어 있던 견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길게 늘인 아랫입술 위를 유난히 붉은 혀끝이 훑고 지나갔다.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앞뒤 안 가리고 끈질기게 구는 이유가 뭘 것 같아요?”
고개를 비스듬히 틀자, 젖은 입술이 커피숍 조명을 받아 선득 빛났다.
“정모단 씨가 믿을 만한 사람이든 아니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에요. 어차피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되니까.”
당신이 아니면 안 되니까.
메아리처럼, 그가 흘린 말이 몇 번이고 귓가를 울렸다.
이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뭐, 어쨌든.”
모단이 컵에 꽂혀 있던 빨대를 빼서 내려놓았다.
“그 편지 받고 나름 심각하게 생각해 봤거든요?”
커피를 맥주 원샷하듯 벌컥벌컥 들이켠 후에 따라 들어온 얼음까지 와자작 씹었다.
“만날 때마다 황당한 소리만 하는 인간이라 영 의심스럽긴 한데.”
이마를 찡그리고 뒷머리를 벅벅 문지르다가, 툭 말을 맺었다.
“편지만큼은 진지해 보여서 믿기로 했어요.”
조금 전에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던 찰나의 표정이 사진처럼 뇌리에 찰칵 박혔다고, 실은 그게 결정적인 확신을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한 달에 하루면 되는 거죠? 지금처럼 커피 한 잔 마시는 정도라면 어려울 건 없겠네요.”
한참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모단을 바라보던 견이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웃으려고 그러는 건지 울려고 그러는 건지 입꼬리가 자꾸 뒤틀어지려고 해서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벅찬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고개를 숙였다가 든 견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모단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 감격하느냐고 할 뻔했다. 포즈부터 분위기까지, 시상식에서 상 받은 여배우나 연인에게 청혼반지를 받은 여자 뺨쳤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눈앞의 백견이 오늘따라 좀 청순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위험한데, 이거.’
첫인상이 워낙 거지 같았던 데다 볼 때마다 학을 뗄 만한 짓만 골라 해서 그렇지, 외모만 놓고 보면 취향에 딱 들어맞았다.
몸은 섹시한데 얼굴은 청순한 남자.
하나 아무리 훌륭해 봤자 얼굴은 얼굴일 뿐이다. 관상용으로 키울 건 아니니까.
‘그럼. 잘생긴 미친놈보다 덜 생긴 일반인이 백 번 낫지.’
모단은 잠시나마 말랑해졌던 맘을 다시 굳혔다.
“근데 병명이 뭐예요? 일주일 동안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요?”
살면서 이렇게 두근대고 기뻤던 적이 있었나, 흡사 계절이 바뀐 듯한 감격에 젖어 있던 견이 파삭 굳었다.
누군가 손날로 목을 치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컥 막혔다. 갈 곳을 잃은 견의 눈동자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듯했다.
가까스로 눈곱만큼의 신뢰나마 얻었고,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가 되는 분위기인데.
‘병명이 월경이고 일주일 동안 아이가 된다고 말하면…….’
예상되는 반응은 두 가지였다.
1번. 하해와 같은 마음씨로 뭐든 다 이해해 준다.
2번. 받아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며 정색한다. 잠시나마 믿었던 것에 더욱 분노해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다.
‘왜 백 프로 2번일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거냐고!’
예전에 병원에서 생리 중이라는 말에 잘못 공감했을 때, 주리를 틀어버릴 기세이던 눈빛이 떠올랐다. 존중받아 마땅한 성스러운 일을 가지고 뭐 하자는 거냐던 말도.
‘애초에 왜 월경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지. 차라리 아예 뜬금없는 병명을 달아버릴 것이지!’
전에도 이런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고모가 생리나 멘스나 달거리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하는 바람에 두 번 다시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첫 만남을 망쳤다가 여기까지 바로잡는 데 얼마나 고생했던가.
‘어차피 같이 있으면 안 변할 테니까 그건 빼자.’
무탈이가 받은 사진, 세상에 하나뿐인 증거도 갖고 있으니 여차하면 언제든 밝힐 수 있다. 지금을 최대한 더 누리고 싶었다.
“병명은…… 말씀드렸듯이 현대 의학으로는 밝혀내기 어려워서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어떤 의사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의사’를 강조한 견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PMS증후군. 월경전증후군이라고도 합니다.”
모단의 눈이 커졌다. 견은 얼른 설명했다.
“딱 증상만 놓고 보면 여성분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겪는 것과 가장 흡사하거든요. 코피이긴 하지만 출혈이 있는 것도 그렇구요. 예민해지고 우울해지고 여기저기 불편하고 아파요. 그게 많이 심해서 밖에 못 나갈 정도가 되는 거죠.”
모단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으나, 다행히 장난으로 듣진 않은 눈치였다.
“그걸 17년을 했다고요?”
“네.”
“한 달에 한 번씩? 하루도 아니고 일주일씩?”
네, 하려다가 갑자기 목이 메었다. 고개를 끄덕인 견은 찌잉 하는 코끝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에 비슷한 병을 앓았던 분이 계셨다는데, 50세가 넘으니까 증상이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럴 거라 가정하면 지금 스물아홉이니까 앞으로 한 20년쯤을 더 해야 하는 겁니다.”
지그시 눈을 바라보며,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건넸다.
“정모단 씨가 없다면요.”
모단의 입술 사이에서 한숨인지 뭔지 모를 소리가 흐음, 하고 새어 나왔다.
‘정말 여자들 그날이랑 똑같네. 나이 먹으면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도 완경 비슷한 것 같은데…….’
모단은 혜숙을 떠올렸다.
얼마 전에 갑자기 밖에서 밥을 먹자고 해서 무슨 일 있나 했더니, 병원에서 완경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30년 넘게 시달리던 생리통과 빈혈에서 해방된 걸 축하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심란해 보이시기에 일부러 더 비싼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고 오는 길에 꽃까지 사드렸다. 그게 결국은 엄마의 눈물샘을 펑 터뜨리고 말았지만.
더 오래전의 기억도 떠올랐다.
아빠가 갑자기 쓰러졌을 때 온갖 병원이며 민간요법들을 찾아 돌아다니던 엄마가.
그때의 엄마는, 어린 저마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만큼 필사적이고 맹목적이었다.
지금 눈앞의 이 남자처럼.
“……힘들었겠네요.”
나직한 모단의 한마디가 견을 뒤흔들었다.
줄곧 그녀에게 향해 있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내외는 저를 한없이 안쓰러워했다.
200년에 한 명 꼴로 걸린다는 저주를 정통으로 맞은 걸로도 모자라 부모까지 잃었다고.
고모 지미는 조금 더 매정했다.
치료법은 있는데 돈이 없는 환자가 제일 불쌍하고, 돈이 있어도 못 고치는 환자가 그다음으로 불쌍한 건데 너는 돈도 있고 치료법도 있을 것 같으니 닥치고 이 약이나 먹어보라고.
사촌 형 지협 또한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다.
지나간 것과 어쩔 수 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그나마 저를 가장 이해해 주는 섭호조차도 힘들겠다는 말은 해준 적 없었다. 팔자 더럽다는 말은 종종 했어도.
‘뭐야. 설마 우는 거야?!’
모단은 눈을 거들떴다.
마주 앉은 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찌나 세게 말아 물었는지 입술이 안 보였다. 눈썹 사이에도 바짝 힘이 들어가 있고, 눈동자에는 이미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오뚝한 코끝이 점점 빨개지는 것을 멍하니 보던 모단이 얼른 일어섰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견이 그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단은 걸음을 재게 놀려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니, 다 크다 못해 더 큰 남자가 무슨…….”
세상 귀엽게 울먹거리고 난리람.
제가 한 생각에 제가 놀란 모단이 세면대 수도꼭지를 찬물 쪽으로 확 틀었다.
전에 새윤이 임시완과 선우원 등 몇몇 남자 연예인의 사진을 들이밀며 멍뭉멍뭉하게 생겨서 왠지 울리고 싶은 남자의 매력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때, 멍뭉대는 소리 하지 말라며 구박했었다.
그런데 방금 전, 아주 조금쯤 그게 뭔 소리였는지 알 것 같았다.
‘알긴 뭘 알아! 남자고 여자고 우는 거 질색이야.’
손을 박박 씻은 모단은 웃긴 생각을 하든 코를 풀든 해서 눈물 뚝 했겠지, 싶을 때쯤 화장실을 나왔다.
완벽히 가다듬어진 모습으로 되돌아온 견이 어김없이 이쪽을 보고 있다가 환히 웃었다.
‘하여간 매사가 넘치는 인간이야. 화장실 갔다 오는데 뭐 저렇게 반겨? 누가 보면 몇 분이 아니라 몇 년은 기다린 줄 알겠네.’
견은 모단이 다시 앉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됐어요. 솔직히 아직 완전히 믿진 못하겠어요. 고작 그것만으로도 사람 하나 살릴 수 있다면 굳이 안 해줄 건 뭔가 싶은 것뿐이에요.”
견의 얼굴 가득 번져 있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저도 뭐든 해드릴게요. 그러고 싶어요.”
“내가 헌혈을 했어요, 장기 기증을 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때려주기만 하면 된다는데 뭘 받아요?”
“닿는 게 언제 때리는 걸로 결론이 났죠?”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린 견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로 하죠. 손찌검보다는 이쪽이 더 상식적이고 신뢰감 있어 보일 것 같은데.”
이걸 또 덥석 잡기는 뭐한데.
모단의 내적 갈등을 눈치챈 견의 입술이 부루퉁해졌다.
“지협이 형 손은 바로 잡았잖아요.”
“누구요? 백지협 이사님?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요?”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왜 나는 망설이는데요? 지금 사람 손 차별합니까?”
“애예요? 참 나.”
세상 한심하다는 눈을 한 모단이 제 옷자락에 손바닥을 슥 문지르고는 견의 손을 맞잡았다. 아까부터 마중 나와 있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감쌌다.
“손이 작네요.”
무탈이의 손을 몇 번이고 잡아주던 손.
짐작처럼, 제 손보다 한 마디쯤 작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건 여전했다.
“나보다 컸었는데.”
모단이 갸웃했다.
“열두 살 때를 말하는 건가요?”
“그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모호하게 말을 흐린 견이 손을 놓았다.
17년 만에 다시 닿은 손이 아쉬운 온기를 남기고 풀어졌다.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궁금했다.
그날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견은 숨을 골랐다. 서두르다 실수하는 건 한 번만으로도 족하다.
어차피 평생 볼 여자이니까.
“사이좋게 지내요, 우리.”
***
“새윤아.”
커피숍에 앉아 있던 모단이 넌지시 물었다.
“만약에 누가 닿는…… 아니지. 먹는 것만으로도 생리 안 하는 약이 있다고 하면 어떡할래?”
“어쩌긴 뭘 어째? 어떻게든 찾아서 얼마를 주고라도 구해야지.”
“왜 박은규 네가 대답해?”
“여자친구나 아내가 있는 남자한테 생리는 남의 일이 아니지. 한 달에 한 번씩 내 여자 고생하는 거 보는 게 얼마나 고역인 줄 아냐? 덩달아 나까지 숨도 눈치 보면서 쉬어야 되는 시즌이라고.”
새윤이 눈을 흘겼다.
“그걸 아는 사람이 최소한 둘째 날만이라도 건들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해도 매번 짜증 나게 만들어? 사실대로 말해봐. 정말 고역인 게 뭔데?”
“에이, 알면서. 그걸 지금 어떻게 말해.”
은규가 새윤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저놈의 부부를 그냥, 하는 모단을 본 새윤이 냉큼 끼어들었다.
“그런 약 만드는 사람은 세계 10대 부자 안에 들고도 남을 거라 장담한다. 있기만 하면 나부터도 사 먹을 거니까.”
“그렇겠지? 어떻게든 가지려고 드는 게 당연한 거겠지?”
일단 믿기로 해놓고도 이래저래 찜찜하던 게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열두 살에 부딪힌 게 제가 아닌 누구였더라도 백견은 그렇게 필사적이었을 거다. 유일한 약이니까.
‘잠깐, 그럼 만약에 남자랑 부딪혔으면?’
모단의 망상이 엉뚱한 곳으로 뻗으려는 찰나, 새윤이 물었다.
“근데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해? 걸핏하면 도믿맨들한테 걸리더니 이번엔 사이비 약장수라도 만났어?”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혹시 제약회사 다니는 남자라도 만났냐? 지가 그런 신약 개발한다고 허풍 떨든?”
말해놓고 은규가 헉, 했다.
모단의 주위에 무시무시한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요 녀석 주둥이 자유분방한 것 보게. 내 앞에서 유손제약 얘길 꺼내?”
“유손제약이라고는 안 했어! 그냥 제약회사라고만 했지.”
“자기야, 전 남친이 유손제약 딸이랑 결혼을 했는데 얘 앞에서 그 얘길 하면 좀 그렇지.”
“네가 더 나빠, 기집애야!”
모단이 새윤의 머리끄댕이를 잡을 기세로 도끼눈을 떴다. 새윤은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뭐 어때서, 기집애야! 그게 언제 적인데 아직도 열 받아 해? 이제 너랑 아무 상관 없잖아. 그래도 유손제약에서 만든 약은 안 먹을 거지만.”
“내 말이. 얼마 전에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편의점에 갔는데 텐잘은 없고 게포린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사 먹었거든? 근데 머리는 계속 아프고 갑자기 소화가 잘되는 거야. 이게 무슨 미친 약이냐?”
“어휴, 쓰레기네. 게포린이 유손제약 거지? 유손제약 완전 양아치.”
“그만해, 이 부부야.”
한 쌍의 너스레에 무너진 모단이 픽 웃어버렸다. 그래도 맘에 걸렸는지, 새윤이 슬쩍 찔렀다.
“문 닫고 한잔할래?”
“됐어. 일찍 자야 돼. 내일 자원봉사 동호회 나가는 날이거든.”
“너 정말로 거기 들었어?”
“어. 그러니까 혹시라도 우리 엄마가 묻거든 그렇다고 대답해 줘. 매주 하는 것 같다고 하고. 그 정도 거짓말은 할 수 있겠지?”
“애써볼게.”
커피숍 문이 열렸다. 바로 옆 가게인 피자집에서 놀다 온 해빛이 쪼르르 뛰어왔다.
“선생님, 아니, 이모!”
자연스럽게 모단의 무릎에 앉은 해빛이 다짜고짜 물었다.
“이모, 근데 왜 무탈이는 어린이집에 안 와?”
“아빠 회사 때문에 비행기 타고 멀리 다른 나라에 갔다 온대. 한 스무 밤 자면 또 올 거야.”
“보고 싶어 죽겠다아.”
상사병에 끙끙 앓는 딸을 본 은규의 표정이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 구겨졌다.
“해빛아, 무탈이가 아빠보다 좋아? 아빠보다 더 잘생겼어?”
“하아, 사진이라도 보여주세요…… 제발…….”
“이제 아빠 말은 듣는 척도 안 하는구나.”
모단이 휴대폰을 꺼냈다.
역할놀이로 갈고닦은 실력을 십분 발휘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혼신의 연기를 펼치던 해빛은 옥상 텃밭에서 찍은 무탈이의 사진을 보자마자 물 듬뿍 먹은 꽃처럼 살아났다.
“세상에. 얘 정말 잘생겼다.”
어느새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새윤도 감탄했다.
토라진 은규가 엉덩이를 든 순간, 새윤이 들으라는 듯 한마디 했다.
“하여간, 엄마 닮아서 남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다시 자리에 앉은 은규가 구시렁거렸다.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라는 걸 가르쳐야지, 엄마랑 선생님이 뭐 하는 거야?”
“그치. 얼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도 많지.”
새윤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은규의 허벅지를 스윽 쓸었다. 모단이 보았다면 공연음란죄 및 솔로능욕죄로 신고하겠다며 소리를 질렀을 터였다.
“그건 그런데, 애들이 무탈이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애가 얼마나 착하고 의젓한데. 예의도 바르고 이해력도 좋아. 큰 애 같다가 또 어쩔 때는 천상 아기 같은 게 어찌나 귀여운지…….”
어느새 새윤과 은규가 저를 빤히 보고 있음을 깨달은 모단은 동공에 초점을 풀고 허공을 보았다.
“저기요, 정모단 씨. 혹시 숨겨둔 아들이세요?”
“뭐라는 거야.”
“그러고 보니 좀 닮은 것 같기도 한데?”
“말이 되냐?”
민망해진 모단이 뺨을 긁적였다.
저도 왜 이렇게 무탈이에게 맘이 끌리는 건지 의아하긴 했다. 유난히 저를 따르고 말도 잘 듣는 애가 무탈이 하나뿐이었던 것도 아닌데.
“이모, 뭐가 왔어.”
“응.”
모단은 기가 막히게 끼어들어 준 해빛에게 감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해빛이 아쉬워하며 휴대폰을 건넸다.
“근데 이모, 이게 무슨 글자야? 박, 아니, 벅…… 벅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