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래야 백견이지
2017.07.23.
카페테리아 안에 섭호와 금지, 둘만 남았다.
섭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정모단 선생님을 만나러 오셨다고요? 클럽에서 2차는 뭐고, 은혜를 갚는다는 건 또 뭐…….”
“그래서 저 언니랑 무슨 사인데?”
“만나면 인사 정도는 할 만한 사입니다. 혹시나 도련님 앞에서는 이런 질문도 뉘앙스도 흘리지 마십시오. 저 죽습니다.”
“뭐어? 그럼…….”
“당분간은 아무 내색 마시고요.”
금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해 죽겠네. 대체 저 언니는 어쩌다가 견차반의 눈에 든 거지? 박력은 있는데 운은 없는 언니인가 봐.”
중얼대던 그녀의 안색이 거짓말처럼 환해졌다.
“그나저나 다행이다. 견이 오빠의 여자를 오빠가 탐낼 일은 없을 테니까. 제일 안전한 여자였네? 역시 좋은 언니야.”
“대체 그날 클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
무심코 힐난조로 흘린 섭호가 입을 다물었다. 은근히 휘어지는 금지의 눈매를 본 탓이다.
“궁금해? 나에 대해서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면서 왜 참아?”
섭호는 대답 대신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금지가 냉큼 맞은편에 앉았다.
“견이 오빠는 어디 갔어?”
“운동 중이십니다.”
“어디서? 사내 헬스장? 직원도 아니면서 뻔뻔하네.”
“직원 가족도 이용 가능합니다.”
“그래?”
금지가 자연스럽게 섭호 앞에 놓인 커피를 가져갔다. 섭호의 눈썹 사이에 힘이 들어갔다.
“오빠 B형이지? 나도 B형이라 같이 먹어도 돼.”
“웬 초등학생 논리를…….”
“그래서 내 립스틱은 언제 돌려줄 거야?”
섭호의 입술이 닿았던 빨대를 날름 문 금지가 눈꼬리를 접었다.
“그거 주면 말해줄게. 클럽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립스틱 같은 건 못 봤습니다.”
“단종된 컬러라 다시 살 수도 없단 말이야.”
“모릅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거라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청문회야, 뭐야.”
금지가 입을 내밀고는 등을 뒤로 기댔다. 섭호는 묵묵히 책만 내려다보았다.
앞에 아무도 없었다면 벌써 대여섯 장은 넘어갔을 책장이 간신히 한 장 넘어갔다.
“나 다시 나가. 작은오빠가 누구 만나보라고 해서. 알았다고 하고 새벽에 공항으로 튀려고.”
또 어딜, 혼자서 위험하게, 하는 말이 혀끝까지 치밀었다.
“어디로 가는지 안 물어봐?”
어차피 따라갈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데 뭐 하러 묻습니까.
하지 못한 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자들 사이로 어룽어룽 섞여들었다.
“언제 돌아오는지도 안 궁금해? 이러다 내가 영영 안 오면…… 그런 무서움 같은 것도 없어?”
섭호는 고집스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드르륵, 의자 밀리는 소리가 나나 싶더니 손이 허전해졌다.
책을 확 낚아챈 금지가 심술 가득한 표정으로 펼쳐져 있던 페이지 한복판에 입술도장을 꾸욱 찍었다.
“이거나 실컷 봐라.”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내려놓은 금지가 홱 돌아섰다.
앞에서는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는 마음을 담은 시선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거친 걸음을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마음도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언젠가 다 닳으면 저절로 멈추겠지.’
덮지 못한 책을 저만치 밀어둔 섭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아으, 요새 왜 이렇게 인생이 다사다난하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한데 모아 압축해 놓은 것 같은 백견만으로도 벅찬데, 회사까지 쳐들어온 그 여자는 또 뭐란 말인가.
‘지협 오빠에 견이 오빠에 섭호 오빠까지. 오빠 소리가 아주 입에 착착 붙던데. 하는 짓도 비슷한 게 백견 친동생 아니야?’
이불과 휴대폰과 충전기, 천국 3종 세트를 갖추고 뒹굴거리던 모단이 멈칫했다.
‘아 참, 백금지가 아니라 황금지라고 했지.’
모단은 얼른 인터넷 창을 켜고 황금지를 검색해 보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나왔다.
“헐. 노블그룹?”
아버지는 노블그룹 황만석 회장, 오빠 셋은 계열사를 하나씩 맡고 있었다. 본인은 경영에 참여하진 않는지, 27살이라는 나이와 미국에 있는 예술대학교를 나왔다는 정보가 다였다.
‘그보다 더 어려 보였는데. 역시 돈으로 관리하는 애들은 다르구나.’
모단은 한숨을 폭 내쉬고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견의 팔짱을 끼고 레스토랑에 들어가던 것과, 클럽에서 매번 견이 오빠가 잡으러 왔었다고 중얼대던 게 떠올랐다. 가족 같은 사이라던 지협의 말도.
‘근데 왜 아까는 영락없이 위 비서님 여자친구처럼 굴었지? 어장인가?’
혹시 나 같은 서민은 그 오빠들이랑 말도 섞으면 안 된다는 건 아니겠지.
이건 좀 자격지심 같다. 모단은 픽 웃었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있는 것들이란.”
밖에서 혜숙이 부르는 소리가 났다.
부스스 일어나 거실로 나가자 상큼한 매실 향이 확 풍겼다.
“이거 찬장에 있더라. 네가 사다 놨어? 비싸 보이던데.”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잔을 집어 들었던 모단이 뜨끔했다.
그날 매실차 마시면 좋대요, 하며 눈꼬리를 접던 누군가가 떠올라서.
“누가 줬어.”
“누가?”
나 좋아하는 미친놈.
쓸데없는 드립이 치미는 바람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모단은 얼른 답했다.
“아는 사람.”
다행히 혜숙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참. 근데 너 임신했니?”
“푸으읍!”
매실차를 한 모금 넘기려던 모단이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밑도 끝도 없이 뭔 소리야! 엄마 딸이 막 혼자 임신하고 그러는 성녀로 보여?”
“생리를 안 하는 것 같기에. 왜 생리대가 줄지를 않어?”
“아, 안 줄기는 왜 안 줄어. 엄마랑 같이 쓰다가 혼자 쓰니까 그렇지. 나 원래 양도 적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대로 남았던데?”
“어…… 그러고 보니까 이번 달에 아직 안 했나? 직장 옮기고 이래저래 스트레스받아서 날짜가 바뀌었나 봐. 금방 하겠지, 뭐.”
모단이 질질 흘린 매실차도 닦아낼 겸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게 엄마가 검진 좀 받아보라 그랬지? 너 혹시 또 살 뺀다고 굶고 다니는 거 아니야? 네 나이에 굶는 다이어트 했다간 살은 안 빠지고 골다공증하고 탈모하고 생리불순만 온다.”
“굶지도 않았지만 너무하네. 내 나이가 어때서!”
“네 나이가 어떻긴. 서른이지. 이십대랑 삼십대랑 확 다르다, 너. 지금부터 몸 챙겨, 이것아.”
“안 그래도 내일부터 운동하기로 했어. 회사 지하에 있는 헬스장 공짜래.”
이번에도 효림의 제안이었다. 한 시간만 일찍 와서 가볍게 운동하고 씻고 출근할까 하는데 괜찮으면 같이 하자고 권했다.
워낙 운동에 취미가 없는 데다 아침잠은 포기할 수 없기에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왜 하필 그때!
금지라는 여자의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리여리한 몸매가 생각나 버린 건지.
정신을 차려보니 제 입이 멋대로 ‘그래요, 곧 여름인데 관리해야죠’ 따위의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연경이 ‘역시 젊은 선생님들은 다르네’ 하며 감탄하는 통에 무르기도 민망했다.
“자원봉사에 운동까지, 웬일이야?”
“지금부터라도 착하게 살면 다음 생엔 괜찮은 남자 만날까 싶어서. 이번 생은 망한 것 같아.”
“으이구!”
모단이 잽싸게 옆으로 엎어졌다. 간발의 차로 혜숙의 등짝 스매싱을 피한 그녀는 히히 웃고는 일어났다.
“말 나온 김에 짐이나 챙겨놔야겠다.”
적당한 가방을 꺼내 옷과 세면도구, 수건 등을 대강 챙겨 넣는데 혜숙이 말을 던졌다.
“아 참. 오늘 낮에 옆집 아줌마랑 점집 다녀왔거든? 새로 신내림 받은 무당이 있다 그래서.”
“뭐래? 혹시 나 삼재라고 안 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인생이 피곤할 리가.
“그런 말은 없던데. 근데 용하긴 하더라. 너 얼마 전에 직장 옮긴 것도 알아맞히더라니까. 근데 거기서는 오래 일 못 할 거라 그러더라?”
“뭔 소리야. 나 거기서 최소 10년은 일할 건데.”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무당 말은 그렇더라고. 반은 믿고 반은 거르는 거지. 그리고 또 이상한 소릴 하대?”
“무슨 소리?”
“네 주변에 뭔가 허연 게 보인다고 하던데?”
“커헉!”
마신 것도 없이 사레에 걸린 모단이 콜록거렸다.
허연 거라니, 왜 듣자마자 백견이 생각나는 거냐고!
“근데 기운이 나빠 보이진 않는다더라. 오히려 좋은 쪽인 것 같대.”
“그럼 아닌가…….”
“뭐가 아니야?”
“아니야, 아무것도.”
모단은 한 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헝클어뜨렸다.
‘오늘은 자야 해. 생각하지 말자!’
***
다음 날 아침.
사내 헬스장 앞에 선 모단은 진정한 멘탈붕괴가 무엇인지 실감하는 중이었다.
‘이 시간에 운동하는 직원이 이렇게 많아버린다고? 그것도 죄다 여자? 나만 빼고 세상 여자들 다 관리하면서 사는 거였어?’
출근하기도 힘든데 새벽에 운동까지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었다. 다른 부서 사람들은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할 줄 알았는데.
‘어차피 땀나고 씻을 건데 왜 다 풀메이크업이지? 저렇게 쫙 달라붙고 푹 파인 운동복을 입을 수 있는 몸매인데 뭘 더 관리하려는 거야?’
헐렁한 반팔 티셔츠면 충분할 줄 알았다. 운동다운 운동을 해본 기억이 하도 까마득해서 변변한 운동복이 없기도 했다.
‘이건 마치…… 사우나로 가려다가 찜질방으로 잘못 들어와서 나만 홀딱 벗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심지어 효림마저도 눈에 확 띄는 화사한 색의 운동복 차림이다. 비비크림에 눈썹 예쁘게 그리고 틴트까지 발랐다.
‘차라리 아침에 엄마가 깨울 때 못 일어나고 다시 잠들어서 꿈을 꾸고 있는 거였으면.’
모단은 어질어질해진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저기요, 효림 쌤. 제가 정말 몰라서 여쭤보는 건데요, 요즘엔 운동할 때도 다들 화장하고 해요?”
진정한 민낯에 헐렁한 차림의 모단을 보고 제가 더 안절부절못하던 효림이 갑자기 몸을 기울였다.
“저기, 모단 쌤. 그게 아니라요, 동기가 불순하다고 거절하실까 봐 사실대로 말씀을 못 드렸는데…….”
주위를 살핀 효림이 몸을 굽히고 속닥거렸다.
“사실은 얼마 전부터 회장님 손주가 사내 헬스장에서 새벽운동 한다고 소문이 나서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백견 말이에요.”
“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저는 분명 고급 정보라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회사 사람 다 아는 것 같네요. 에잇.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어쩐지,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입구 쪽을 흘끔거린다 했다.
‘내가 너무 추레해서 나 보는 줄 알았는데.’
지금 이 순간, 모단은 신데렐라가 12시 되기 전에 필사적으로 무도회장을 탈출한 이유를 절절히 깨달았다.
왕자놈 놓치는 게 뭐 대수였겠는가. 꼬리 펼친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여자들 속에서 혼자 누더기 꼴이 되는 게 더 끔찍하지.
속에서 온갖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당당해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렇구나. 그런 거라면 상관없어요. 난 또, 저렇게 안 입으면 못 들어가는 건가 했네.”
발걸음은 쿨하게 안으로 향했으나, 마음은 이미 인터넷 쇼핑몰에서 신상 운동복을 미친 듯이 클릭하고 있었다.
젠장.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하물며 백견이라니!
효림과 나란히 러닝머신 앞에 선 모단은 간절한 바람을 담아 소곤거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 그분 운동 쉬시나 본데요?”
“헉. 설마요.”
“근데 효림 쌤은 백지협 이사님파 아니었어요?”
“미남은 편식하는 거 아니래요.”
작은 웃음이 터졌다.
“모단 쌤, 오해하시면 안 돼요. 저 정말 그런 목적만으로 여기 온 거 아니라고요. 열심히 운동할 거예요.”
“그러기엔 이미 의욕이 확 꺾인 눈인데요?”
발목을 돌리던 효림이 그대로 멈췄다. 뒤이어 점점 눈을 크게 떴다.
효림 쪽을 보고 서서 접은 왼팔 사이에 오른팔을 넣고 당기던 모단은 주춤 멈췄다.
“왜, 왜요?”
등 뒤가 싸했다. 모단은 팔도 풀지 않고 슬금슬금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바로 옆 러닝머신 앞에 백견이 있었다.
그는 주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익숙한 동작으로 긴 팔다리를 쭉쭉 풀었다. 붙지도 않는 심플한 운동복만 걸쳤을 뿐인데 본 적도 없는 근육이 보이는 것 같았다.
때마침 견이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그가 한 손을 들었다.
‘잠깐만,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아는 척을 해버리면……!’
인사하는 줄 알았던 손이 계속 올라가더니 머리를 짚고 옆으로 꾸욱 눌러 목을 풀었다.
아는 척은커녕 이 시각에 여기서 만난 것에 대해 놀라는 기색조차도 없는 무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모르는 사이다.
‘역시, 그때 금수저 어쩌고 했다고 상처받은 건가.’
모단은 얼른 시선을 떼어냈다.
경주마에 빙의해 앞만 보기로 결심한 그녀는 비장하게 러닝머신에 올라 시작 버튼을 눌렀다.
30분 후.
“허억……!”
모단은 옆에 백견 아니라 백견 할아버지가 있다 해도 신경 못 쓸 지경이 되었다.
체력이 그새 더 저질이 됐는지, 뛰지도 않고 조금 빠르게 걸었을 뿐인데 숨이 턱까지 찼다. 아무도 없었다면 3분 만에 포기했을 것이나 체면치레하느라 그럴 수도 없었다.
어찌어찌 시간을 채우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끝! 드디어 끝! 해방이다!’
러닝머신이 느려지다 멈추자마자 얼른 내려왔다.
‘어라, 왜 바닥이 계속 움직이지?’
걸음을 내딛는데 땅이 출렁했다. 기다렸다는 듯 다리에 힘까지 풀렸다.
‘설마 무당이 나 이 회사 오래 못 다닐 거라고 했다는 게…… 수치사해서……!’
처절하게 무릎 꿇고 넘어지기 직전, 팔이 덥석 붙들리며 몸이 제자리로 돌아와 섰다.
“조심.”
견이었다.
“운동 처음 하세요? 러닝머신 끄자마자 바로 내려오면 위험해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조금은 까칠하게 들릴 만큼 무심한 투다.
견의 러닝머신은 아직도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미처 끄지도 못하고 급히 내려서 절 잡아준 모양이었다.
“모단 쌤, 괜찮아요?”
“아, 네.”
어쩔 줄 몰라 하는 효림을 보자 정신이 돌아왔다. 모단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네.”
웃지도 않고 답한 견은 다시 돌아가 뛰기 시작했다.
모단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과한 운동 때문인지 놀라서 그런 건지,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잡힌 팔도 화끈거렸다.
잘못 건드렸다가 또 망신만 당할까 봐 무난한 기구 몇 개만 돌면서 소심하게 운동을 마쳤다.
“모단 쌤, 잠시만요.”
샤워실로 향하려는데 효림이 물통을 놓고 왔다며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입구에 모단만 어정쩡하게 남았다.
주변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는 것처럼 운동에만 집중하고 있는 견의 뒷모습이 눈에 걸렸다.
규칙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풀어졌다 하는 어깨와 등과 팔뚝.
흡사 중독성 있는 마약짤을 보는 것 같아 얼른 다른 데를 보았다.
그제야 다른 남자 직원도 몇 명 있었다는 걸 알았다. 백견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저렇게 건강해 보이는데 걸핏하면 코피 흘리면서 끙끙 앓는다니. 거참.’
“가요, 쌤.”
모단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평소의 효림이었다면 아까 백견이 잡아준 것에 대해 호들갑을 떨었을 법도 한데, 누가 봐도 데면데면하던 견의 태도와 오늘 이래저래 수치스러웠을 모단을 배려해서인지 별말하지 않았다.
씻고 평소처럼 가벼운 화장을 하고 나오니 출근하는 시각과 비슷했다. 일찍 일어나서 운동까지 했으면 뿌듯하고 개운해야 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찜찜했다.
교실로 들어와 앞치마를 걸치고 애들 맞을 준비를 하는데, 문자가 왔다.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 있는 데서 아는 척하면 혼날까 봐.
해빛이 당당하게 잘못 읽은 이후 자꾸만 ‘벗겨’로 보이는 그 이름.
―퇴근도 늦게 하면서 아침까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침밥은 먹었어요? 혹시라도 다이어트 같은 거 하지 마요. 뺄 살이 어디 있다고.
네가 봤냐, 내 살?
―그냥 내일부터 운동하지 마요. 불안해서 못 보겠어요. 정 해야겠으면 딴 데 가서 해요. 남자 한 명도 없는 여성전용 피트니스센터 같은 데서.
사내 헬스장을 여성전용 피트니스센터 뺨치게 만들어놓은 인간이 뭐라는 거야.
쉴 틈 없이 날아드는 문자에서 어쩐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 그렇지. 이래야 백견이지. 아까 멀쩡하고 차가운 도시 남자처럼 굴던 건 대외용 이미지였구만.’
언제부턴가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었음을 깨달은 모단은 한 손으로 입가를 꾹 눌렀다.
그래도 아까 잡아준 것과 눈치껏 모르는 척해준 건 고마우니 짧게나마 답을 보내야겠다 하는데, 눈을 의심케 하는 문자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밖에 나올 때 화장은 꼭 하고 다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