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소시오패스 아니고 소시오바보
2017.07.26.
모단이 헬스장을 나간 후, 견은 대충 운동을 마무리하고 후다닥 씻고 나왔다.
예고도 없이 모단과 맞닥뜨렸을 때부터 정신이 반쯤 날아가 버렸다.
온 신경이 그녀에게만 쏠리는 걸 감추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느라 운동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밀당이라는 건가? 보고 싶어서 따라다니면 구박하고, 안 보려고 하면 먼저 나타나고.”
하의만 걸치고 문자 하나 보내고, 셔츠를 꿰어 입고 또 하나 보냈다. 모단이 출근하면 바로 휴대폰을 서랍에 넣어둔다는 걸 알기에 맘이 급했다.
단추 다 잠그고 또 보내고,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리고 1층으로 올라가며 또 보내려다 멈칫했다.
“잠깐. 이거 해도 되는 말인가?”
견은 곧장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구석에 섭호가 앉아 있었다. 제 노트북을 앞에 놓고, 맞은편에 견의 노트북도 미리 펴두었다.
견은 의자에 앉자마자 손에 쥔 휴대폰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섭호야, 화장 안 한 얼굴이 너무 야하다고 하면 변태같이 들릴까?”
“네. 성희롱으로 고소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칼 같은 대꾸에 베일 뻔했다. 견은 손사래를 쳤다.
“그런 뜻이 아니라, 화장하고 차려입은 건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맨 얼굴에 편한 차림은 정말 가까워야 보는 거잖아. 같이 사는 사이라든가 볼 거 다 본 사이라든가. 말 그대로 막 씻고 나온 것처럼 한 꺼풀 사라진 느낌이라 야해 보인다는 뜻인데.”
“들으면 들을수록 그런 뜻이네요. 흉합니다.”
“아, 진짜 그런 거 아닌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본능적으로 말려야겠다 싶어진 섭호가 얼른 쐐기를 박았다.
“그런 말은 정말로 같이 사는 사이라든가 볼 거 다 본 사이가 된 후에 하시죠. 사지 멀쩡하게 오래 살고 싶으시다면요.”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언젠가는 될 거니까 미리 하면 안 돼?”
“답 정해놓고 물어보실 거면 묻지 말고 그냥 하십시오. 어차피 제가 귓방망이 맞을 것도 아닌데.”
잘근잘근 씹히던 견의 아랫입술이 불만스레 튀어나왔다.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견이 아까 보낸 문자, ‘밖에 나올 때 화장은 꼭 하고 다녀요’에 이어 ‘화장 안 한 얼굴 다른 사람들이 보는 거 맘에 안 드니까’까지 썼을 때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단의 문자가 먼저 도착했다.
―제 민낯이 백견 씨 안구에 테러를 가한 점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만 운동도 화장도 너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까불지 마라.
‘이게 바로 반존대라는 건가?’
존댓말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반말로 끝나는 문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섭호야. 나 사고 친 것 같아.”
“민사 쪽입니까, 형사 쪽입니까?”
“연애사 쪽이야. 정모단 씨가 나보고 까불지 말래.”
“또 까부셨습니까?”
대강의 사정을 들은 섭호는 끌끌 혀를 찼다.
민낯을 본 남자에게서 앞뒤 다 자르고 화장하고 다니란 문자를 받았으니 여자 입장에서는 핵도발 수준이었을 거다.
“글로 하니까 이런 오해가 생기지! 전화를 해야겠다.”
“최소 일주일은 안 받는다는 쪽에 월급의 세 배 걸겠습니다.”
“쓸데없이 통 크게 배팅하지 마. 승률만 따지면 나도 그쪽에 걸고 싶으니까.”
한참 휴대폰을 만지던 견이 다 팽개치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안 받네. 하긴, 애들 볼 때는 다른 거 안 보는 사람이니.”
“어떻게 수습하시게요?”
“일단 문자는 보내뒀어. 정말 그런 뜻 아니었다고.”
견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제대로 손질하지 않은 머리가 더 비죽비죽해졌다. 워낙 결이 좋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뭐가 이렇게 힘드냐. 정모단 씨한테 문자 한 줄 보내는 게 사업계획서 쓰는 것보다 더 힘들어.”
날 때부터 우월함이 몸에 밴 견이 이토록 의기소침해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너무 어려운 여자야. 피가 안 섞인 사람 중에 나한테 할 말 다 하는 사람은 너 빼고 처음 봤어. 욕하고 때린 사람은 유일하고.”
견도 섭호도, 호르몬시터를 어떻게 찾을지만 걱정했지 찾고 나서 고생할 거라는 생각은 깊게 해본 적 없었다.
성질대로 굴어도 좋다는 여자들이 넘치는 마당에, 맘먹고 잘해준다면 싫어할 리 없을 거라 여겼다. 갖고자 마음먹은 걸 못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안이한 자신감마저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처음이더라고. 내가 먼저 나서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고 한 게.”
견의 타고난 외모와 배경은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게 만드는 힘이자 독이었다.
탐낼 것이 너무 많은 그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였기에.
열두 살 이후로는 친구 비슷한 걸 만들 기회도 없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 연애에 대한 관심도 의욕도 뚝 떨어졌다.
덕분에 한 가지 얻은 게 있다면, 비즈니스에서는 더 뛰어날 수 있었다는 거다.
매사 냉철하게 손익을 따져 결정하면 될 뿐, 인맥이나 정 같은 게 끼어들 여지가 없었으니까.
“근데 너도 알잖아. 나 처음 하는 일이라도 조금만 익히면 순식간에 잘하는 거.”
맞는 말인데 대꾸해 주기 싫어진 섭호는 딴청을 피웠다.
“근데 정모단 씨는 왜 그렇게 안 되지? 잘될 것 같다가 또 틀어지고, 조금 알 것 같다가도 전혀 모르겠고.”
“도련님이 이제껏 뼈저리게 느낄 기회가 없으셨을 뿐, 원래 사람하고 마음은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원래 다 그런 거야? 나만 못하는 거 아니지?”
“유난히 못하시긴 합니다. 경험 부족 탓이겠지만, 평범하게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너 지금 나보고 소시오패스라는 거야?”
“정반대죠. 소시오패스는 쉽게 호감을 얻고 치밀하게 조종하는 쪽 아닙니까.”
섭호가 예리하게 정곡을 찔렀다.
“도련님은 그냥 소시오바보입니다.”
“이 자식이.”
울컥하긴 했지만, 견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라 더 이상 뭐라 하진 않았다.
“땅에 떨어진 음식도 3초 안에 주워 먹으면 아무 이상 없다는데, 실수로 떨어뜨린 문자는 왜 다시 주울 수가 없는 거지? 잘못 보낸 문자 취소하는 기능은 왜 없는 거냐고.”
커피를 반쯤 들이켠 견이 한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말 나온 김에 내가 희명소프트 입사해서 연구해 볼까?”
“관련 계열 석사나 박사 학위 있으십니까?”
“나 고졸이잖아. 나 대신 네가 갈래?”
“전 지방대 출신입니다.”
“그래도 국립대잖아. 수석입학해서 4년 내내 장학금 받지 않았어?”
“그래 봤자 인서울 명문대 간판에 밀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제가 울며 겨자 먹기로 도련님 비서가 된 거 아닙니까. 졸업하고 이력서 낸 회사 중 한 군데만 붙었어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 수 있었을 텐데.”
“울며 겨자 먹기라고 했냐, 지금? 너 다른 데 취업했으면 지금 연봉 반도 못 받았어.”
걸핏하면 ‘난 상사고 넌 비서야’를 강조하는 밉상이지만, 섭호는 잘 알았다.
말만 그렇게 하지, 제가 아무 일도 안 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곁에 둘 견이라는 걸.
능력보다 스펙만 보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뭐라고 할까 봐, 아무도 뭐라 안 해도 혼자 기죽을까 봐, 가끔은 일부러 더 유난스레 군다는 걸.
“연봉이 높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죠. 하물며 상사와 한집에 살다니, 최악 아닙니까?”
“그건 그래. 낮밤으로 시중들려면 힘들지.”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만한 발언은 삼가주십시오.”
표준어를 쓸 때는 돌직구로, 사투리를 쓸 때는 변화구로 덤벼드는 건방진 놈이지만, 견은 잘 알았다.
말만 그렇게 하지, 제가 재벌 아니라 거지라 해도 지금처럼 챙겨줄 섭호라는 걸.
때론 스스럼없는 형제처럼, 때론 엄한 부모처럼 빈 곳을 메워준 섭호가 없었더라면 소시오바보가 아니라 진짜 소시오패스가 되고도 남았을 거라는 걸.
“어쨌든 너나 나나 서류상으로는 1차 탈락이라는 거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견이 셔츠 소매를 걷었다. 노트북을 조금 당겨놓고 가볍게 손을 풀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잡으려 하니 눈빛부터 달라졌다.
“그런데 도련님, 집에서 하셔도 될 일을 꼭 여기 와서 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규칙적인 생활에 다시 적응할 겸, 사내에 소문도 퍼뜨릴 겸.”
“무슨 소문이요?”
“나 멀쩡하게 일하는 모습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겸사겸사 정모단 선생님도 봤으면 좋겠는데.”
섭호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닫았다.
오랜만에 견의 집중력이 폭발했다.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그에게서 예민섹시의 아우라가 줄줄 흘렀다.
바라던 대로, 지나가는 직원들마다 흘끔거렸다. 아마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이런저런 말들이 나돌 듯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서류만 보고 사람을 뽑는 건 허점이 너무 많아. 너 같은 인재를 놓친 회사들만 봐도 알 수 있지. 나도 서류만 봐서는 대표는커녕 인턴도 못 할 거고.”
견이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한 손에 턱을 괴었다.
“우리 희명그룹에서만이라도 타파해 보면 어떨까?”
“어떻게요?”
“그 판을 지금부터 짜야지.”
얼핏 건조해 보이는 견의 눈동자 위로, 먹잇감을 희롱하는 포식자 같은 빛이 스쳤다.
섭호는 슬그머니 자세를 고쳤다.
“정확히 뭘 위한 판입니까?”
“정모단 씨의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판.”
“어떤 말이요?”
“이 멀쩡한 허우대랑 스펙으로 일을 하면 다시 경영천재 소릴 들을 수도 있을 거라는 말.”
섭호가 사이다 한 모금 들이켠 표정을 했다가 얼른 가다듬었다.
“남들은 가지려고 발악을 해도 쉽게 못 갖는 것들을 날 때부터 쥐고 태어났으면…….”
견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번졌다.
“남들 눈에 아까워 보이지 않게 휘두를 줄도 알아야지.”
***
퇴근하는 길, 휴대폰을 꺼내본 모단은 헛웃음을 흘렸다.
문자에 부재중 전화에 난리가 났다.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정말 그런 뜻 아니에요! 그 반대예요.
―민낯이 안 예쁘다는 게 아니라 예뻐서 그런 거라고요. 전에 맞선 본다고 치마 입고 나왔을 때 얼른 집에 가라고 했던 거랑 똑같은 거란 말이에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더 심쿵하는 남자들도 많은 거 알아요? 꼭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심쿵은 개뿔, 지가 뭔데 단속질에 관리질이냐고!’
그보다 이 인간 문자는 왜 저절로 음성 지원이 되는지 모르겠다.
언죽번죽 뻔뻔하게 굴다가도 틈만 나면 찡얼찡얼대는 목소리가 귓속에 쟁쟁거렸다.
무시하려다가, 그 정도로는 굴하지 않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조금쯤 심술이 돋았다.
‘그래. 맨날 소리 지르고 열내봤자 내 혈압만 오르지.’
―오해 풀 테니까 대신 오늘처럼 회사에서 나 절대로 아는 척하지 말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세요.
과연 먹힐 것인가.
조마조마해하는데 답장이 도착했다.
―네……….
‘뭐가 이렇게 아련해. 점을 몇 개를 찍은 거야?’
그래도 이번만큼은 휘둘리지 않은 것 같아 뿌듯했다. 징글징글 말 안 듣던 아이가 회심의 필살기에 홀랑 넘어와 얌전해졌을 때에 버금가는 흐뭇함이다.
버스 창밖을 내다보며 히죽거리는데 전화가 왔다. 견임을 확인하자마자 인상이 팍 구겨졌다.
부재중 1통.
부재중 2통.
다섯 번째 진동이 울렸을 때, 모단의 인내심에 빠직 금이 갔다.
“여보세요! 방금 연락하지 말라는 말에 네, 해놓고는 장난하는 거……!”
[어! 안 받을 줄 알았는데!]
“그럼 왜 했대? 끊어요.”
[잠깐, 아니에요! 받아줘서 고마워요. 위섭호 월급 석 달 치 정모단 씨한테 드릴게요.]
“참 나. 그걸 내가 왜 받아요?”
[그런 게 있어요.]
끊어버릴까 봐 겁먹었는지, 견은 빠르게 덧붙였다.
[당분간 연락 안 하기 전에 이건 꼭 물어봐야겠다 싶어서 전화했어요. 당분간이 언제까지죠?]
‘엇. 기간은 생각 안 해봤는데.’
말문이 막힐 걸 예상한 듯, 견이 잽싸게 치고 들어왔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면 되죠? 그 이상은 너무 길어요. 누구 숨넘어가는 꼴 보려구.]
“다음 주도 아니고 이번 주라니, 고작 며칠밖에 안…….”
[그동안 깊이 반성할게요. 대신 말 잘 들으면 칭찬도 해줘야죠? 주말에 나랑 밥 먹어요.]
“싫습니다.”
[그럼 나도 싫습니다. 말 안 들을 건데 어떻게 안 들을 건지는 내일 출근길에 알려 드리든가 할게요.]
버스만 아니었어도 괴성을 내질렀을 터다. 모단은 참을 인 자를 몇 번이고 새기며 이를 악물었다.
“토요일에 교육 있어요. 일요일엔 쉬고 싶고요.”
[교육이 자정에 끝난다고 해도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럼 토요일 저녁에 보는 걸로 알고 금요일까지, 아니다. 큰맘 먹고 교육 끝날 때까지 연락 안 할게요!]
똑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던 모단은 버스 창문이라도 부수고 싶은 맘을 꾹 참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젠장, 또 당했어……!’
***
연락만 안 할 뿐, 견과 모단은 아침마다 헬스장에서 마주쳤다.
첫날 너무 힘들어해서 안 올 줄 알았던 모단은 의외로 빠지지 않았다. 이 수모를 복근과 바꾸겠다는 오기가 생긴 거였다.
역시나 화장은 안 했으나, 운동복은 조금 더 타이트한 것으로 바뀌었다.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점잖은 수준이었음에도 견의 속을 시끄럽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간신히 얻어낸 주말의 칭찬 찬스가 아니었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접근했을 터였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볼 수 있는 게 어디야. 역시 회사로 다시 들어오길 잘했어.’
체력 단련인지 정신력 단련인지 알 수 없는 운동을 마치고 나면, 견은 오전 내내 사원들 눈에 잘 띄게 카페테리아에서 일을 했다.
종일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오후에는 백 회장의 양해를 구하고 회장실에 틀어박혔다.
“잠시 비서실 좀 올라갔다 오겠습니다.”
“알았어.”
섭호가 자리를 비우고, 견은 하던 일에 마저 몰두했다.
그때 카페테리아로 들어오던 은규가 견을 발견했다.
사다리타기 내기에 져서 팀원들에게 주문받은 음료를 시켜놓고, 은규는 망설였다. 견은 너무 몰입한 나머지 누가 온 줄도 모르는 듯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은규가 쭈뼛대던 걸음을 크게 뗐다. 그러고는 견의 옆에 서서 어깨를 두드렸다.
일하던 표정 그대로 서늘하게 돌아보았던 견은 얼른 눈꼬리에 힘을 풀었다.
“은규 씨!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커피 사러 오셨어요?”
“네.”
“그렇군요. 팀원분들 다 잘 지내시죠?”
“네.”
“해빛…….”
저도 모르게 해빛이도 잘 있냐고 물어볼 뻔했다. 견은 얼른 창밖을 가리켰다.
“해, 햇빛…… 이 참 좋은 날씨네요.”
우중충한 밖을 내다본 은규가 갸웃했다.
어색하게 웃은 견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음료 나올 때까지 잠깐 앉았다 가세요.”
“네.”
너무 기다렸다는 듯 앉는 바람에 견은 살짝 당황했다. 은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더 그랬다.
“저기, 대표님. 참, 대표님이 아니지.”
“백견 씨라고 부르세요.”
“아, 예. 저기…… 백견 씨.”
영 입에 안 붙는 호칭을 겨우 뱉은 은규가 목을 가다듬었다.
“안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이렇게 따로 조용히 뵐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막막했는데 잘됐네요.”
계속 말해보라는 듯, 부드러운 눈빛이 은규를 바라보았다.
“용건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머리카락 사이에 식은땀이 송송 배어날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한 은규가 간신히 말을 끄집어냈다.
“모단이는 안 됩니다.”
견의 한쪽 눈썹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모단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