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남녀 사이의 일은 함부로 장담하지 말라
2017.08.06.
“얼굴 맞대고 속닥거릴 일 없을 거라더니.”
급해서 들이대고 본 건데, 그러고 보니 너무 가까웠다.
다른 사람과 고작 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본 게 언제였더라.
키스하기 직전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일이 없기에 한동안 잊고 있었다. 얼마 전 코에 있는 점을 본답시고 견이 들이대긴 했지만 뭘 의식하기도 전에 멀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쪽이 다가드는 것만큼 멀어지면 그만인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흡사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 의식은 지나칠 만큼 또렷해서 사소한 것까지 다 느껴지는데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오늘 아무 일도 없을 것 같다고 했던 말도…… 취소할까요?”
나직이 달싹이다 멈춘 입술이 금방이라도 더 다가올 것만 같았다.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린 모단은 튕기듯 허리를 펴고 멀어졌다.
튀어나오게 생긴 눈을 본 견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남녀 사이의 일은 함부로 장담하지 말라는 말이 있죠.”
견이 창문 버튼에 손을 올렸다. 겸손도 빈틈도 없이 잘생긴 얼굴이 스르르 가려졌다.
“갑니다. 푹 쉬어요.”
차가 혜숙의 옆을 지나 미끄러지듯 멀어졌다.
갸웃하며 돌아본 혜숙이 총총 다가와 모단의 팔을 쳤다.
“어, 엄마. 언제 나왔어?”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와 주었다.
“입은 왜 틀어막고 서 있어?”
“아무것도 아냐. 방금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어가지고. 어휴.”
“저 차는 누구 차인데?”
얼굴에 두어 번 손부채질을 한 모단이 태연히 둘러댔다.
“오늘 같이 교육 들은 쌤.”
“저 선생님은 돈이 어디서 나서 저렇게 좋은 차를 탄다니? 네 월급 봐서는 턱도 없어 보이는데.”
“원래 집이 잘 산대.”
“그래?”
모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잘 넘긴 듯했다. 아마 남자인 걸 걸렸다면 밤새 추궁당하고도 남았으리라.
“줘, 엄마. 내가 버릴게.”
“그래, 그럼.”
쓰레기봉투를 넘겨준 혜숙이 손을 툭툭 털었다.
“근데 너 뭐 먹고 왔어?”
“응?”
“마늘 냄새 나는 것 같은데. 고기 먹었어? 맛있는 거 먹고 들어올 거면 저녁 하지 말라고 전화나 하지. 얼른 버리고 들어와.”
모단은 쓰레기봉투를 든 채 한참 동안 굳어 있었다.
눈앞에 아까의 맛있는 저녁이 스쳐 지나갔다. 신나게 마늘을 퍼먹는 제게 이것까지 먹으라며 더 줬던 것도.
‘그래 놓고 그렇게 가까이서……. 아무리 잘 보일 필요 없는 남자라지만 이런 민폐를……!’
모단은 다시금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까는 너무 긴장해서 몰랐던 쌉싸름한 향이 생생히 올라오며 확인사살을 했다.
“나를 버리고 싶다…….”
한편, 견은 말아 쥔 손을 입가에 대고 연신 피식거렸다.
심장이 잔뜩 신난 아이처럼 폴짝거렸다. 사정이야 어쨌건 먼저 훅 다가들던 모단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아른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모단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얼른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는 거였다.
예의 지키려다가 모단을 곤란하게 만들고 나중에 눈치는 쌈 싸먹었느냐며 욕을 먹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었지만.
“나중에 꼭 제대로 인사드려야지.”
마늘 냄새 따위, 느끼기는커녕 생각도 하지 못한 그였다.
***
“선생님.”
옥상으로 산책을 가는 길, 초은이 쪼르르 다가와 모단의 손을 잡았다.
“저 어젯밤에 이 빠졌어요.”
초은이 고개를 쳐들고 이, 했다. 아래 앞니가 있던 자리에 앙증맞은 구멍만 남았다.
“우와, 정말이네. 아프지 않았어?”
“별로 안 아팠어요. 피도 났는데 안 울었어요.”
회장실로 가기 위해 올라왔던 견은 시끌시끌한 아이들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올망졸망 늘어선 줄이 복도를 지나 계단 쪽으로 가고 있는 게 보였다.
“이야, 멋지네. 이제 아기 이는 이 요정이 가져가고 더 튼튼한 어른 이가 나겠다.”
초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모단의 뒷모습을 본 견이 미소를 지었다.
소리에 온도가 있다면 저 여자의 목소리는 딱 체온 정도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요, 엄마가 어른 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계속 써야 해서 이제부터 양치를 더 열심히 해야 한대요. 그리고…….”
초은이 열심히 조잘거리는데 동후가 끼어들었다.
“이초은! 선생님한테 거짓말하지 마아!”
“내가 언제에!”
“사실은 너 이 빠질 때 엄청 울었지? 너 울보잖아.”
“아니야! 안 울었어! 선생님, 울보라고 하는 사람이 울보지요? 그치요?”
“울었대요∼ 이도 없대요∼”
“너어!”
혀를 쏙 내민 동후가 계단으로 도망쳤다. 씩씩대던 초은이 바로 따라가려 했다.
“어어, 얘들아! 뛰면 안 돼요!”
놀란 모단이 반사적으로 초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거의 동시에 초은이 동후의 티셔츠에 달린 모자를 잡아당겼다.
“동후야!”
동후가 뒤로 휘청하는 것을 보자마자 모단은 팔을 뻗었다.
자칫 구를 뻔한 아이를 받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고 말았다. 동후를 안은 쪽 팔이 계단 모서리에 길게 긁히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계단이 몇 개 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단은 얼른 일어나 동후부터 앉히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동후야, 괜찮아?”
“선생님…….”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동후가 조심스레 모단의 팔을 잡았다.
그제야 제 팔을 내려다본 모단은 넓게 쓸린 상처 위로 피가 배어난 것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이 상처가 아이에게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선생님! 괜찮아요?”
뒤에서 아이들을 보면서 오던 연경도 놀라서 다가왔다. 모단은 얼른 웃어 보였다.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툭툭 털고 일어선 모단이 동후를 다독여 주었다.
“계단에서 차례를 지키지 않고 뛰면 이렇게 넘어지고 다칠 수 있어서 위험해. 얘들아, 다시 짝꿍 손 잡고 예쁘게 잘 서보자.”
놀라 눈이 댕그래졌던 아이들이 얼른 자리를 찾았다.
옥상 놀이터로 올려 보내고, 모단은 연경에게 눈짓을 했다.
“저 잠깐 내려가서 밴드만 붙이고 와도 될까요?”
“그럼요. 천천히 다녀와요.”
계단을 내려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는데 길쭉한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샴푸인지 향수인지, 익숙한 향이 코끝을 훅 스쳤다.
“다친 데 좀 봐요.”
견이 모단의 손목을 잡고 살짝 옆으로 틀었다. 팔에 핏자국이 덕지덕지했다.
“뭐예요? 갑자기 어디서…….”
“안 되겠다. 이리 와요.”
손을 잡은 채로 견이 걸음을 옮겼다. 회장실 쪽이다.
“잠깐만요, 어린이집 가서 해도!”
“2층까지 내려가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빠르잖아요. 어차피 할아버지 안 계셔서 아무도 없고.”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벌써 회장실까지 도착했다.
견은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모단을 앉혔다. 구급상자를 챙겨다 준 섭호는 바로 옆에 있는 비서실로 사라졌다.
“제가 할게요.”
“그냥 둬요. 내가 빨리 해줄 테니까. 얼른 올라가서 애들 봐야 되는데 싶어서 마음 급한 거 다 알아요.”
마주 앉은 견이 구급상자를 열고 이것저것 꺼냈다.
소독약에 적신 거즈로 상처를 가볍게 닦아내는데, 너무 따가워서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아으, 아……!”
오만상을 찡그리고 몸을 비비 트는 모단을 본 견이 한마디 했다.
“아프면 울어도 돼요. 애들한테 선생님도 울보라고 소문내게.”
말은 농담조인데, 표정은 꼭 제가 다친 것처럼 심각했다.
연고를 얹은 면봉이 상처 위를 조심조심 스쳤다.
움찔움찔하던 모단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만져도 감촉도 느껴지지 않을 것처럼 가느다란 속눈썹 아래, 보일 듯 말 듯한 눈동자가 제 살갗을 찬찬히 더듬고 있다.
세심한 손길과는 달리 눈썹 사이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금 얼마나 제게 집중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모단은 흠칫 고개를 틀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견도 멈칫했다.
“아파요?”
대답 대신 고개를 젓는 모단을 본 견은 다행이라는 듯 웃고는 거즈붕대를 꺼냈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모단은 회장실 안을 둘러보았다.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사무실을 상상했는데 검소하다 못해 썰렁해 보였다.
지금 있는 곳이 응접실인 듯, 안쪽에 회장실과 비서실이 따로 있었다.
손님을 맞는 곳에 소파와 테이블 정도만 갖춰둔 걸 보니 회장실이라고 적힌 문 너머도 눈 튀어나오게 화려할 것 같진 않았다.
“다 됐어요.”
어느새 상처가 꼼꼼하게 덮였다. 모단은 걷고 있던 셔츠 소매를 조심조심 내렸다.
“고마워요.”
“옷이 안 닿는 게 편하지 않겠어요?”
“조그만 밴드도 아니고 이렇게 큰 붕대를 하고 있으면 애들이 겁먹을지도 몰라요. 특히 동후는 저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할 것 같고요.”
견의 눈빛이 혀끝에 닿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그러다 비죽 매서워졌다.
“하여간 동후 그 녀석은 초은이 성격 알면서 꼭 그렇게 약을 올리고…….”
뜨끔한 견이 얼른 입을 닫았다.
모단은 잘못 들었나 하는 눈으로 되물었다.
“애들 이름도 아세요?”
“아, 아까 들었어요.”
“방금 성격이라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랬나요? 모르겠네. 둘 다 장난기가 있어 보여서.”
견이 구급상자를 덮었다.
“얼른 가봐요. 흉터 안 남게 조심하고.”
“네, 고마워요.”
모단은 얼른 일어나 회장실을 나섰다.
문 열고 나오기 전 주위를 살폈을 땐 아무도 없었는데, 몇 걸음 떼자마자 뚜벅뚜벅 소리가 들렸다. 저 앞에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어디 숨을까 했던 모단은 그게 더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옆을 지나치기 전에 묵례를 했다.
회장실 외에 다른 사무실이 없는 15층에서 앞치마 입은 여자와 맞닥뜨린 두 남자, 블랑아이의 변진상 대표와 김광남 과장은 얼결에 인사를 받았다.
“누구지?”
“글쎄요.”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는 그녀를 돌아보고 갸웃했으나, 바로 관심을 거뒀다.
“참, 대표님. 지난번에 드린 말벌주는 다 드셨습니까? 장인어른께서 벌집을 통으로 따다가 직접 담그신 거라 웬만한 보약보다 효과가 좋을 겁니다.”
“음. 집사람이 무릎이 안 좋은데 아침저녁으로 한 잔씩 마시니까 괜찮은 것 같다고 하네.”
“아이고, 다행입니다. 제가 다음에 더 좋은 걸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때 회장실 문이 열렸다.
섭호와 함께 나오던 견이 변진상과 김광남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백 군.”
뻣뻣하기 짝이 없는 김광남의 인사를 들은 섭호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대표님, 하면서 누구보다 깍듯하던 호칭은 대표 자리에서 내려오자마자 백견 씨가 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백 군이 되었다.
변진상이 입을 실쭉거렸다.
“요새 회사에 매일 들락거린다던 소문이 사실일 줄이야.”
“그런 소문이 도나요?”
견이 심상히 맞받았다.
“퇴근 전까지 웬만하면 대표실 밖으로 안 나오시고 사내식당은 입에 맞지 않아 밖에서만 드신다는 변 대표님까지 들으실 정도면 회사 사람 거의 다 안다고 봐도 무방하겠네요.”
변진상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김광남이 얼른 끼어들었다.
“사원도 아닌 사람이 멋대로 회사를 드나드는 게 썩 보기 좋지는 않습니다만.”
“사원은 아니지만 얼굴이 곧 신분증 아닙니까. 자리는 없어졌어도 애사심은 여전해서요. 우리 회사에 이렇게 좋은 복지 제도가 있으니 알차게 활용하시라고 솔선수범하는 겁니다.”
변진상과 김광남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사원 가족도 공짜로 헬스장 이용할 수 있고 외부인도 사원 동반하에 식권 구매해서 사내식당 이용 가능하고. 1층 카페테리아는 원래 외부인도 들어올 수 있는 곳이고. 여긴 우리 할아버지 보러 온 거고.”
견이 한 손으로 턱을 쓸었다.
“아, 회장실에 오는 게 거슬리셨나 보구나. 죄송합니다. 워낙 예쁨 받으면서 오냐오냐 자란 탓에 걸핏하면 할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러네요.”
변진상이 헛기침을 했다.
백견이 오냐오냐 자라 제멋대로라는 말은 그가 틈만 나면 주위에 흘려대는 말이었다.
“하고 싶은 건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은 보고 살아야죠. 안 그래요?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지 알고.”
견이 철없는 아이처럼 히죽 웃었다.
“저 위에 있다가 뚝 떨어질 수도 있고.”
변진상을 뚫어져라 보던 시선이 김광남에게로 옮겨갔다.
“내일 여기에 없을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닙니까.”
아슬아슬한 침묵이 흘렀다.
변진상의 잇새에서 끄응, 하는 침음이 새어 나왔다. 와인 상자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있던 손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지금 할아버지 안 계시는데. 그거 혹시 할아버지 드릴 거면 대신 전해 드릴까요?”
“그럴 것까지야.”
“넣어두신다니 다행이네요. 할아버지 요새 와인 안 드세요. 손주랑 위스키 마시는 재미에 푹 빠지셔서.”
소문난 와인 애호가인 백 회장을 위해 귀한 와인을 구해 온 변진상의 눈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그럼, 다음 주주총회 때 뵙겠습니다.”
견이 먼저 까닥 고개를 숙였다.
어흠, 소리를 흘린 변진상이 먼저 몸을 돌렸고, 김광남도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견이 혀끝으로 입안을 느리게 훑었다.
“……건방진 새끼.”
낮게 욕을 뱉은 변진상이 들고 있던 와인을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김광남이 얼른 받아 들었다.
연신 뒤를 흘금대는 김광남을 본 변진상의 입가에 노골적인 경멸의 빛이 스쳤다.
“왜, 그래도 회장 손주라고 겁나나?”
“아유, 아니, 아닙니다!”
김광남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겁이 난다기보다는 신경이 좀 쓰인다, 그런 거죠. 요새 회사에 와서 버티고 있는 게 다시 업무에 복귀하려고 그러는 거란 말도 있고 해서…….”
“가만 보면 김 과장, 항상 고생이 많아.”
“예?”
“한 줄에만 죽자사자 매달려 있어도 모자랄 판에, 틈만 나면 어디 더 튼튼한 줄 없나 간 보느라 말이야.”
“아이고, 그게 무슨!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김광남은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변진상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직도 모르겠나? 백주승 대표하고 백지협 이사한테만 잘하면 돼.”
희명리조트를 맡고 있는 백주승 대표는 백 회장의 차남이자 지협의 아버지였다.
“백견이 부모가 있어, 변변한 제 사람이 있어? 그럴듯한 처가라도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정신 제대로 박힌 집안이라면 굳이 백견을 사위 삼으려고 들진 않겠지. 백 회장 총애쯤이야 영감 돌아가시면 끝이고.”
변진상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백주승 대표가 아무리 백견을 자식처럼 여긴다 해도 능력 있는 아들이 조카한테 밀리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그거야 그렇겠지요.”
“백지협 이사도 마찬가지야. 어렸을 때부터 우애가 남달랐다고는 하지만, 글쎄. 지금도 그럴까? 약혼 깨지기 전이라면 모를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것까진 알 것 없고.”
변진상의 입가에 야비한 웃음이 떠올랐다.
“돈은 피보다 진한 법이지. 제까짓 게 아무리 날뛰어봤자 다 쓰러져 가는 울타리 안에 있는 놈일 뿐이야.”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 와인, 적당한 때 봐서 백주승 대표한테 갖다 줘.”
“예.”
“참, 괜찮은 청소업체 아는 데 있나? 일요일에 우리 딸이 이사를 하는데 애가 바빠서 아직도 집을 못 치웠다지 뭐야.”
“아유, 비싸게 사람 쓰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제가 가서 도와드리겠습니다. 토요일에 시간 되는 직원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쓰나.”
“괜찮습니다. 대표님 일이 제 일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15층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엘리베이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화장실 앞, 안쪽에 숨어 있던 모단이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휘 둘러보고, 저 멀리 회장실 쪽을 본 모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온 김에 화장실에 들렀다가 올라가려고 한 건데, 아까 그 남자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는 바람에 나오지 못했다.
아까 마주쳤을 때부터 일개 직원이 15층에서 알짱거리는 걸 수상해하는 눈치였는데 또 눈에 띄면 안 되겠다 싶어서.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저렇게 목소리도 안 낮추고 떠들어? 들어봤자 겁날 거 없다는 거잖아.’
지협의 약혼이 깨졌다는 말도 조금은 충격이었으나, 그에 대한 생각은 깊게 해볼 겨를이 없었다.
뜻 모를 화가 치밀어 부글부글 끓었다가, 이내 먹먹해졌다.
다친 팔을 감싸 쥐고 얼마간 그 자리에 서 있던 모단은 열없이 몸을 돌렸다.
‘모르는 척하자. 위로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이런 걸 누가 봤다는 것 자체로 더 비참해질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