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네가 먼저 반말했잖아
2017.08.09.
그날 저녁, 집에 가는 길에 견은 일부러 2층으로 향했다. 혹시 모단이 아이들을 배웅하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다른 데도 아니고 얼굴에 멍이 들어서……!”
어린이집 앞이 소란스러웠다. 한 여자가 고함을 치고 있었다. 옆에 동후가 서 있는 걸 보니 동후의 엄마인 듯했다.
그 앞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모단을 본 견이 우뚝 멈춰 섰다.
“여기 빨개진 거 보세요. 얼마나 아팠겠냐구!”
동후의 뺨은 얼핏 봐선 잘 모를 만큼 발그스름했다. 아까 떨어지며 안길 때 모단의 품에 조금 세게 부딪혔지 싶었다.
“게다가 뭐라고요? 계단에서 떨어질 뻔했다고요? 더 심하게 다칠 수도 있었다는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모단이 거듭 고개를 숙였다. 동후가 엄마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엄마아. 선생님한테 화내지 마. 선생님이 나 안아줬단 말이야!”
“너는 가만히 있어봐!”
동후의 팔을 뿌리친 여자가 모단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아니, 애를 얼마나 건성으로 봤으면 이런 일이 생겨요? 아무리 새로 온 선생님이라지만 너무 서툰 거 아니에요? 선생님, 아직 결혼 안 하셨죠? 애를 낳아봤어야 뭘 알지!”
보다 못한 연경이 한마디 했다.
“동후 어머니, 좀 진정하시고요. 제가 옆에서 봤는데 아이들끼리 장난치다가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어요. 그나마 정 선생님께서 잘 대처하셔서…….”
“뭐라고요? 애들끼리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예요? 무슨 말을 그렇게 무책임하게 하시죠?”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면 뭔데요! 같이 장난친 애는 또 누구예요? 걔 때문에 우리 동후 다칠 뻔한 건가요? 누구죠?”
모단이 얼른 나섰다.
“제가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한 탓이에요, 어머니. 앞으로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할게요. 동후 뺨에 난 상처도 완전히 나을 때까지 원에서 잘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구요!”
훌쩍이는 동후를 본 모단이 손을 뻗어 다독여 주려는데, 동후 엄마가 차게 밀어내고는 동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필 다친 팔을 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린 순간, 동후 엄마가 눈을 부릅떴다.
“지금 대놓고 기분 나쁜 티 내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그게…….”
“으아앙! 엄마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결국 동후의 울음이 터졌다. 모단은 소매를 잡았던 손을 내렸다.
원장이 급히 밖으로 나왔다.
“동후 어머님, 시간 괜찮으시면 안으로 잠깐 들어오셔서 말씀 나누시겠어요?”
동후 엄마의 팔을 잡은 원장이 모단에게 나머지는 본인이 해결하겠다는 눈짓을 보냈다.
모단을 노려본 엄마가 동후의 손을 꽉 움켜쥐고는 원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이를 데리러 왔던 다른 엄마가 걱정스레 물었다. 모단은 환히 웃었다.
“그럼요, 어머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금방 지율이 데리고 나올게요.”
문 안으로 사라지는 모단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견은 몸을 돌렸다.
“가자, 섭호야.”
견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는 척하자. 위로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이런 걸 누가 봤다는 것 자체로 더 비참해질 수도 있으니까.’
***
“휴우…….”
길게 기지개를 켠 모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한 지 몇 시간이 지났음에도 속에 얹힌 게 풀어지질 않았다.
어쨌든 잘 돌보지 못한 책임이 있는 건 사실인 데다, 제 자식이 다쳤으니 순간 이성을 잃을 수도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려 해도 기분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애 대충 본다는 말만 안 했어도. 그렇게 못 믿으면서 애를 어떻게 맡기시는지.”
다시금 한숨을 흘린 모단이 이제껏 만지작거리던 것을 가방 안에 넣었다. 동후가 좋아하는 캐릭터 밴드와 상처연고에, 엄마에게 드리는 쪽지까지 넣어 포장한 거였다.
“술 땡긴다.”
이불 뒤집어쓰고 푹 자고 싶은 마음과, 시원하게 한잔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전화가 왔다.
백견이다.
여보세요, 하자마자 백견스러운 말이 넘어왔다.
[나 정모단 씨네 동네 왔다가 길 잃어버렸어요.]
“네. 수고하세요.”
[뭘 맨날 수고하래. 우리 집 가는 길 좀 가르쳐 줘요.]
“내비게이션 돌려보세요.”
[고장 났어요. 안 났어도 낼 예정이에요.]
“애초에 우리 동네는 왜 왔는데요?”
[정모단 씨가 오라고 했잖아요. 아까 약 발라준 거 고마워서 술 한잔 사고 싶다고.]
“내가 언제요? 꿈꿨어요?”
[아, 꿈이었구나. 어쩐지.]
‘포기하면 편해’라는 명언이 모단의 머릿속을 뎅 울렸다.
이 인간 특유의 귀신 같은 화법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들어봤자 속만 터질 뿐이다. 오히려 평범한 소릴 하면 어디 아프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오늘 기분 더러운 일이 있어서 같이 술 마시자고 하려고 왔어요.]
아까 15층에서 들은 말을 떠올린 모단은 슬며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나랑 언제부터 술친구였느냐고 한 소리 하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은 매정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보통은 오기 전에 연락을 먼저 하죠.”
[안 받을까 봐서요. 내가 워낙 보통 이상이기도 하고.]
정말 밖인지, 수화기 너머가 약간 소란스러웠다.
[집은 못 찾겠는데 맘에 드는 포장마차는 하나 찾았어요. 나와요.]
“뭐요?”
[오빠 믿지?]
“싸우자는 거죠?”
[포장마차 이름 읽은 거예요. 엄청 믿음직스러워 보이는데 같이 마셔요.]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린 모단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거기보다 그 옆에 ‘이모네 닭발’이 더 맛있는데…….”
순간 조용해졌다가,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모단은 조용히 제 입술을 쥐어뜯었다.
웃음 끝에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이 뒤섞였다.
[……미치겠다.]
“아니, 그건 그냥 그렇다는 얘기고…….”
[알았어요. 이모네서 닭발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뚝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마시라는 신의 계시로구만.”
쯔읍, 입맛을 다신 모단은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럭저럭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견은 허름한 포장마차 구석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가장 눈에 안 띄는 자리인데도 희한하게 눈길이 갔다.
이런 데 처음 와본 것처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편하게 긴 다리 쭉 뻗고 앉아 소주도 닭발도 잘 먹는데도 그랬다.
아무도 없었다면 시선이 더 쏠렸을 텐데, 시끌시끌한 중년 손님들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뜬금없이 마주 앉게 된 남녀 사이의 어색함을 얼마간 덜어주는 고마운 소음이다.
“저기요, 백견 씨.”
“네.”
“백견 씨 정도면요, 일반인들은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럭셔리한 룸에서 값비싼 위스키 같은 거 마시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나 정도면 그래도 되는데 그런 무리들이 나를 안 껴주네. 그런 데서 망나니짓이라도 해보고 견차반 소릴 들었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견이 소주잔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손가락이 유난히 길어서인지 잔이 신기할 만큼 작아 보였다.
“위스키는 좋아하는데 룸이나 바 같은 데는 싫어해요. 특히 일반적인 곳 말고 폐쇄된 곳은 나부터도 뭔가 켕길 때 찾거든요. 내가 이 여자를 만났다는 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할 때나 그런 데서 만났…….”
아직 소주는 한 병도 다 줄지 않았는데 말실수부터 터졌다. 견은 신속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백견 씨 사생활을 왜 저한테 사과하세요?”
“사과하고 싶어서요. 뭐 다른 생각 하신 건 아니죠? 호르몬시터인가 싶어서 만나보고 아니면 바로 아웃이었어요. 또 보기는커녕 집에도 안 데려다줬어요. 섭호가 고생 많이 했죠.”
늘 고생 많아 보이던 위 비서님을 떠올린 모단은 인정한다는 의미로 술잔을 내밀었다.
환해진 견이 냉큼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어지간한 바에서 파는 것보다 우리 집에 모아놓은 위스키들이 더 훌륭해요.”
“집에요?”
“아니, 집에 가잔 말 아니고요! 정말 아니에요!”
가자고 하면 누가 가기나 하나.
아무 생각 없이 되물은 건데 혼자 펄쩍 뛴다.
“아쉽지만 우리 집은 안 돼요. 섭호랑 같이 살거든요.”
“뭐가 안 되고 뭐가 아쉽다는 건데요? 나 참.”
모단이 술을 홀짝 털어 넣었다.
기분 안 좋을 때 술을 마시면 더 빨리 올라온다는 말이 사실인지, 벌써 알딸딸했다.
“하여간 백견 씨는 참 특이해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으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봐요.”
“아이 같아요. 스스럼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게. 보통 어른들은 따질 게 많아서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아, 백견 씨는 무서운 게 없어서 그런가?”
“나도 무서운 거 있어요.”
“뭐요?”
“정모단 씨요.”
저렇게 눈부터 접고 실실 웃고 있으면서 뭐가 무섭다는 거야.
모단은 초점을 맞추듯 견의 눈 아래 있는 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몸에 밴 거부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려 했다. 급히 술을 삼켜 속을 짓눌렀다.
“난 백견 씨 안 무서워요.”
“응. 무서워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럼 난 뭐 무섭고 나쁜 사람이고요?”
“나 이렇게 만들어놓고 책임 안 지면 나쁜 사람이죠.”
견이 플라스틱 테이블을 젓가락으로 탕탕 두드렸다.
“나쁜 사람!”
“벌써 취했어요? 동네 창피하게!”
반쯤 몸을 일으킨 모단이 견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포장마차 주인도, 다른 손님들도 힐끔거렸으나 큰 관심은 없는 듯했다. 본인들만 모를 뿐, 누가 봐도 연인끼리 도란대는 걸로 보였기에.
“어쨌든, 뻔한 얘길 아닌 척 돌려 하는 사람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뭔 꿍꿍이인지 너무 잘 보이니까 오히려 편할 때도 있달까.”
“칭찬이네요?”
“칭찬이라기보다는 적응했다는 거죠.”
모단이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새 술을 따라주며 넌지시 물었다.
“기분 더러운 일이라는 건 뭐였는데요?”
제 잔에도 술을 따르려는데, 견이 병을 가져갔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별거 아니에요. 회사에서 싫어하는 사람이랑 마주쳤어요.”
“얼마나 재수 없는 인간이면 마주치기만 했는데 기분이 더러워졌을까.”
덩달아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닭발을 오독오독 씹는 모단을 보며, 견은 한참을 피식거렸다.
“그래서 내일부턴 회사 안 나오려고요. 영영 안 오겠다는 건 아니고 당분간만. 더 골 때리게 마주치기 위한 일종의 포석이랄까.”
모단이 젓가락이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사정은 몰라도, 방금 그 말속에서 각목으로 맞고 칼침으로 갚아주겠다는 깡패정신 같은 게 느껴져서.
안심했다는 건 걱정했었다는 것과 같은 거라는 것까지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좋겠네요. 안 나오고 싶을 때 안 나올 수 있어서.”
“정모단 씨도 어린이집 안 가고 싶을 때가 있어요?”
“직장인이라면 한 번씩은 있잖아요. 때려치우고 싶다, 그런 생각 들 때. 솔직히 오늘 좀 그랬어요.”
술기운이 올라서일까, 어렵지 않게 얘기가 나왔다.
“근데 애들 때문에 관두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몇몇 어른들 때문에 관두고 싶었지.”
“관두지 마요. 엄마가 그만두는 게 어디 있어요? 진짜 엄마가 일하는 동안에는 선생님이 엄마잖아요.”
모단이 멈칫했다.
엄마가 일하는 동안에는 선생님이 엄마라는 말은 원에서 제가 다른 아이에게 했던 말이다. 그때 무탈이가 어김없이 제 옆을 맴돌고 있었으나, 그것까지 기억날 리가 없었다.
분위기를 가늠해 보던 견이 입을 뗐다.
“혹시 오늘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뭘요?”
“그때 리조트에서요.”
누구랑 왔는지, 왜 왔는지. 많은 물음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견은 접시를 콕콕 찍는 모단의 젓가락 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쩌면 오늘은 말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기껏 쌓은 뭔가를 또 바스라뜨릴지도 모른다는 걱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누굴 좀 만나러 갔었어요.”
“네?”
“여행 같은 건 아니었어요. 혼자 간 것도 맞아요. 제가 좀 조숙했거든요.”
술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아니지, 이모네 닭발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이거 맛있게 매워서 술이 자꾸 들어간다고 그랬으니까.
“어떤 어른을 만나뵙고 어려운 부탁을 드려야 했거든요. 근데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서 막무가내로 거기까지 따라간 거예요. 그 리조트에서 하는 무슨 행사에 참석하신다고 들어서.”
‘그게 내 생일파티였던 거라고?’
그 많은 손님들 중 누굴 만나러 왔던 건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혼자서 거기 있었던 것과 부딪히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진 것도 얼마간 이해가 갔다.
‘울고 있었던 걸로 봐서, 어려운 부탁이란 건…….’
“여기까지.”
견의 생각이 미처 다 정리되기도 전에 모단이 먼저 말을 맺어버렸다.
“다음 편은 언제 계속되는데요?”
“내 마음 내킬 때요.”
모단은 잔을 들었다. 견도 바싹 타는 입안에 술을 부었다.
이제는 견도 그녀의 선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화는 낼지언정 그럭저럭 받아줄 때와, 더 넘어가면 안 되는 때가 있다는 걸.
한참을 망설이다가, 견은 가장 묻고 싶었던 것 한 가지만 더 묻기로 했다.
“혹시…… 그때 나 때문에 정모단 씨의 인생이 안 좋은 쪽으로 바뀌었나요?”
모단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깐 동안, 견은 온몸의 피가 마르는 것만 같았다.
“아뇨. 잠시 안 좋은 쪽으로 바뀌긴 했지만 백견 씨 탓은 전혀 아니에요.”
시원스런 대답에서 진심이 전해졌다. 견은 어쩐지 코끝이 살짝 찡해지려고 했다.
“이제 보니 굴러온 호박을 내 발로 찬 거였네요. 그때 내가 백견 씨에게 뭔가 의미가 있는 사람이란 걸 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왜요?”
“그땐 어리고 철도 없었으니까 대놓고 협박하면서 돈 달라고 할 수 있었을 것 같거든요.”
“돈 필요해요?”
“지금은 필요 없어요.”
견의 미간에 슬쩍 힘이 들어갔다.
“이젠 나한테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네. 자존심 때문에 말 못 하는 게 아니고 정말 없어요. 난 이제 어른의 도움 따위 필요 없는 어른이니까.”
“필요한 것도 없는데 왜 내 말 다 들어주고 같이 있어줘요?”
투정이라기엔 묵직하고, 주정이라기엔 진지한 말이 튀어나왔다.
“필요한 게 없는데도 옆에 있는 사람은 섭호밖에 없었어요. 다들 나한테 바라는 게 있었다고요. 원하는 걸 가지면 조용히 가고, 안 주면 욕하면서 가고.”
조금은 날카로운 눈빛이 모단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뭐라도 바란다고 해봐요. 죽을 때까지 안 주게.”
“삐뚤어진 것 봐. 어휴.”
모단은 술이나 마셔요, 하는 손짓을 했다.
“나도 생각해 봤어요. 솔직히 난 백견 씨를 평생 안 봐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데, 왜 계속 받아주는가.”
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래서 이제부터 안 받아주기로 했다, 이게 최후의 만찬이다, 왠지 그런 결론이 날 것 같아서.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뜻밖의 말들이 흘러나왔다.
“내 문제예요. 눈치 보고 자란 거 티 내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 기분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에 보인다고. 그걸 맞춰줘야 미움받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남아서…….”
모단의 눈썹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축 처졌다.
“그러지 말자, 그럴 필요 없다, 안 그래도 된다. 계속 생각하면서 의식적으로 안 그러려고 하는데 결국은 그러고 나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죠.”
처음 보는, 잘못 건드리면 툭 부스러질 듯한 표정이다.
“백견 씨가 한 말이 진짜일 가능성이 2프로고 아닐 가능성이 98프로라고 해도, 내가 그 2프로를 무시해서 남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걸 견딜 수가 없단 말이에요. 미움받아도 상관없는데, 왜!”
카랑하니 높아졌던 모단의 목소리가 볼륨 버튼을 확 끌어내린 듯 낮아졌다.
“내가 유난히 약한 게 딱 세 가지 있어요. 어린 사람, 아픈 사람, 그리고…….”
견은 홀린 듯 그녀 쪽으로 몸을 내밀고 귀를 기울였다.
뜸 들이듯 한 잔 마신 모단이 손등으로 제 입가를 슥 훑고는 중얼거렸다.
“잘생긴 사람.”
어리고 아프고 잘생기고, 다 가진 건가.
그게 바로 정모단표 주사의 시작임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견은 한참 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다.
얼마 후, 거짓말처럼 모단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어어?”
“요즘 애들 다 귀한 거 알죠. 다 귀한 집 자식인 거 나도 안다고.”
“잠깐, 잠깐만요. 진짜 우는 거예요? 얘기가 갑자기 그리로 튀고?”
“근데 나도 우리 엄마한테는 귀한 자식이란 말이야!”
“뭔 눈물이 이렇게 가짜처럼 펑펑 쏟아져?”
어쩔 줄 몰라 하던 견이 냅킨을 한 주먹 뽑아 모단에게 건넸다. 모단이 팽 하고 코를 풀었다.
“물론 애가 다치는 것보다는 내가 다치는 게 백 번 낫지만. 이거 봐봐, 이거. 이거를 아까 딱 보여줄라 그랬는데!”
소매를 올리려다가 상처가 쓸렸는지 모단이 인상을 썼다.
그녀가 대뜸 지퍼를 내리고는 겉옷을 벗었다.
“아, 거참!”
견이 몸을 뒤로 물리며 이마를 짚은 손으로 눈을 반쯤 가렸다.
헐렁한 반팔 차림이 된 모단이 다친 팔을 들어 보였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했다.
“이거 우리 엄마한테는 비밀. 우리 엄마 나 다치고 아프고 그러면 난리 난다고.”
입에 댔던 손으로 코를 문지르고 훌쩍인 모단이 언제 울었냐는 듯 방긋 웃었다.
“시원하다. 진즉 벗을 걸.”
빨개진 눈가와 반창고를 붙인 팔을 번갈아 보던 견의 입가에 푸스스 웃음이 번졌다.
“많이 아팠겠네.”
“네. 더럽게 아팠어요.”
“약은 누가 발라줬고?”
“네가요.”
견이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키득거렸다.
“나보고 안 낳아봐서 모른다고 그러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따지면 의사는 아픈 사람이 하고 수의사는 개가 하고 장의사는 죽은 사람이 하나? 그래, 안 그래?”
“그래.”
꼬박꼬박 잘 대답해 주는 게 맘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모단이 불쑥 인상을 썼다.
“잠깐. 근데 너 아까부터 왜 반말해?”
견이 테이블에 한 팔을 올리고 느른하게 턱을 괴었다.
“네가 먼저 반말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