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꽃처럼, 계절처럼, 달처럼
2017.08.13.
“네가 먼저 반말했잖아.”
깜박.
견의 눈꺼풀이 내리 닫혔다 올라왔다.
달싹.
모단의 입술이 오물대다가 열렸다.
“그랬네요.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괜찮습니다.”
견의 눈가에 잔뜩 흩뿌려진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좀처럼 가실 것 같지 않았다.
“근데 정모단 씨는 왜 유아교사가 됐어요? 그렇게 힘든데.”
“이렇게 힘들 줄 몰랐으니까 됐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을 들었다.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애들을 좋아했어요.”
“그랬어요?”
“예쁘잖아요. 떼쓰고 말 안 들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사랑스럽고.”
“그렇죠. 예쁘고 사랑스럽고.”
“어른들 상대하는 게 훨씬 피곤해요. 애들은 심술이나 고집은 있어도 악의는 없거든요. 순수해.”
“순수하고.”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으면 진즉에 때려치웠을 거예요. 세상에 돈 벌 수 있는 일이 그거 하나뿐인가.”
“맞아요. 뭘 해도 잘했을 것 같아요.”
따뜻한 시선이 모단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맞다. 얼마 전에 무탈이라는 아이가 왔었거든요?”
견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너무너무 똘똘하고 귀여운 아이인데…… 맞다. 위 비서님이 데리고 오셨었지. 혹시 백견 씨도 무탈이 알아요?”
견의 눈동자가 스르르 다른 데로 굴러갔다.
“……얼굴이랑 이름 정도만요.”
“그래요? 난 같은 백씨인 데다 여기 있는 점도 똑같아서 먼 친척인가 했는데.”
“아닙니다.”
“그렇구나.”
모단이 두 손에 턱을 받쳤다. 세운 팔이 낭창거렸다.
“보고 싶다, 우리 무탈이. 벌써 한 달 지났으니까 곧 오겠다.”
눈까지 감고 중얼거린다.
모단의 미소를 복잡한 눈으로 보던 견이 마지막 잔을 비우고는 몸을 일으켰다.
“이만 일어나죠.”
모단은 순순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제법 똑바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바지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냈다.
“나 술 얻어 마시러 온 거 아닌데요.”
견이 막았으나, 손등만 찰싹 얻어맞았다.
“이런 데서 블랙카드 같은 거 내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현금도 충분히 있…….”
“스읏. 그냥 잘 먹었습니다, 하세요.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잘 먹었습니다.”
모단은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견은 모단에게 인사를 했다.
포장마차에서 나오자마자 견이 챙겨 나온 모단의 겉옷을 어깨에 둘러주었다.
“자꾸 흘리고 다니는데.”
“맞다. 이놈의 건망증. 고맙습니다.”
대강 옷을 걸쳐 입은 모단은 반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견을 알면서도 딱히 의식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필름이 끊길 정도는 아닌데 둥실 떠 있는, 기분 좋게 취한 상태다.
“와, 벚꽃이 언제 이렇게 피었지? 백견 씨는 알고 있었어요?”
“출퇴근하면서 보긴 봤어요. 아무 생각도 안 들었지만.”
“메말랐네, 사람이.”
“안 메말랐어요. 지금은 막 두근두근하거든.”
모단이 걸음을 멈췄다. 견도 덩달아 섰다.
가로등 바로 옆에 있는 벚꽃나무를 올려다보던 모단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언젠가 본의 아니게 만져 본 적 있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정말.”
작은 손이 심장을 덮은 순간, 견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예기치 못한 전율이 전신을 훑었다.
“두근두근하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이 멀어졌다. 원망스러울 만큼 담백했다.
“하긴, 백견 씨는 원래 거짓말 안 하죠? 거짓말 같은 얘기는 많이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견을 내버려 두고, 모단은 다시 발을 뗐다.
“올해도 제대로 된 벚꽃 구경 한 번 못 해보나 했는데 보긴 보는구나. 예쁘다.”
“그러게요.”
간신히 말문을 연 견이 뻐근해진 가슴에 손을 짚고 중얼거렸다.
“심장 터지게 예쁘네.”
집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견이 불렀다.
“정모단 씨.”
모단은 돌아보았다.
뭉근한 봄 냄새가 감도는 골목 위로 달빛이 사그라졌다.
자디잔 꽃잎이 허공을 구르며 뒤채다 견의 머리 위에 얹혔다. 저만큼이나 보드라워 보이는 머리카락 사이를 비비적거리다가 마지못해 날려갔다.
“오늘의 내가 진짜 나라는 거 믿어줄 수 있어요?”
“무슨 말이에요?”
다시 바람이 불었다. 땅에 떨어져 있던 꽃잎들이 들썩들썩 흩날리며 마주 선 두 발 사이를 휘감았다.
“곧 보름이잖아요.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몰라요.”
모단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둥그스름한 모양새를 거의 다 갖춘 달이 시리게 빛나고 있다.
다시 고개를 내리려는데 낯선 온기가 손을 감쌌다.
“아프고, 못되게 굴고, 볼품없이 작은 나 말고…….”
모단의 눈이 커졌다.
달만큼, 꽃잎만큼 엷고 투명해 보이는 얼굴이 제 위에 머물고 있었다.
“당신보다 이만큼이나 큰 내가 진짜예요.”
알 수 없는 말, 알 수 없는 표정.
술이 깨는 것 같기도, 더 취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지금처럼 내 옆에 있어주면, 난 계속 진짜로 있을 수 있어요.”
왜였을까.
이대로 꼭 안기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빈틈없이 감싸 쥐었던 손은 그대로 풀어졌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두어 걸음 물러선 견이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장난스런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남녀 사이의 일은 함부로 장담하지 말라는 말이 있죠.”
한참 동안 서 있던 모단은 손을 두어 번 털어내고 눈가를 짚었다. 분명 차가운데 화끈거렸다.
벚꽃 따위 의식하는 게 아니었는데.
멋대로 찬란하다 순식간에 져 버릴 거, 관심도 주지 말아야 하는 건데.
‘내버려 두면 또 변할 거야.’
잠시 아름답다 시들어 버리는 꽃처럼,
언제 뜨거웠냐는 듯 쓸쓸히 시려지는 계절처럼,
매일이 달라 믿을 수 없는 달처럼.
***
“모단 쌤, 오늘은 왜 운동 안 왔어요?”
“미안해요. 늦잠 자서 지각할 뻔했어요.”
사실은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거의 자지 못했다는 게 맞겠다.
제가 어제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이 난다는 건 다행이나, 대체 그 말들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는 건 불행이었다.
“그러셨구나. 참, 오늘 백견도 안 왔더라고요.”
효림이 이런저런 수다를 늘어놓았다. 오늘부터 당분간 회사 안 올 거라던 말을 떠올린 모단은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효림이 교실로 돌아가고, 모단은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처럼 진동으로 바꾸고 서랍에 넣어두려는데 문자가 왔다.
견임을 확인하자마자 절로 헙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금요일에 나랑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달력을 보니 금요일이 보름이다.
‘근데 평일에 어떻게? 일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쩔 수가 없는데?’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또 문자가 왔다.
―퇴근할 때까지는 회사 근처에 있을게요. 아마 낮에는 별일 없겠지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지난번처럼 원으로 전화할게요. 이번엔 너무 놀라지 말아요.
‘그럼 퇴근하고 나서는 같이 있어야 한단 말이야? 어디서? 코피 터지기만 기다리면서 같이 있는 거 좀 이상하지 않나?’
또다시 마음을 들킨 듯한 답이 왔다.
―퇴근 후에 가야 하는 곳이나 특별히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없으면 불편하지 않을 만한 곳을 알아봐 둘게요.
“선생님.”
모단은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넣어두고 돌아보았다. 동후가 서 있었다.
“동후 왔어? 어디 보자.”
몸을 낮춘 모단이 동그란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제 안 빨갛네? 다행이다. 어제 깜짝 놀라서 무서운 꿈 꾸거나 하진 않았어?”
“네.”
동후가 가방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더니 쭈그리고 앉았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작은 캐릭터 밴드 하나가 나왔다.
“선생님, 내가 호오∼ 해줄게요.”
오물대는 입모양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다 나은 것 같았다. 마음에 그어졌던 상처까지도.
모단은 환히 웃었다.
“고마워, 동후야. 우리 동후가 최고다, 정말.”
***
금요일 저녁, 어린이집을 나선 모단은 회사와 집의 중간쯤에 있는 어느 북카페로 향했다.
표시를 따라 3층까지 올라갔는데, 문 앞에 < CLOSED >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간판을 다시 확인했으나 맞았다.
견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안에서 문이 열렸다.
“깜짝이야!”
“얼른 들어와요.”
모단은 견이 잡아주는 문 안으로 주춤주춤 들어섰다.
“어떻게 된 거예요?”
“사장님이 애인이랑 데이트 해본 지가 언젠지 까마득하다고 투덜거리시기에 놀러 갔다 오시라고 했어요.”
“예에?”
“가게 봐드린다고 했지 손님까지 받아준단 말은 안 했으니까.”
견이 다시 문을 닫고는 딸깍 잠갔다.
“오해하지 마세요. 안에서 손잡이만 돌리면 쉽게 열려요. 밖에서 못 들어오게 하려고 잠근 거예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나.”
견이 정말 자기 가게라도 되는 양 성큼성큼 들어가며 손짓했다.
“전세 냈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요. 사장님은 아마 꽃구경 실컷 하고 애인이랑 닭발에 소주까지 드시고 나서 오실 거예요. 누구처럼 옷 벗은 것도 까먹을 정도로 취하면 안 오실지도 모르고.”
쓸데없이 긴 뒷모습을 힘껏 째려본 모단이 가까운 자리로 향했다.
“이왕이면 창가에 앉아요. 가장 인기 있는 자리래요. 길 건너에 있는 공원 벚꽃길이 제대로 보여서.”
혹한 모단은 내려놓으려던 가방을 다시 들고 창가로 옮겼다. 창가 자리는 한 사람씩 나란히 앉을 수 있는 바 형식이었다.
‘정말로 사장이랑 아는 사이인 건가? 혹시 통째로 빌린 거 아냐?’
자연스럽게 내밀던 블랙카드가 떠올랐다. 모단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묻지를 말자.’
의자에 앉자 정말로 시야 가득 환한 벚꽃이 담겼다.
작게 감탄하는데, 앞에 커피잔이 놓였다.
“제대로 된 벚꽃 구경 한 번 못 해봤다고 아쉬워하지 말고 실컷 봐요.”
모단이 조금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견은 무릎 위에 담요까지 놓아주었다.
“오늘은 놀아달라고 안 보챌 테니까 편하게 하고 싶은 거 하고.”
그러고는 노트북이 있던 책상으로 돌아갔다.
눈만 깜박이던 모단은 주섬주섬 담요를 펴서 다리를 덮었다.
툭툭 던지는 말들은 평소와 같은데,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장난기가 한결 덜어진 것 같달까.
‘맞다. 예민해진다고 했지.’
무슨 일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노트북 양옆에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다. 한쪽은 본 것이고 다른 쪽은 확인하는 중인지, 서류 하나하나를 꼼꼼히 훑어보고 넘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진지하다 못해 차고 건조한 시선.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미하게 찡그린 눈썹.
오늘따라 더더욱 날카로워 보이는 콧날과 턱선.
웃음도 많고 표정도 많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엿보이는 팔뚝이며 단정하게 시계를 찬 손목, 기다란 손가락까지 시선을 미끄러뜨리던 모단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뭐 하는 거냐. 나야말로 이러다 뼈와 내장까지 볼 기세구만.’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찔렸다. 서둘러 앞에 꽂혀 있는 책 중에 한 권을 골라 들었다. 무난한 소설책이다.
‘전문서적이랑 아이들 그림책 말고 이런 책 본 지가 언제더라.’
책 한 장 넘기고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창밖에 흐드러진 꽃을 한 번 보고, 다시 책을 보았다.
의외로 여유롭고 괜찮은 금요일 저녁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재미있어요?”
“으악!”
어느새 책에 빠져들었던 모단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소스라쳤다.
“고개 한 번 안 들고 보네.”
바로 옆에 앉은 견이 테이블에 팔을 쭉 뻗고는 길게 엎드렸다.
“좀 쉬어야겠어요. 힘들어.”
모단은 책을 덮어 내려놓았다.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견이 눈만 들어 마주 보며 물었다.
“팔 다친 데는 좀 어때요?”
모단이 소매를 걷어 보여주었다. 상처를 덮은 거즈 위에 알록달록한 밴드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동후가 붙여준 거예요. 너무 귀엽죠?”
“다른 남자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걸 뭐 그리 자랑스럽게 보여주시나.”
“고작 일곱 살짜리한테 다른 남자라고 하면 안 부끄러워요?”
“난 그런 쪽으로는 한 점 부끄러움을 몰라요. 개도 수컷은 안아주지 마요.”
“개 같은 소리 하고 있으시네요.”
입을 비죽한 견이 베고 있던 팔을 접었다. 낮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많이 피곤한가 봐요.”
“네. 일하는 남자의 섹시함을 보여주려고 각 잡고 일했더니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파요. 근데 정모단 씨가 눈길 한 번 안 줘서 마음도 아파요.”
“입은 안 아프신가?”
견이 엎드린 채로 클클 웃었다.
말은 농담처럼 했지만, 안색이 썩 좋지는 않았다.
“피가 나면…… 많이 나요? 지혈을 해도 안 그치고 계속?”
“30분 정도? 일주일 동안 안 나는 게 어디예요.”
“아프진 않아요?”
“피 나는 거 자체가 아프진 않아요. 그전에 몸이 부대끼고 불편해서 힘든 거지.”
모단은 잠잠히 견을 바라보았다.
“난 여자들 월경하는 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고생도 아니고, 안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잖아요. 생리휴가 같은 거라도 맘 편히 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봐요. 일부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문제긴 하지만…….”
모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제 무릎에 올려두었던 담요를 견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놀란 듯 몸을 일으킨 견이 당황한 투로 중얼거렸다.
“뭐가 바뀐 것 같은데.”
“뭐가요? 안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 챙기는 거 맞잖아요. 가뜩이나 아프면 서러운데.”
“온갖 좋은 대접 다 받아봤지만 이렇게 감동적인 대접은 처음 받아봐요.”
“온갖 좋은 대접 다 받았다면서 뭐 이런 거에 감동받고 그래요? 쉬기나 하세요.”
견이 순순히 엎드리더니 눈을 감았다.
담요가 제법 큰 줄 알았는데, 넓은 어깨 위에 얹어놓으니 우스꽝스러울 만큼 작아 보였다. 그래도 견은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표정이었다.
“고마워요. 역시 정모단 씨는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네요.”
조금 까칠해 보이는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남에게 맞춰주기 싫은데 자꾸 해주게 된다는 거, 결국은 마음이 따뜻해서 그런 거잖아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에요. 난 남의 기분 같은 거 잘 몰라서 매번 실수를 하니까.”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배울 게 많은 여자라 더 좋아하게 되나 봐요.”
입뿐만 아니라 다른 데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점점 잠기운에 물드는 목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이느라고.
“아니, 근데…… 억울한 게…… 왜 맨날 나만 반하는 거지…….”
간지러운 여운, 짙은 침묵, 고른 숨소리.
모단은 짙은 속눈썹 아래 자리한 점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부르는 점.
이미 무의미해지기는 틀린 것 같았다.
저 점이, 저 점을 가진 남자가, 저 점을 가진 남자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분명 어떤 의미로든 남게 되리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담요를 덮은 어깨가 뒤척였다.
모단은 아까 보던 책을 얼른 다시 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라.”
부스스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모단은 독서에 몰두해서 못 들은 척 꼼짝도 하지 않았다.
“코피.”
“예? 정말요?!”
방금 못 들은 척한 게 무색할 만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견은 익숙한 동작으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반쯤 덮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봐 봐요.”
“어디요? 왜요?”
모단은 얼결에 그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꽃 제일 많이 핀 나무. 그 위에 달. 보여요?”
봄밤.
아마도 그림이었다면 그런 제목이 달렸을 것 같다. 창틀이 액자가 되어 고요한 풍경을 품고 있었다.
“나 보름달 완전 싫어하거든요. 근데 오늘은 처음으로.”
어깨에 묵직한 게 얹히며 은은한 향이 폴싹 날렸다.
“낭만적으로 보여서.”
덩치는 산만 한 남자가 연약한 척 제 어깨에 기대 있는 것을 본 모단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낭만 같은 소리 하네, 하는 눈을 한 그녀가 사정없이 견의 머리를 밀어냈다.
“코피 난 후에 때리면 된다고 했죠? 지금인가?”
“때리는 게 아니라 닿는 거라니까요. 불편하면 정모단 씨가 내 어깨에 기대도 되고.”
“방금 닿은 건 뭔데요? 한 번 더 밀어드려요? 아예 창밖으로 밀어드릴까?”
“나도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대체 얼마나 닿아야 효과가 있는 건지 모르니까 불안하잖아요. 최소한 지난번만큼은 닿아야 하지 않을까요?”
“또 깔아뭉개겠다고요?”
“에이, 그럼 큰일 나죠. 비슷하게 안는 정도만…… 아아, 빈혈…….”
“빈혈은 개뿔. 쓰러질 거면 혼자 바닥으로 쓰러지세요! 신고는 해드릴게.”
“냉정하고 치사하다.”
툭탁거리는 사이 시간이 흘러갔다.
견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며 말수가 줄어드나 싶더니, 급기야 벌떡 일어섰다.
“차에 좀 다녀올게요.”
“지금요? 갑자기?”
“절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줘요. 알았죠?”
급히 차 키를 챙긴 견이 가게를 빠져나갔다.
믿고 있지만,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아이로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숨은 거였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모단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코피 멎었네요?”
가게 복판에서 서성이고 있던 모단을 향해 견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손 씻고 온 거…… 으헙!”
그러고는 허리가 휘청할 만큼 세게 모단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