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32화 (32/86)

#32. 남자친구 중에 1등

2017.08.20.

“더블데이트 좋죠. 그런데…….”

모단이 꼭 잡은 해빛의 손을 보란 듯이 들어 보이며 견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 사람만 짝이 없네요.”

견의 얼굴 가득 충격과 배신이라는 말이 번졌다.

“정모단 씨, 누가 봐도 이쪽이 자연스럽지 않아요? 어차피 손 하나 남으니까 나도…….”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모단을 향해 내민 견의 손을 섭호가 스윽 잡았다. 그러고는 금지에게 눈짓을 했다.

“짝 없는 사람은 집에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미쳤어? 이 손 안 놔?”

“잡지 마! 섭호 오빠 손 잡지 말라고! 내 거야!”

“내가 잡았냐고! 나도 싫어!”

난리가 난 세 인간들을 지켜보던 모단의 미간에 시름이 가득 들어찼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해빛이 물었다.

“이모 친구들이야?”

“친구는 절대 아니고.”

그냥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입단속을 시켜봤자 조잘조잘 다 털어놓을 해빛이니, 우연히 만나 같이 논 걸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막상 해빛이가 ‘백견’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새윤도 은규도 뒤집어질 게 뻔했기에 가명을 쓰기로 했다.

“무탈이네 형은 키 큰 삼촌, 저 언니는 예쁜 언니라고 하자. 저기 저 삼촌은…….”

“존잘 삼촌.”

“어허.”

“아니아니, 잘생긴 삼촌!”

별명 짓기 놀이라도 하는 줄 안 건지, 냉큼 답을 한 해빛이 아직도 짝짓기 전쟁 중인 셋을 보고 웃기다며 까르륵거렸다.

모단은 조용히 뒷목을 주물렀다.

‘왠지 봐야 될 애가 더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야…….’

어디론가 사라졌던 금지가 캐릭터 머리띠 한 보따리를 들고 나타났다.

“보니까 다들 이거 하나씩 하고 있네. 우리도 하자. 해빛이부터 고를까? 해빛이는 어떤 게 제일 맘에 들어?”

“이거요!”

“그치그치! 너무 귀엽지! 언니도 해빛이가 이거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해빛이는 이거 하고, 언니는 이거.”

해빛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왕리본 머리띠를 씌워주고, 저는 토끼 머리띠를 쓴 금지가 모단을 돌아보았다.

“모단 언니는 뭐 하실래요?”

“난 이거요.”

“시크하게 안 한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이런 기회는 놓치지 않는 편이에요.”

까만 고양이 귀 머리띠를 한 모단을 본 견이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래 봤자 붉게 물든 부위가 너무 넓어 반의반도 가려지지 않았지만.

해빛이 불쑥 나섰다.

“키 큰 삼촌은 이거! 잘생긴 삼촌은 이거 하세요.”

“아니야, 해빛아.”

“우린 안 해도 돼, 해빛아.”

두 남자가 동시에 손을 내젓자, 해빛이 시무룩해졌다.

“안 하면 안 되는데…….”

급기야 울먹거리는 해빛을 본 모단이 인상을 썼다. 머리 위의 고양이 귀가 순간 살쾡이 귀로 돌변했다.

“오늘 해빛이 즐겁게 해주려고 온 건데 멋대로 끼어들어 놓고 동심 파괴까지 하시겠다? 다들 눈치는 저어기 롤러코스터에 태워서 날려 버리셨나 봐요?”

“아, 알았어요.”

덩치 큰 두 남자도 마지못해 머리띠를 받아 들었다.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귀가 생긴 견과 곰돌이 귀를 단 섭호는 의식적으로 서로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이제 놀이기구 타러 가자. 해빛아, 뭐부터 탈래?”

“회전목마!”

“엇. 이모가 높은 데서 내리꽂히고 때려 박고 이런 건 잘 타도 깜깜한 거랑 빙글빙글 도는 건 무서워하는데.”

“그럼 삼촌이랑 타자.”

견이 얼른 나서서 해빛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자연스럽게 해빛과 어울리는 견을 본 모단은 슬쩍 웃음을 삼켰다.

예전에 옥상에서 봤을 때는 애들을 어려워하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편해 보였다.

어린이집에서 친구처럼 지낸 덕이라는 건 알 리가 없었기에, 해빛이 혼자뿐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금지가 섭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우리도 회전목마!”

“안 탑니다.”

“그럼 위섭호 목말을 탈까? 2미터 위에 있는 공기는 얼마나 신선한지 늘 궁금했는데.”

“…….”

“회전목마가 낫겟지? 빨리빨리! 언니도 빨리 와요!”

줄을 서 있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날아와 꽂혔다.

한 명만 있어도 눈에 확 띌 것 같은 남녀가 넷이 모여 있는 데다 깜찍한 아이까지 낀 묘한 일행이니 그럴 만도 했다.

혼자 괜히 신경이 쓰인 모단이 견을 쿡 찔렀다.

“백견 씨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전에 잡지 같은 데도 나오고 그러지 않았어요?”

“전에는 간혹 그러기도 했는데 대외적인 직함도 활동도 한동안 없었더니 금방 잊히더라고요. 사람들 흥미라는 게 워낙 그렇잖아요. 세상은 넓고 잘나가는 사람은 많으니까.”

괜스레 모단의 입맛이 썼다. 떨떠름한 그녀의 표정을 본 견이 옅게 웃었다.

“다행이죠? 재벌 3세의 일반인 여자친구라면서 사람들이 막 따라붙으면 정모단 씨가 얼마나 피곤했겠어.”

“따라 하세요. 망상은 일기장에, 헛소리는 덜 정성껏.”

“안 따라 할 건데요. 나는 순종적인 남자 말고 나쁜 남자 할 거라서.”

“더럽게 나쁘네. 아, 피곤해.”

어느새 차례가 돌아왔다.

해빛은 말 대신 신데렐라 호박마차에 냉큼 올라앉았다. 뒤따라 옆에 탄 견은 남들보다 월등히 긴 다리를 거의 욱여넣다시피 했다.

울타리 밖에 서서 지켜보던 모단은 휴대폰 카메라를 슬그머니 올렸다. 어디까지나 해빛이를 찍는 건데 바로 옆에 있어서 같이 담기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견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미소를 짓는 순간.

심장이 쿵 하는 것과 함께 묘한 기시감이 스쳤다. 옥상 텃밭에서 감자 심기를 할 때 무탈이 사진을 찍어주다 눈이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모단은 뺨을 긁적였다.

‘이것도 직업병인 거지. 뭐만 하면 사진 찍어서 부모님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은.’

그사이, 키가 작은 금지는 발판에 발도 걸치지 못하고 낑낑대고 있었다.

조용히 뒤로 다가간 섭호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말 위에 앉혀주었다.

“어머, 오빠……!”

묵묵히 벨트까지 당겨 채워준 섭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갑자기 웬 직원 멘트? 같이 타는 거 아니었어?”

“아니었습니다.”

섭호가 잽싸게 빠져나오자마자 회전목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화 같은 멜로디에 맞춰 커다란 오르골처럼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지켜보던 모단은 옆에 선 섭호를 돌아보았다.

“위 비서님.”

“네.”

“이런 거 묻는 건 실례인 거 알지만, 모르면 다른 실례를 하게 될 것도 같아서 여쭤보려고요.”

“네, 말씀하십시오.”

“금지 씨랑은…….”

모단이 쉽게 단어를 고르지 못하는 것을 눈치챈 섭호가 먼저 답해주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어야 하는 사이입니다.”

깔끔하게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복잡미묘한 대답이다. 더 물으면 안 되는 게 분명했다.

“백견 씨랑은요? 평범한 상사와 비서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비서이자 동거인이자 보호자이자 피 안 섞인 가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너무 오래 봐서 지긋지긋한데 앞으로도 더 보게 될 것 같고요.”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어디서 권태기 부부 향기 안 나요?”

“그런 흉한 단어는 삼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단이 웃음을 터뜨렸다. 섭호도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회전목마 쪽에서 금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무슨 얘기 하는데! 언니! 나 보기보다 무서운 사람이에요!”

토끼 머리띠 한 조그만 여자가 그런 말 해봤자 허언증으로밖에 안 보인다. 모단은 휴대폰을 들어 찰칵 사진을 찍었다.

“아이, 귀엽다. 그쵸?”

“예…… 아닙니다.”

회전목마가 반 바퀴 돌아가자 이번에는 견이 마차 밖으로 반쯤 몸을 내밀고 야단을 했다.

“떨어져! 가까이 서 있지 말고 떨어지라고!”

“저 인간이나 마차에서 확 떨어졌으면 좋겠네.”

“동감…… 아닙니다. 어디 한 군데 다치기라도 하면 제가 더 피곤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그럼 취소.”

섭호가 넌지시 덧붙였다.

“그래도 볼수록 좋은 분이십니다, 우리 도련님.”

“혹시 저한테 그런 말을 하면 연봉을 더 올려주겠다고 했다거나?”

“하하. 아닙니다.”

덩달아 웃은 모단은 회전목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뭐, 볼수록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긴 하더라고요.”

몇 개의 놀이기구를 더 탄 후에 섭호는 매점에 가고, 모단과 금지는 화장실로 향했다.

벤치에 견과 해빛만 남았다.

“무탈이한테 얘기 들었어. 제일 좋아하는 친구가 해빛이라고.”

“정말요?”

가뜩이나 발그스름하니 들떠 있던 해빛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견은 모단에게 잘 보이고자, 금지는 나름 현모양처스러운 모습을 어필하고자, 섭호는 금지를 피하고자 서로 경쟁하듯 놀아준 덕에 해빛이의 기분은 한껏 좋아져 있었다.

물론 그런 꿍꿍이만으로 잘해줬다면 본능적으로 진심과 가식을 구분하는 아이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겠지만.

“무탈이가 엄청 좋아하던데. 해빛이 예쁘고 착하고 씩씩하다고.”

“정말이에요?”

“그럼. 이번에 어린이집 못 오게 됐다고 엄청 울었어. 해빛이도 친구들도 다 보고 싶다고.”

“나도 어제 울었어요. 무탈이 주려고 편지도 썼는데.”

“그랬어? 잘 갖고 있다가 다음에 줘.”

화장실 쪽을 힐끗 본 견이 해빛 쪽으로 슬그머니 몸을 기울였다.

“근데, 삼촌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네.”

“혹시 모단이 이모 남자친구 본 적 있어?”

갸웃거리던 해빛이 선선히 답했다.

“진짜로 본 적은 없고요, 이모 핸드폰에서 사진으로 봤어요. 옛날에요.”

“옛날…… 에? 몇 살 때?”

“다섯 살 때도 보고 여섯 살 때도 봤어요.”

“그래? 잘생겼어?”

“음…….”

견은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긴장감에 휩싸여 해빛의 입을 주시했다.

“어떤 삼촌은 멋있게 생겼고 어떤 삼촌은 예쁘게 생겼고 어떤 삼촌은 조금 안 잘생겼었어요.”

‘대체 몇 명을 만난 거야, 이 여자?’

견은 벤치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혈압이 올라서 뒷골이 띵했다.

“와아, 솜사탕! 팝콘! 츄러스!”

마침 양손 가득 간식을 든 섭호가 돌아오고, 모단과 금지도 왔다.

팝콘 통을 끌어안고 아그작거리던 모단이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견을 돌아보았다.

“뭔데요? 먹고 싶으면 말로 해요.”

“정모단 씨.”

“왜요?”

견이 팝콘 통에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먼저 들어가 있던 모단의 손을 스치고는 팝콘 사이를 부스럭 헤집었다.

허연 팝콘 몇 개를 꺼낸 견이 제 입에 넣고 팍팍 씹었다.

“전에 만난 남자들이 이렇게 심심한 애들이라면요.”

뒤이어 다디단 캐러멜이 끈적하게 묻은 갈색 팝콘을 꺼내 모단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나는 이거.”

“뭐라는 거야. 겨우 놀이기구 몇 개 타고 정신이 빠졌어요?”

이런 꼴을 처음 보는 금지는 턱이 바닥까지 떨어질 기세였다. 섭호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돌렸다.

그때 해빛이 섭호를 가리켰다.

“앗! 이모 옛날 남자친구다!”

“응?”

막 커피를 마시려던 섭호가 움직임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모두를 오싹하게 만든 해빛이 섭호 손에 들려 있던 커피 컵, 정확히는 그 커피 광고 모델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견을 돌아보았다.

“전에 이모가 저 사진 보여주면서 이모 남자친구라고 했어요.”

“콜록!”

팝콘 옥수수 껍데기가 목에 걸린 모단이 입을 틀어막고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모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이게…… 무슨?”

“언니, 설마 진짜예요? 용케 데스패치에 안 걸린 거구?”

“아니, 그게…….”

모단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굴리는 해빛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주었다.

얼마 후, 해빛이 인형 탈을 쓰고 지나가는 캐릭터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얼른 해명했다.

“장난친 거예요. 남자 연예인들 사진 보여주면서 이모 남자친구야, 그러면 다 믿어주는 게 너무 귀여워서……. 아니, 드라마 보다가 이모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한테 뽀뽀했다고 울었다는데 안 귀엽고 배겨요?”

금지가 깔깔대기 시작했다. 섭호도 빨대를 지그시 깨물었다.

“하여간 내가 박해빛 때문에 못 살아…….”

얼굴이 새빨개진 모단이 중얼거렸다.

견의 입가에는 아주 즐거운 웃음이 번졌다.

집에 올 때는 견의 차를 얻어 타고 왔다. 해빛이가 졸려서 보채기도 했거니와, 모단도 피곤해서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려 동 앞으로 가자, 새윤이 1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엄마아!”

“우리 딸, 잘 놀고 왔어?”

해빛을 받아 안은 새윤이 턱짓을 했다.

“들어와서 커피 한잔하고 가.”

“아냐. 어디 앉으면 눕고 싶어질 것 같아. 바로 집으로 갈게.”

“고생했다. 고마워.”

“고맙기는. 내일 봐.”

모단은 인사만 하고는 바로 집으로 향했다. 뒷모습을 얼마간 지켜본 새윤은 해빛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해빛아, 오늘 재미있었어?”

“응! 이모랑 언니랑 삼촌들이 너무너무 잘 놀아주고 사달라는 것도 다 사줬어!”

“언니랑 삼촌들?”

“응. 에버월드 갔는데 이모 친구들을 만나서 다 같이 놀았어. 키 큰 삼촌이랑, 예쁜 언니랑, 잘생긴 삼촌이랑.”

무슨 소리인가 싶었으나, 나중에 모단에게 물어보는 게 정확할 것 같았다.

“엄마,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뭔데?”

엘리베이터 안에 아무도 없음에도 괜히 둘러보는 시늉을 한 해빛이 손을 모아 새윤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잘생긴 삼촌이 이모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뭐어?”

새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봤어. 이모 쳐다볼 때마다 눈이 이렇게 하트가 되는 거. 그리고 있잖아, 갈색 팝콘! 그거를 이모한테 줬어.”

“갈색 팝콘?”

캐러멜 팝콘을 사주면 개중 캐러멜이 진하게 묻은 걸 갈색 팝콘이라 부르면서 골라 먹는 해빛이었다.

그렇게나 맛있는 걸 양보해 주다니, 아이의 눈에는 의심할 나위 없이…….

“사랑에 빠졌어.”

애늙은이처럼 주먹을 턱에 대고 고개를 끄덕이는 해빛을 보던 새윤이 부르르 몸을 비틀었다.

‘어우, 어우, 어우! 궁금해 환장하겠네!’

애만 아니었어도 벌써 다그치고도 남았다.

당장 모단에게 전화하고 싶었으나, 종일 애 봐줬는데 또 들들 볶자니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오늘은 푹 쉬라고 하고 내일 잡아다가 캐야겠다.’

새윤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쫄깃해졌다.

집 안으로 들어서며, 새윤은 슬쩍 물었다.

“그 잘생긴 삼촌이라는 사람, 진짜로 잘생겼어?”

해빛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1등.”

“뭐가 1등이야?”

“이모 남자친구 중에 1등이라고.”

“진짜? 그렇게 잘생겼어?”

“응.”

하긴, 은근히 얼빠 기질이 있는 모단이라 만나는 놈들마다 얼굴은 반드르르하긴 했다. 그런데 그때, 싸한 촉이 새윤의 뇌리를 번뜩 스쳤다.

“해빛아, 혹시 그 삼촌…… 눈 밑에 점이 있지 않든?”

“맞아.”

바로 고개를 끄덕인 해빛이 발까지 구르며 덧붙였다.

“무탈이 닮았어!”

***

잔인한 가정의 달, 5월.

누군가는 빨간 날이 많아 좋다지만 모단에겐 아니었다.

일주일 전부터 선물과 카드 등등을 만들고 잔치를 준비해 어린이날을 치르고 나니 그다음은 어버이날이었다.

손톱 빠지도록 카네이션 몇십 개를 만들어 보내고, 1학기 부모 상담까지 끝내고 나니 벌써 5월의 절반이 지나갔다.

‘하루는 더럽게 긴데 일주일은 훅훅 잘도 지나가네.’

‘진짜 힘든데 살은 왜 안 빠지는 거지?’

‘분명 월급 받은 지 며칠 안 됐는데 돈은 다 어디 간 거야? 통장 잔고 줄듯이 몸무게가 줄어들면 얼마나 좋을까.’

맨날 하는 고민을 또 하며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데, 새윤에게 문자가 왔다.

―가는 길에 가게 들러.

모단의 입가에 슬그머니 웃음이 번졌다.

에버월드에 다녀온 다음 날, 새윤은 냉기를 폴폴 풍기며 커피숍으로 그녀를 불러들였다.

견 일행과 마주친 거 맞다고 인정했더니, 거기서 우연히 만났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백견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며 펄펄 뛰었다.

자꾸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처럼 딱 부러지게 부정할 수도 없게 된지라 아무 말도 못 했더니 분위기는 정말 이상해지고 말았다.

그 후로 연락 한 번 없다가 오늘 문자가 온 거였다.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같은 게 얼마간 치워진 것 같았다. 휴우, 숨을 몰아쉬는데 전화가 왔다.

견이었다.

[잘 지냈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그 역시 많이 바빴는지 그동안 보지 못했다.

모단은 목소리에 반가움이 먼지만큼이라도 묻어날세라 조심하며 답했다.

“뭔데요?”

[힘든 하루를 보내고 퇴근해서 버스정류장에 딱 내렸는데 잘생긴 남자가 맞아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고마울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네. 몇 대 맞아줄 건데요? 나 요새 스트레스 많이 받았으니까 어금니 꽉 깨물어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입이 비죽 나온 게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웃음이 나려고 했다.

“장난이에요.”

[어금니 꽉 깨물고 있었는데. 다행이네요.]

“진짜 맞아주면 장난 아니게 만들어 드립니다.”

[눈치는. 오지 말란다고 안 갈 것 같으면 애초에 물어봤겠어요? 전 남친이 공유에 송중기에 조인성쯤 되는 대단한 여자인 건 알겠는데, 적당히 튕기고 빨리 와요.]

“그 얘기는 왜 또!”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전화가 뚝 끊어졌다.

모단은 애꿎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다 거칠게 넘겼다.

싫었다.

벌써부터 집까지 몇 정류장 남았나 세어보게 되는 것도.

퇴근할 때 화장도 안 고치고 나온 걸 후회하게 되는 것도.

하다하다 버스에서 자연스럽게 내리지 못할까 봐 긴장되는 것까지도.

‘차라리 하던 대로 불쑥 나타나지.’

우거지상이 된 모단이 가방을 뒤적였다.

마침 정류장이라 버스가 멈춘 틈을 타 거울을 보고 입술을 다시 바르는데, 비어 있던 옆좌석에 누가 앉는 기척이 났다. 물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 나 뭐 하냐.’

입술 바른 김에 다른 화장도 고쳐야 하나 고민했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거울을 탁 소리 나게 접었다.

동시에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달밤에 치명적인 입술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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