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낫다
2017.09.06.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금지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모단과 은규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우리 큰오빠가 이 백화점 사장님인데,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객님.”
매니저와 직원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90도 가까이 굽혔던 허리를 편 금지가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뭐 하세요? 어차피 잘릴 거라도 사과드릴 건 사과드리고 넘어가야죠.”
당황해서 서로 쳐다보기만 하던 모단과 은규마저 철렁할 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잘릴 거라는 말에 더욱더 흙빛이 된 매니저와 직원이 황급히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정말 죄송합니다.”
방금 전까지 있는 무시 없는 무시 다 해놓고 갑자기 머리가 땅에 닿을 듯 절을 하니, 씁쓸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금지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사과와 보상, 직원 징계까지 고객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거듭 사과드립니다.”
“아니, 저기…….”
결국 모단이 그녀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이럴 것까진 없어요, 금지 씨.”
작게 말한다고 했는데도 워낙 찬물 끼얹어놓은 것처럼 싸한 분위기였던지라 모단의 목소리가 매장 안에 있던 사람들 귀에 또렷이 들렸다.
“아는 사이였어?”
은규도 놀라 속닥대며 물었다. 모단은 조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금지가 모단의 팔짱을 끼고 친근하게 몸을 붙였다.
“언니, 많이 불쾌하셨죠? 기분 푸세요.”
“방금 금지 씨 덕에 다 풀어졌어요. 괜찮아요.”
“언니가 그냥 넘어가신다고 해도 제가 오빠한테 전할 거예요. 매상은 물론이고 백화점 이미지와도 직결되는 일이니까.”
사장님 동생과 보통 이상의 친분까지 있는 손님이었다니.
아까의 잘못된 판단을 거듭 후회하던 매니저는 금지의 매서운 눈길과 마주하고 얼른 고개를 떨어뜨렸다.
“파는 물건이 꼭 자기 것인 줄 알고 고객 차별하는 직원들, 오빠가 아주 싫어하거든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다른 직원들까지 욕을 먹는다고.”
금지가 모단의 팔을 잡아당겼다.
“여기서 사지 마세요. 제가 다른 매장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클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얼결에 금지에게 이끌려 나가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뒤를 붙들었다.
“오랜만이다, 금지야.”
모단이 먼저 돌아보았다. 금지는 볼까 말까 고민하듯 앞만 뚫어져라 보다가 홱 돌아보았다.
줄곧 앉아 있던 여자 손님이 일어서서 금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언니한테도 연락 좀 하지.”
금지의 입술 사이에서 피식,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니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둘을 번갈아 보던 모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서 친한 척이세요, 손여은 씨?”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적대적인 말투에 한 번, 손여은이라는 이름에 두 번.
황망히 흔들리는 모단의 시선이 새삼스레 여자를 살폈다.
“……넌 참 여전하구나.”
“누가 할 소릴. 둘 사이에서 고민하느라 남한테 민폐 끼치는 건 여전하네? 남자 고를 때도 그러더니 가방도 그따위로 고르고 있어. 짜증 나게.”
여은이라 불린 여자는 서슴없이 뱉어내는 금지의 말들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듣고 서 있었다.
“가요, 언니.”
다시 모단을 잡은 금지는, 어느새 평소의 애교스러운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언니가 여기서 이런 대접 받은 거 알면 지협 오빠가 가만 안 있을 텐데.”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모단은 어리둥절했다.
백견도 아니고 백지협 이사가 갑자기 왜 튀어나온 거냐고 물으려는데 금지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근데요, 언니. 다른 남자랑 가방 사러 온 거 지협 오빠도 알아요?”
그걸 백지협 이사가 왜 알아야 하느냐고 하려는 찰나 또 옆구리를 찔렸다.
뭔지는 모르지만 눈치껏 어영부영 대꾸했다.
“친구예요. 친구 남편이기도 하고.”
“그래도 괜한 오해 사지 않게 조심해요. 곧 희명그룹 식구 될 사람이.”
내가요? 하려다가 세 번째로 옆구리를 찔렸다.
갈비뼈에 구멍 나기 전에 입을 다문 모단은 매장을 나가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입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던 여은과 눈이 마주쳤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모단이었다.
***
금지가 안내한 매장에서 더 예쁜 가방을 훨씬 저렴하게 사고 상품권까지 받은 은규는 영 얼떨떨한 눈치였다.
“이런 것까지는 안 주셔도 되는데.”
“원래 이런 일이 생기면 고객님들께 사과의 의미로 상품권과 서비스 제공해 드리거든요. 부담 갖지 말고 받으세요.”
금지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모단에겐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긴 은규가 먼저 집으로 갔다.
모단과 금지는 근처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그 직원 자르지 말아요.”
금지가 빨대를 입에 문 채로 윗입술을 비죽 올렸다.
“언니, 너무 착하신 거 아니에요?”
“내가요?”
팔짱을 낀 모단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불량함이 폴폴 풍겼다.
“언제 한번 겁나 스트레스받는 날에 머리 안 감고 슬리퍼 신고 가서 아까 그 매니저한테 가방 보여달라고 할 거거든요. 한 시간 동안 대접 받을 거 다 받고 안 사고 나올 거예요.”
눈을 두어 번 끔벅인 금지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견이 오빠가 왜 언니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아요.”
“예?”
“그 인간 이상형이 낮이밤이거든요. 그런 여자가 없어서 이제껏 솔로로 살았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던데 드디어 임자 만났네요.”
깜찍한 또라이가 이상형 아니었느냐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언니는 견이 오빠한테 관심 없어요? 언니가 싫다는데도 따라다니는 거면 말씀하세요.”
“떼어주게요?”
“아니요. 오빠한테 영혼이라도 팔아서 분발하라고 하게요. 저 이번만큼은 그 오빠 편이에요.”
금지는 웃지도 않고 비장하게 덧붙였다.
“언니가 꼭 백견 데려가셨으면 좋겠어요. 진짜 희명그룹 식구 하면 안 돼요?”
웃음기가 어려 있던 모단의 눈가가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근데 왜 아까는 백견 씨가 아니라 백지협 이사님 이야기를 했어요?”
“그야, 뭐. 견이 오빠도 화나면 무섭지만 그 여자가 더 무서워하는 건 지협 오빠니까요.”
눈을 내리깐 금지에게서 아까 보였던 냉기가 언뜻 스쳤다. 모단을 볼 때는 다시 웃고 있었지만.
“오늘 일 알면 지협 오빠가 별로 안 좋아할 거란 말은 사실이에요. 그 오빠 성격이 워낙 깐깐하고 치밀해서, 견 오빠가 언니 좋아하는 거 알았을 때부터 아마 언니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을 거예요. 시어머니가 며느릿감 보듯이.”
시어머니에 며느리라니,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린다 싶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클럽에서 금지와 함께 나왔을 때도 옷차림 지적까지 했었다. 꼰대 기질이 있다더니, 실은 그래서 맘에 안 들었나 보다.
“그렇다고 지협 오빠가 막 뒷조사 같은 것까지 할 사람은 아니니까 오해하시면 안 돼요, 언니.”
“뒷조사는 백견 씨한테 당할 만큼 당했어요.”
“그 오빠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죠. 용케 신고 안 하셨네요. 역시 언니는 착하셔.”
“안 착하다니까요. 신고를 안 했다는 거지 가만 놔뒀다고는 안 했어요.”
“꺄아, 언니 최고! 커피에서 사이다 맛이 날라 그러네. 앞으로도 그 인간 가만 놔두지 말아주세요.”
“그럼 아마 더 좋아할 거…… 후유. 아니에요.”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모단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 여자분이랑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그냥 몰랐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싫어요. 아까 봤잖아요, 자기밖에 모르는 거. 주변 사람들한테 온갖 상처 다 주고도 끝까지 도도한 여자예요. 딱 재수 없죠.”
모단은 입안에 딸려 들어온 얼음을 천천히 굴렸다.
“그 여자, 유손제약 딸 맞죠?”
“어? 언니가 손여은을 어떻게 알아요?”
똑똑히 다시 들은 이름에, 어렴풋하던 기억도 조금 더 또렷해졌다.
마지못해 펼쳐 보고 접어버린 청첩장에 적혀 있던 이름 세 글자.
“제가 아는 사람하고 결혼한 여자였네요. 이름하고 유손제약 딸이라는 것만 들어서 얼굴까진 잘 몰랐지만.”
“정말요? 그 여자랑 결혼한 사람이 누구였지? 의사랬나?”
“네, 맞을 거예요.”
“언니는 어떻게 아는데요?”
“전에 일하던 어린이집 원장님 아들이었어요.”
볼품없이 녹아버린 얼음 조각이 어금니 사이에서 와작 씹혔다.
“김민철이라고.”
***
“장난하는 거야?”
민철은, 졸업하고 바로 취직해 몇 년 동안 일한 어린이집 원장님의 아들이었다.
처음 저를 조용히 불러 본인 아들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하셨을 때는 얼마나 난감했던가.
그냥 직장 상사도 아닌 무려 원장님 아들이라니, 부담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차마 거절조차 못 할 만큼.
그런데 만나보니 의외로 잘 맞았고, 자연스럽게 연애로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렸기에 너무 먼 미래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만남이 길어지고 결혼 얘기까지 나오기 시작하자 초조해졌다.
“말했잖아. 오빠랑 결혼 못 한다고.”
고민 끝에 이제껏 아무에게도, 심지어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한 얘길 털어놓았다.
중학생 때까지 초경이 없었는데, 엄마 걱정시키는 것도 미안하고 교복 입고 산부인과 가는 것도 싫어서 그냥 한다고 거짓말했다고.
스무 살 넘어 결국 무월경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큰 비용을 들여 힘든 치료를 한대도 임신이 안 될 확률이 높을 거라고 했다고.
민철은 난감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삼대독자 외아들이었으며 효자였으니까.
게다가 이제껏 그 사실을 숨겼다는 것에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다고 했다.
“오빠도 그건 우리끼리 극복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 했잖아. 그래서 헤어진 거고. 한 달 만에 다시 보고 한다는 말이 결혼하자니, 내가 어렵게 꺼낸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면 뭐야?”
“그땐 내가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 생각해 봤는데 아이는 없어도 그만이지만 너는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바보같이 흔들릴 뻔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내가 없으면 죽을 사람처럼 보였기에.
“그냥 결혼하자, 모단아. 요새 일부러 안 낳고 사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괜찮아. 우리 부모님도 그런 거 가지고 너 구박할 분 아닌 거 알잖아.”
“그래서 더 못 해.”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조금만 더 무모했다면, 혹은……
조금만 더 그를 사랑했더라면.
“원장님을 내가 몰라? 남의 아이들도 이렇게 예쁜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낳은 손주는 얼마나 예쁠까, 그러시는 분이잖아. 그런 분을 어떻게 실망시켜? 난 못 해.”
“원장님이라고 하지 말고 어머니라고 불러. 전처럼.”
고집스레 입을 다문 나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일단 결혼하자. 아직 젊으니까 몇 년 동안은 안 갖는 거라고 하고, 그 후에 노력해 봤는데 안 생긴다고 하면 되잖아. 병원 가서 검사해 봤더니 나한테 문제가 있더라고 하자. 그래서 그냥 둘이 살기로 했다고…….”
“왜 그래야 하는데?”
잡힌 손을 빼냈다. 익숙한 따뜻함이 그 순간만큼은 두려웠다.
그 따뜻함에 녹아,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질 것 같아서.
“내가 왜 멀쩡한 오빠를 문제 있는 사람 만들고, 평생 부모님 속이면서 살아야 하는데? 오빠나 부모님이 지나가는 아이들 보면서 예쁘다 한마디만 해도 상처받고 죄책감 느끼면서, 왜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모단아.”
“우리 엄마는 또 어떻고? 엄마 성격상 오빠네 부모님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평생 죄인처럼 구실 게 뻔한데, 난 그거 싫어. 딸 가진 것도, 내가 건강하지 않은 것도 죄는 아니잖아.”
겁이 났다.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투성이인데도 그는 헤어져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점점 더 모진 말만 튀어나왔다.
“근데 오빠랑 결혼하려고 맘을 먹으면 죄가 돼. 그냥 내가 몇 가지만 포기하면 사는 데 전혀 지장 없는 건데. 그래서 싫어.”
그 말을 듣고 나서 엉망으로 일그러지던 민철의 표정은, 많은 것들이 잊힌 후에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엔 너 마음고생 하기 싫어서 나 정도는 쉽게 포기가 된다 그거잖아.”
“오빠.”
“넌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그럼 사람을 이렇게까지 매달리게 만들지를 말았어야지. 우리 엄마한테는 안 미안해? 엄마가 널 얼마나 예뻐하셨는데.”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러니까 그만해.”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그 체면 중요시하는 분이 너 가족관계 복잡한 거 아시고 며칠을 끙끙 앓으셨으면서도 결국 묻어두자고 하실 정도였어. 그만큼 너를……!”
“그만하자고, 제발!”
훗날, 그가 그렇게 말해주어서 고맙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가족 이야기까지 나온 덕분에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까.
내가 그와,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도 쉽게 결혼하지 못할 이유는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어차피 애도 못 낳아주는 여자니까 애초에 아무도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이야?”
끝까지 안 운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확실히 알겠어. 오빠는 나를, 나는 오빠를, 절대 행복하게 해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충혈된 눈.
그 밑에 자리하고 있는, 안경을 벗으면 더욱 잘 보이는 그 점.
또 이별이다.
눈밑점이 있는 사람과, 가족이라 생각했던 사람과 또.
그와 헤어지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게 그의 어머니와 헤어지는 거였다.
“원에서는 정 선생님, 해야 하는데 자꾸만 모단아, 소리가 나오려고 한다니까. 얼른 우리 식구 됐으면 좋겠다, 모단아. 이미 식구나 다름없지만.”
나를 예뻐하셨던 만큼 많이 속상해하셨다.
“나는 아직도 안 믿긴다, 모단아. 정말 우리 민철이랑 헤어진 거니?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어? 요새 애가 아주 형편이 없어. 너도 이렇게 말랐으면서, 응?”
그랬기에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가 네 형편 모르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들어와서 이만큼 경력 쌓아놓고 이제 와서 그만둘 필요까진 없지 않겠니? 서로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둘이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시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서먹해졌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몇 달 후였다.
“이번 주말에 원장님 아드님 결혼식 있는 거 알죠? 시간 되시는 선생님들은 다 참석하세요. 청첩장 하나씩 받으시고.”
“들으셨어요? 신부가 유손제약 딸이래요.”
“어쩐지, 얼굴부터 부잣집 딸 느낌이 물씬 나네. 원장님 아드님은 대학병원 레지던트라 그랬죠? 남편은 교수라고 하셨나? 교육자 집안에 의사 아들이니 재벌이랑 사돈도 맺고 그러는구나.”
“원장님께 듣기로는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다 그러던데요? 같은 학교 선후배였는데 10년 가까이 못 봤다가 최근에 다시 만난 거래요.”
“어머머. 돈도 가지고 낭만도 가지고 다 가졌네.”
그 무엇에도 마음 쓰지 않으려 애썼다. 하던 대로 일을 잘 해내는 것과, 희명사내어린이집 이직에 성공하는 것 외에는.
“죄송하지만 저는 결혼식 참석 못 할 것 같아요.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요. 축의금만 대신 좀 전달 부탁드려요.”
끝도 없이 비참해지는 마음을 그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이제 남인데 헤어진 다음 날 결혼을 하든, 몇 달 후에 결혼을 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이별까지 몰아붙이고 도망쳐 버린 건 나였는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엔 고맙다는 생각마저 했다.
결혼은 예쁜 드레스와 부케를 고르며 즐거워하는 게 다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들을 선택하고 포기하고 잃어야 하는 독한 현실이라는 걸 알려줘서.
***
“아…… 머리야.”
모단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뒤척거렸다.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꿈자리가 뒤숭숭해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얼른 다시 잠들려 했으나 정신은 오히려 갈수록 또렷해졌다.
“쯧.”
머리맡에 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아침 되려면 멀었다.
의미 없이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인터넷에 ‘백견’을 검색해 보았다. 인물정보가 뜨긴 하는데 생각보다 별게 없다.
‘블랑아이 전(前) 대표’라는 이력이 조금 씁쓸하게 읽힌다.
지금보다 몇 살쯤 더 어려 보이는 사진 속 그는 지금보다 훨씬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섭호와 금지 외에 다른 사람을 대하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묘한 확신이 들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마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내가 아는 백견은, 나만 아는 백견이 아닐까.
‘아니야. 착각하지 마. 처음에 공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
새삼 그의 눈 밑에 있는 점이 아프게 눈을 찔렀다.
뻑뻑한 눈을 세게 감았다 뜬 모단은 스크롤을 죽 내려 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백견 [명사]
같은 말 : 백구(白狗)(빛깔이 흰 강아지).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낫다.
‘그건 그렇지.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와아이씨! 새벽이라 뇌가 건전하질 못하네!’
원래 감성이 폭발할 시간이라 그런 거다.
술이라도 잘못 마셨다간 자칫 헤어진 애인에게 ‘자니?’를 보낼 만큼 구질구질해진다는 마성의 새벽 아니던가.
모단은 음란마귀를 떨쳐 내고 모로 자세를 틀었다.
손이 어느덧 견과 주고받은 문자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창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훑고 있었다.
오늘부터 1일 운운하던 것부터 농담 따먹기를 지나 점점 어색해지다 딱딱한 첫 문자까지 도착했다.
저만 그랬다.
바로 보아도 거꾸로 보아도 견의 말들은 한결같았다. 오롯이 저를 향해 있었고, 따뜻했고, 달콤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백구 같은, 그러니까 백견 같은 그 모든 것들이.
휴대폰을 든 손을 툭 떨어뜨린 모단은 몸을 웅크렸다.
혈관 속의 피가 심장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콩닥콩닥 기척을 내며 흘러가는 것 같다. 베개에 닿아 있는 귀 아래에서 바짝 울려대는 쿵쿵 소리 때문에 잠은 더욱 깨고 만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있기는 했었는지.
그때였다. 고요한 방 안에 웬 깨발랄한 통화 연결음이 울려 퍼졌다.
모단은 소스라쳐 일어나 앉았다. 손이 버튼을 스쳤는지, 제가 견에게 무려 보이스톡을 걸고 있었다.
연결 중이란다, 누구 맘대로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