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낮이밤이, 낮저밤저
2017.09.10.
“미쳤어, 미쳤어!”
모단은 빛의 속도로 취소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은 끊어졌으나, 채팅창에 ‘보이스톡 해요’라는 다정한 한마디가 고스란히 남았다. ‘취소’라는 아련한 두 글자도.
더 충격적인 건 숫자 1이 바로 사라졌다는 거다.
실시간으로 확인한 거다, 백견이!
이 시각에 자다 깨서 얼마나 황당했을까.
“와아이씨, 옘병! 환장하겠네! 머리 깎고 산으로 갈까, 그냥?”
절로 갈라진 비명이 튀어나왔다. 엄마가 깰까 싶어 입을 틀어막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제발 자라. 잠결에 저지른 실수였다고 아침에 말하게!’
간절히 빌었으나, 얄밉게도 바로 문자가 왔다.
―실수예요, 실화예요?
―당연히 실수죠.
―안 자고 뭐 하다가 이런 실수를 해요? 떨리게.
―잠이 안 와서 폰 만지다가 실수했어요. 미안해요. 다시 자요.
―나 안 자고 있었어요. 오늘까지 꼭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래서 안 보였구나.’
키스하고 코빼기도 안 비추는 건 뭐지, 하는 생각을 언뜻 했더랬다.
키스 정도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할 수도 있는 거라고 먼저 떠벌린 주제에 그런 거 따지나 싶어 입 다물었지만.
―며칠 있다가 또 실수해 줘요. 지금은 내 목소리가 아니라 어차피 못 받았을 거라서.
―목감기 걸렸어요?
―비슷한 거요. 그때 모단 씨랑 키스하다가 옮은 것 같아요. 책임지세요.
키스라는 단어만 봐도 움찔하게 되는 걸 알고서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더불어 오랜만에 떠오른 기승전 책임져까지.
―나 아니에요. 난 감기 바이러스 같은 거 안 키워요.
―역시 내 이상형이네요. 바이러스도 때려잡는 항생제 같은 여자.
―항생제는 마냥 좋은 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금지 씨가 그러는데 이상형은 낮이밤이라면서요.
―네. 낮에도 이쁘고 밤에도 이쁜 여자요. 근데 황금지한테 내 이상형 물어봤어요? 언제? 왜요? 뭐든 다 보여줄 수 있으니까 나한테 직접 물어보랬잖아요.
―안 물어봤는데 알려줬어요. 안 궁금했다고!
그보다 낮이밤이가 그런 뜻이었다니.
―난 낮져밤져 할 거예요. 지는 게 이기는 거랬거든요.
―낮에도 저질, 밤에도 저질 아니고요?
한참 답이 없다. 아마도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면 늘 그렇듯, 소년처럼 꾸밈없이 눈꼬리를 접고서.
―모를 줄 알았는데. 티 많이 났어요?
―엄청요.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일 있다면서요. 얼른 하고 자요.
―정모단 씨도 얼른 자요. 참, 비 온다니까 출근할 때 우산 꼭 챙겨 가요. 이번엔 지난번처럼 데리러 못 가니까.
―별 걱정을 다. 백견 씨 만나기 전에도 나 알아서 잘 살았어요. 맑은 날에도, 비 오는 날에도.
던져 놓고 바로 후회했다. 조금이라도 설렐라 치면 못된 말로 얼른 덮어버리려고 드는 이 못된 습관.
다 안다는 듯, 견은 이번에도 기꺼이 져주었다.
―없을 때도 잘 살았는데 있으면 얼마나 더 잘 살겠어요. 잘 자요♥
***
잘 자라는 따뜻한 한마디 덕분이었을까, 속이 꽉 찬 간지러운 하트 덕분이었을까.
그루잠을 잤음에도 아침이 개운했다.
“맞다, 우산.”
하늘이 많이 흐리긴 한데 아직 빗방울이 떨어지진 않는다. 짧게 고민한 모단은 평소처럼 빈손으로 집을 나왔다.
그런데 당장 버스에 타자마자 빗줄기가 투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백견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모단은 한 손으로 귀를 후볐다.
정류장에서 회사까지 그리 멀지 않은 데다 폭우는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 사이로 전력질주해서 로비로 들어선 모단은 머리와 어깨의 빗방울을 대강 털어내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어,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아직 등원 시간은 아닌데 섭호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등에 업혀 있는 무탈이를 본 모단은 순간 코피 터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뭔데! 뭐가 저렇게 귀여워!’
섭호가 워낙 커서 무탈이가 더 작아 보였다. 섭호가 한 걸음 뗄 때마다 어깨 너머로 늘어뜨려진 짧은 팔과 자그마한 손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넓은 등에 묻혀 있던 이마가 간당간당 미끄러지다가 어깨 옆으로 툭 떨어진 순간, 곤히 눈을 감은 얼굴이 빠끔 나타났다.
모단은 자칫 끄아앙 하고 외칠 뻔했다.
‘귀여워! 원래 자는 애들은 다 천사 같지만 심하게 귀엽다고!’
섭호가 모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제 일…… 아니, 노느라고 늦게 잤거든요. 오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는데 못 일어나더라고요. 오늘 제가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조금 일찍 깨웠더니 더 그러네요.”
“그랬구나.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네. 그저 잠을 못 자서 그렇습니다.”
고개가 옆으로 완전히 꺾였는데도 정신없이 자는 무탈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모단이 팔을 뻗었다.
“제가 안고 들어갈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보기보다 무거운데.”
“애기들 하루 이틀 안나요. 괜찮아요.”
섭호가 등을 돌리고, 모단이 받아 안았다. 말 그대로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잠든지라 낭창낭창하니 안겨들었다.
우리 도련님, 제 모습도 제정신도 아닐 때에야 안겨보는 건가.
갑자기 짠해진 섭호는 슬쩍 코끝을 문지르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네, 다녀오세요.”
모단은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채로 신발을 벗겨주는데도 곤히 곯아떨어져 있다.
바다반 교실 안쪽에 있는 소파에 가만히 눕혀주려는데, 등이 닿기 직전에 작은 팔이 모단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으음…….”
어딘가에 닿은 뺨을 비몽사몽간에 비비적거리던 견은 잠꼬대나 다름없는 혼잣말을 흘렸다.
“정모단 씨……?”
등을 다독다독하던 손이 멈칫했다.
“……씨?”
모단의 중얼거림 뒤로 묘한 정적이 덮쳐들었다.
남은 잠기운이 한꺼번에 싹 달아났다. 견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어떡하지? 잠결에 뭔가 익숙한 향이 나는 것 같아서 그만……. 들었나? 못 들었나?’
모단은 얼핏 제 이름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해서 혼란에 빠진 참이었다.
목을 안았던 팔이 스르르 풀어지더니 뜬금없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씨…… 씨씨씨를 뿌리고…….”
자진해서 소파로 굴러 떨어진 견이 등받이 아래까지 파고들어갈 기세로 몸을 웅크렸다.
“선생님, 엄마아……. 졸리다, 잠 온다아…….”
작은 웃음소리가 등 뒤를 타고 넘어왔다.
“잠 온다는 소리였구나. 무슨 잠꼬대를…….”
작은 기척이 나더니, 따뜻한 손길이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별게 다 사랑스럽네.”
백견을 사랑한다 말한 게 아닌데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려내는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끔찍한 허물이라 여겼던 모습을 이렇게까지 예뻐해 주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그 자체만으로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로와 치유를 받은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내가 진짜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믿어주기는 할까?
‘차라리 진상을 부릴까? 더 이상 어린이집 안 왔으면 하고 빌 만큼 밉상으로 찍혀 버려?’
맘만 먹으면 어느 누구 못지않게 잘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작정하고 모단을 괴롭히는 일 따위.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는 손길까지 느끼자, 복잡하던 머릿속이 몽글몽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아침이 다 되어서야 마무리한 기획안 때문에, 그리고 새벽에 느닷없이 날아든 모단의 심장 공격 때문에 한숨도 못 잔 견은 스르륵 정신을 놓았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등원하며 교실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와중에도 잘만 자던 견은 모로 누워 있던 몸을 틀어 반듯이 누웠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싹한 예감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예감이 아니라 확실한 그림자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시야가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견은 눈을 번쩍 떴다.
“……쳇. 실패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한마디를 남긴 누군가가 코앞까지 바짝 들이댔던 고개를 들었다.
해빛이었다.
“바보. 뽀뽀를 한 다음에 눈을 떠야지!”
“무탈이 바보.”
“거 봐. 내가 무탈이 백설공주 시키지 말자고 했잖아.”
대체 뭐부터 지적해 줘야 하는 건가.
난 바보도 아니고 공주도 아니라는 걸 강조해야 할지, 그보다 백설이 아니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아니냐고 따져야 할지, 다 떠나서 남이 자고 있을 때 덮치면 안 된다는 것부터 가르쳐야 할지.
부스스 일어나 앉은 견이 나름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지적했다.
“입술 뽀뽀는 아무하고나 하는 거 아니야.”
“왕자님하고 공주님도 하고, 우리 아빠랑 엄마도 맨날 하는데?”
“그러니까. 아빠하고 엄마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만 하는 거야. 좋아하는 거 말고 진짜, 많이, 이만큼 사랑하는 거.”
“무탈아. 진짜, 많이, 이만큼 사랑해!”
해빛이 견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견은 동심 보호 차원에서 포옹 정도는 받아주기로 했다.
“으응, 그래.”
‘미래의 이모부로서 예뻐한다, 해빛아.’
견은 해빛의 등을 두어 번 다독이고 떼어냈다. 앙증맞은 입술이 틈을 놓치지 않고 쭈욱 밀고 들어오려는 것을 한 손으로 막았다.
“이건 안 돼. 해빛이 입술은 소중하니까 꼭꼭 아껴놓는 게 좋겠다.”
마침 이쪽으로 오던 모단의 귀에 또랑한 무탈이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동화놀이도 좋지만 분위기에 휩쓸려서 뽀뽀까지 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직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뽀뽀라는 말을 듣자마자 모단의 양심이 콕 찔렸다.
돌아본 견이 먼저 미소를 지었다. 자동반사적으로 모단의 입가에도 웃음이 걸렸다.
“무탈이 일어났네? 잘 잤어?”
“네.”
“잘됐다. 안 그래도 만들기 할 거라서 깨우려고 했는데.”
하품을 한 견이 그렁그렁해진 눈을 비비며 소파에서 내려왔다.
아이들 수만큼의 투명우산과 시트지, 유성매직과 가위가 바닥에 준비되어 있었다.
“얘들아, 이제부터 선생님하고 재밌는 놀이 할까? 이쪽으로 모여보자.”
“네!”
짧은 설명을 듣고 난 후, 아이들은 펼쳐진 우산을 하나씩 앞에 두고 앉아 마음껏 꾸미기 시작했다.
모단은 아이들을 도와주며 아낌없는 칭찬을 건넸다.
“이 커다란 자동차 바퀴 완전 멋지다.”
“선생님, 저 집에 갈 때 이거 쓰고 가고 싶어요!”
“그래. 아무래도 집에 갈 때까지 비가 계속 올 것 같네.”
창밖이 저녁처럼 우중충했다. 비가 제법 오고 있었다. 간간이 우르릉대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언뜻번뜻하기도 했다.
“무탈이는 왜 아무것도 안 그리고 있어?”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견은 옆에서 열심히 꽃을 그리고 있는 해빛이를 힐끔 보았다.
“선생님은 무슨 꽃 좋아하세요? 선생님이 좋아하는 꽃 그릴래요.”
“선생님이 좋아하는 꽃? 글쎄…… 분홍색 꽃?”
매직펜을 만지작거리던 견의 손이 우뚝 멈췄다.
“벚꽃도 예쁘고, 분홍 카네이션도 좋고.”
견이 말없이 빤히 올려다보기만 하자 모단이 아, 했다.
“무탈이는 분홍색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겠구나. 그럼 무탈이가 좋아하는…….”
“아니에요.”
견이 망설임 없이 분홍색 유성매직을 들었다.
“남자는 분홍이죠.”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냐며 웃는 모단을 옆에 두고, 견은 투명한 우산 위에 느릿느릿 꽃잎을 그렸다.
평소 잘 쓰지 않는 왼손이라서인지, 아니면 떨려서인지 선이 제멋대로 그어졌다. 둥글게 그리려고 하는데 자꾸만…….
“꽃잎이 하트 모양이네? 귀엽다.”
“선생님, 내 손 잡으세요.”
견은 펜을 들지 않은 오른손을 뻗어 모단의 손을 꼭 잡았다. 모단이 왜? 하는 눈을 했다.
“비 와서 깜깜하니까요. 선생님 깜깜한 거 싫어하신다면서요.”
백견이 이런 핑계를 댔으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한다고 때리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은 감동마저 받은 눈으로 웃어준다.
“그래서 손 잡아주고 지켜주는 거야? 고마워. 근데 이 정도는 괜찮아. 밖은 깜깜하지만 안에 불도 환하게 켜져 있고 너희들도 있잖아.”
“그렇구나. 근데 선생님, 우산 가져오셨어요?”
말문이 막힌 모단이 어물어물했다.
견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단의 눈에는 그 모습이 완벽한 애늙은이처럼 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날 저녁, 견은 맨 마지막으로 하원하며 제가 만든 우산을 모단에게 내밀었다.
“집에 갈 때 이거 쓰세요.”
“아니야, 무탈아. 무탈이가 열심히 만든 건데.”
“선생님 드리려고 열심히 만든 거니까 쓰세요. 저는 차 타고 가요.”
막무가내로 쥐여주고 돌아선 견은 아무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그렇게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 반, 짓궂은 심보 반을 담아 준 거였다.
그렇게 우산 가져가라고 말했는데 쿨하게 무시한 게 얄미워서.
어른이 쓰기엔 좀 많이 쑥스러운 우산을 쓰고 가면서 반성하라고. 다음엔 꼭 우산 갖고 다녀야지 하라고.
그런데, 주차장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고 회사를 나오다가 보고 말았다.
회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정말로 그 우산을 쓰고 서 있는 모단을.
주변에서 힐끔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머리 위에 투명한 꽃그늘을 드리우고, 빗방울 대신 삐뚤빼뚤한 꽃잎을 맞으며 그렇게 서 있었다.
아이의 마음이 담겨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저렇게 진심으로 들어주는 거겠지.
아니면 정말로 분홍 꽃을 좋아해서?
그 많은 분홍 꽃 중에 벚꽃과 분홍 카네이션을 떠올려 주었다는 건, 어쩌면…….
문손잡이를 꼭 쥐었던 견이 작은 제 손을 내려다보다 중얼거렸다.
“나, 진짜 애라도 됐나 봐.”
‘갑자기 울고 싶어지는 게.’
섭호가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견은 눈꺼풀을 힘껏 내리닫고, 턱도 굳게 다물었다.
당장 차를 세우고 내려서 달려가 안아줄 수 없으니까.
별게 다 사랑스러운 건 당신이라고 말해줄 수 없으니까.
참아야 했다.
***
돌아온 토요일, 모단은 사내 자원봉사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한 보육원으로 향했다.
희명그룹 직원들 외에 먼저 와 있는 다른 봉사팀도 있었다. 한국대병원 치과 의료진들이라고 했다.
임시 진료실에서 구강검진과 가벼운 충치치료 등이 이뤄지는 사이, 희명 직원들은 밖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안에서 일을 도와주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모단과 효림이 주축이 되어 돌보고, 크고 활달한 아이들은 남직원들과 함께 축구에 빠져들었다.
모래가 휘날리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아이들과 어울려 운동장을 뛰는 지협을 힐끔대던 효림은 얼굴까지 발그레해져서는 속닥거렸다.
“너무 멋있지 않아요? 학교 다닐 때 보면 꼭 한 명씩 있잖아요. 잘생겼고 반장에다 공부도 잘하는데 운동까지 잘하는 애.”
운동장 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지협이 실수를 했는지 직원들과 아이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효림이 바로 추가했다.
“그런 애가 가끔 가다 허당스러운 면을 보이면 그게 또 그렇게 귀엽죠.”
“귀엽기보다는 부럽네요. 저도 다음 생엔 꼭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로 태어나서 막 살아볼 거예요.”
“하여간 모단 쌤은.”
둘의 대화가 들릴 리가 없음에도 머쓱하니 웃고 있는 지협을 보다가, 모단은 뺨을 긁적였다.
‘저래 보여도 무서운 사람이라는 거지.’
금지가 그의 이름을 딱 두 번 흘렸을 뿐인데, 손여은이란 여자조차 입을 딱 다물긴 했다.
“땀 흘려도 멋있으시네. 저런 남자는 누가 데려갈까요? 아마 결혼은 재벌집 딸하고 하겠죠? 최소 우리나라 10대 재벌 안엔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겠죠.”
“나이가 있으니 연애 정도는 하셨을 텐데. 만났다고 알려진 여자가 한 명도 없어서 게이라는 찌라시도 돈다던데, 아니겠죠?”
“눈이 매우 높고 깐깐하신 게 아닐까 싶네요.”
사촌 동생이 좋아하는 여자까지 단속할 정도인데 제 여자한테는 오죽할까.
그때 작은 손이 모단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언니, 같이 놀아요!”
효림과 모단이 만들어 온 손인형에 푹 빠져 있던 아이들이 곁으로 모여들었다. 모단은 기꺼이 자리를 잡았다.
“그래. 언니가 동화 들려줄까?”
“네!”
“언니, 잠깐만요! 나도 같이…… 아얏!”
조금 떨어진 곳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뛰어오다가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다. 모단이 얼른 일어나 다가갔다.
“무릎이 많이 까졌네. 얼른 밴드 붙여야겠다. 이리 와.”
우는 아이를 덥석 안아 올린 모단이 효림에게 눈짓을 하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아, 괜찮아. 언니가 금방 약 발라줄게. 약이 어디 있을까?”
원장실이든 어디든 누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모단이 우뚝 멈췄다.
몇 걸음 앞에 잘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