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역시 세상은 옘병이다
2017.09.13.
“괜찮아, 괜찮아. 언니가 금방 약 발라줄게. 약이 어디 있을까?”
원장실이든 어디든 누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모단이 우뚝 멈췄다.
몇 걸음 앞에 잘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눈에 익은 흰 가운과 은테 안경.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민철이 모단을 보고 있었다.
헤어질 때에 비해 살이 좀 붙었음에도 더 피곤하고 예민해 보였다.
‘……어쩐지 싸하더라니.’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한국대병원 치과 의료진들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거부감이 들어 밖에서만 머물렀다.
제가 아는 민철은 봉사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지만, 저도 꾸준히 봉사를 해와서 지금 여기 있는 건 아니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역시 세상은 옘병이다. 애타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끼리 마주치는 기적 같은 일보다, 죽을 때까지 안 보고 싶은 사람들끼리 마주치는 X 같은 일이 더 자주 일어나는 걸 보면.’
모단의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민철의 옆을 지나쳤다.
“아이가 다쳤나 보네요.”
바로 옆을 스칠 때,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멈출 뻔했다.
못 들은 척 피하려는데 민철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잡았다.
“비상약 있으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필요 없…….”
돌아본 순간, 민철과 같은 가운을 입은 사람들 몇이 지나가다 이쪽을 돌아보는 게 눈에 띄었다.
모단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고 옆에 있는 임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파티션으로 분리된 공간에 간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아이를 앉히고 달래는 사이 민철이 간단한 소독 도구와 약을 가져와 다친 무릎을 치료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아이에게 희미하게 웃어준 민철이 모단을 힐끗 보았다.
“……오랜만이다.”
파티션 바로 너머에서 듣지 않는 이상 모를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이렇게 둘이 보는 거.”
“둘이라니. 셋이 있는데.”
아이를 다시 안은 모단이 파티션 쪽을 힐끗 보았다.
“더 있을지도 모르고.”
그대로 나가려는데 민철이 말을 이었다.
“너 희명그룹 사내어린이집으로 옮겼다는 건 알고 있었어.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도. 반갑다는 말은 못 하겠다. 이만 가볼게.”
상처 주고 헤어진 사람과의 만남만큼 불편한 게 또 있을까.
모단은 그저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눈치가 유난히 빠른 아이가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내려주세요, 했다.
“언니, 나 가서 친구들하고 놀아도 돼요?”
“그럼. 같이 나가자.”
아이를 데리고 나가려는데 민철이 모단의 팔을 잡았다. 모단은 먼저 나가는 아이를 부르려다 차마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멈췄다.
“너한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왜 하필 희명그룹이야?”
원장님도 비슷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했었다.
국공립과 견줄 만큼 좋은 곳인데 왜 반응이 떨떠름한지 의아했던 기억이 났다.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직서를 받아주는 바람에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설마 뭐 알고서 일부러…… 아니, 아니다. 네가 그럴 애는 아니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게 왠지 선득했다. 미간을 찡그린 모단은 잡혔던 팔부터 빼냈다.
“여기서 이렇게 얘기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으니까 비켜줘.”
“잘 지내지?”
“뭐?”
“아픈 데는 없고?”
지금이 감성 터질 시간도 아니고, 봉사활동 하러 오면서 술을 퍼마시고 왔을 리도 없는데 그런 질문을 왜 하느냐는 말이 혀끝을 맴돌았다.
다음 순간, 더한 소리가 나왔다.
“만나는 사람은…… 있어?”
달갑지 않은 만남이니 최대한 조용하게 지나치길 바랐는데, 순간 화인지 짜증인지 모를 것이 치솟았다.
“지금 내가 오빠 부인도 잘 있느냐고 물어봐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
가뜩이나 복잡해 보이던 민철이 뺨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오랜만이라는 말에서부터 미련이 뚝뚝 떨어진다고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이건 아닌 거다. 모단은 냉랭하게 쳐냈다.
“만나는 사람 있어. 내가 오빠랑 눈 마주치면서 이런 질문에 꼬박꼬박 답해줬다는 거 알면 뒤집어엎고도 남을 사람.”
그 순간, 파티션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모단 씨, 여기 있어요?”
“네!”
누구 목소리인지 가늠해 보기도 전에 냉큼 대답했다. 덕분에 비로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고맙다고 하려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지협이었다.
“서연이랑 마주쳤는데 언니 혼자 저 안에 있다고 하기에.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니에요. 서연이가 다쳐서 데리고 왔었어요.”
뒤따라 나왔다가 어정쩡하니 멈춰 선 민철과 지협의 눈이 마주쳤다.
얼마간 뚫어져라 보던 지협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모단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안녕하십니까, 김민철 씨.”
모단의 눈이 커졌다.
민철은 이도 저도 아닌 표정으로 응수했다.
“백지협 이사님 아니십니까. 어떻게 여기서 뵙네요.”
“저도 자원봉사 동호회에 속해 있어서요. 의료봉사라니, 좋은 일 하시는군요.”
지협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민철은 그 손을 잡았다가 바로 놓았다.
“그런데 어떻게 모단 씨와 같이 계십니까?”
“별일 아닙니다. 아까 다친 아이를 제가 치료해 줘서.”
“그러셨군요.”
민철은 아까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 뭔가를 들은 건 아닌지 염려하는 게 분명했다.
안경을 벗어 든 민철이 한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 뗐다. 그의 눈 밑에 있는 점을 본 지협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되돌아왔다.
“난 또. 모단 씨가 어디 불편한 상황인 줄 알고.”
기분 탓인지, 지협의 말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친근하고 낫낫하게 들렸다. 누가 들으면 둘 사이를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마저 스칠 만큼.
모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준 지협이 민철을 돌아보았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네.”
창백하게 굳은 민철을 뒤로하고, 둘은 나란히 보육원 입구로 나왔다.
조금은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꼭 차 안에 둘이 남았을 때처럼.
‘하필 김민철이라…….’
지협은 고민에 빠졌다.
실은 얼마 전에 금지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백화점에서 여은과 마주쳤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들으란 듯이 모단을 희명 식구라 감싸며 오빠가 알면 가만 안 있을 거라는 말까지 했더니 찍소리도 못 하더라고.
괜한 소리라도 나돌면 골치 아프니 앞으로는 사람 많은 데서 소란 피우지 말라고 핀잔했다가 더 야단을 들었다.
[약혼반지까지 받아놓고 딴 놈이랑 사랑타령 하면서 파혼하고 결혼한 여자야! 사랑은 무슨, 지가 생각해도 오빠하고 희명그룹은 지 깜냥에 벅찰 것 같으니까 평생 저 떠받들어 줄 시원찮은 놈한테 간 거지. 오빠는 속도 없니? 열 받은 내가 이상한 거야?]
두 집안의 가족들조차도, 그 약혼이 제약회사의 협력이 필요한 지미의 연구소와 희명병원이 필요한 유손제약의 이득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만 생각했다.
그 뒤에 정략이라는 말을 빼도 좋을 마음이 있었다는 걸 유일하게 눈치챈 게 금지였다.
[애초에 약혼이라도 요란하게 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내가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두고두고 욕해줬을 거 아니야. 오빠 눈독들이던 다른 집안에서 유손제약 건드릴까 봐 결혼 날짜 잡을 때까지 밖으로 말 안 나가게 해준 것도 그 여자는 모르지?]
내심 신경은 쓰였으나 곧 잊었다.
말 그대로 우연이었을 뿐, 지금처럼 앞으로도 안 보고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엮여 있을 줄이야.
‘다음에 따로 얘기하자고 할까?’
지협은 바로 생각을 접었다.
그러려면 견 모르게 따로 둘이 봐야 한다는 것도, 그러다 얘기가 생각보다 깊어질 수 있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여기서 짧게 해결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언제 사람들이 오갈지 모르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역시 아까 나긋하게 들렸던 톤은 내 편을 간절히 원한 나머지 뇌가 일으킨 착각이었던 건가.
지협이 말꼭지를 떼자마자 모단은 그런 생각부터 했다.
“김민철 씨와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다른 때보다 더 차분하고 사무적인 투였다.
“본의 아니게 파티션 너머에서 들었습니다. 제가 서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못 들었을 거구요.”
모단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착잡한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지협이 아니라, 이따위 상황을 만든 김민철에게.
뜸을 들이지도, 변명을 하지도 않고 모단은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전 남자친구예요. 당연히 안 좋게 헤어졌고요.”
‘짐작은 했지만…….’
민철을 마주할 때조차도 평온하던 지협의 표정이 씁쓰름해진 것을 본 모단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근무시간 외의 동호회 활동이라지만 회사 이름을 걸고 나와 있는 것인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정모단 씨 잘못이 아닌 일은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딱하던 지협의 말투가 얼마간 누그러졌다.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는 법이니까.”
“그러게요. 정말 별 거지 같은 일이 다 있네요.”
그러게요, 까지만 한다는 게 얼결에 더 내뱉고 말았다. 다행히 지협은 미소로 넘어갔다.
“이사님은 저 사람을 어떻게 아세요?”
“전에 어떤 모임에서 소개받고 인사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괜히 물었구나 싶다. 유손제약 사위와 희명그룹 이사가 만날 법한 자리를 제가 알아 뭐 한다고.
“앞으로 더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좀 전에 말씀하신 대로, 견이는 모단 씨가 전 남자친구와 눈 마주치면서 질문에 꼬박꼬박 답해줬다는 거 알면 뒤집어엎고도 남습니다.”
“…….”
“그런 걸 떠나서라도 유부남과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단둘이 있는 걸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그리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진 않군요.”
모단의 윗입술이 솟았다 내려왔다.
“역시 시어머니…….”
“방금 뭐라고……?”
“아닙니다. 또 마이너스 받은 것 같네요.”
속없어 보이는 웃음으로 눙친 모단이 비죽 덧붙였다.
“재벌가 사람들은 연애하기 참 힘들겠어요.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일단 만나봐야 아는 경우가 태반인데, 그전에 이 집안에 어울리고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까지 따져야 하니.”
싸X월드 사진첩만큼이나 비공개하고 싶었던 전 남친을 들킨 충격 때문일까, 배짱 좋게도 심술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이사님은 연애 안 하시는 건가요?”
무표정하게 돌아보는 지협과 마주한 순간, 모단은 바로 허리를 접고 선처를 호소하려 했다. 한데 뜻밖의 대답이 툭 던져졌다.
“연애할 시간도 없어서 시답잖은 짝사랑이나 겨우 해봤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말도 안 된다고 하려다가, 모단은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전에 회장실이 있는 15층에서 어떤 남자가 그랬었다. 백지협 이사의 약혼이 깨진 적이 있다고.
하마터면 그럼 그건 뭐냐고 물을 뻔했다.
모단은 얼른 다른 말로 무례한 호기심을 눌렀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핑계 좋다고 했을 텐데 백지협 이사님은 진심으로 수긍이 가네요. 그 나이에 그 자리까지 올라가 인정받는다는 게 아무나 해내는 일은 아니니까요.”
“네. 많이 노력했습니다. 남들보다 더 갖고 태어난 만큼 기준도 높았거든요. 특히 견이보다는 몇 배나 더…….”
지협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눈을 깜박이던 모단이 입을 뗐다.
“백견 씨가 열두 살 때부터 아팠다고 했죠?”
“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에 제가 보던 아이 중에 굉장히 어른스러운 아이가 있었어요. 모든 걸 완벽하게 잘하려고 하는 아이요. 다른 아이가 말을 안 듣고 규칙을 어기는 것마저도 못 견뎌 해서 다툼이 생길 정도였어요.”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의아해하던 지협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까 아픈 동생이 있었더라고요. 온 식구가 아픈 아이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얘한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
“아픈 아이에게는 숨만 쉬어도 고맙다고 하면서, 얘가 잘하는 걸 칭찬해 줄 여유는 없었던 거예요. 근데 조금만 못하면 ‘너까지 엄마를 힘들게 해야겠니’ 같은 말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아이가 일종의 강박이 생긴 거죠.”
“더 잘해야 칭찬해 주시려나 보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나한테도 관심과 사랑을 주시지 않을까, 그런 강박이었겠군요.”
“……그렇죠.”
지협의 시선이 모단의 옆모습에 머물렀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잘 컸습니까?”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겠네요. 너무 애쓰지 말라고, 지금처럼 건강하면서 매일매일 행복하게 잘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줬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단이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연애할 시간 정도는 있는 남자로 컸으면 좋겠는데.”
피식, 입매를 늘인 지협이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모단도 미소를 지었다.
문밖을 힐끗 본 그가 먼저 자리를 떴다.
“누가 안에서 뭐 했느냐고 묻거든 제가 놀이실 정리를 부탁했다고 하세요.”
고개를 끄덕인 모단도 얼마간 더 머물다 밖으로 나갔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오가는 눈빛쯤은 보이는 거리에서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민철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번들거렸다.
***
월요일 아침, 어린이집에 온 견은 몹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주말 내내 그리고 그렸던 내 여자 품에 오자마자 안기려고 마음먹었는데, 이미 동후가 모단의 무릎을 차지하고 세상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린이집 문 앞에서 가기 싫다고 발버둥을 치다가 엄마한테 혼나고 들어왔다고 했다.
“동후야, 왜 어린이집에 오기가 싫었어?”
바로 옆에 앉아 한 손으로 삐딱하니 턱을 괴고 있던 견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어린놈이 아직 세상을 모르는구만. 살다 보면 울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데 고작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울어, 울기를.’
“힘든 일이나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어? 선생님한테 말해줄 수 있을까?”
동후가 모단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모단의 앞치마에 묻어나는 눈물콧물을 본 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냥, 흑. 집에서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요…….”
“엄마도 그러실 거야. 엄마도 일하는 동안 동후 많이 보고 싶어 하실 거고, 얼른 여섯 시가 되어서 동후랑 같이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실 거야.”
“아니에요. 엄마는 이제 나 안 예뻐해요. 우리 엄마는 새엄마 같아요.”
견의 입술이 실룩이다 꾹 다물어졌다.
‘역시 결혼은 하더라도 애는 안 낳는 게 좋겠어. 내 애라도 내 아내한테 하루 종일 붙어서 보채고 힘들게 하면 안 예뻐 보일 것 같으니까. 근데 정모단 씨는 애를 저렇게 예뻐하는데 어쩌지?’
견이 한참 앞서 가는 걱정에 빠진 사이, 모단은 동후를 더 꼭 안아주었다.
“그런 생각까지 할 만큼 속상했구나. 그런데 선생님이 보기에는 동후랑 엄마랑 똑같이 생겼는데? 특히 요 코가.”
모단이 동후의 코를 장난스레 쥐었다 놓았다.
“그리고 새엄마라고 해서 다 아이를 미워하고 그러는 건 아니야. 친엄마보다 좋은 새엄마도 많아.”
“정말요?”
“그럼.”
얼마간 더 다독여 주자 비로소 동후의 울음이 가라앉았다.
세수 한 번 시켜주고 친구들 쪽으로 보낸 후에 다른 일을 하려는데, 견이 불렀다.
“선생님, 이쪽으로 와보세요.”
의자 위에 서 있는 아이를 본 모단이 얼른 다가갔다.
“무탈아, 그렇게 올라가면 위험…….”
견이 길게 팔을 둘러 모단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까치발까지 하자 얼추 모단과 키가 비슷했다.
“매일 애기들 안아주느라 고생 많으시니까. 선생님은 내가 안아줄게요.”
모단은 팔을 풀고 방긋 웃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아이. 오롯이 저만 보는 시선.
누군가가 떠오르려고 했다.
어른 같은 이 아이와는 반대로, 아이 같은 어떤 어른이.
모단은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무탈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아준 건 고맙지만 의자나 책상에 올라가는 건 위험해. 대신 선생님이 이렇게 앉을게.”
견의 앞에 쭈그리고 앉은 모단이 미소를 지었다.
겨드랑이의 순결을 잃은 걸로도 모자라 맥없이 대롱대롱 들려 버린 그가 얼마나 큰 굴욕감에 휩싸여 있는지, 언젠가 이 수모를 갚아주겠다는 다짐까지 하고 있다는 건 조금도 모른 채.
“우리 무탈이, 모레부터 또 어린이집에 못 오면 선생님 어쩌지?”
“왜요?”
“선생님이 아는 사람 중에 누가 그랬거든. 삶을 달콤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누려보면 그게 없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진다고.”
모단이 견의 뺨을 다독였다.
보드라운 온도를 나누는 찰나.
모단은 손이, 견은 뺨이 녹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무탈이 없으면 선생님이 많이 허전할 것 같아서.”
또 올게요, 라는 말은 차마 안 나왔다.
대신 견은 다시 한 번 모단에게 매달리듯 안겼다.
‘지금 내가 딱 그 상태란 말입니다. 그렇게 단 걸 누려보고 바로 이 꼴이 되는 바람에 매일 보면서도 불만만 쌓이고!’
견이 팔을 풀었다.
“선생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하루에도 몇 번씩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를 연발하는 아이에게, 모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선생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