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조실부모한 연하의 취준생
2017.10.01.
“누구야, 그놈?”
딱 걸렸구나.
모단이 삐걱삐걱 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혜숙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어, 어디까지 봤는데?”
“집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다 봤네.
‘하긴, 손만 흔들고 헤어졌다 해도 이 시각에 집 앞이면 뻔하지 뭐.’
이루 말할 수 없는 민망함이 떼로 덤벼들었다. 모단은 웅얼웅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그게, 밥 먹고 한잔하면서 얘기하다 보니까 좀 길어져서. 다음부터는 일찍 들어올게.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 정말 별 사이 아니었거든. 오늘 약간의 발전이 있어가지고 뭔 일이 더 생기고 나서 말을 꺼낼까 말까 하던 참에…….”
“얘가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혜숙이 잘 안 보이는 글씨를 볼 때처럼 눈을 잔뜩 찌푸렸다.
“드라마 범인 물어봤더니 뭔 드라마를 쓰고 있대? 너 12화까지 봤다며? 11화 마지막에 윤담이 집에 들어왔을 때 뒤에서 친 놈 누구냐고 물어봤더니만.”
“아! 드라마 얘기 한 거였어? 난 또!”
모단의 목소리가 불쑥 커졌다.
“알려줄게! 당장 알려줄게! 스포 괜찮지? 윤담 뒤통수 깐 놈이 누구냐면 그 경찰청 윗대가리 중에…….”
“시끄러, 기집애야! 지금 그게 중요해?”
그게 중요해서 새벽까지 드라마 본 거 아니냐고 하려다 눈치껏 침묵했다.
혜숙이 컵에 든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본격적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남자랑 있었어? 그래도 용케 집에는 들여보내 줬구만? 어떤 놈이야? 몇 살이고 어디 살고 직업은 뭐야? 부모형제는?”
‘내가 이래서 당분간 안 걸리고 싶었는데!’
어느새 소파에 앉은 혜숙이 무섭게 손짓했다. 모단은 가방만 내려놓고 주춤주춤 엉덩이를 붙였다.
“엄마나 나나 날 밝으면 출근해야 하니까 짧게 합시다.”
“알았어. 아까 물은 것까지만 답해. 몇 살이고 어디 살고 직업은 뭐고 부모형제는 어떻게 되는지만.”
“내일 주민센터 가서 서류를 떼올까?”
혜숙이 눈을 부릅떴다. 모단은 냉큼 깐족을 접었다.
“나이는 스물아홉이고.”
“얼씨구. 연하야? 이왕이면 대여섯 살 어린 애를 잡지 고작 한 살 차이?”
“물론 내가 맘만 먹으면 대학생도 꼬실 수 있긴 한데 자제한 거야.”
“술주정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집은?”
“주정이라니! 술은 마셨지만 취하진 않았어. 어쨌든 집은…….”
고작 나이 하나 털어놨을 뿐인데 벌써 난감했다.
땅값 비싸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들 동네에 있는 저택에서 비서랑 산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고.
모단은 얼렁뚱땅 넘겼다.
“가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는데 아무튼 서울에서 자취해.”
이건 뭐 거의 5성급 호텔과 여인숙을 숙박업소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수준이다.
“가족관계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할아버지가 키워주셨고 사촌 형네하고도 가까운 것 같고. 대충 그렇대.”
그 할아버지가 희명그룹 회장이라는 걸 빼고 말하니까 불우한 청년 느낌까지 난다.
“직업은?”
“응?”
“직업은 왜 빼먹어?”
이게 제일 문제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라고 할 수도 없고. 모든 직장인의 로망인 돈 많은 백수라고 할 수도 없고.
모단은 치열한 고민 끝에 말을 골랐다.
“취…… 취업 준비생.”
희명그룹 상속자가 졸지에 조실부모한 연하의 취준생이 되는 순간이다.
혜숙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멀쩡한 회사 잘 다니는 남자들 맞선 자리마다 뻥뻥 차놓고, 뭐? 취준생?”
“능력 있어, 엄마! 진짜야! 어마어마해!”
“어마어마한데 왜 아직도 직장을 못 구했어?”
“몸이 좀 아파서…… 아차차.”
“뭐가 어째? 몸뚱이까지 시원찮어? 근데 대체 뭘 보고!”
“얼굴이 좀 괜찮…… 많이 괜찮아.”
“이놈의 기집애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 아퍼! 나 지금 엄청 억울하다, 엄마!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여지없이 등짝 스매싱에 강타당한 모단이 발을 굴렀다.
“우리 이 여사님 왜 이러실까! 사람 보지도 않고 조건부터 따지시는 분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엄마 딸도 특A급은 아니야!”
“네가 뭐 어때서!”
그 말이 혜숙의 심기를 더 건드린 듯했다.
“진정해, 엄마. 내가 지금 결혼하겠다고 들이미는 거 아니잖아.”
“20대 초반도 아닌데 결혼 생각 아예 없이 만나는 것도 문제지!”
“희명그룹 다니다가 몸이 안 좋아서 잠깐 쉬었는데 다시 일할 거래. 관리만 잘하면 일상에 아무 지장 없고.”
희명그룹이라는 말에 조금 가라앉은 것 같긴 했으나, 그래도 영 마뜩찮은 눈치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엄마도 알잖아. 나 이제까지 아무도 못 만났고 안 만날 거라고 했던 거.”
침묵하던 혜숙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런 생각 하는 나도 참 못됐지만은, 차라리 무던한 허물 한두 개쯤 있는 사람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들도 꿀리는 게 있어야 남의 집 귀한 딸 안 무시할 거 아냐.”
“엄마.”
민철과 헤어진 진짜 이유를 모르는 엄마는, 얼마 되지도 않아 그가 유손제약 딸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단보다 더 가슴 아파했었다.
‘꿀리기는커녕 몇십 배는 더 대단하다는 거 알면 뒷목 잡으실 것 같으니까 당분간 입 다물자.’
모단이 굳게 다짐하는 사이, 혜숙도 맘을 가다듬었다.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연애 많이 해. 어차피 완벽한 놈은 없으니까 쓰레기 같은 놈들만 거르면 되지. 어느 정도 기본은 갖춘 보통 남자들 만나서 이런 연애도 해보고 저런 연애도 해보고 그래.”
“알았어.”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니까 싫은 일 힘든 일 생기면 굽히고 맞춰줄 생각하지 말고 차버려. 알았어?”
“아, 알았다고.”
모단이 먼저 일어섰다.
“나 오늘 엄마랑 같이 자도 돼?”
“더워, 기집애야.”
“좀만 기다려! 나 씻고 베개 들고 갈 테니까.”
“다 큰 게 어리광은.”
씩 웃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는 모단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혜숙의 입에서 다시금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리 모단이, 그래도 혼자 살면 안 되지. 나 죽으면 쟤한테 누가 있다고.’
마른 손이 무릎 위의 옷자락을 몇 번이고 쓸어냈다.
‘좋은 남자한테 시집까지 잘 보내야지. 남편 사랑 듬뿍 받으면서 저 닮은 애 두엇쯤 낳아서 잘 키우는 것도 봐야지. 그래야 내가 나중에 저세상 가더라도 쟤 아버지 볼 낯이 있지. 그 여자한테도 보란 듯이 한마디 하지.’
끄응, 하고 몸을 일으킨 혜숙이 훌쩍 소리를 내고는 코끝을 세게 문질렀다.
‘당신이 낳아놓기만 하고 거들떠도 안 봤던 그 예쁜 아이가,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 보라고.’
***
눈이 아리도록 화려한 곳이었다.
분명 동화 속 무도회장처럼 아름다운데, 다들 웃고 있는데, 나 혼자서만 감당하기 힘든 감정에 짓눌려 있었다.
그래서 그 안의 모든 것들이 화면과 음악이 맞지 않는 영화처럼 기묘해 보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어른들 뒤에 바짝 붙어 걸어가다가 운 좋게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혹은 미미한 호기심이 담긴 시선이 스칠 때마다 심장이 조마조마하다 터질 것만 같았다.
아빠의 회사는 곧 망할 것 같다고 했다. 아빠도 쓰러졌다.
그 모두를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인 엄마를 보면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건 돈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을 떠올렸다.
나를 낳아줬지만 엄마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은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외할아버지.
사람들 사이를 헤매다 그분을 발견했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결코 반가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아빠를 택하는 바람에 친정과 인연을 끊고 살았던 그 여자는, 고작 1년도 되지 않아 식어버린 열정을 책임지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결국 이혼했다.
그때 처음으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보았다. 더 이상 아빠의 아내도 내 엄마도 아니게 되어서야 다시 딸로 인정하고 데리러 왔던 그들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큰 차의 뒷좌석에서 내리던 사람들.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고, 그저 나를 거들떠보고 돌아서던 싸늘한 눈빛만 기억에 남았다.
두 번째로 본 건 아홉 살 때였다.
그 여자는 낫지 못할 병에 걸렸다고 했다. 가뜩이나 말랐던 그녀는 그야말로 뼈만 남아 앙상했다.
그때 처음으로 외갓집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처음이자 마지막 식사를 같이 했다. 그때마저도 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본 게 열세 살, 그날이었다.
이미 그 여자는 세상에 없었다. 그러니 이제 그들과 나의 연결고리는, 물론 피가 섞여 있긴 했겠지만,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용기를 짜내어 그를 불렀다.
“……할아버지.”
돌아본 그는, 놀라울 만큼 무표정한 눈으로 한참 나를 내려다보았다.
“초대장 없이는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네가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그래도 알아봐 주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철없게도.
냉혹한 시선에 살갗이 베이는 것 같았음에도 꾸역꾸역 말을 꺼냈다.
아빠가 아프다고. 아빠의 회사도 쓰러져 간다고.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도와달라고.
나한테는 할아버지가 마지막 끈이라고.
“그래, 얼마면 될까?”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도와주고 싶어 묻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아무리 어려도 알 수 있었다.
“착각하지 마라, 얘야. 너는 내 딸의 아이도, 내 손녀도 아니야.”
내려다보던 눈길과 싸늘한 목소리.
“너만 아니었어도 내 딸이 그렇게 쉽게 그놈을 따라나서진 않았을 거다. 비루하게 살다가 죽지도 않았겠지. 그런데도 내가 널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 거냐?”
감추지도 않던 비웃음.
“뻔뻔한 건 꼭 네 아비를 닮았구나. 내 딸은 그렇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그 여자가 나를 보던 바로 그 눈빛.
너만 아니었어도. 그런 원망과 적의가 켜켜이 쌓여 있는.
어떻게 몸을 돌려 빠져나왔는지 모른다. 그렇게 정신없던 와중에 부딪힌 거였다.
그 아이와.
나를 내친 그들과는 달리, 내가 너무나도 필요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찾아준 그 남자와.
***
“흐윽…….”
모단은 눈을 뜨려다가 다시 감았다. 베개에 얼굴을 문질러 잠결에 배어난 눈물자국을 다 닦아내고서야 겨우 눈을 떴다.
예전만큼 가슴이 아프진 않았다.
끔찍한 악몽인 건 변함없지만, 이제는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으로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어스름한 새벽 빛 사이로 곤히 잠들어 있는 혜숙의 옆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혜숙과 처음 만났을 때가 가끔 생각나곤 했다.
“세상에. 학교 다녀와서 겨우 이것 먹고 이제까지 혼자 있었다고? 정 사장님! 이렇게 예쁜 딸을 두고 일이 손에 잡혀요? 회사도 회사지만 애를 먼저 키워야죠!”
이미 부모보다 남이 더 익숙했던 나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부터, 나를 낳은 여자는 엄마 노릇을 거부하고 베이비시터를 들였다. 그럴 형편이 아니라며 아빠와 싸우던 것도 여러 번 보았다.
그랬던 아빠도 나를 도우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얄궂게도 이혼한 직후에 벤처 붐이 일면서 회사가 무서운 속도로 커진 거였다. 가난해서 악착같이 일하느라 바빴던 아빠는 이제 돈을 쓸어 담느라 바빴다.
그 도우미가 갑자기 그만두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당분간 혼자 지냈을 뿐인데. 걸핏하면 쥐어박는 아줌마가 없어서 오히려 좋았는데.
아빠와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혜숙은 태어나서 지금껏 혼자 살아온 애라도 보는 양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가 아빠한테 막 화를 냈다.
표현이 서툴렀던 아빠와 얼음 같던 그 여자.
그들만 보고 자란 내 눈에,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변하고 목소리가 바뀌는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유치원에서 새윤이를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신기했다. 저렇게 잘 웃고 잘 울고 좋고 싫은 걸 다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그 이후로 혜숙은 가끔씩 아빠를 통해 선물을 챙겨 보내고,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조금 가까워진 후에는 목욕탕에 데려가기도 하고, 미용실에서 나란히 머리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이 많은 혜숙이라서 그랬다.
일 외에 다른 데서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제대로 된 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 외로운 줄도 모르는 멀뚱한 아이가 맘에 걸리고 눈에 밟혀서, 그렇게 자꾸 신경을 쓰다 보니 가족이 되어 있더라고 했다.
그녀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주변에서 새엄마가 어쩌고 한다 해서 섣불리 혜숙을 오해한다거나 하는 철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친엄마도 그렇게 쉽게 버린 저를, 당연한 것처럼 품어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부스럭대는 기척을 눈치챈 혜숙이 웅얼거렸다.
“아직 알람도 안 울렸는데 좀 더 자지 않구.”
눈도 뜨지 않았으면서 기가 막히게 이불을 잡아당겨 덮어주고 도닥여 주기까지 한다.
모단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
“왜.”
“……사랑해.”
“잠꼬대야? 얘도 참.”
몇 번쯤 더 다독이던 손길이 느려지더니 스륵 떨어졌다.
얕게 코 고는 소리를 듣고 있던 모단은 혜숙의 손을 찾아 쥐고 눈을 감았다.
‘잘할게, 엄마. 일이든 연애든 사는 거든 뭐든. 엄마 속상하지 않게, 나 괜히 키웠다는 생각 들지 않게 정말 잘 살게.’
***
띠링띠리링. 드르륵.
머리 위에서 소리와 진동이 가열차게 울려댔다.
습관적으로 알람을 끄려던 모단은 소리가 다르다는 걸 깨닫고 간신히 한쪽 눈을 떴다. 훨씬 일찍 출근하는 혜숙은 벌써 일어났는지 옆이 텅 비어 있다.
“뭐야. 이 시각에 웬 전화…….”
비몽사몽간에 휴대폰을 귀에 댔다.
“여보세요…….”
[잘 잤어요?]
‘이 달짝지근하고 훈훈한 멘트는 뭐지? 잘못 건 거 아니야?’
[일어나요, 모단 씨.]
‘내 이름이잖아. 꿈인가?’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아, 맞다! 나 간밤에 남자친구 생겼지.’
순간 왈칵 울 뻔했다.
아침에 다정한 남자 목소리를 들어본 지가 얼마나 오래됐으면, 뇌에서도 현실이 아니라고 거부하려 들었단 말인가.
한 박자 늦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어나라는데 일어나기 싫어지고, 봄날의 오후 세 시처럼 더 노곤해지게 만드는 목소리다.
[안 끊어졌는데. 다시 잠들었나?]
혼잣말을 흘린 견이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왔다.
[모단아, 자?]
모단은 커헉 숨을 삼켰다. 태어나 셀 수도 없이 들은 이름인데 등줄기가 쭈뼛쭈뼛했다.
‘씨’ 자와 ‘요’ 자, 달랑 두 개 뺐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묘하게 들릴 줄이야!
모단은 이불 속에서 몇 번 몸을 뒤틀어 박살 난 심장을 간신히 다시 붙였다.
“밤새 혼자서 한 살 더 먹었어요? 왜 갑자기 친구가 됐지?”
일어났네, 하는 목소리와 작은 웃음소리가 섞여 넘어왔다.
[한 살 차이면 동갑 아닌가?]
“나 초등학교 1년 일찍 들어갔어요. 두 살 차이 나는 거나 다름없는데 어딜.”
[학교로 따져요? 그럼 고등학교 졸업은 같은 해에 했으니까 동갑 맞네.]
학교 다니기 힘들어서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1년 만에 졸업했다고 했었나.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이름 불릴 때마다 매번 몸을 배배 꼴 수는 없으니까.
“까불지 마요.”
안 까분다는 대답은 없고 웃음소리만 들렸다.
[모단 씨 지각하면 안 되니까 짧게 통화하고 끊어야겠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이번에는 모단이 웃었다.
“무탈이라고, 어린이집에도 걸핏하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하는 애가 있는데. 똑같네요.”
무심코 한 말인데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아니에요. 절대 안 똑같아요. 난 사실 세 가지 물어보려고 했어요.]
“뭘 또 그렇게까지 따져요? 물어보세요.”
[어젯밤에 있었던 일 다 진짜 맞죠? 길고 구체적인 꿈을 꾼 건가 의심스러워서.]
모단은 구연동화로 갈고닦은 연기력을 끄집어냈다.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어요?”
[나 방금 진짜로 철렁했는데.]
“왜요? 난 정말 모르겠는데.”
[정말 그게 다 꿈이라고요? 내가 모단 씨한테…… 그리고 모단 씨도…….]
성인인증부터 하고 들어야 할 것 같은 키스썰이 신들린 어휘력을 타고 줄줄 풀려 나왔다. 끈적하기가 가히 악마의 초콜릿 급이다.
기겁한 모단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 그만해요! 실화 맞으니까 그만하라고!”
[한 번만 더 별일 아닌 척하면 더 생생하게 되새겨 줄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그럼 두 번째. 오늘 뭐 입고 출근할 거예요?]
“그걸 왜 물어요?”
[솔직히 지금 뭐 입고 있는지가 더 궁금하긴 한데 그거 물어보면 혼날 것 같아서요.]
편하다 못해 후줄근한 옷을 내려다본 모단이 쓰읍 입맛을 다셨다.
“옷 같지도 않은 거 입고 있어요. 회사에는 옷 같은 거 입고 갈 거고요. 됐어요?”
[왜 묻지도 않은 거 알려주고 그래요? 아침부터 사람 힘들게! 그리고 집에서도 헐벗고 다니지 마요! 나랑 살 거 아니면.]
안 혼내고 순순히 대답해 줬더니 되레 야단이다. 옷 같지도 않다는 말이 걸치나마나 한 야시시한 옷으로 잘못 입력된 모양이다.
“백견 씨는 변태 같은 소리를 되게 당당하고 산뜻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거 알아요?”
[알아요. 낮에도 저질, 밤에도 저질인데 얼굴이 최고급이라 커버되는 거.]
“자랑이다…….”
[자랑이죠. 나만 자랑인가? 모단 씨한테도 자랑이지. 그런 의미에서 이따 퇴근하고 볼 수 있어요?]
“네.”
[데리러 갈까요?]
“회사 앞은 위험해요.”
[전에 회사 앞 버스정류장에서도 본 것 같은데?]
“이제까지는 떳떳하게 아무 사이 아니었으니까 크게 신경 안 썼는데 이제는 신경이 쓰이네요. 너무 자랑스러워서.”
전에는 정말 몰라서 용감했던 거다.
회사 사람들과 출퇴근 시간이 다르고 사람이 많은 정류장도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도 제 눈엔 백견이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기에 막 봤던 거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짐작조차 못한 채.
여태 회사에 아무 말도 돌지 않았다는 게 기적적인 거다. 이제부터라도 조심해야지.
“백견 씨는 오늘 뭐 해요?”
[할아버지하고 다녀올 데가 있어요. 그럼 이따 봐요. 출근 잘하고요.]
“네.”
통화를 마치고 나서야 알람이 울렸다. 모단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이런 아침이 얼마만이더라.’
조금 더 실감이 났다. 완전히 익숙해지려면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제 확실히 와 닿았다.
‘나, 정말 연애 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