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정모단 한정 변태
2017.10.04.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 견은 백희명 회장과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같이 나오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요샌 집에도 통 안 오니 말이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요새 계속 바빴어요.”
“그 아가씨 만나느라?”
“하하. 그것도 그렇고요. 살면서 이렇게까지 절실해 본 적은 처음이라서.”
어떤 일이든 대충 한 적은 없지만 절박하게 매달린 적도 없었다.
넓게 보고 멀리 계산하되 앞선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안 될 리 없다는 판단이 늘 위에, 그 아래에는 어떻게든 되게 할 수 있다는 오만이 깔려 있었으니까.
그러나 모단은 이제껏 습관처럼 쌓아온 그의 여유를 보란 듯이 허물어뜨렸다.
견은 그녀를 통해 겁이라는 걸 배웠다. 막연히 안 좋은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어뜩함을 느낄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래. 일이든 사람이든 몰두해야지. 죽자고 해보고 끝을 봐야 후회가 안 남는 법이니.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고 몰아붙이다 그르치지는 말고.”
“명심할게요.”
최종 테스트만 남겨두고 있는 블라인드 공모전에 대해서는 백 회장에게도 함구했다.
견이 지원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지협뿐이었다. 그 역시 결과까지는 몰랐다. 수많은 기획안 중 만장일치로 탄성을 자아낸 게 아마도 견의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하고 있었다.
“내가 죽기 전에 데려와 다행이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백 살은 거뜬히 사실 것 같은데 죽기 전이라는 말씀은 왜 붙이세요? 그리고 모단 씨 만나보셨어요?”
“방금 너한테 서두르지 말라고 해놓고 내가 그랬을 것 같으냐? 먼발치에서 우연히 봤다.”
견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나왔던 날, 호르몬시터를 찾았음을 알게 된 백 회장은 만감에 휩싸였다.
아주 오래전, 호르몬시터가 또래의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얼마간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중년 이후까지 상대를 꾸준히 곁에 두는 방법 중 가장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건 역시 결혼일 테니까.
반대할 마음도 없고 그럴 처지도 못 되지만 전혀 궁금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라, 모단의 퇴근시간 즈음에 집 근처로 찾아가 본 적이 있었다.
그날 차 안에서 보았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가, 정류장 귀퉁이에 나물 몇 가지를 뭉뚱그려 놓고 있던 어느 할머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웃으며 말을 거는 모습을.
“아이고, 아가씨가 뭐 해먹을 줄 안다고 이런 걸 사. 노인네가 궁색해 보여서 그러는 거면 관둬. 괜히 가져가서 버리지 말구.”
“버리긴 왜 버려요, 할머니. 제가 나물 무칠 줄은 몰라도 엄마가 무쳐 주신 거 잘 먹을 수는 있거든요. 엄마가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이런 데서 직접 다듬어 파시는 게 훨씬 맛있다고 지나가다 보면 꼭 사오라고 하셨으니까 이거 다 주세요.”
다 시든 나물을 꾹꾹 눌러 담은 까만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꾸벅 인사까지 하고 멀어지던 뒷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언제 보셨기에 나쁜 사람 같진 않다고 하실까. 사람 보는 눈 깐깐한 백 회장님께서.”
“하나를 보면 열까지는 아니고 대강 다섯쯤은 알 수 있는 법이지.”
그날 이후 더 이상 볼 필요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백 회장은 비서에게 이런저런 조사를 시켜 볼까 맘먹었던 것도 접어두었다.
손주의 고통을 두고 감히 이러면 안 되겠지마는, 어쩌면 그 병이 독이 아니라 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날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비슷한 집안에서 며느릿감을 보겠다고 그 어린 아이들과 부모들을 한자리에 모아두고 하나하나 품평하듯 살피지 않았던가.
좋은 사람은, 진짜 꼭 필요한 조건은 그렇게 따진다고 보이는 법이 아님에도.
“할아버지. 저요, 얼마 전에 처음으로 아파서 고맙다는 생각을 했어요.”
백 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 병이 계기가 되고 접점이 되어서 정모단 씨를 만났으니까요.”
곧 서른이 아니라 마흔, 쉰이 된다 해도 언제까지나 아이로 보일 것만 같던 손주는 어느새 제법 어른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아프지 않았다면 저, 이렇게 좋은 여자를 바로 앞에 두고도 못 알아봤을 것 같거든요.”
가히 프로 집착러라 해도 좋을 만큼 온갖 것에 집착해 봤지만 끝은 항상 허전함이었다.
딱 한 걸음만 빠져나와서 정말 이게 없으면 안 되는지 자문해 보면, 그건 아니라는 답과 함께 급격히 마음이 식곤 했다.
그러나 모단에 대해서만큼은, ‘만약 없으면’까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생존이 걸려 있으니까, 평화로운 일상에 대한 욕심을 안 낼 수가 없으니까 그런 건지도 모른다고 냉정하게 파고들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 물어보마. 만약 다른 방법으로 네가 나아질 수 있다고 해도 그 아가씨를 놓지 않을 것 같으냐?”
방금 백 회장이 한 것과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네.”
“그럼 됐다.”
그럼 된 거였다.
이제 나는, 그녀 하나면 된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좋은 기분이 들고, 만날수록 내가 더 나아지는 것 같다면 충분히 좋은 인연인 게지.”
“전생에 내가 착한 일 좀 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더 완벽한 거죠?”
운전석에서 커흠, 소리가 넘어왔다.
‘뒷좌석에 있는 팔불출 때문에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슈, 나는 전생에 왜구가 쳐들어올 적에 성문을 직접 열어준 놈인가 봐유’ 하는 섭호의 항의였다.
“그렇다고 혼자 취해 있진 말고. 상대방도 같은지 늘 잘 살피도록 하고.”
“네.”
얼마 후 차가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섭호가 백 회장 쪽의 문을 열어드렸다.
“고맙다, 섭호야.”
반대쪽으로 내린 견이 백 회장의 옆에 섰다.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인 섭호가 운전석으로 돌아가고, 백 회장과 견은 눈앞의 건물로 들어섰다.
―갤러리 한.
큰 미술관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이지만 탁월한 기획과 수준 높은 전시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신인 작가들의 창작 민화와 희귀 개인소장 민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먼저 와 있던 한규철 사장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회장님.”
“허허. 오랜만에 뵙습니다.”
패션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한성어패럴의 사장이자 이 갤러리의 소유주인 그는, 특히 동양화에 관심이 많아 백 회장의 컬렉션에 적잖은 영향을 준 이였다.
견도 단정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오, 그래요. 이게 얼마만이야. 여전히 인물이 훤하구만.”
둘의 대화는 거기까지가 다였다.
사실 한 사장과 견은 다소 껄끄러운 사이였다. 예전에 블랑아이 론칭을 준비하며 거래처를 선정할 때 한성어패럴 대신 다른 업체를 낙찰한 일 때문이었다.
견은 사적인 친분을 배제하고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훨씬 나은 곳을 선정한 것뿐이었지만, 한 사장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동안 그림을 계기로 백 회장과 ‘사적인 친분’을 착실히 쌓아왔으니 모종의 혜택이 돌아올 거라 믿은 거였다.
견이 소위 말하는 관행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걸 모른 탓이었다.
그 이후로 한 사장이 견을 대하는 태도는 얼마간 냉랭해졌다. 물론 견은 거리낄 게 없었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블랑아이 대표가 변진상으로 바뀌고 나서야 거래를 틀 수 있었고, 그 후부터는 얼마간 유해지긴 했다.
“역시나 눈이 즐겁습니다. 한 사장님 안목은 여전하시군요.”
“제가 뭐 한 일이 있겠습니까. 직원들의 노고지요. 흡족하시다니 다행입니다.”
견은 담소를 나누는 백 회장과 한 사장에게서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어느 그림 앞에서 멈춰 선 그는, 마침 옆에 서 있던 갤러리 직원을 돌아보았다.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여기 이 그림 속에 있는 나비 말입니다.”
“네? 네.”
얼굴을 붉힌 여직원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얼른 다가왔다.
그림을 돋보이게 하고자 부드럽게 낮춘 조명인데, 그림이고 뭐고 눈앞의 남자만 돋보인다.
“이 나비 날개에 칠한 색을 두고 모단색이라고 하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진한 곳은 모단에 먹을 섞었고, 끝부분은 호분(胡粉, 백색)으로 바림(그라데이션)해 표현한 작품입니다.”
은은하고 섬세한 나비 날개를 한동안 바라보던 견이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예쁘네요.”
걸음을 옮기던 백 회장과 한 사장이 가장 큰 작품 앞에 섰다.
꽃 중의 꽃, 목단(牧丹) 혹은 모단(牡丹)이라고도 불린 모란꽃의 화려함이 오롯이 담겨 있는 8폭짜리 모란도병풍(牡丹圖屛風)이다.
“이게 바로 전에 말씀하셨던 한 사장님의 소장품이로군요.”
“예. 이렇게 밖에 내놓은 건 처음입니다.”
한 사장이 유리 전시장 안에 갇힌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딸아이가 사사(師事)한 민옥 교수의 작품입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이기도 하고요.”
“따님 생각이 많이 나시겠습니다.”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지요.”
“자식 앞세운 부모 심정을 누가 감히 헤아리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애끓는 공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사장이 화제를 돌렸다.
“백견 군은 언제쯤 경영에 복귀하는 겁니까? 아까운 인재 아닙니까.”
“곧 하겠지요. 희명이 아니더라도 뭐라도 할 아이입니다.”
남은 작품을 마저 감상하고 인사를 한 후에 백 회장과 견은 밖으로 나왔다.
아까 그 자리에 세워져 있는 차로 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서 은발을 질끈 묶은 여인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민옥 교수 아니냐?”
시력이 좋지 않은 백 회장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때, 한 여자가 빨간 차에서 내리더니 얼른 뛰어와 민 교수 옆에 섰다.
백 회장보다 먼저 그녀를 알아본 견은, 섭호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백 회장을 슬쩍 밀었다.
“가요, 할아버지.”
“응? 인사 정도는…….”
견도 얼른 차에 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야 창 너머로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백 회장이 헛기침을 했다.
손주며느리가 될 줄 알았던 아이, 여은이었다.
결혼을 전후해 붓을 놓았지만 그녀 역시 민옥 교수의 제자였었다.
백 회장은 창문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바로 집으로 가야지.”
차가 출발했다.
“너희들도 오랜만에 집에 들러 밥이나 먹고 가지 그러냐?”
“섭호만 든든하게 챙겨주세요. 여자친구도 없는 불쌍한 애니까.”
방금 차가 흔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거니 한 견은 해맑게 덧붙였다.
“죄송하지만 전 당분간 불효 좀 할게요. 하루라도 안 보면 눈에 가시가 돋치는 그런 때라서.”
***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남은 일이 많았어요? 아니면 버스가 늦게 왔어요?”
“끝나자마자 온 거예요. 버스도 바로 왔고.”
어쩌다 보니 보름 때마다 보는 아지트처럼 되어버린 북카페가 있는 동네.
둘은 창밖으로 보기만 했던 공원 안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하는 동안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일하는 동안 딴생각하면 자칫 애들 다쳐요.”
“맞는 말이고 연락 못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생각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10초면 되는데. 밥 안 먹어요? 화장실 안 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팔은 벤치에 턱 걸쳐 놓은 자세로 견의 앙탈을 감상하던 모단이 코를 찡그렸다.
“나한테 ‘오빠,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까지 할 생각은 아니죠?”
“그건 안 하죠. 모단 씨가 왜 내 오빠야.”
견이 한 손으로 모단의 턱을 가볍게 잡아 제 쪽으로 돌려놓았다.
“누나.”
슬며시 모았다가 벌리는 입술 사이에서 퍽 새침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요?”
모단은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뒤틀었다.
“아으, 악! 누나라니! 차라리 오빠라고 해요! 형이라고 하든가!”
“형은 절대 아니던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 견이 손을 올리더니 허공의 공기를 볼륨감 있게 움켜쥐었다 놓았다.
그 요망한 손동작이 정확히 제 가슴 높이에서 이루어졌음을 깨달은 모단의 뺨이 대번 새빨개졌다.
“알겠어요, 달라진 거! 어제보다 더 변태 같아졌네.”
“아닌데? 나 원래 이랬는데? 누나 나한테 관심 없구나?”
“하지 말라고!”
기어코 팔뚝에 손맛을 본 견이 빙구 같지만 설레는 눈웃음을 떨어뜨렸다.
“어제보다 더 잘생겨 보이지 않아요? 원래 내 남자 되면 더 괜찮아 보이는 법이라던데. 남들 눈에는 안타깝지만 임자 있는 남자라는 분위기까지 팍팍 풍길 거고. 톨앤핸섬 영앤리치로도 모자라서 굿와이프까지 갖춰졌달까.”
싱거운 대답에 몇 대 더 맞았다.
“누가 와이프예요, 누가.”
“우리 집에선 이미 허락 다 받았어요. 언제든지 장가가래요. 내가 좋다는 여자면 무조건 좋으시다고.”
“거짓말하지 마요. 보통 부모님들도 말만 그렇게 하시는데 재벌가는 오죽하겠어.”
“진짠데. 우리 집은 보통 재벌가가 아니라 사연 많은 재벌가라서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독한 어른들이나 재산 싸움 같은 거 없어요. 지협이 형은 조금 따질 수도 있겠지만 그 집도 그렇게 심하진 않을 거예요.”
견이 뭔가를 더 말하려다 말고 커피를 쪼옥 빨아올렸다.
초여름의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머리 위의 나뭇잎들을 흔들었다.
처음 북카페 안에서 이 공원을 내려다보았을 때는 분홍 꽃잎을 터지도록 머금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딜 봐도 초록투성이다.
“백지협 이사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무슨 얘기 못 들었어요?”
“지협이 형한테요? 무슨 얘기요?”
아무도 몰랐다면 절대로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만, 지협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맘에 걸렸다. 괜스레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찜찜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이런 기분 느낄 필요가 뭐 있나 싶어 스스로 털어놓기로 했다.
“전에 자원봉사 하러 갔던 보육원에서 전 남친을 만났거든요. 백지협 이사님하고 같이.”
“푸흡!”
견이 마시던 커피를 요란하게 뿜었다. 모단이 얼른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내밀었다.
간신히 셔츠를 살려낸 견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게 그렇게 길 가다 동창 만났다는 투로 할 얘기야?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다 꺼내봐요. 내가 모르는 거 없게. 얼른!”
모단은 최대한 덤덤하게 그날의 일을 대강 털어놓았다.
견은 눈매를 차게 굳히고는 입 한 번 떼지 않았다. 모단의 얘기가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화났어요?”
“내가 왜요.”
“개한테도 질투하는 남자니까?”
때마침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여자가 앞을 지나갔다.
직진하던 강아지가 모단의 발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견과 눈이 마주치고는 얼른 되돌아갔다.
딱히 째려보거나 한 건 아닌데, 개마저도 지금 견을 둘러싸고 이글대는 질투의 불꽃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이런 여자가 여태껏 연애 한 번 안 해봤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근데 그냥 그랬겠구나 하는 거랑 직접 듣는 건 다르네요.”
넓디넓은 견의 어깨가 추욱 늘어졌다.
“나는 모단 씨 만나기 전엔 정말 아무도 눈에 안 들어왔는데. 모단 씨 마음에는 이미 들어왔다 나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진 않아요.”
모단은 입 안쪽의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금 엄청나게 심각하다는 건 알겠는데, 어쩐지 심장이 간질간질한 게 웃음이 나려고 했다.
엉뚱한 이유로 울음이 터진 아이를 달래줘야 할 때와 비슷했다. 애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데, 저는 귀여워서 볼따구를 확 깨물어주고 싶은 그런 심정.
큼큼,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한 모단이 목소리를 깔았다.
“백견 씨. 지금 내 마음 재활용품 취급하는 거예요?”
“네?”
“딴사람 줬다가 돌려받아서 대충 닦고 구겨진 데 펴서 다시 준 것 같냐고요.”
“아뇨!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한 번 주면 끝! 그때 그 마음은 더럽게 아작나서 깔끔하게 버렸어요.”
모단이 견의 손을 잡고 제 무릎 위에 올렸다.
“그래서 난 이제 누구 줄 마음 같은 거 없는 줄 알았는데, 백견 씨 만나고 나서 어느 순간 보니까 옛날 옛적 어설펐던 마음보다 훨씬 더 괜찮은 마음이 이만큼 자라 있더라고요.”
견의 눈매가 슬금슬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걸 준 건데.”
모단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는 턱을 당겼다. 그 각도에서 올려다보자, 자연스레 뭔가를 조르는 표정이 되었다.
어지간히 급할 때가 아니면 함부로 안 쓰는, 한동안 끊고 살았던 나름의 애교다.
한데 견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묘한 무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세상 민망해진 모단이 얼른 눈에 힘을 풀었다. ‘그고 준 곤뎅’ 하고 콧소리까지 냈으면 영영 못 볼 뻔했다.
다신 안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견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물었다.
“공공장소에서 키스하는 거 좋아해요?”
비명을 삼킨 모단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럴 리가 있어요? 그거 경범죄라고!”
“그럼 차로 가요.”
“안 가요!”
어설픈 애교 따위 씨알도 안 먹힌 줄 알았는데, 제대로 먹히다 못해 과다복용됐나 보다.
모단은 필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으나 어느새 두 손이 단단히 깍지까지 껴서 붙들려 있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예요? 밖에서도 안 된다 하고, 차도 안 간다 하고. 어디 따로 하고 싶은 데라도 있나?”
“나중에 하면 되잖아요! 지금은 1단계, 그래, 2단계까지만 하자고요!”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모단 씨가 건드렸잖아요.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눈을 그렇게 떴어요?”
“눈 한 번 뜨는데 무슨 각오까지!”
놀리는 줄 알았는데 진지했다. 공복 상태에서 앞에 맛있는 걸 두고 못 먹게 하니 빡친 맹수, 딱 그렇게 보였다.
“나 너무 더워서 더 이상 밖에 못 앉아 있겠는데. 차에 가서 에어컨 틉시다.”
“낮저밤저 변태한테 속을 줄 알고?”
“내가 어디 가서 아무한테나 변태 짓 하고 그래요? 정모단 한정 변태인데 좀 속아주면 어때서.”
에어컨은 무슨, 가면 더 더워질 거라는 게 빤했다.
모단은 가까스로 잡힌 손을 빼냈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커피라도 다 마시고…… 헉.”
홱 당긴 손을 항복 자세로 올리고 있던 모단이 덜컥 굳었다. 견이 의아한 눈을 했다.
“왜요?”
“아, 아니. 아무것도…….”
허전한 등을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비상사태다!’
실랑이를 하다가 속옷 후크가 풀려 버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