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주인밖에 모르는 대형견
2017.10.08.
허전한 등을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비상사태다!’
실랑이를 하다가 속옷 후크가 풀려 버린 거였다.
“왜요?”
“아, 아니, 아무것도…….”
“어디 아파요? 혹시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그렇게 세게 잡진 않았는데, 장난치다 어디 긁히기라도 한 건가 싶어 견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단은 어정쩡한 차렷 자세를 하고 몸을 슬슬 뺐다. 눈동자만 굴려 내려다보니 앞이 부자연스럽게 뜬 것 같기도 했다.
하필 오늘 평소보다 얇고 파인 시스루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네크라인 위로 컵이 탈출하거나 반팔 소매 아래로 끈이 나오는 아찔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았다.
‘옘병, 어차피 이렇게 될 거면 순순히 차로 갈걸…… 은 무슨, 뭔 소리야! 낮저밤저는 나구만!’
모단은 침착하게 대책을 강구했다.
‘아직 이런 것까지 쿨하게 채워달라고 할 사이는 아니지. 화장실 다녀온다고 할까? 근데 일어나서 움직이면 속옷 틀어진 게 바로 비칠 거라고!’
견이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이고 그녀를 살폈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추워서.”
“네?”
“미안한데 옷 좀 빌려줄래요?”
“옷이요?”
의아한 듯 되물으면서도 견은 바로 재킷을 벗어 어깨에 둘러주었다.
“고마워요. 이제 됐어요.”
모단은 재킷 앞을 두 손으로 여며 쥐었다.
그 와중에도 그가 입고 있을 때는 보기 좋게 꼭 맞던 옷이 헐렁하게 감싸는 것에 살짝 설레었다. 은은하게 숨을 따라 들어오는 향도 좋았다.
‘흔한 향수나 섬유유연제는 아니고. 비누? 바디워시? 아, 혹시 엄청 비싼 니치 향수일지도. 아무튼 되게 깨끗한 냄새…….’
“정말로 어디 아픈 거 아니죠?”
헤벌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깜박했다. 모단은 떨리는 동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냥 갑자기 좀 불편…… 목이 마른 것 같기도…….”
“차에 물 있을 거예요. 없으면 사다 줄게요. 잠깐만요.”
견이 얼른 일어섰다.
그의 뒷모습을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모단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고 재킷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얼른 손을 뒤로 돌려 옷 안으로 넣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어휴.’
한쪽 끄트머리는 한 번에 잡았는데 다른 쪽이 안 잡혔다. 낑낑대던 모단이 몸을 반 접다시피 앞으로 숙였을 때였다.
“모단 씨, 배 아픈 거예요?”
저만치 간 줄 알았던 견의 목소리가 등짝을 훅 때렸다. 소스라친 모단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황급히 손만 빼냈다.
“그 정도로 아팠으면 말을 해야죠!”
아파서 엎드려 끙끙대는 걸로 오해한 게 분명했다. 다시 앉는 견의 눈에 염려가 가득했다.
“혼자 있으라고 한 것도 맘에 걸리고. 가다가 생각해 보니까…….”
견은 갑자기 ‘그날’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여자의 그날을 챙겨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런 것 같았다. 생리통 등의 이유로 힘들어하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불편한데 참아가면서 같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차라리 집에 데려다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다시 온 건데.”
누구보다 잘 아는바, 그날에는 그 어떤 배려보다 집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게 최고다.
“얼른 집에 가요.”
조심스레 등을 감싸 일으키는 손길과 걱정 가득한 눈동자 앞에서 모단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느새 견의 차가 저 앞에 보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 이렇게 걱정만 시키고 허무하게 집에 가도 되는 건지, 심란함에 모단의 걸음이 느려졌다.
“많이 힘들어요? 업어줄까?”
“아뇨! 아니에요.”
혜숙도 걱정이 유난한 편이지만 이 남자는 더했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어떻게 될 것 같은지, 그야말로 애지중지 살피는 게 고마움을 넘어 미안해질 정도다.
나 진짜 사랑받고 있구나.
이런 상황에서 느껴도 되나 싶은 감동과 양심의 가책이 한데 몰려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솔직히 말하려는데, 화장실이 눈에 띄었다.
“잠깐, 잠깐만요!”
“왜요?”
“여기 딱 서 있어요.”
모단은 급히 여자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번에는 후크가 한 번에 딱 잡혔다. 깔끔하게 속옷을 정리하고 매무새도 가다듬고, 견의 재킷을 챙겨 당당하게 나왔다.
“이제 됐어요!”
“네?”
“안 아프다고요. 집에 안 가도 돼요.”
얼떨떨해하며 재킷을 받아 든 견이 큰 깨달음을 얻은 눈을 했다.
“아…… 그 배였구나…….”
“뭐요? 무슨 배요?”
모단이 어리바리 되묻다가 펄쩍 뛰었다.
“그거 아니었어요!”
“뭐 어때요. 화장실 안 가는 사람도 있나.”
“아니라니까요! 나 엄청 빨리 나왔잖아요! 의심스러우면 냄새라도 맡아보시든가!”
견이 재킷에 팔을 넣다 말고 정색했다.
“여자화장실 냄새 같은 거 관심 없거든요? 누굴 진짜 변태로 아나. 정모단 한정이라고 몇 번을 말해.”
“억울하니까 그렇죠! 아까 장난치다가 갑자기 속옷 후크가 풀어져서 그런 거였다고!”
까악. 까아악.
기분 탓인지 실제인지 어디선가 뻘쭘한 새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병원에서 다짜고짜 생리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 견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 그게 그렇게 쉽게 풀어지는 거였구나…….”
“놀리기만 해봐요. 어쩌다 잘못 움직이면 그럴 때도 있다고요.”
“놀리긴 왜 놀려요.”
견이 환히 웃었다.
“모단 씨 안 아픈 거면 됐어요. 다행이다.”
아까 놀라 챙길 때만큼이나 드라마틱한 표정 변화다.
“그럼 진짜 괜찮은 거죠? 조금 더 같이 있어도 되는 거죠? 차로 가는 거죠?”
“깜박 속을 뻔했네. 차로 왜 가요? 밖에서 놀아요.”
“아아, 나 덥다고.”
“아이스크림 사줄 테니까 징징대지 말고 빨리 와요. 이 근처 어디에 아이스크림 가게 있댔는데.”
모단이 견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견은 거의 다 온 차를 못내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얼마 후, 둘은 소프트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손에 들고 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왜 자꾸 웃어요?”
“아까 모단 씨 당황했을 때 표정,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귀여워서. 꿈에도 나올 것 같은데. 자다가도 웃게 생겼어요.”
“그만합시다.”
모단이 잡고 있던 손을 빼려는데 견이 먼저 놓더니 고쳐 쥐었다. 모단의 손가락 사이로 견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파고들어 꼭 맞물렸다.
“있죠, 모단 씨가 내가 찾던 사람이구나 하고 확 느낀 게 언제인지 알아요?”
모단은 고개를 돌렸다. 진중한 눈이 저를 보고 있었다.
“처음 닿았을 때 정말로 심장이 쿵 했었어요. 찌릿찌릿, 그런 것도 있었고.”
느끼한 말인데 하도 진지해서 핀잔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차마 말할 순 없지만 저도 그랬었다. 차에서 내려 자리를 뜨려던 그를 붙잡았을 때 강한 정전기 같은 걸 분명히 느꼈다.
“그것도 그랬지만, 정말로 확신한 건 시간 때문이었어요.”
“시간이요?”
“네. 모단 씨를 만날 때마다 시계가 고장 난 것 같더라고요. 그런 거 처음이었거든요. 순식간에 몇 시간이 지나가기도 하고, 때론 멈춘 것 같기도 하고.”
모단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물었다. 화끈대는 뺨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혀주길 바랐는데, 닿은 순간에만 차가웠다가 금세 부드럽게 녹는다.
“그냥 얘기만 해도 좋고 재밌어서 그런 것 같아요. 대화가 통한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닌데. 취향과 유머코드도 맞아야 하고, 같으면 신기하고 다르면 궁금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계속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고.”
“그건 그래요. 안 맞는 사람하고 대화하면 기가 쪽쪽 빨려요.”
“나랑 노는 건 좋죠?”
싱긋 웃은 견이 모단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입에 넣고 쪽 빨더니 제 아이스크림을 불쑥 내밀었다.
“바꿔 먹어요. 그게 더 맛있네.”
“다 먹고 콘만 남았으면서 뭘 바꿔 먹어요? 그리고 내 입술에 닿았던 거라 더 맛있었던 거예요. 그냥 먹으면 맛없어요.”
“얼마나 뺏기기 싫었으면 그런 말까지 자기 입으로 해가면서…….”
모단이 보란 듯이 아이스크림을 크게 핥았다. 침 이만큼 묻혔으니까 넘보지 말라는 경고였는데, 견은 슬쩍 귓가를 붉히고는 앞을 보았다.
“백견 씨랑 노는 게 재밌는 건 사실인데, 그래도 적당히 놀아야 할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백견 씨 능력 있지만 아직 직장은 없는 취준생으로 알고 계시거든요.”
그날 괜히 말려서 이래저래 털어놓았다는 말을 들은 견은 웃음을 터뜨렸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어째……. 차라리 건물주라고 하시지.”
“건물도 있어요?”
“있냐고 물어볼 게 아니라 몇 개 있느냐고 물어봐야죠. 엇, 흘릴 뻔했다.”
견이 얼른 혀를 내밀어 옆으로 녹아내리는 모단의 아이스크림을 핥아 삼켰다. 모단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냥 취준생 만들길 잘한 것 같네요. 건물주 운운했다간 당장 내일 시집가라고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요. 그걸 노린 건데. 내가 지금이라도 어머님 찾아뵙고 어필해야 하나.”
한참 웃은 견이 코를 찡그렸다.
“아쉽네요. 한 일주일 정도만 늦게 걸렸으면 떳떳하게 직업까지 밝힐 수 있었을 텐데.”
“다시 일해요? 무슨 일이요?”
“하던 일 마저 해야죠. 저도 회사 다시 다니고 싶어 죽겠다고요.”
견이 저 앞에 보이는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구겨 던졌다. 깔끔하게 쏙 들어갔다.
“이제 핑계 안 대요. 나보다 훨씬 가진 거 없고 힘든 사람들도 악착같이 사니까. 멀쩡한 허우대랑 스펙과 금수저가 아깝지 않게 할 거예요.”
모단의 귓가가 화끈 달아올랐다.
“그땐 내가 말이 심했어요.”
“안 심했어요. 지금도 고마워요. 그런 말도 해주는 여자라서 좋은 거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저야말로 고마웠다.
“근데요, 혹시 회사에 갑자기 새 본부장님이 오시는데 그게 백견 씨라거나?”
“드라마 너무 보셨네. 그렇게 큰 회사를 이끄는 자리에 회장 손주라고 막 앉히고 그래요? 지협이 형이 이사 단 것만 해도 엄청나게 초고속인데. 그만큼 능력이 있긴 하지만.”
“백견 씨도 사장이었잖아요.”
“그야 블랑아이는 처음부터 내가 기획하고 팀을 꾸린 거니까요.”
“다시 할 일도 같은 쪽이에요? 유아동복?”
“네.”
모단의 호기심이 폭발했다.
“처음에 사업 아이템을 그쪽으로 잡은 이유가 뭐예요?”
“패션 쪽 일을 하고 싶었어요. 처음엔 남성복을 염두에 뒀는데 시장분석을 해보니 속옷하고 유아동 쪽이 괜찮을 것 같아서 엄청 고민했어요. 초반엔 속옷 쪽으로 기울었죠.”
속옷회사 사장님이라니, 꽤나 섹시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모단은 견에게 변태라고 할 자격조차 없는 자신의 변태력에 소리 없이 한탄했다.
“제가 그렸던 컨셉이랑 딱 맞는 란제리 디자이너가 있었어요. 허니부슈라는 웨딩이벤트 업체 직원이었는데, 몇 번 스카웃 제안을 했는데도 거절하더라고요. 연봉도 꽤 높이 불렀는데.”
“드물게 의리 있네요.”
“의리는 모르겠고 추리닝도 못 입고 여섯 시 퇴근도 보장 안 되는 곳에선 일 못 한다고 단호하게 자르더라고요.”
역시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구나.
모단은 다시금 인생의 진리를 되새겼다.
“능력이 있으니까 그런 소신도 가질 수 있는 거겠죠. 어떤 면으로는 부럽네요.”
“맞아요. 그분 때문에 괜히 눈만 높아져서 다른 디자이너는 맘에 차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유아동복 쪽으로 틀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잘 풀려서 이쪽이구나 했어요.”
“그랬구나.”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공원을 한 바퀴 다 돌아가는데도 마땅히 앉을 데가 보이지 않았다. 둘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차로 향했다.
“근데 나중에 문득 아, 싶더라고요.”
“뭐가요?”
“엄마가 손재주가 좋으셔서 제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셨거든요. 그 기억이 무의식 속에 좋게 남아 있었나 봐요. 엄마가 아이에게 옷을 입혀보고 좀 크네, 하면서 소매를 접어준다거나, 단추 잠가주면서 잘 맞네, 우리 애기 너무 예쁘다, 해주는 그런 장면들이.”
본 적도 겪은 적도 없는 광경이 어쩐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막연히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뭉클해졌다.
‘이 비주얼 그대로 어려진다면 인형 같겠지. 뽀얗고 이목구비 또렷하고 옷발 잘 받고…….’
그 순간 낯익은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꼭 무탈이처럼.’
새삼스러운 시선이 견을 살폈다.
‘전에도 느꼈지만 진짜 닮긴 했어. 아들이라고 해도 믿겠네.’
모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견은 다 먹은 모단의 아이스크림 껍데기도 받아 대신 버려주었다.
“어쨌든, 조만간 취준생 아니고 뭐든 될 거예요.”
공모전에 붙으면 사원이 될 테고, 떨어지면 회사 차릴 거니까 사장이 되겠지.
모단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응원할게요.”
마침 차 앞에 도착했다. 견은 모단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방금 그 말, 마법의 주문 같았어요.”
“오글대지 마요.”
“정말로 모단 씨한테 초능력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한 번만 더 하면 토할 거라고 하려는데 견이 알아서 분위기를 깼다.
“아까 보니까 손 안 대고 속옷 푸는 아주 유용한 능력도 있던데.”
“그럼 그렇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등짝을 얻어맞으면서도 조수석 문을 열어준 견이 차 앞을 빙 돌아 운전석으로 도망쳤다.
“풀어져라!”
“뭘 또 풀어지래! 조용히 안 해요?”
“내가 뭘요. 모단 씨 삐진 것 같아서, 마음 풀어지라고.”
“그 마음이 그 마음인 거 확실하냐고!”
“다른 마음 있으면 뭐.”
세상에서 정모단한테 까부는 게 제일 재밌다는 얼굴을 한 견이 숨넘어가게 웃었다.
포기하면 편해, 모단은 새삼 되뇌었다.
차에 타고서도 한참 씩씩대는 모단을 꿀 떨어지는 눈으로 보던 견이 불쑥 다가들었다.
안전벨트를 죽 당겨 채워주는 동시에 입도 맞췄다. 멀티플레이어의 정석이다.
“아직 안 풀렸어요? 풀렸으면 좋겠는데.”
모단이 눈을 흘겼다.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게 웃은 견이 액셀에 발을 올렸다.
“모단 씨는 어린이집에서 오래 일할 거예요? 나중에 원장이 될 생각이라거나?”
“그건 아니에요. 아이들이 좋긴 하지만 사십대가 되어서도 어린이집에 있는 모습은 잘 그려지질 않아요.”
견이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모단이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아 제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백견 씨 재산에 비하면 코찔찔이 용돈 수준이겠지만 저도 모아놓은 돈 있어요. 정말로 하고 싶은 걸 찾았을 때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건 싫거든요.”
“무조건 많아야 귀한 돈은 아니죠. 어떻게 벌고 쓰는지에 따라 돈의 가치가 달라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모단 씨도 엄청 부자구나. 멋있어요.”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는 사이 금방 모단의 집 앞에 도착했다.
“매정하게 바로 내릴 건 아니죠?”
견이 한 손으로 시트를 짚고 몸을 기울여 왔다.
차로 가자고 조르던 것에 비하면 담백한 키스였다.
풀어지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말로만 하는 장난이고 속내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정말로 속옷이 또 풀려 버리기라도 하면 인내심 극기체험을 하게 될 것 같아 몸을 사리는 것임을 모단이 알 리 없었다.
뜨거워질 듯 말 듯, 간질간질한 스킨십이 이어졌다.
“나 혹시 애정결핍 환자처럼 보일까 봐 하는 말인데.”
견이 누가 봐도 애정을 갈구하는 눈으로 비비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거 없어요. 애정 엄청 받고 컸어요.”
뜬금없는 고백에 모단은 작게 웃었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저보다 한참 큰 그가 매달리듯 치댈 때면 주인밖에 모르는 대형견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너무너무 좋아한다는 게 스미듯 전해졌다.
이토록 쏟아붓는 듯한 애정을 받아본 건 처음이라 겁도 났다.
이 마음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기에, 혹시나 너무 빨리 바닥을 보이진 않을까 싶어서.
“그러니까 이건 그냥 좋아서 그러는 거라는 뜻이죠.”
그가 주는 묵직한 온기가 싫지 않아서, 모단은 잠자코 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스킨십 중독자처럼 보일까 봐 하는 말인데 정모단 한정이에요. 원래 다른 사람하고 살 닿는 거 되게 싫어해요. 굉장히 금욕적이고 목석같은 매력이 있는 남자거든요.”
“나는 구경도 못 해본 그런 매력이네요.”
견이 허리를 감은 팔에 장난스레 힘을 주었다. 모단의 입에서 윽, 하고 숨 막히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도 원래 다른 사람하고 닿는 거 엄청 싫어해요.”
모단이 속삭이듯 덧붙였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퍼스널 스페이스가 0이 되더라고요.”
목덜미에 자잘한 웃음이 쏟아졌다.
“별게 다 똑같네.”
모단은 눈을 꼭 감고 어깨를 움츠렸다.
거리 따위 조금도 없는, 빈틈없이 꽉 닿은 손과 입술에서 행복한 열기가 번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좋은 시간이었다.
***
다음 날 아침, 희명그룹 대회의실로 직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 No spec, be yourself > 공모전의 최종 심사 자리였다.
1차와 2차에서는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전 직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그렇게 스무 개의 기획안이 최종까지 남았다.
오늘 그 스무 명이 자신의 기획안을 직접 발표하게 되었다. 공모전의 취지에 맞게 얼굴은 보이지 않고, PPT와 목소리만으로 선보이는 블라인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최종 후보자들은 다른 직원들이 출근도 하기 전에 회사에 와 있었다.
각 부서에서 한두 명씩 뽑힌 담당자들이 빙 둘러앉았다. 그중에는 지협도 있고, 김광남 과장과 은규도 있었다.
“첫 번째 분 준비해 주세요.”
곧 심사가 시작되었다.
합격하면 바로 채용되어 실무에 들어가는 만큼 치열한 발표와 날카로운 질문들이 이어졌다.
블랑아이에 지원한 사람은 넷이었는데, 그중 세 번째가 돋보였다.
SNS에서 핫한 해시태그인 ‘키즈 패셔니스타’와 ‘패밀리룩’을 들어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감각적인 포트폴리오까지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어느덧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다른 참가자들처럼 어떤 소개도 없이 바로 발표에 들어갔다.
“블랑아이의 SWOT분석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부드러운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