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47화 (47/86)

#47. 금수저입니다

2017.10.11.

어느덧 마지막 차례가 되었다.

다른 참가자들처럼 어떤 소개도 없이 바로 발표에 들어갔다.

“블랑아이의 SWOT분석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부드러운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을 울렸다.

그러나 부드러운 것은 목소리뿐, 내용은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나 약점(Weakness)을 짚을 때는 지원자인지 저격수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 총체적 문제의 원인은 브랜드 이미지가 확고하지 못하다는 데서 옵니다.”

팩트폭력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듯한 발언들을 반쯤 넋 나간 채 듣고 있던 은규가 갸웃했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같은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 마이크의 음질이 썩 좋지 않았다. 잘 아는 목소리라 해도 한 번에 알아듣긴 힘들 듯했다.

“커흠.”

헛기침 소리에 흠칫한 은규가 옆에 앉은 김광남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사실 김광남은 이 공모전 자체에 처음부터 불만을 내비친 사람 중 하나였다.

학력도 스펙도 보장되지 않는 사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맘에 안 든다며 작정하고 삐딱한 태도를 보였다. 조금 전 블랑아이에 지원한 다른 발표자들에게도 트집에 가까운 질문들을 쏟아냈었다.

본인이 꽂아주겠다며 거들먹거렸던 지인의 자제들은 죄다 떨어졌다는 것에 대한 화풀이도 없지 않았다.

블랑아이를 나노 단위로 너덜너덜하게 파헤친 SWOT분석이 끝나고, 기획안 발표가 이어졌다.

“첫 번째 키워드는.”

프로젝터 화면에 세 글자가 떠오른 순간, 회의실 안이 술렁거렸다.

“금수저입니다.”

금수저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쓰인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얼마간 동요하게 내버려 둔 남자가 또 한 번의 파격 발언을 던졌다.

“블랑아이는 금수저입니다. 뒤에 희명그룹을 업고 있죠. 다른 업체들은 쉽게 못 갖는 것들을 쥐고 있는 겁니다. 그럼 아낌없이 써먹어야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전해졌을 텐데도, 발표는 여유롭게 계속되었다.

“다음 키워드는 ‘Organic’입니다.”

프로젝터 화면에도 같은 글자가 떠올랐다.

혼신의 힘을 다해 꾸민 다른 PPT들과는 달리, 심플한 배경에 단어 하나만 떠 있다.

쓸데없는 데 시간 쓰지 않겠다는 대범함과, 중요한 건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다는 자신감이 전해졌다.

김광남이 구시렁거렸다.

“언제 적 유행한 오가닉이야?”

“유기농 인증 마크를 받은 섬유로 제작한 의류라는 뜻의 오가닉, 그것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유기적인 관계를 뜻하는 오가닉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Collaboration’이라는 단어가 크게 떠올랐다.

“콜라보레이션. 각기 다른 분야의 협업으로 윈윈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김광남의 이마에 못마땅한 주름이 잔뜩 들어찼다.

“유아동의류 업계에서의 콜라보레이션이라 하면 대표적으로 캐릭터 라이선스 사업을 들 수 있습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애니메이션 주인공 등을 디자인에 도입하는 게 가장 일반적인 케이스입니다.”

“오가닉에 이어 캐릭터 라이선스까지. 저렇게 흔해 빠진 기획안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다만 이런 경우, 계약기간이 지나면 타사에서도 비슷한 제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희소성이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자체 캐릭터 개발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김광남이 참지 못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이봐요, 캐릭터 하나 개발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얼마나 드는 줄 알고 하는 얘기예요?”

“하지만 캐릭터 개발에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죠.”

네, 알고 하는 얘깁니다, 라는 뉘앙스를 노골적으로 풍기는 대답이 김광남의 말문을 탁 막았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저희에게는 이미 자체 캐릭터가 있습니다. 희명그룹의 전신(前身)인 희명토이즈의 마스코트, ‘곰곰이’요.”

화면에 투박한 듯 귀여운 곰 캐릭터가 떴다. 희명토이즈에서 나오는 장난감에 오래전부터 쓰인 캐릭터였다. 희명출판사에서 나온 ‘글자 없는 그림책’ 시리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유명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지만 친숙함이라는 강점이 있습니다. 이 캐릭터를 조금만 다듬으면 얼마든지 매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광남이 재차 따지고 들었다.

“저 캐릭터가 뽀로로나 디즈니 같은 유명한 캐릭터랑 경쟁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 캐릭터가 뽀로로나 디즈니만큼 유명해지게 하려면, 그것도 최대한 단기간에 띄우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이번에도 다 안다니까요, 하는 듯한 대꾸가 돌아왔다. 김광남의 뒷골에는 혈압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흥미가 차올랐다.

희명토이즈와 희명출판사 로고에 이어 희명소프트의 로고가 떠올랐다.

“바로 유아동 어플리케이션 개발입니다. 이미 타 출판사에서 자체 개발한 캐릭터와 콘텐츠를 활용한 어플리케이션을 선보여 크게 성장시킨 예도 있습니다.”

“캐릭터 개발도 모자라서 유아동 어플리케이션이요? 넘쳐 나는 게 유아동 어플인데…….”

보다 못한 지협이 마이크를 들었다.

“김광남 과장님, 질문은 발표가 끝난 후에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참가자들과의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김광남이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요즘은 넘쳐 나는 게 유아동 어플이죠. 그렇기에 차별화를 둬야 합니다.”

오가닉으로 시작한 프레젠테이션은 짐작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주면서 마음이 편한 부모는 거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마음 놓고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가 나온다면 어떨까요.”

희명소프트 로고 뒤로 희명어린이집의 로고까지 떠올랐다.

“희명어린이집에서 자문과 감수를 받는 겁니다. 희명어린이집은 전문가들이 함께 개발한 자체 보육프로그램 운영으로 부모들 사이에 인지도와 신뢰도가 높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활용한 교육적 놀이 콘텐츠를 담는다면 부모들의 관심을 크게 끌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블랑아이의 로고가 나타났다.

“이렇게 키운 캐릭터가 곧 블랑아이만의 경쟁력이 됩니다. 캐릭터로 표현되는 확고한 브랜드 이미지와 다양한 상품 개발의 기회, 나아가 충성고객까지 얻게 되는 거죠.”

금수저, 세 글자로 시작한 화면은 어느새 희명 계열사들의 로고로 꽉 차 있었다.

“초기 투자비용과 시간은 걸릴 겁니다. 하지만 있는 비용과 네트워크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금수저니까.”

사슬처럼 원을 그린 계열사 로고 한복판에 마지막 키워드, ‘Synergy’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블랑아이만의 성장이 아닙니다. 계열사 간의 유기적 연계와 창의적인 협업을 통해 희명그룹 전체가 함께 성장하는 겁니다.”

회의실 안이 숙연해졌다.

“발표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몇 가지 질문이 나왔다. 희명그룹은 물론, 업계 전체를 꿰뚫고 있는 듯한 답변이 돌아왔다.

정작 김광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표자들이 돌아가고 회의가 이어졌다.

“이 정도로 거시적인 기획안까지 나올 줄은 몰랐네요.”

“결과는 다 나온 것 같죠?”

합격자를 추리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열 명을 합격시키는 걸로 하겠습니다.”

최종 심사 서류를 챙긴 지협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 중으로 합격자에게 개별 연락하도록 하죠.”

***

다음 날 저녁, 모단은 오랜만에 새윤의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냈다.

전에는 매일같이 가다가 요즘 너무 안 간 것 같아 새윤이 섭섭한 티를 내기 전에 알아서 들른 거였다.

오늘 오후에 올라온 인사발표 명단에 은규의 대리 승진 소식도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케이크도 사 들고 왔다.

“해빛아, 가방에 있는 스카프 해빛이 거 아닌데? 누구 거야?”

“응? 어디어디?”

어린이집 가방을 정리하던 새윤이 물었다. 구석자리에서 놀고 있던 해빛이 쪼르르 달려왔다.

새윤의 손에 들린 스카프를 날름 가져가더니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거 초은이 거다!”

“뭐야. 냄새 맡고 어떻게 알아?”

“해빛아, 이모도 줘봐.”

스카프를 건네받은 모단이 역시나 코에 대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초은이 거 맞네. 가방 놓는 자리가 바로 옆이라 헷갈렸나 보다.”

“응. 그런가 봐.”

새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 다 뭐냐? 강아지들도 아니고.”

“이 일 오래 하다 보면 자동으로 탑재되는 능력이야. 왜, 세제랑 섬유유연제 같은 게 섞여서 집집마다 특유의 냄새가 나잖아.”

“그건 알지.”

“애들이 놀다가 아무 데나 양말 벗어놓고 손수건 같은 거 흘리고 그러면 냄새 맡아보고 가방에 넣어주고 그러거든. 영아반 선생님들은 응가 냄새도 구분한다니까.”

“너는 직업병이라 쳐. 내 딸은 뭐니?”

“엄마 닮았나 보지. 너 어렸을 때부터 개코였잖아.”

“그런가?”

해빛이가 모단의 무릎에 냉큼 올라앉아 폭 안겼다. 목걸이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다가 쇄골 아래쯤에 불그스름한 흔적을 콕 찔렀다.

“이모, 여기 아야했어?”

“응?”

내려다본 모단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야한 거 아니고 모기가 물었어.”

정말 모기 물린 건데, 새윤이 고함을 쳤다.

“야! 그거 잘생긴 모기 자식이 문 거지!”

“뭔 소리야? 내가 아무리 얼빠지만 모기 얼굴까지 보겠냐!”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기집애야! 그거 그거잖아!”

“엄마, 이모! 싸우는 거야?”

해빛이 희번덕 눈동자를 뒤집었다. 모단과 새윤이 얼른 방긋했다.

“엄마랑 이모랑 싸우긴 왜 싸워. 목소리가 조금 커진 거야.”

“미안해, 해빛아. 엄마랑 이모랑 예쁘게 얘기할게. 모단아, 진도를 그렇게 빨리 나가면 어떻게 하니? 그럴 거면 썰이라도 풀어주든가.”

“빠르지 않아, 새윤아. 너의 오해야. 그리고 풀긴 뭘 푸니? 그런 게 궁금하다면 박 대리님 노트북에 직박구리 폴더를 열어보는 것을 추천해.”

몇 마디 주고받다가 영 못 해먹겠다는 얼굴을 한 새윤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정모단! 아무리 사귀게 됐다고 해도 금방 쉬워지지 마라. 박해빛! 이모 힘드니까 얼른 내려와서 그림 그린 종이 정리해. 엄마 이것만 치우고 문 닫고 집에 가게.”

평소보다 10분쯤 이른 시각, 가게 불을 끄고 다 같이 나왔다.

“오늘은 우리가 이모를 데려다줄까?”

“그럴까아?”

신나게 답한 해빛이 한 손엔 엄마 손을, 다른 손엔 모단의 손을 잡고 폴짝거렸다.

골목 어귀에 있는 과일가게 앞에서 새윤이 멈춰 섰다.

“여기가 마트보다 더 싸고 좋아 보이네? 안 그래도 은규가 참외 먹고 싶다고 했었는데. 모단이 네 것도 한 봉지 사줄 테니까 가져가서 엄마랑 먹어.”

대답할 틈도 없이 새윤이 가게로 들어갔다. 해빛도 얼른 따라갔다.

그때 모단의 휴대폰이 울렸다. 견이었다.

“아까 휴대폰 고장 나서 고치러 간다더니 다 고쳤나 보네. 여보세요?”

[모단 씨, 어디예요?]

“지금 집 근처 과일가게 앞인데…….”

[그래요? 그럼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다짜고짜 전화가 끊어졌다.

동네 입구 쪽을 기웃거리는데, 집 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뛰어오더니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가뿐히 들기까지 했다.

“으악!”

“모단 씨, 할 말 있어요! 좋은 얘기!”

“뭐, 뭔데요? 일단 좀 내려주고!”

견은 내려주기는커녕 안은 채로 올려다보며 들뜬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집에 가서 어머님께 말씀드려요. 남자친구 희명그룹 사원이라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블랑아이로 출근한다고.”

“블랑아이로 출근? 게다가 사장이 아니라 사원이요?”

모단이 아니라 새윤의 목소리가 쨍 하니 울렸다.

놀란 견이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해빛이 외쳤다.

“잘생긴 삼촌이다!”

“어어, 해빛아.”

“우와아, 삼촌 힘 엄청 세다아!”

견이 얼른 모단을 내려놓았다. 해빛이 팔을 뻗으며 깡총깡총 뛰었다.

“삼촌, 나도! 나도 높이높이 해주세요!”

그러나 바로 새윤에게 뒷덜미를 붙들렸다.

“그거 아니야, 해빛아.”

“왜애, 엄마! 에버월드에서 삼촌이 어깨에도 앉혀줬는데!”

“이따가 아빠한테 해달라고 하자.”

영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참외를 건네주는 새윤과 받는 모단의 손 사이에서 비닐봉지 부스럭대는 소리만 났다.

헛기침을 한 견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백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윤새윤입니다.”

새윤의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궁금한 건 많지만 잘 알지도 못하고 맘에도 안 드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는 싫고 그럴 분위기도 아닌 것 같아 꾹꾹 누르는 중이었다.

견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은규 씨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기획안 공모전이 있었습니다.”

거기 합격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듣고 바로 모단에게 왔다는 말을 들은 새윤은 우물거리다가 툭 뱉었다.

“왜 힘들게 다시 들어오시는 건지……. 사장이었다가 사원이라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불편할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견이 자세를 고쳤다. 단정한 어깨가 더 곧게 펴졌다.

“사과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니까요.”

새윤은 물론, 모단도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정이 있었다고 변명하는 것만으로는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잘못 선택했던 것, 그래서 생긴 결과들, 책임지고 바꿔보려고요. 직접.”

다시금 대화가 끊겼다.

얼마 후, 새윤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가게에서 커피 한잔하고 가실래요?”

***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다 했어.”

문은 잠그고 가장 안쪽의 불 하나만 켜둔 커피숍 안, 견과 모단은 나란히 앉았다. 맞은편에는 새윤과 은규가, 해빛은 모단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은규가 새윤을 바라보며 마저 하소연했다.

“합격자 두 명한테 내가 직접 전화를 걸었거든. 한 명은 바로 받는데 목소리가 낯익은 거야. 번호도 낯익어. 다시 보니 전에 김 과장하고 대판 싸우고 퇴사했던 양선해 차장님이시고.”

새윤과 모단이 동시에 헐, 했다. 견만 무덤덤했다.

“한 명은 전화를 계속 안 받아서 문자를 보내놨거든. 한참 있다가 확인했다고 연락이 왔는데 백견 대표님, 아니, 백견 씨…… 하아. 이게 무슨 일이야.”

은규가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때 블랑아이를 진두지휘하던 두 사람이 맨 밑으로 들어오다니. 막내 들어온다고 들떠 있던 사원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 같은 재앙이었다.

“사실 양 차장님도 제가 끌어들였습니다.”

“예에?”

“퇴직금으로 이 근처에 북카페 차려놓고 놀고먹고 하시더라고요. 수석디자이너였는데 아깝잖아요.”

모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그 북카페가 공원 앞에 있는 거기?”

“네.”

‘보름 때마다 블랙카드 긁고 전세 내는 건가 했는데, 사장이 지인이었다니!’

견이 은규 쪽으로 슬그머니 몸을 기울였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긴 너무 죄송하지만, 옛날 회사 분위기 그립지 않습니까?”

“두 분이 다시 오신다고 해도 그때와 같겠습니까? 변 대표하고 김 과장이 있는데. 더 난리나지 않으면 다행이죠.”

은규가 고개를 내저었다.

견이 있을 때만 해도 모두가 백견파라 부딪힐 일이 없었는데, 대표가 바뀌면서 빠르게 변진상파로 갈아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견에게 제 쓸개로 술도 담가줄 것 같던 김광남이 가장 빨리 노선을 바꿨다.

반면 디자인팀 차장이었던 양선해는, 꼰대 냄새 폴폴 풍기며 이제껏 이룬 성과를 신나게 까먹는 변진상과 김광남에게 치열하게 맞서다 사무실 한복판에서 김광남의 가발을 벗겨 팽개치고 그 길로 회사를 때려치운 이였다.

블랑아이가 있는 쪽을 향해 매일 세 번씩 경건하게 침을 뱉고 엿을 날린다는 그녀를 어르고 달래느라 견은 적잖은 고생을 했다.

그렇게라도 데려올 가치가 있는 인재인 데다 확실한 제 사람이었고, 파격 신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들어설 사무실에서 동지가 되어줄 이였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예전보다 더 잘될 겁니다.”

“그 프레젠테이션을 보면서 잃었던 비전과 목표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 기는 무슨! 저는 예전의 패기롭던 신입이 아니라 찌든 직장인일 뿐입니다. 조용히 살고 싶네요. 이미 틀린 것 같지만.”

“쉽게 찌들 분 아닌 거 압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죠? 이제부터 진짜 제대로 잘해봅시다. 아! 제가 사원인데 이런 말은 주제넘었네요. 죄송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은규 대리님.”

“이러지 마세요, 대표니이임이 아니라 백견 씨…….”

대리 달았다는 기쁨을 제대로 누려보기도 전에 만신창이가 된 은규는 견이 내민 손을 영혼 없이 잡고 흔들었다.

“도저히 적응이 안 됩니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냐고요. 백의종군도 아니고.”

“처음에 사장이었다고 무조건 위에 있으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밑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으면 기꺼이 그래야죠. 부담 갖지 마시고 편히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단이 물을 마시겠다며 일어섰다. 그녀의 무릎에 앉아 있던 해빛이 옆에 있던 견의 무릎으로 옮겨 앉았다.

“어, 이상하다.”

“뭐가, 해빛아?”

매끄러운 실크 타이를 만지작거리는 재미에 빠져 있던 해빛이 갸웃했다.

“왜 삼촌한테서 무탈이네 집 냄새가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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