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49화 (49/86)

#49. 집 주소 대요

2017.10.18.

“제 남편이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분, 맞으시죠?”

불온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민철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렸다.

오래 만난 여자가 있다는 건 제 입으로 말했었다. 취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낯선 곳에서 눈을 떴을 때, 실은 결혼할 남자가 있다던 여은의 말에 하도 기가 막혀 저 역시 그렇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게 모단이라고는 말한 적 없다.

여은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는데, 소름이 돋았다.

여은의 뒤통수만 보고 서 있는 민철을 힐끗 본 모단이 여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떤 식으로 뭘 알아보신 건지 모르겠지만, 바로 뒤에 남편분을 두고 굳이 두 번 본 저한테 확인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모단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누구에 대한 배려도 없는 말이다. 그렇다고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말도 아닌 것 같은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전 여친 뒷조사까지 하고, 만난 김에 망신까지 주기로 결심했다?’

하나 그렇다기엔 민철의 표정이며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냉랭해 보였다.

‘그럼 반대로 부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서 보란 듯이 먹이는 거?’

뭐가 됐든 저에 대한 악의가 깔려 있다는 건 확실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덜 친한 회사 동료나 상사쯤 됐다면, 혹은 지협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얼마나 난감했을 건가.

혹은 견이었다면, 그러니까 지금 만나는 사람이었다면 싸움의 불씨가 됐을 것 아닌가.

‘금지 씨 말이 맞네. 자기밖에 모른다고, 주변 사람들한테 온갖 상처 다 주고도 끝까지 도도해서 재수 없는 여자라더니.’

모단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음에도, 여은의 미소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날 백화점에서 맞닥뜨린 이후 모단에 대해 조용히 알아보았다. 대체 누구기에 금지가 식구라며 싸고도는 건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배경은 그저 그랬다. 제가 아는 지협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여자를 만날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한 가지가 딱 걸렸다. 전 직장이 시모가 원장으로 있는 데가 아닌가.

우연이 아닐 것 같다는 촉이 왔다. 그런 이름을 가진 선생님이 있었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시모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알고 보니 민철과 교제했던 여자라 했다.

왜 하필 희명그룹으로 옮겨갔을까.

지협과의 약혼은 극비나 다름없었으니 그 여자가 알 리는 없다. 혹시라도 민철에게 들었다면 모를까. 하지만 민철과 이런 얘기를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여은이 입을 열었다.

“본 건 고작 두 번뿐이지만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아서요. 하필 저와 결혼할 뻔했던 남자와 같이 계시는 걸 보니.”

모단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잘못 들었나 싶다.

말문이 막힌 모단이 지협을 돌아보았다. 여은의 미소가 조금 더 만족스러운 빛으로 짙어졌다.

‘연기? 아니야. 정말 몰랐던 것 같은데.’

그러나 난감해하기는커녕 미미한 변화조차 없는 지협을 본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도대체 저 남자는…….’

늘 저런 식이다. 오죽하면 저 반듯한 이목구비가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걸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을까.

그러고 보니 딱 한 번 본 적 있긴 했다.

취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민철과 호텔을 나서다가, 로비에서 그와 딱 마주쳤을 때.

여은은 그쯤에서 생각을 끊어냈다.

“설마 모르셨던 건 아니죠?”

“설마 몰랐던 거 맞는데요. 보통 그런 얘기를 본인도 아닌 사람이 막 하진 않으니까.”

불퉁하니 대꾸한 모단은 그제야 모든 걸 납득했다.

원장님이, 민철이, 왜 하필 희명그룹이냐고 물어봤었던 게.

막장 드라마처럼 얽힐까 봐, 혹은 내가 뭘 알고서 작정하고 덤빌까 봐 겁났던 거구나.

‘내 성격을 몰라서? 내가 그렇게까지 구질구질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격한 미련이 남을 만큼 좋아하진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니들이 막장이라고 남들도 다 막장으로 보이냐?’

모단은 민철을 노려보았다. 마침 보고 있던 그가 흠칫 시선을 피했다.

이번에는 여은을 보았다. 도도한 위선 안에 오해와 미련이 덕지덕지 붙어 있음이 느껴졌다.

‘걸어가다 느닷없이 흙탕물을 뒤집어쓴대도 이보다는 덜 찜찜하겠네. 옘병할 똥차들 같으니.’

모단은 남은 인내심을 죄다 끌어모아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알겠네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쪽은, 난 결혼했지만 전 남친이 잘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거죠? 마치 여기 있는 가방을 다 살 건 아니지만 남도 못 사게 했던 것처럼.”

새빨간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근데 나는 나 잘 살기도 바빠서 전 남친이 어떻게 살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어요. 내 남자 과거도 마찬가지예요. 신경 안 써요. 어쨌든 지금 옆에 있는 건 나니까.”

내 남자가 이 남자라고는 안 했다.

속으로만 덧붙인 모단이 지협을 돌아보았다.

“이사님, 우리가 이런 거 가지고 싸울 사이예요?”

지협은 미리 입이라도 맞춰둔 것처럼 차분히 응수했다.

“시간만 아깝죠.”

당연히 아깝겠지. 애초에 그럴 사이가 아니니까.

그러나 여은의 귀에 그렇게 들릴 리가 없었다. 민철도 마찬가지였다.

모단이 한 걸음 다가서며 덧붙였다.

“맞다. 저 김민철 씨 결혼할 때 축의금 냈거든요? 저 결혼할 때 잊지 말고 똑같이 입금하세요. 청첩장은 아깝고 계좌 보낼 테니까.”

그대로 여은의 옆을 스친 모단이 먼저 매장을 나가 버렸다. 민철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모단을 따라 홱 돌아섰던 여은은 비로소 민철을 마주하고는 멈췄다.

“도대체 네 눈엔 내가 어디까지 우스워 보이는 거지?”

민철이 짓씹듯 내뱉었다.

“하긴, 네 눈에 우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지협을 돌아본 민철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하고는 자리를 떴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여은이 몸을 돌렸다. 지협은 그대로 서서 저를 보고 있었다.

“그 여자 안 따라가세요?”

“따라가야죠.”

여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세게 악물었는지 입술 아래가 희게 질렸다.

“싫은 사람과 평생 살 자신은 없다고 했죠. 책임감 때문에 버티지 말라고.”

지협이 걸음을 뗐다.

“대체 뭡니까? 지금 손여은 씨를 버티게 만드는 건.”

바로 앞까지 가까워졌다. 숨이 막혔다.

“자존심?”

그의 그림자가 저를 짓누르는 것만 같아, 여은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게 뭐라고 자꾸 남도 자신도 아프게 합니까.”

쓰디쓴 한마디만 남기고, 지협마저 그녀의 옆을 지나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여은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먼저 간 모단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누가 봐도 딴생각에 잠긴 얼굴로 느릿느릿 가고 있다.

어깨를 가볍게 치자 멈춘 모단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실룩거리는 눈썹과 눈과 입꼬리를 구경하던 지협이 툭 뱉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보육원에서 봤을 때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지협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모단이 얼른 말을 거뒀다.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이상하네요. 이사님도 당황스러우셨을 텐데 묻지도 않은 얘길 먼저 하시는 것도…….”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모단 씨 말대로 살다 보면 별 거지 같은 일도 있는 법인데.”

모단은 맥없이 웃고 말았다.

“그럼 이사님하고 저는 뭐가 되는 거죠?”

“뭘 뭐가 됩니까.”

지협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몇 다리 건너 아는 사람 하나쯤 있는 건 흔한 일 아닙니까? 우연히 지인이 겹친 것뿐이죠. 가깝지도 달갑지도 않은 지인.”

모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복잡하던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지협의 말이 맞다. 딱히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감정의 찌꺼기 따위를 남길 필요도 없는 사람들일 뿐인 거다.

“댁으로 가시는 길이면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선물 골라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사양하지 않을게요.”

이대로 헤어지면 다음에 지협과 마주쳤을 때 더 어색할 것 같았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모단은 부러 농담을 던졌다.

“아까 제가 이런 걸로 싸울 사이예요? 하고 던졌을 때 이사님이 착 받아주셔서 감사했어요.”

“상황상 받긴 받았지만 유치했습니다.”

“살다 보면 유치해질 때도 있지 뭘 그러세요. 솔직히 좀 시원하긴 했잖아요.”

지협은 떨떠름한 표정이면서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저는 더 유치해질 수도 있는데. 혹시 유손제약 딸이 내 성질 건드렸어, 하면 백견 씨가 유손제약을 날려줄까요? 그 정도는 아니겠죠?”

“아직 견이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유손제약이 몇십 억 규모의 계약 체결 공시를 올려서 다음 날 주가가 엄청나게 뛸 거라고 기대했는데…….”

지협이 저 앞에 보이는 제 차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날 밤에 타사와 계약했던 신약물질이 임상 3단계에서 개발 중단됐다는 악재가 퍼지는 바람에 발칵 뒤집혔죠. 개장 전에 호재만 공시하고 악재는 쉬쉬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까지 받았습니다.”

운전석 문을 열며, 지협이 말을 맺었다.

“손여은 씨가 약혼을 깬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입니다.”

깨진 게 아니라 깼다고 했다. 그쪽에서.

모단은 입을 꾹 닫고 차에 올랐다. 아직 에어컨은커녕 시동도 안 걸었는데 오싹하다.

“유손제약 내부 기밀을 캐내서 터뜨린 사람이 누군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다만 그 일이 있기 전에 견이가 유손제약 주식 가진 거 있으면 조용히 처분하라고 했던 게 떠오르는군요.”

“……말하지 말까요?”

“말해야죠. 남들이야 무슨 오해를 하건 상관이 없지만 견이가 오해하는 건 달갑지 않으니까. 절대 적으로 만들면 안 되는 녀석이거든요.”

운전대를 잡은 지협이 미소를 지었다.

“견이가 안 바빴으면 뭘 해도 했을 텐데, 당장 출근해야 해서 그럴 시간이 없을 테니 안심하고 말씀하세요.”

어느 부분에서 안심해야 되는 거냐고 차마 묻지 못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모단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

토요일 아침, 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로 일찌감치 집 앞으로 온 건가 싶어 놀라 받았는데, 당황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모단 씨, 혹시 자고 있었으면 미안해요. 근데 지금 전화해서 물어볼 만한 사람이 모단 씨밖에 생각이 안 나서요.]

“무슨 일 있어요?”

[열이 너무 많이 나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데 뭐부터 해야 돼요?]

“네? 백견 씨 아파요?!”

[나 말고 섭호가…….]

원래 저보다 일찍 일어나는데 안 보여서 가봤더니 이마가 펄펄 끓고 있더라고 했다.

제가 드러누운 적은 많았어도 섭호가 아픈 적은 처음이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열이 몇 도나 되는데요? 집에 체온계 있어요?”

[보긴 본 것 같은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찾고 있어요.]

“차라리 바로 병원으로 가봐요. 고생하지 말고 주사든 링거든 맞고 빨리 가라앉히는 게 낫죠.”

[그러려고 했는데 무슨 감기몸살 가지고 그러냐고 안 간다고 고집을 부리잖아요. 고모라도 부른다고 했더니 죽어도 싫다고 해서. 근데 이렇게 앓은 적이 없는 애라 겁나요.]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은 체온계하고 해열제부터 찾아보세요. 미지근한 물에 수건 적셔서 얼굴하고 손발 닦아주시면 열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열이 막 오를 때는 오한이 올 수도 있는데 그럴 때는 이불 덮어주시고.”

[알았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오늘 보기로 한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지금 그게 문제예요? 당연히 비서님 옆에 있어줘야죠. 아, 근데 집안일 비서님이 다 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뭐 먹을 건 있어요?”

[안 그래도 지금 주방인데……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뭐라도 있을 거예요. 지금 찾아보고 있는데…… 으악!]

수화기 너머에서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백견 씨,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일단 이건 나중에 치우고, 먹을 만한 게…….]

“할 줄 아는 건 있어요?”

[안 되겠다. 죽이고 약이고 사다가 먹여야…… 어, 여기 죽 같은 거 있다! 아니구나. 마늘 빻은 거구나.]

일곱 살짜리 혼자 집에 놔둔 것만 같은 불안함이 몰려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섭호가 살려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어김없이 직업병이 발동했다. 모단은 깊은 한숨과 함께 이불을 걷어냈다.

“……집 주소 대요.”

***

“도련님…….”

얼굴까지 벌겋게 열이 오른 섭호가 간신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고는 거실 장식장 서랍에서 한 번에 비상약통을 찾아냈다.

“여기 있다고…… 콜록! 말을 해줘두…… 왜 못 찾겠다는 겨…….”

“이상하다…… 내가 찾을 때는 분명히 안 보였는데…….”

“앞 못 보는 심청이 아부지가 도련님보다 낫겄슈.”

견이 억울하다 하려는데 섭호가 기침을 쏟아냈다. 피라도 토할 것 같은 기세에 질린 견은 얼른 등을 쓸어주었다.

“이런 속담이…… 콜록, 생각나는구먼유…….”

“무슨 속담?”

“앓느니 죽지.”

견이 입을 비죽거렸다.

“그러게 합격한 건 나인데 왜 네가 긴장이 풀려서 병이 나느냐고.”

섭호는 대꾸도 하지 않고 주섬주섬 체온계와 해열제를 꺼냈다.

“물 갖다 줄게. 아니지, 잠깐 있어봐. 뭐라도 좀 먹고 약을 먹어야지.”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섭호가 사색이 되었다.

“설마 고모님?”

“아냐.”

얼른 대문부터 열어준 견이 현관으로 뛰어갔다.

한편, 급한 김에 혜숙의 차까지 끌고 나온 모단은 견의 집 앞에서 한참을 대문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짐작보다 훨씬 엄청난 위용에 기가 질렸다. 그런 집 앞에 10년 넘은 경차를 세워두니 그야말로 꼬마자동차 붕붕이가 따로 없었다.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누르자 철컥 하고 대문이 열렸다. 거기서부터 건물까지의 거리도 한참이다.

정원 중간쯤 갔을 때 견이 나왔다. 평소엔 본 적 없는 헐렁한 티셔츠에 부스스한 머리다. 그 모습도 설정인 것처럼 근사한 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건가.

“고마워요, 모단 씨.”

견은 모단이 들고 온 커다란 쇼핑백을 얼른 받아 들었다.

“비서님은 좀 어때요?”

“앓느니 죽는다고 직접 내려왔어요…….”

“으이구.”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섭호가 당황해서 일어섰다.

“선생님, 어떻게 여기까지.”

“죄송해요. 미리 말씀도 못 드리고 찾아와서. 통화하다 보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와봤어요.”

아픈데 앉아 계세요, 하는 말로 섭호를 소파에 앉힌 모단이 체온부터 쟀다.

“세상에. 40도 가까이 되는데, 정말 병원 안 가셔도 되겠어요?”

“괜찮습니다.”

“그럼 일단 죽 먹고 약 드셔보시고 그래도 열이 안 떨어지면 그땐 병원 가시는 걸로 해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콜록, 주말 아침부터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잠깐 주방 좀 들어갈게요.”

그때 견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할아버지. 오늘 점심이요? 죄송해요, 못 나갈 것 같아요. 섭호가 몸이 많이 안 좋아서요. 네. 나중에 찾아뵐게요.”

그사이 모단이 오는 길에 사온 죽을 그릇에 덜어 식탁에 놓아주었다. 약과 보리차, 이온음료도 챙겨 왔다.

“힘드시더라도 좀 드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아플 땐 마음이 약해진다더니, 괜스레 서러워진 섭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우걱우걱 죽을 퍼 넣었다. 옆에 앉은 견이 조용히 물컵을 밀어주었다.

“엄마가 아프면 애들이 이런 기분일 것 같아. 나 아플 땐 엄마가 다 해줬는데 정작 나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고. 미안해.”

“뭘 그런 말꺼정 허고 그류…… 십니까.”

집이라 무심코 사투리가 나왔다가 표준어로 마무리했다. 섭호와 견이 동시에 큭 하고 웃었다.

“왜요?”

맥락 없이 어질러져 있던 주방을 정리하느라 못 들은 모단이 동그래진 눈으로 돌아보았다. 견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 방금 되게 소외감 느꼈는데. 나 돌아서면 둘이 몰래 손잡고 그러는 거 아니죠?”

섭호의 얼굴에 병세가 더욱 악화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모단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죄송해요, 비서님. 얼른 드시고 쉬세요.”

“고맙습니다.”

“나한테는 왜 사과 안 해요? 솔직히 얘랑 나랑 엮으면 내가 아까운데?”

“엮지 마세요. 비서님은 지금도 충분히 힘들고 착하게 살고 계세요.”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지금.”

죽 한 그릇을 다 먹은 섭호가 설거지까지 시킬 순 없다고 나섰다가 모단에게 구박만 받고 2층으로 올라갔다. 견이 그릇과 식탁을 치웠다.

“백견 씨는 밥 먹었어요?”

“아뇨, 아무것도.”

“그럴 것 같아서 도시락도 사왔어요.”

모단이 아까 죽을 꺼낸 쇼핑백에서 도시락을 꺼내는데, 익숙한 온기가 등 뒤를 이불처럼 꼭 감싸왔다.

“고마워요. 모단 씨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뒤에서 허리를 꼭 안은 견이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모단은 팔을 올려 그의 머리를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하여간 손 되게 많이 간다니까.”

“다 잘하는 남자친구 하고 싶은데 잘 안 돼요.”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해요? 너무 빈틈없어도 매력 없어요.”

“그래서 난 매력 있다는 거죠?”

견의 팔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밖에 나올 때 화장 꼭 하고 다니라니까 그냥 왔네. 심쿵하게.”

“찍어 바를 정신이 어디 있어요? 그래도 씻고는 왔어요.”

“나도 밥은 안 먹었지만 씻기는 했어요. 눈뜨자마자 샤워부터 하거든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미 뒤섞여 버린 체취가 슬그머니 공기를 덥혔다.

견과 모단의 고개가 스르르 돌아가려던 순간,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주방 입구 쪽에서 흘러들었다.

“저…….”

아까 견이 올려준 물수건으로 이마와 눈을 덮은 섭호였다.

“정말 너무나도 죄송스럽지만 쿨럭, 크윽. 물 좀…….”

“아, 아아! 물이요! 네!”

모단이 견을 팽개치듯 밀쳐 내고 두리번거렸다. 헛기침을 한 견이 이온음료를 병째 건네주었다.

“저는 이제부터 시체처럼 잘 테니까 아무도 없다 생각하고 편히 계십시오. 콜록.”

“아, 아니에요! 제가 편히 있어서 뭐 하게요. 비서님 쉬시게 이만 가봐야죠.”

“정말 괜찮습니다. 전 한 번 잠들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같이 나갔다 오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밤까지 잘 거니까요.”

고개를 꾸벅한 섭호가 비척비척 방으로 돌아갔다.

견이 모단의 어깨를 짚고 속닥거렸다.

“속지 마요. 쟤 잠귀 되게 밝아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어휴, 환자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창피하고 미안하고…….”

그때였다.

요란한 초인종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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