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어리고 예쁜 신입사원
2017.10.25.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아…… 네. 환영합니다…….”
월요일 아침, 다른 때 같았으면 주말의 후유증을 떨치지 못하고 카페인을 빨고 있었을 블랑아이 직원들은 정자세로 서서 신입사원 두 명, 아니, 두 분을 맞이했다.
견과 선해와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 직원들의 얼굴에는 난감함과 두려움이, 늦게 입사해 그들을 본 적 없는 직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희명그룹에 계열사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블랑아이에만 이런 재앙을 따블로 몰아주십니까!’
다른 부서에 물어보니 타 신입들은 상대적으로 무난했다. 나이가 좀 많거나 전공이 아예 다른 정도였고, 결혼과 임신으로 대학을 중퇴해 고졸 학력인 이가 희명출판사에 입사한 게 개중 가장 파격적인 케이스였다.
은규는 두 눈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컴컴하고 어찔거리는 게 꼭 제 앞날 같다. 상사라는 적폐 고래와, 신입의 탈을 쓴 신흥 고래 사이에서 신나게 등가죽 터질 새우.
“오늘부터 출근하게 된 신입사원 양선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삼십대 초중반처럼 보이지만 사실 후반인 선해는 이름과는 달리 전혀 양순하거나 선해 보이지 않는 첫인상의 소유자였다.
심플한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인데도 왠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편집장 뺨치는 카리스마를 풍겼다.
“신입사원 백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작년에 입사한 막내 직원과 동갑인 견은 더했다.
네이비 슈트에 흰 셔츠, 무난한 타이까지 전형적인 신입사원 패션에 싱그러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데도 어려웠다.
대체 왜 여기 계시냐고, 저기 대표실이나 임원들 있는 층으로 올라가 버리시라는 말이 절로 나오려 했다.
“뭐, 일단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잘해보세요.”
이번에 차장으로 진급한 김광남이 사무실 한가운데 삐딱하니 서서 한마디 했다. 변진상은 아직 출근하지도 않았다.
“양선해 씨하고 백견 씨 자리 알려주고 적당히 업무 분담하세요.”
“네.”
은규와 다른 여자 대리가 둘의 자리를 알려주었다.
나머지 직원들도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여직원들 눈엔 얼마간 하트도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심란한 분위기였다.
모니터에 메신저창을 띄운 직원들이 폭풍 수다를 쏟아냈다.
―백견, 백견 말만 듣다가 실물 처음 봤는데 연예인 본 기분이에요. 얼굴복지 만세!
―넥타이 매듭 살짝 삐뚤어진 거 보셨어요? 세상 귀여우시다.
―얼굴하고 분위기만 보면 정말 애기애기한 신입사원 같으신데.
―속지 마세요. 일하는 거 보면 그런 말 안 나와요.
―언더커버 보스, 뭐 그런 거 아니에요? 어떡해. 엄청 긴장돼요.
―양선해 씨가 전설의 그분 맞죠? 김 차장 가발 벗겨서 팽개쳤다던.
―그래서 아까 김 차장이 계속 머리 잡고 있었던 거예요? 미쳐ㅋㅋㅋ
당사자들은 아직 초대받지 못한 대화방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 군대 있을 때 대대장 아들이 이병으로 들어온 적 있는데 그때 그 기분이야.
―저 잠깐 커피숍 매니저로 일할 때 사장 딸이 알바하러 온 적 있는데 그때 그 기분이에요.
―나 전생에 조선 수군일 때 이순신 장군님이 백의종군하러 오신 적 있는데 그때 그 기분이야.
―와, 은규 대리님 대리 다시더니 바로 개그 수준 달라지는 거 봐.
―오늘부터 점심 혼자 먹고 싶은가 보다.
―미안합니다.
사무실 가장 안쪽에 있는 차장 자리에서 김광남의 고함이 터졌다.
“일 안 하고 뭣들 해? 그저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으면 다야? 신입들 일 가르쳐!”
“네, 알겠습니다.”
“특히 백견 씨!”
“네.”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몇 안 되는 소지품들을 가방에서 꺼내던 견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대답했다.
높지 않은 파티션 너머로 김광남과 견의 눈이 마주쳤다.
“시키는 일만 하세요. 건방지게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하지 마시고.”
순간, 사무실 안의 온도가 10도쯤 스윽 내려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무시무시한 침묵 속, 직원들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블라인드 공모전 결과가 나온 후, 담배 두 대를 연달아 빨아들인 변진상은 꽁초를 짓이기다시피 끄고는 폭소를 터뜨렸다.
“제정신이 아닌 거지. 회사가 제 놀이터로 보이는 모양이야.”
방금 그 웃음이야말로 제정신 아닌 것 같았다는 말을 꿀꺽 삼킨 김광남은 억지로 웃는 얼굴을 했다.
“백 회장도 포기했단 말이 돌더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걸 가만두겠나?”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이미 업계에서 말이 나올 대로 나왔는데 또 정신 나간 짓을 벌이는 걸 보면 말입니다.”
“지가 회장 손주인 거 다 아는데 누가 절 함부로 할까 싶은가 본데, 그럴수록 자존심도 콧대도 철저하게 눌러놓게. 일반 직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까 봐 똑같이 대했을 뿐이다, 좋은 명분이지 않나.”
“예, 알겠습니다.”
“제까짓 게 영 못 버티겠다 싶으면 나가겠지. 두 번이나 나가면 더 이상의 신뢰는 없을 거고. 아무것도 못하게 해.”
아무리 그래도 회장 손주인데, 하는 시선들을 의식한 김광남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흘렸다.
‘설마 진짜로 일개 직원 취급할까 싶었겠지만, 특별대우 같은 건 눈곱만치도 없을 거다.’
그런데 견은 일말의 동요도 없는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차장님. 명심하겠습니다.”
‘저거 또 무슨 꿍꿍이야?’
되레 불안해진 김광남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견은 그저 웃기만 했다.
***
“타 부서 사람들이 오늘따라 많이 오네요.”
“평소였으면 귀찮다고 안 왔을 일도 직접 가져온다거나 지나가다 들르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아뇨. 신입 탓이에요.”
속닥거린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시선이 고장 난 복사기를 손수 고치고 있는 견에게로 향했다.
넥타이 끝을 셔츠 단추 사이에 넣고 소매도 반쯤 걷은, 그러니까 회사 남직원들의 절반 이상이 하고 있는 차림인데도 홀로 영롱한 후광이 감돌았다.
씹힌 종이를 빼내고 능숙하게 다시 기계를 조립한 견이 하던 복사를 마저 했다. 조금 후에 있을 회의에서 쓰일 자료다.
따끈따끈한 서류를 스테이플러로 딱딱 집어서 착착 쌓아 회의실로 들고 가는 견의 뒷모습을 보던 직원들의 눈매가 흐뭇해졌다.
“빠릿빠릿한 신입 너무 좋다. 말이 신입이지 뭔 일을 어떻게 시키나 심란했는데, 시키고 자시고 할 것도 없네.”
“근데 되게 의외예요. 잡무 같은 건 못 하실 줄 알았는데.”
“아니야. 대표로 있을 때도 직원들한테 잡다한 거 거의 안 시키고 웬만한 건 혼자 하고 그랬어.”
“우와……. 누구랑은 너무 다르네요.”
어처구니없을 만큼 사적인 일까지 다 떠맡기는 변 대표를 떠올린 모두가 이를 갈았다.
“근데 왜 견차반이라는 소문이 난 거예요?”
“글쎄, 뭐랄까. 가끔 이상할 때가 있긴 했어. 일 관련해서 예민할 때는 또 엄청 예민하고. 그만둘 때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런저런 잡음도 많았고. 떠도는 말이긴 한데 바람둥이라는 말도 있고. 뭐, 그건 사생활이긴 하지만.”
“솔직히 돈 많고 잘생겼는데 여자가 안 꼬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게 보면 또 그렇지.”
10분 후에 회의 시작합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가장 어린 여직원 둘은 죽상이 되어서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 타는 거야 돌아가면서 하니까 참을 수 있는데 김 차장 갖다 주는 건 너무 싫어.”
“내 말이. 로또만 되면 이놈의 회사 때려치우고 신고할 텐데. 에휴.”
“잘 마실게, 이러면서 어깨 짚을 때마다 소름 끼쳐. 어쩔 수 없어서 참았더니 엉덩이까지 두드리더라.”
“그래 놓고 표정 안 좋으면 지가 더 정색하잖아. 딸 같아서 그런 건데 기분 나빠하면 섭섭하다나 어쨌다나.”
“지 딸이 똑같은 대접 받아도 사회생활이 다 그렇다고 할 건가? 짜증 나.”
욕을 쏟아내며 커피를 타고 있는데, 탕비실 안쪽 창고에서 박스를 든 견이 나왔다. 순간 직원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배, 백견 씨.”
“거기 계셨어요?”
괜한 뒷담화는 아니지만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견이 박스에서 종이컵을 꺼내 선반에 정리하며 작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그게…….”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말 꺼내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일단 오늘은 제가 커피 가지고 들어갈게요.”
“네?”
“쟁반 이리 주세요.”
종이컵을 가득 올린 쟁반을 들고, 견이 먼저 회의실로 들어섰다.
김광남과 다른 직원들이 놀란 눈을 했다. 정말로 저런 일까지 다 할 줄은 몰랐다는 눈이다.
“제가 탄 건 아니지만 드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차례로 직원들 앞에 놓아주고, 마지막 남은 한 잔을 김광남 앞에 놓아주었다.
김광남이 들고 있던 볼펜으로 책상을 틱틱 쳤다.
“안 시킨 일은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백견 씨가 아직 모르나 본데, 나는 어리고 예쁜 사람이 주는 것만 마셔.”
저걸 농담이라고 하고 자빠졌나, 하는 표정이 모두의 눈에 스쳤다. 몇몇이 마지못해 웃어주는 시늉을 했다.
그때, 견이 김광남의 어깨를 살포시 짚고는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다소곳이 눈꼬리를 접었다.
“저 정도면 어리고 예쁘지 뭘 그러세요.”
“커푸픕!”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요망한 눈 찡긋질을 정통으로 목격한 직원이 사레에 들려 괴로워했다.
다들 입을 틀어막거나 뺨을 붉히는 등 어수선해진 와중에, 어리고 예쁜 건 사실이라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한 방 맞고 말려든 김광남이 어깨를 은근히 주무르던 견의 손을 쳐냈다.
“뭐 하는 짓이야? 징그럽게.”
“징그러우시다니 섭섭합니다. 가족 같아서 그런 건데.”
“됐고, 치워!”
이마까지 시뻘게진 김광남이 끝까지 큰소리를 쳤다.
“커피 마실 때도 손맛이 있는 거 모르나? 커피 넣고 물 넣고 저을 줄 몰라서 다방에서 시켜 먹겠느냔 말이야.”
여직원들이 눈을 찌푸렸다.
선해가 스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광남은 반사적으로 한 손을 올려 정수리를 짚었다.
그런데 견이 그 손을 덥석 잡더니 제 엉덩이에 떡하니 가져다 댔다.
“이런 손맛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두가 뜨아악 입을 벌렸다.
김광남 역시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무실을 뒤집어놓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백견이 이런 인간이었던가……?’
예전에 대표로 있을 때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그 후 가끔씩 마주쳤을 때와도 달랐다.
유들유들 무뎌진 것 같으면서도, 더 알기 어려워졌다.
대체 이 의뭉스런 똘끼 뒤에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가.
회의실 책상 가운데 놓인 휴지를 집으려고 일어섰던 선해가 진지하게 말했다.
“차장님, 사내 성희롱으로 신고하시죠.”
“성희롱?”
“백견 씨 엉덩이가 차장님 손을 만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까도 가…… 족 같은 핑계를 대질 않나.”
‘가’와 ‘족’ 사이를 띄어 읽었을 뿐인데 욕 같은 문장이 완성되었다. 김광남이 벌떡 일어섰다.
“이 새ㄲ…….”
평소 남직원들에게 쌍욕쯤은 예사로 던져 대는 그였다. 그러나 막상 견과 눈이 마주치자 다 뱉지 못하고 말끝을 삼켰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와 ‘내가 누군지 몰라?’가 같이 들어 있는, 교묘하고 치밀한 시선.
순간적으로 스친 싸늘한 표정 또한 김광남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해하고 실례했습니다. 하긴, 손맛은 커피 타는 사람 손에만 있으면 되죠.”
싱긋 웃은 견이 커피를 들어 김광남의 손에 고이 쥐여주었다.
“마시는 사람 손은 잔 드는 데만 쓰시면 됩니다. 이렇게.”
점심시간, 사내식당에서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밥을 먹은 견은 직원들을 따라 로비로 내려왔다.
틈만 나면 탈출을 꿈꾸는 직장인들의 습성을 따라 굳이 사내 카페테리아를 놔두고 밖에 있는 별다방으로 가려는데,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던 변진상과 김광남과 마주쳤다.
“다들 어디 가나?”
“대표님,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커피 한 잔 마시고 오려고 나가는 중인데, 대표님 것도 사오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변진상이 카드를 꺼내 견에게 내밀었다.
“신입이 가서 커피 좀 사와. 오늘은 특별히 내가 살 테니까 사무실에 모여서 다 같이 마시지.”
사무실도 싫고 너도 싫고 다 싫은데, 커피보다 회사 밖 공기를 마시고 싶었던 건데, 점심시간이라도 마음대로 쓰게 냅두지 왜, 등등의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물론 밖으로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두 손으로 카드를 받아 든 견의 눈썹이 미미하게 실룩였다. 제가 산다고 생색은 있는 대로 내더니 법인카드다.
선해가 나섰다.
“백견 씨 혼자 어떻게 다 들고 오려고요. 저도 신입이니까 같이 가죠.”
사무실이 싫거나 견과 친해지고 싶은 직원들도 얼른 끼어들었다.
“두 분도 벅찰 것 같은데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갈래요.”
“거 쓸데없이 우르르 몰려다니지 말고 다 올라가! 신입들이나 갔다 오게.”
변진상이 툭 말을 잘랐다.
“이 정도도 혼자 못 하나?”
“아닙니다. 다들 뭐 드실지 말씀해 주세요.”
“아, 그리고 오는 길에 다른 것도 사와.”
사사로운 심부름 몇 개가 추가됐다. 견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회사 앞 별다방, 듣는 것만으로도 한 번에 외운 메뉴를 줄줄 읊어 주문한 견이 직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바쁜 시간인데 한꺼번에 많이 주문해서 죄송합니다.”
말 한마디에, 사실 얼굴만 보고도 피로가 사르르 풀려 버린 직원을 뒤로한 견은 선해에게 실례한다는 눈짓을 보내고 휴대폰을 꺼냈다.
“섭호야, 몸은 좀 괜찮아?”
[어제부터 괜찮았습니다. 일하는 건 어떠십니까?]
“밥을 엿기름으로 삭힌 다음에 고아서 만든 달고 끈적끈적한 음식을 뭐라고 부르지?”
[엿 같군요.]
“응. 지금 출근해 있는 거지?”
[예.]
오늘부터 섭호도 비서실로 출근하게 되었다.
서류상으로는 입사 당시부터 비서실 소속인데 견의 수행비서라는 명목으로 줄곧 외근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 달에 최소 몇 번쯤은 사무실에 나갔었기에 견보다는 빨리 적응했다.
“시간 날 때 하나만 부탁할게.”
[말씀하십시오.]
“블랑아이 쪽으로 나온 법인카드 있지?”
견이 아까 변진상이 내민 법인카드를 손가락 사이에서 탁 튕겼다.
“회계 처리 빈틈없이 되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사적으로 쓴 것까지 경비 처리된 건 아닌지.”
견과 선해가 커피 캐리어를 양손에 바리바리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피 같은 점심시간을 똥 같은 커피타임으로 허비하게 된 직원들의 얼굴은 우중충하기만 했다.
“어이, 홍진우 씨. 1년 만에 막내 탈출했네? 그동안 돈은 좀 모았어?”
“아, 아직요. 학자금 대출이 남아서…….”
“거 뭐냐, 프로필인가 뭔가 보니까 여자친구랑 여행 갔다 온 것 같던데, 그런 데 쓸 돈은 있고? 결혼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여자한테 헛돈 쓰지 말고 악착같이 모아. 남자는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어리고 예쁜 여자 만날 수 있어.”
차라리 늘 하던 대로 대표실에서 인터넷이나 하지, 오늘따라 왜 갑자기 직원들 사이에 껴서 개소리 대잔치를 벌이고 난리람.
모두의 눈에 살기가 번뜩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변진상은 견을 돌아보며 퉁을 놓았다.
“커피가 왜 이렇게 써?”
견이 기다렸다는 듯 스틱 설탕을 건넸다.
“설탕 말고 시럽 없어?”
설마 했는데 일회용 시럽까지 나왔다. 냅킨이나 빨대도 말만 하면 주머니에서 꺼낼 것 같았다.
방긋 웃는 견에게서 시럽을 건네받은 변진상이 헛기침을 했다.
뭐라도 트집을 잡고 망신을 주고 싶은데 의외로 틈이 없다. 분위기를 살피니 직원들도 생각보다 거북해하지 않는 눈치다.
견이 직장 생활을 아예 안 해본 사람이 아닌 데다, 신입을 위한 사소한 팁들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온 덕이었다.
“윤 대리는 혼자 거기서 뭐 해?”
“죄송합니다. 속이 안 좋아서 약 좀 먹느라고요.”
“쯔쯔. 자기 몸 알아서 챙기는 것도 능력이야. 회사는 단체 생활이잖아. 누구 하나 골골대면 다른 팀원들한테 그만큼 부담이 돌아가는 거 모르나?”
변진상의 말에 김광남이 장단을 맞췄다.
“대표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안 그래도 전에 비슷한 경우가 있지 않았습니까? 걸핏하면 쉬네 마네 남한테 피해만 주고 말입니다.”
저를 겨냥한 말임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견은 홀로 커피 CF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럼 얼른 마시고 일들 해.”
변진상이 대표실로 들어가고, 개소리 바통을 김광남이 넘겨받았다.
“이서연 씨는 아직도 남자친구 없나? 시집 안 가?”
“아, 뭐…… 일도 바쁘고요.”
“하긴, 시집가서 애 생기면 육아휴직을 쓴다 퇴직을 한다 골치만 아프지.”
견이 슬쩍 끼어들었다.
“차장님께도 따님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 공부 중입니까?”
“졸업한 지가 언젠데. 유학 갔다 와서 지금은 외국계 회사 근무한다고. 애가 워낙 능력이 있다 보니까 벌써부터 업무량이 장난이 아닌 모양이야. 몸이 축난 게 눈에 보이는데…….”
“저런. 자기 몸 알아서 챙기는 것도 능력인데 안타깝네요. 따님 하나 골골대면 다른 팀원들한테 그만큼 부담이 돌아갈 텐데.”
아까 백번 옳다 했던 변 대표의 말이 견의 입을 타고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더불어 제가 했던 말도 고스란히 되돌려 받았다.
“그렇게 능력도 있고 열심히 하는데, 상사에게서 어차피 시집가서 애 생기면 육아휴직을 쓴다 퇴직을 한다 골치만 아플 거 아니냐는 말이라도 들으면 참 속상하겠군요.”
형언할 수 없는 분노에 김광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면, 직원들의 얼굴에는 사이다 대잔치를 한 듯 황홀한 표정이 떠올랐다.
견이 전 대표가 아닌 완벽한 신입사원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하나 생겼다.
사또,
즉 사이다 또라이.
덤으로 사또에게 걸핏하면 농락당하는 김광남 차장은 사또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