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어흥 직전의 으르렁
2017.10.29.
“불금엔 소주.”
“소주엔 닭발.”
견의 잔과 모단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오랜만에 온 ‘이모네 닭발’ 안이었다.
“일주일 동안 고생 많았어요. 신입 노릇하기가 쉬운 게 아닌데.”
“여자친구 앞이니까 센 척하고 싶은데 솔직히 힘들었어요. 하다하다 성희롱까지 당했어.”
모단의 손에 들려 있던 닭발이 투둑 떨어졌다. 입은 꾹 닫고 있는데 눈빛에서 욕이 들렸다.
커피 주는데 김 차장이 엉덩이를 만졌다며 일러바친 견이 잔뜩 불쌍한 눈을 했다.
“열 받죠? 차장 명치 치고 싶죠? 나도 아직 못 만져 봤는데 어딜, 싶죠?”
“내 말이…… 가 아니라! ‘나도 아직 못 만져 봤는데’는 빼고. 명치는 쳐주고 싶네요.”
“그걸 왜 빼요? 딱 그 부분에서 빡이 돌아야지.”
“내가 빡이 도는 포인트를 왜 백견 씨 마음대로 정해요?”
하지만 역시 그 포인트에서 빡이 돌긴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네. 자기는 엉덩이 없나? 남의 엉덩이를 왜 건드려? 그걸 가만히 놔뒀어요?”
“사실은…….”
견이 그제야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직원들 괴롭게 할 때마다 귀신같이 끼어들어서 똑같이 돌려줬더니 이젠 되도록 자리에 혼자 있고 싶어 한다고.
“원래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변 대표 밑에서 스트레스를 어지간히 받았는지 직원들을 너무 험하게 대하시더라고요. 안 좋은 건 금방 닮는다더니.”
그 와중에 업무에는 지장 없는 잔실수를 저질러 한 번씩 혼낼 기회를 준다거나, 김광남이 변 대표에게 까일 땐 은근히 감싸줬다는 얘기를 들은 모단은 웃고 말았다.
그를 절대 적으로 만들면 안 된다던 지협의 말에 백번 공감하는 바였다.
“뭐야. 알고 보니까 그 차장이 희롱당한 거잖아요. 그러다 사또하고 사또밥이 된 거구만.”
“사또? 암행어사도 아니고 웬 사또? 그게 뭔데요?”
“백견 씨 별명이요. 몰랐어요?”
사이다 또라이라는 설명을 들은 견은 미친놈 소리 좀 들어본 사람답게 그런가 보다 했다.
“견차반보다는 백배 낫네. 근데 그 소문이 어린이집까지 들어갔을 정도면 다른 부서도 다 안다고 봐야 되겠네요?”
“그렇죠. 듣자 하니 요새 블랑아이 직원들은 사또하고 사또밥 밀당하는 거 보는 재미로 출근한다던데.”
제 일 아닌 것처럼 낄낄대는 견을 보다가 모단은 고민에 잠겼다.
요새 희명그룹 안에서 가장 핫한 존재가 바로 백견이었다.
동호회 덕에 사내 지인이 많은 효림에게 간간이 그의 얘길 들을 때마다 움찔하게 됐다. 대체로 좋은 얘기들이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백견이 회장 손주가 아니었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일반 신입사원이었어도 마음 놓고 차장한테 할 말 다 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지.’
전에 회장실 근처에서 견의 험담을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지금은 더했다. 신경이 쓰이다 못해 겁까지 났다.
저 윗동네에서 벌어지는 알력다툼에 대해 알 도리는 없지만, 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 좋은 말이 돈다면 그 사람들이 놓치지 않고 물어뜯을 것 같았다.
“백견 씨.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겠지만.”
견이 잔을 반쯤 들고는 마주 보았다.
“물론 대부분이 속 시원하다고 좋아하고 대리만족도 하는 것 같지만요, 누군가는 삐딱하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어딜 가나 그런 사람들은 꼭 있으니까.”
“삐딱하게요?”
“보통은 억울해도 회사 때려치울 거 아니면 참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백견 씨는 그런 걱정에선 비교적 자유롭잖아요. 그것 자체를 시샘해서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겠다 싶어서.”
“음…… 그렇게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역시 모단 씨.”
생각에 잠겼던 견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도 아무도 안 나서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나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럼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대신 이제부터는 눈에 안 띄게 응징해 보도록 할게요.”
“눈에 안 띄게 응원할게요.”
둘은 동시에 웃었다.
“참, 나 내일 출장 가요.”
“신입이 벌써 출장을 가요?”
“시킨 일은 아니고 혼자 알아서 하는 일이에요. 셀프 출장이랄까. 시키지도 않은 일 하지 말라고 하니까 갑자기 하고 싶어져서.”
조금, 아주 조금, 사또를 부하직원으로 둔 사또밥이 가엾어졌다.
“같이 갈래요? 바람도 쐴 겸.”
“어딘데요?”
“좀 멀어요. 원래 안 자고 오려고 했는데 모단 씨가 같이 간다고 하면 자고 와야겠네요. 꼭.”
“뭐가 바뀐 것 같다는 생각 안 들어요?”
“뭐가요? 나 혼자 가면 볼일만 보고 일찍 오겠지만 같이 가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느라 한밤중이 될 거 아니에요. 모단 씨 옆에 태우고 졸음운전 같은 거 할 순 없죠.”
“졸음운전은 혼자 있을 때도 하지 말아야죠!”
“그러니까 조수석에 앉아서 말 좀 시켜줘요.”
견이 해맑은 척하지만 위험천만한 눈웃음을 연방 흘렸다.
“나 믿죠? 손만 잡고 잘게요.”
“차라리 게이나 스님이라고 하면 믿겠네.”
“게이 아니고 스님 아닌 거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무슨 소리야. 그러지 말고 시간 되면 같이 가요.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그렇고 그런 망상들이 뇌를 잠식하는 통에 모단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견이 모단의 코끝을 톡 치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솔직히 내가 맘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어흥 했을 거란 생각 안 들어요?”
“어, 어흥이라니…….”
“전래동화에 나오는 호랑이가 ‘어흥’ 하기 전에 꼭 붙이는 말이 있잖아요.”
“뭐요?”
“널 잡아먹겠다.”
“…….”
그건 그랬다. 호텔 펜트하우스라는 야릇한 장소에 서로 마음을 확인한 순간이라는 낭만적인 배경까지 갖춰졌음에도 키스만 열심히 하지 않았던가.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둘만 있게 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치덕치덕 붙어 오면서도, 열렬함이 지나치다 싶으면 먼저 손을 거두고 꺼뜨려 버리곤 했다.
“방 하나 더 잡을게요.”
견이 한마디로 스케줄을 정리했다.
“난 모단 씨한테 미움받는 게 제일 무서운 사람이니까 안심하고 같이 가요.”
***
그렇게 말해주었음에도.
또한 그가 그 말을 제 동의 없이 힘으로 뒤집지 않을 거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간밤에 정성껏 목욕재계를 하고 가진 것 중 가장 깔끔하고 예쁜 속옷을 챙긴 걸까.
‘아주 작정을 했구나. 혹시라도 들킬까 봐 무섭다.’
모단은 남모를 자괴감에 휩싸였다.
‘어휴, 복잡해. 약속을 지키길 바라는 건지 사고를 치길 바라는 건지 나도 모르겠네. 이러다 내가 덮치는 거 아니야?’
갑자기 견이 모단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화들짝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차가 덜컹 튀었다.
“미안해요. 과속방지턱을 미처 못 봤어요. 괜찮아요?”
“네. 이 정도는 뭐.”
다시 속도를 올리면서도 견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안전벨트보다 더 든든하게 저를 잡아주는 팔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향수 바꾼 것 같네요.”
“네. 지협이 형한테 선물 받았어요.”
“잘 어울려요.”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전 남친 얘기 따위 자꾸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협의 말대로 그가 오해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사실 그거 저도 같이 고른 거예요.”
“네?”
모단이 백화점에서 민철과 여은을 만났던 얘기를 꺼냈다. 둘이 결혼했다는 사실에 견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견이 입을 뗐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다신 볼 일이 없길 바라지만, 혹시나 또 마주친다면 그땐 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네요.”
“미안해요. 자꾸 신경 쓰이게 해서.”
“괜찮아요. 지금 모단 씨 남자친구는 나니까.”
질투로 발칵 뒤집힐 줄 알았는데 지나간 일에는 의외로 쿨한 듯했다.
대답 속에 담긴 믿음이 고마워서, 그래도 기분이 썩 좋을 리가 없으니 미안해서, 모단은 견의 손을 꼭 쥐었다.
견이 가볍게 늘인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나보다 모단 씨가 더 거슬릴 것 같은데. 혼내줄까요?”
“시간 아깝게 뭐 하러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인데.”
“그건 그렇죠. 사실 나도 불쌍한 사람은 안 건드려요.”
“그 사람들이 불쌍하다고요?”
“네. 모단 씨를 놓치고 그런 여자한테 간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급커브길이 나왔다. 모단을 잡은 견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빠졌다.
“그런 남자한테 가겠다고 형이랑 파혼한 여자가 그다음으로 불쌍하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요. 백지협 이사님 정도면 다들 못 만나서 안달일 텐데.”
갑자기 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우물대는 것 같다가 톡 뱉었다.
“근데 지협이 형도 그렇게 완벽한 건 아니에요. 그 형 은근히 쪼잔하고 융통성도 없어서 사람 피곤하게 하고 그래요.”
“네?”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몰라요. 대외용 이미지만 좋지, 사실 친구도 없는 은둔형 외톨이라 걸핏하면 술 마시게 집으로 오라 그러는데 가보면 웬 아저씨가 있다니까요. 안 씻고 안 먹고 안 치우고 안 움직이고.”
“에이, 설마요.”
“아니라니까요? 면도만 안 해도 완전 다른 사람이에요. 반면에 나는 그때 봐서 알겠지만 엄청 깔끔하고 또…….”
서로 애틋하게 챙길 땐 언제고 갑자기 흉을 보나, 하는데 견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튼! 그래도 내가 더 나아요!”
둥그레진 모단의 눈이 견의 옆모습에 닿았다. 미끈하게 떨어지는 콧날 아래 입술이 딱 봐도 한 주먹은 나와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형이 더 어른스럽고 유능해 보이고 인정도 많이 받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볼을 부풀리고 웅얼대던 견이 신호에 걸리자마자 모단을 돌아보았다.
“나만 볼 거죠?”
모단은 주먹을 말아 쥐고 제 입가를 지그시 눌렀다.
아이에게 하듯 양 볼때기를 꾹 누르고 우쭈쭈 세례를 퍼붓고 싶은 충동이 꿈틀거렸다.
‘역시 내가 덮칠 가능성이 높아. 조심해야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어서는 안 돼.’
“아기 상어 뚜루루뚜루…….”
“응?”
“아, 아니에요. 속으로 부르려고 했는데 이게 왜 밖으로 나와.”
남몰래 동요 한 소절 때리면서 어른의 충동을 누르려고 했는데 꼬여 버렸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견은 나만 보라니까 뜬금없이 상어를 찾는 여자친구의 심리는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심각한 오해에 빠졌다.
“백견 씨.”
“왜 불러요.”
대답이 불퉁하다. 순순히 너만 보겠다고 하기는커녕 딴생각만 했다고 삐진 게 분명했다.
이왕 수습하기 어려워진 거, 모단은 조금만 더 귀여워해 보기로 했다.
“세상에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너만 봐요?”
“알았어요. 넓게 보고 멀리 보고 정모단 보고 싶은 거 다 보고 살아요. 눈이 돌아가든가 말든가.”
“근데 희한한 게요, 솔로일 때는 그렇게 잘 보이던 꽃돌이들이 요새는 하나도 안 보이는 거 있죠? 백견 빼고 다 죽었나 봐요.”
툴툴대던 견의 입이 쏘옥 들어가고, 대신 광대가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모단의 입꼬리도 실룩거렸다.
크흠, 목도 표정도 가다듬은 견이 치명적인 각도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많이는 안 죽었을 텐데. 나보다 잘생긴 남자들이 많진 않아요.”
모단이 웃음을 터뜨렸다. 차 안 가득 몽글몽글 부서지는 웃음소리에 견의 입가도 길게 늘어졌다.
“운전하는 사람 적당히 들었다 놨다 해요.”
“아직 다 안 들었는데.”
모단이 몸을 기울이더니 앞유리창 너머를 가리켰다.
“저 앞에서 잠깐 차 세워봐요.”
“왜요?”
“뽀뽀나 한 번 하게.”
모단이 내 안에 아재 있다, 하는 표정으로 흐흐 웃었다.
똑같이 흐흐 웃어준 견이 순식간에 정색했다. 되돌아오는 눈빛을 보자마자 모단은 아차 했다.
“이제 보니 졸음운전이나 모단 씨나 똑같네.”
핸들이 조금 거칠게 꺾였다.
“운전 못 하게 만드는 건.”
차가 미끄러지듯 갓길에 멈춰 섰다. 비상등을 켜고 안전벨트를 푼 견의 상체가 조수석으로 훌쩍 넘어왔다.
“잠깐, 나 분명 뽀뽀 한 번이라고 했어요! 뽀뽀 모르냐고!”
“여기다 이렇게 하는 게 뽀뽀 아닌가? 어릴 때 뽀뽀뽀 안 보고 딩동댕유치원만 봤더니 헷갈리네.”
“뭔 말도 안 되는, 아오!”
겁 없는 도발의 결과는 늘 그렇듯, 어흥 직전의 으르렁으로 되돌아왔다.
***
견과 모단이 도착한 곳은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지방의 작은 도시였다.
예전에는 제법 번화하고 활기찬 항구도시였다는데, 지금은 오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와아…….”
“어때요? 서울하고는 공기부터 다르죠?”
코끝을 스치는 짠내와 피부 위로 달라붙는 끈끈한 소금기가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왠지 기분이 묘해지네요.”
“저도 가끔 올 때마다 느껴요. 여기만 시간이 멈춘 것 같달까.”
차에서 내린 둘은 50년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듯한 풍경 속을 천천히 걸었다.
칠이 다 벗겨지고 철골마저 드러난 건물들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바랜 간판을 매단 거리는 너무 고즈넉해서 영화 세트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 혹시 백견 씨 어렸을 때 살던 동네예요?”
“저 말고 우리 할아버지 고향이에요.”
견이 걸음을 멈췄다. 운동장에 드문드문 잡초가 보이는 자그마한 학교 앞이었다.
오래전에 폐교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담이 허술하게 벌어져 있어 잠긴 교문이 무색해 보였다.
견이 교문 바로 앞에 있는 낡은 건물을 가리켰다.
“여기가 60년대에 우리 할아버지가 하시던 가게예요. 이 근방에서 제일 큰 문방구 겸 장난감 가게였대요.”
“정말요?”
“물 건너온 장난감은 너무 비싸고, 그렇지 않은 건 너무 조잡하고, 그래서 여기서 번 돈으로 조그마한 공장을 사서 희명토이즈를 세우신 거죠. 요즘 말로 가성비 좋은 장난감을 만들고 싶으셨대요. 그게 커지면서 지금의 희명그룹이 된 거고요.”
“대단하다……. 무슨 역사의 현장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희명문방구’라고 쓰인 간판을 한참 보던 모단은 이끌리듯 다가갔다.
견은 그 자리에 서서 챙겨온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낡은 전봇대가 이고 있는 하늘과 움직임을 멈춘 거리, 노쇠한 건물들 속에서 홀로 생기를 머금은 모단까지.
모단은 나무틀에 유리를 끼워 넣은 미닫이문 앞에 섰다. 유리가 깨져서 갈았는지 맨 아래만 불투명한 젖빛 유리다.
부연 흙먼지와 시커먼 더께가 앉아 있어 선뜻 손을 대기가 꺼려졌다.
유리에 이마가 닿을 듯 말 듯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니, 다 무너져 가는 매대에 간간이 물건들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주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고 있는 것처럼 묘한 감상이 번졌다.
“이렇게 오래된 간판하고 가게가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가 있죠?”
“다른 분이 학교 폐교되기 전까지 그럭저럭 장사를 하셨어요. 그전에 할아버지가 건물을 사서 세를 안 받는 대신 가게와 간판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하셨고요. 요즘도 계속 고민하세요. 조금이라도 덜 무너지게 손을 봐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둘지.”
“뭔지 알 것 같아요. 하나뿐인 그림인데 덧칠하자니 망칠 것 같고 그냥 두자니 색이 빠질 것 같은…….”
“모단 씨.”
얼결에 돌아보자 경쾌한 셔터 소리가 났다.
“예뻐서.”
한 손에 카메라를 든 견이 따스한 미소를 흘렸다.
모단의 눈 안에는 그 장면이 사진처럼 선연히 남았다.
과거를 등지고 서서 반짝이는 남자.
오롯이 저만 보고 있는.
“이리 와봐요.”
견이 손짓했다. 모단은 얼른 그의 옆으로 가서 섰다.
“저기 글씨 옆에 조그만 그림 보여요?”
견이 간판 끄트머리에 그려진 곰돌이를 가리켰다. 너무 많이 지워져서 한참 보고서야 곰이구나 하는데 어딘가 눈에 익었다.
“곰곰이, 알아요?”
“아, 맞다! 우리 어릴 때 잠깐 유행했던 인형 아니에요? 어린이집에 책도 있는 것 같은데.”
“맞아요. 쟤가 곰곰이 원조 격이에요. 할아버지가 애들 눈길 끌어보겠다고 손수 그리신 그림.”
모단은 아까와는 또 다른 기분으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자물통이 매달려 있는 미닫이문이 활짝 열리고, 그 앞에 알록달록한 장난감과 군것질거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환상이 아른거렸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주인이 붓에 페인트를 묻혀 정성껏 간판에 그림을 그리면, 옹기종기 모여 구경하던 아이들이 소란한 웃음을 터뜨렸을 광경이.
얼마간 향수 비슷한 것에 젖어 있던 모단이 그때까지도 사진을 찍고 있던 견을 돌아보았다.
“근데 이게 출장이에요? 할아버지 고향 찾아와서 사진 찍는 게?”
“자료조사죠. 이제부터 곰곰이를 블랑아이의 상징이자 아주 유명한 캐릭터로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해요.”
“스토리텔링이요?”
“네.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야기의 힘. 그냥 곰이랑 사연 있는 곰은 같을 수가 없으니까.”
견은 언젠가 모단이 무탈이에게 했던 질문을 꺼냈다.
“모단 씨, 저 곰돌이가 지금 뭐라고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음…….”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와 비슷한 곰의 포즈를 유심히 보던 모단이 덩달아 한 손을 치켜들었다.
“바닷가 왔으니까 회 먹고 가라고?”
“미친다, 내가.”
한 팔로 모단의 목을 감아 제 가슴으로 당겨 안은 견이 한참을 웃었다.
“회는 숙소 근처 가서 저녁으로 먹고, 해 지기 전에 조금만 놀다 가요.”
“놀아요? 어디서?”
견이 바로 뒤에 있는 학교를 가리켰다.
“저기서. 둘이서만 신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