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53화 (53/86)

#53. 나 지금 그 방으로 가도 돼요?

2017.11.01.

견이 바로 뒤에 있는 학교를 가리켰다.

“저기서. 둘이서만 신나게.”

둘은 교문 옆 크게 벌어진 담 사이로 들어갔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몸까지 움츠리고 두리번거리게 됐다. 일단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거니까.

“생각보다 깨끗하네요?”

“몇 년 전에 수련원 같은 걸로 개발한다고 손을 보다가 중단했대요.”

“그렇구나. 폐교라고 해서 공포체험 프로그램 같은 데 나오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줄 알았더니.”

중간중간 창문이 빠진 단층 건물이나 조회대, 얼룩덜룩해진 동상들은 다소 을씨년스럽기도 했으나 운동장은 깨끗한 편이었다.

뿌리내린 세월만큼이나 굵직한 나무들이 만들어낸 그늘과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놀이기구들은 지금도 얼마든지 좋은 쉼터가 되어줄 듯했다. 이제 찾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타볼래요?”

군데군데 솟아오른 잡초들을 피해 운동장을 가로지른 견이 그네를 가리켰다.

“오늘은 내가 모단 씨 그네 태워줄게요.”

무심코 꺼내놓고 말실수를 깨달았다.

모르고 넘어가길 바랐는데, 모단은 갸웃하며 돌아보았다.

“오늘은? 언제 내가 백견 씨 그네 태워준 적 있었나요?”

견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음…… 꿈에서요.”

“예?”

“모단 씨는 모르겠지만, 난 매일매일 꿈에서도 모단 씨랑 놀아요.”

코가 쑤욱 길어지는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거짓말이 표가 날까 봐, 견은 모단의 귓가로 몸을 숙여 얼굴을 감췄다.

“참고로 매번 건전하게 노는 건 아니에요.”

“멋대로 내 꿈꾸면 가만 안 둔다고 경고했던 거 까먹었어요?”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럼 뭐, 딴 여자 나오라고 해요?”

“그랬다간 헬게이트 오픈 축하 행사장에서 척추 반 접힌 풍선인형처럼 나풀대다가 저승사자한테 업어달라고 하게 될 텐데.”

이쯤 되면 질투가 아니라 살인 예고 수준이다.

견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모단이 그네를 살폈다.

“가뜩이나 많이 녹슬어 보이는데, 내가 타면 뚝 끊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아까 휴게소에서 회오리감자까지만 먹지 그랬어요.”

“왜 먹는 거 가지고 기를 죽이고 그래요!”

대체 어딜 봐서 기가 죽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을 건드린 게 분명했다.

“에이, 장난이지. 45㎏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얼른 타요.”

“다리 한 짝 떼고 타라는 거야, 뭐야. 안 타요.”

“그러지 말고 한 번 앉아서 줄이라도 잡아줘요.”

견이 그네에 빙의라도 한 양 아련하게 읊었다.

“그네 입장에서 생각해 봐요. 얘는 누구 태워주는 게 일이고 낙일 텐데 오랫동안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겠어요.”

잘생긴 얼굴로 끌어낸 스토리텔링이 모단의 감수성을 제대로 저격했다.

그네 의자에 쌓인 흙먼지를 탁탁 털어낸 그녀가 살며시 엉덩이를 붙였다.

“백견 씨, 방금 우리 반 애들만큼 순수해 보였어요. 일곱 살 아이가 한 말이라 해도 믿겠어요.”

그녀의 뒤에 서서 그넷줄을 잡은 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모단 씨, 사실은 내가 가끔…….”

동그란 뒤통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일곱 살처럼 되기도 해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담백한 진실.

목에 걸린 무언가를 뱉어내는 것처럼, 그렇게 저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이렇게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이다음에 그녀가 뭐라 묻는다면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도 당연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모단이 그넷줄을 잡은 채로 돌아보았다.

“알아요.”

올려다보는 눈은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잠잠하기만 했다. 정신없이 뒤채는 건 견의 눈동자뿐이었다.

‘알고 있다니, 뭘 어떻게…….’

“안다고요. 백견 씨 철딱서니 없는 거.”

견의 손등에 잔뜩 도드라졌던 힘줄이 스르르 풀어졌다. 모단은 다시 앞을 보았다.

“일곱 살 정도면 많이 올려줬지. 어쩔 땐 미운 세 살 수준이던데요, 뭘.”

등 뒤의 견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모단은 다리를 쭉 뻗었다.

“뭐 해요? 태워준다면서요. 얼른 밀어요. 너무 세게 밀진 말고.”

“모단 씨, 다시 보니까 안 될 것 같아요. 기둥이 막 흔들흔들하는데?”

“에이, 정말!”

버럭하면서도 ‘진짜예요?’ 하며 위를 올려다본다.

낮게 웃은 견이 그네를 뒤로 당겼다가 시원하게 밀어주었다.

“나 그네 정말 오랜만에 타봐요. 맨날 태워주기만 했지.”

“난 얼마 전에 타봤어요.”

“어디서요?”

“회사 옥상 놀이터요. 갑자기 타고 싶어져서.”

그리고 선생님이 밀어줬죠.

“그거 누가 봤으면 역시 사또라고 그랬을 거 아니에요. 어휴.”

귀엽다고 사진 찍은 사람이 누구더라.

“그네가 움직여지기는 해요? 다리가 하도 길어서 땅에 질질 끌릴 것 같은데.”

“난 이래서 모단 씨가 좋아요. 본인이 절대 안 겪어본 일도 배려해 주잖아.”

“칭찬인 줄 알았더니 내 다리 짧단 얘기네. 으악! 너무 세게 밀지 마요!”

“미안해요. 힘이 남아돌아서.”

그네에서 나는 끼익끼익 소리에 겁먹은 모단이 연신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내린다는 말은 안 한다.

“어렸을 때는 한 바퀴 돌 기세로 굴러도 무서운 줄 몰랐는데 지금은 이게 뭐라고 무섭담. 너무 오랜만에 타서 그런가.”

“어른이 되면 원래 무서운 게 많아지는 법이잖아요. 예전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것도 망설이게 되고.”

모단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지금은 또 엄청 어른 같고.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남자야.”

“좋잖아요. 얼마나 흥미진진해. 나랑 있으면 평생 심심하진 않을 텐데.”

평생, 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

그만큼 나를 믿고, 자신의 마음을 믿는 거겠지.

시야 가득 덤벼들었다 멀어지길 반복하는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모단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심장을 비롯한 장기들이 훅 쏠렸다 떨어질 것 같을 때마다 커다란 손이 등을 받아주었다. 그 덕분일까, 이제까지와는 달리 겁 없는 아이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제 안 밀어줘도 돼요. 나 혼자서 타볼게요.”

그네에 앉아야 그네를 타고, 발을 굴러야 날아오른다.

타보지도 않고 끊어질 것 같다며 염려하고, 남이 미는 대로 흔들리기만 하다가 그 사람이 지쳐 멈춰 버리면, 평생 그네 타는 재미 따윈 알 수 없겠지.

“백견 씨!”

옆 그네에 앉아 있는 견을 휙 지나친 모단이 하늘에 발을 디뎠다.

“요새는 의학이 발달해서 백 살까지도 산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얘기냐는 표정이 곁눈으로 보였다. 이번에는 등이 구름에 닿았다.

“그럼 난 앞으로 70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건데.”

다시 한 번 스윽, 그의 옆을 지나쳤다. 어차피 같은 자리로 되돌아올 테지만.

“심심해서 죽진 않겠어요. 백견 씨 덕분에.”

몇 번인가 더 왔다 갔다 했을 때, 견이 몸을 일으키더니 모단이 탄 그네의 줄을 두 손으로 잡아챘다. 그네가 크게 출렁했다.

“악! 떨어질 뻔했잖아요!”

“별걱정을. 내가 잡을 건데.”

양손으로 줄을 잡고 마주 선 견이 미소를 지었다. 움켜쥔 손안에서 서서히 흔들거림이 멈췄다.

“방금 나한테 백 살까지 같이 살자고 한 거 맞죠?”

“그렇게 들렸어요?”

“응.”

오후의 햇살이 그의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부서졌다. 줄에 기대고 숙여오는 얼굴 위로 매혹적인 그늘이 어룽거렸다.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눈으로.”

감은 눈 위로 입술이 내렸다.

코끝의 작은 점에도 내렸다가, 입술에서 아주 오래 머물렀다.

정말 일곱 살로 돌아간 것처럼 한참을 신나게 논 둘은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았다.

견은 스스럼없이 등을 대더니 모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옷 더러워질 것 같은데.”

“몰랐구나. 나 원래 옷 한 번만 입고 버려요.”

“정말이에요?”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믿을 건 뭐야. 차에 갈아입을 거 있어요. 대충 털고 내일 다른 거 입으면 되죠.”

지금 이곳에서 성대를 울려 소리를 내는 건 둘뿐인 듯했다. 견과 모단이 입을 다물자 살랑살랑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모단은 아주 어렸을 때 만화로도 보고 책으로도 본 적 있는 ‘비밀의 화원’을 떠올렸다. 어쩐지 지금 여기도 꼭 그런 곳처럼 느껴졌다.

견도 오래된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었던지 갑자기 물었다.

“모단 씨는 어렸을 때 뭐가 되고 싶었어요?”

“화가요.”

친엄마가 화가였다고 했던 걸 떠올린 견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모단의 마음은 늘 불편했다. 하필 그 여자의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게, 어쩔 수 없이 그 여자의 딸임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칭찬이나 상을 받을 때마다 아빠와 혜숙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혜숙은 늘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를 해주었지만 마냥 기쁘게 받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예중에 보낼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일반중으로 가게 됐을 때 차라리 잘됐다 여겼다.

“지금은…… 어때요?”

“그냥 그래요.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큰 미련은 없어요.”

진심이었다.

지금 하는 일도 적성에 잘 맞고 즐거워서 못 이룬 꿈이 그렇게까지 절절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언젠가는 다시 그림을 그릴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 때가 있었다.

“백견 씨는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요?”

“피구왕이요.”

백견스러운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견은 진지했다.

“연습하면 통키도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피구가 올림픽 종목도 아니고 국가대표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알아요? 한참 방황했어, 내가.”

“커서 무적레인저 된다고 하는 우리 반 똥꼬맹이들이랑 똑같네. 아하하하.”

그 웃음.

그렇게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표정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자꾸만 더 실없는 소리를 하게 된다는 걸 알까.

소소한 장난을 주고받다가, 견의 말끝이 조금씩 느려지는 걸 알아챈 모단이 그를 토닥였다.

“한숨 자요. 오래 운전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나 안 졸려요.”

“실시간으로 눈 풀리고 있으면서 안 졸리다고 우기는 것도 딱 일곱 살이네. 걱정 말고 쉬어요.”

망설이던 견이 눈을 감았다.

뻑뻑해진 눈알이 눈꺼풀에 쓸리며 미간이 찡그려졌다가 느리게 풀어졌다. 이내 숨소리마저 고르게 가라앉았다.

모단은 아주 오랫동안 먼 곳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시끌시끌했을 학교 건물과 주홍빛 해가 느리게 가까워지는 광경이 서글프리만치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이토록 뿌듯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따라오길 잘했네.’

모단은 잠든 견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 아래 자리한 점을 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멈췄던 시간이 갑자기 일어나 빠르게 쫓아오는 것 같았다. 오늘의 순간들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데, 순식간에 떠밀려 묻힐 것 같은 불안감이 치밀었다.

잃으면 안 되는데. 놓치면 안 되는데.

꿈에서도 나와 그네를 탄다는 남자를.

“일어나 봐요, 백견 씨.”

처음이라서 알지 못했다.

너무 좋아하게 되면, 때로는 꼭 그만큼 벅차 두려워지기도 한다는 걸.

견이 부스스 눈을 떴다.

그 안에 비친 저를 본 순간, 모단은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간신히 삼켰다.

분명 파도에 떠내려가고 있는데 대체 내가 언제 바다에 들어온 건가 싶은, 그런 당혹감이었다.

“저거 보라고요.”

모단은 아무렇게나 손을 들어 노을을 가리켰다. 일어나 앉은 견이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고는 시선을 옮겼다.

“미안해요. 더 쉬게 놔둘걸. 하늘이 너무 빨개서…….”

그러나 견의 눈동자는 금세 모단에게로 되돌아왔다.

“표정이 왜 그래요? 꼭 울 것처럼.”

견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서워서 깨웠어요? 금방 어두워질 것 같아서?”

“아니에요. 예뻐서…… 같이 보고 싶어서.”

견의 눈동자가 노을보다 짙게 물들었다.

“모단 씨가 그런 표정 하고 있으면 난 노을이고 뭐고 눈에 안 들어오는데.”

철렁.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더불어 그가 제 마음 아주 깊숙한 곳까지 뛰어드는 소리를 들었다.

모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견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모단 씨……?”

갑작스런 행동에 조금 놀랐지만, 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안아주었다.

폭우처럼 쏟아진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들고,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것 같던 견의 심장 소리도 얼마간 평온해지고,

모단의 배에서 깜찍한 꼬르륵 소리가 울릴 때까지.

***

사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워낙 없는 동네라 숙소는 30분쯤 떨어져 있는 해수욕장 근처에 잡아두었다고 했다. 휴가철이 아니라 그곳도 한산하긴 마찬가지였다.

눈에 띄는 횟집에서 저녁을 먹은 둘은 느긋하게 바닷가 산책까지 하고 호텔로 들어왔다. 이 근처에서는 가장 좋은 곳처럼 보였다.

“바로 옆방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요.”

각자 카드키 쥐고 문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게 너무 어색했다. 야릇한 긴장마저 감돌았다.

“아무 일 없어도 불러도 되고.”

모단은 잠자코 눈을 흘기고는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고 깔끔한 데다 아늑했다. 커다란 창문으로 바로 바다가 내다보여서 기분이 좋아졌다.

샤워부터 하고 나온 모단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몸이 개운해지니 더 노곤해진 의식은 맥락 없이 시간을 거슬러 그와 손잡고 안고 입 맞출 때의 감각들을 되살려냈다.

‘큰일 났다. 또 안고 싶잖아.’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두드리던 손길이 팍팍 거칠어졌다.

‘나 이렇게 밝히는 인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십대엔 잘 모르다가 삼십대에 욕구가 왕성해지는 사람이 있다더니 그게 저인가 싶었다.

몇 번 안 되는 연애 중 민철을 포함해 공통적으로 들은 말이 있었다.

나만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닭살 돋는 거 싫다는 이유로 표현에 인색했고, 그렇게 좋은 줄도 모르겠던 데다 부담스럽기까지 해서 대부분의 스킨십을 피하거나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때와 남자친구 앞에서의 자신이 달라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던 것 같다.

“근데 백견한테는 왜 이러는 거야. 낮저밤저라도 옮은 거야?”

초조한 맘에 혼잣말이 터졌다.

“진정하자. 이러다 무서운 누나로 보일 수 있어.”

도도, 철벽, 시크를 주문처럼 외운 그녀가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로 입꼬리를 죽 끌어 내렸다.

“나 생각해서 정말 방까지 따로 잡아줬는데, 이상한 여자 취급받을 순 없잖아.”

근데 곰곰이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는다.

“혹시…… 혼후관계주의인가?”

문득 떠오른 건데 바로 납득이 갔다. 그래서 그렇게 결혼 타령을 하는 건가 생각하니 앞뒤가 딱 맞는다.

‘만약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타인의 신념도 존중해야 하니까.’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 제가 피임 같은 거 필요 없는 몸이라는 걸 아예 관계 전에 말해야 할지, 아니면 진지하게 결혼 얘기가 오가는 관계가 되면 말해야 할지 아직도 결론내지 못했으니까.

오늘 1박 여행을 앞두고도 치열하게 고민했었다. 하지만 견은 정말로 각방 잡아 깔끔하게 잠만 자고 올 생각이었는데 제가 먼저 그런 말을 하면 한없이 어색해질까 봐 하지 못했다.

‘에이, 모르겠다.’

모단이 흐물흐물 침대로 녹아내렸다.

“아기 상어 뚜루루뚜루 귀여운 뚜루루뚜루 바닷속…….”

엄마 상어에 아빠 상어에 할머니 상어로도 모자라 할아버지 상어까지 찾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모단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심지어 망상도 별로 안 했는데 흡사 저 잡으러 오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처럼 들려 괜히 찔렸다.

“여보세요?”

[밖에 내다봐요. 얼른.]

견의 목소리에 모단은 창문 쪽을 돌아보았다.

작은 불꽃이 보였다. 발코니 문을 열고 나가자 선명한 펑펑 소리까지 들렸다.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어린 목소리들이 깔깔거리며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와아.”

“귀엽다. 그쵸?”

수화기 안과 밖에서 동시에 말소리가 들렸다.

놀라 두리번거린 모단은 바로 옆 발코니에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는 견을 보고는 눈을 끔벅거렸다.

호텔이 그리 크지 않아서 발코니도 가까운가 보다. 손이 닿을 정도는 아니어도 몸을 내밀면 얼마든지 마주 볼 수 있었다.

견도 막 씻었는지 젖은 머리에 티셔츠 차림이다. 옅은 미소를 흘린 그가 다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폭죽이 다 떨어졌는지, 어느새 불꽃도 목소리도 사라지고 고요에 잠겼다.

발가락 사이에서 포말이 부서지는 듯한 착각이 일 만큼 파도 소리가 가까웠다.

하늘과 바다는 기가 막힐 만큼 닮은 색으로 물들어 있어,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위아래로 떠 있는 달과 별 중 부윰한 것들이 진짜고 일렁이는 것들이 물에 뜬 그림자이겠거니 할 따름이었다.

언젠가 그가 들려준 적 있는 노래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이제는 많이 달라질 거야, 밤하늘에 별이 이렇게 많았었나 하면서…….

“모단 씨.”

흠칫 돌아보았다.

“나 지금 그 방으로 가도 돼요?”

모단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발밑까지, 아예 몸이 통째로 발코니 아래 바다까지 잠겨 버린 것만 같았다.

견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덧붙였다.

“뽀뽀나 한 번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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