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같이 자요, 오늘
2017.11.05.
간신히 눈을 떠보니 침대 위였다.
지금 그 방으로 가도 되느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문을 열어주었고, 그가 들어왔고, 그리고…….
그게 대체 몇 분 전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견이 했던 말처럼 2분 같기도, 20분 같기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200년 전 같기도 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이 맞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것처럼 현관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팔이 휘감기고 입술이 포개졌다. 사고 같았던 북카페에서의 첫 키스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어쩌면 둘의 무의식 속에서 같이 그려둔 장면인지도 모른다.
현관 센서등이 꺼졌다 켜졌다 정신을 못 차리고,
뒤엉킨 채 뒷걸음질 치다가 더듬더듬 휘저은 손에 스위치가 꺼지고,
제 방 매트리스 아니면 못 잔다고 큰소리치던 두 사람이 낯선 침대 위로 함께 몸을 뉘는,
종일 앞세웠던 이성은 어디론가 날려 보내고 기꺼이 본능에 휘둘리는 지금의 순간들.
“백견 씨, 나…….”
휘몰아치는 와중에 간신히 말을 붙잡았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하려 했는데 그는 듣지 못했다.
“항상 귀에 아무것도 없던데.”
어느새 모단의 위에 자리한 견이 여린 귓불을 머금다 말고 물었다.
“원래 귀걸이를 잘 안 해요?”
모단은 작은 신음과 함께 몸을 뒤틀었다.
“애들 안다가 긁힐까 봐 안 하다 보니 습관…… 아!”
견이 혀 대신 이를 세우는 통에 대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잠시 숨을 돌리나 싶더니 처음처럼 맹렬해졌다. 말을 꺼낼 여지는커녕 의식을 잡고 있기도 힘들었다.
호흡이 모자라 어질어질해질 때까지 몰아붙이면서도 손길은 한없이 다정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자극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수 있는지 경이롭기만 했다.
“잠깐, 잠깐만요. 나…….”
모단은 이대로 모른 척 무너져 버리고 싶은 유혹을 가까스로 이겨냈다.
“할 말이 있어요.”
견이 몸을 조금 떼고 내려다보았다.
“지금 할 말은 아닌데, 더 일찍 했어야 했는데…… 더 늦게 해도 안 될 것 같아서.”
열기로 흐릿해진 견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다.
“다 한다는 게 결혼까지 해야 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그래서요.”
완전히 일어나 앉은 견이 모단의 한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일으켰다.
“내가 또 너무 마음대로 밀어붙였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뭔데 그래요? 걱정 말고 얘기해 봐요.”
모단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남들과 다른 건 내 잘못이 아니지만 미리 말하지 않은 건 잘못이야. 이 사람은 줄곧 결혼 얘길 했는데.’
그에게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었어야 했다.
아직 만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사람 일은, 특히 남녀관계는 끝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온갖 핑계를 떠올려 가며 밤마다 하루씩 더 욕심내다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나, 아프진 않지만 사실 건강하지도 않아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견의 눈가에 걱정이 불길처럼 번졌다.
“난…….”
모단은 차마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 다른 여자들처럼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지 않거든요. 아예 초경이 없었던 걸로 봐서 선천적인 문제 같대요.”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막막했다.
“절대로 일부러 감춘 건 아니에요. 말하기가 어려워서, 대뜸 말하기도 뭐했고……. 이미 부담스럽겠지만, 그래도 더 큰 책임까지 얹고 싶진 않아서 지금이라도 말해요. 늦어서 미안해요.”
쏟아내듯 말을 마친 모단은 허벅지 아래 시트 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아주 조금 홀가분했으나 그보다 더 크고 복잡한 감정들이 진득진득 뒤엉켰다. 미안함, 서글픔, 억울함, 두려움, 딱히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운 무엇들이.
“모단 씨.”
그의 목소리로 듣는 제 이름에 겁이 나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는데.
“나 지금 좀…… 아니, 많이 혼란스러워요.”
모단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대부분이 그렇듯 결혼과 출산, 육아를 자연스러운 루트로 여겼다면 당황스럽다 못해 사기당한 기분마저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아주 중요한 문제는 맞는데, 저도 하던 고민이었는데, 방금 되게 싱겁게 끝나 버려서.”
모단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견은 얼마간 당혹스런 얼굴이긴 했으나, 불쾌하거나 화난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게 무슨…….”
“난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안 가질 거예요.”
“네?”
“알다시피 나도 건강하지 않잖아요. 굳이 이런 유전자를 남겨서 누군가를 또 고생시키고 싶진 않아요. 어차피 손주 보자고 조를 부모님도 안 계시고. 근데 아내 될 사람한테 강요할 일은 아니니까…….”
모단은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되게 싱겁게 끝나 버려서 혼란스럽다던 게 어떤 뜻인지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갑자기 어깨가 당겨지더니 넓은 가슴에 코부터 폭 파묻혔다.
“생각해 보니 미안해요. 내가 대책 없이 결혼 얘기 할 때마다 모단 씨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겠어. 그러게 진작 말하지.”
견의 품에 꼬옥 안겨서도 모단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남의 집 대가 끊긴다는데 내 마음이 편안해져도 되는 건가? 천벌 받는 거 아니야? 그렇지만 대는 백지협 이사님이 이어도 될 것 같…… 잠깐, 정신 차려! 결혼한 것도 아닌데 자녀 계획도 아니고 무자녀 계획을 먼저 세우는 건 이상하잖아!’
모단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곧 눈앞이 핑글 돌았다.
“으앗!”
앉아 있던 몸이 다시 뒤로 넘어갔다. 머리가 닿기 직전, 견의 손이 베개보다 폭신하게 뒤통수를 받쳐 주었다.
“이럴 때 천생연분이라는 말 쓰는 거 맞죠?”
그러니까 하던 거 마저 해요, 라는 말은 눈맞춤 한 번으로 대신했다.
침대와 견 사이에 갇힌 채, 모단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그를 안았다.
어깨도, 등도, 팔도, 허리도, 어딜 짚어도 뜨거웠다. 빈틈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단단한 근육이 제 손길에 움찔 반응해 올 때마다 등줄기가 저릿거렸다.
견은 모든 감각으로 그녀를 탐하고 기억했다.
어디를 건드렸을 때 못 견뎌하는지, 어떻게 하면 숨이 더욱 흐트러지는지, 참았다 터뜨리는 나직한 소리들이 얼마나 아찔한지, 감은 눈과 뺨 위에 떠오른 홍조와 자잘하게 스쳐 가는 표정들이 얼마나 예쁜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건…… 몇 단계쯤 돼요?”
모단이 견의 뒷목을 덮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신경이 촘촘하게 곤두섰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하느라 숨이 달떠 있었다.
“음…….”
대답을 찾는 건지, 입술 아래 짓뭉개진 살갗을 음미하는 건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견의 음성 또한 짙고 나른했다.
“글쎄. 몇 단계 같아요?”
“6단계…… 쯤?”
견이 나직이 웃었다.
“벗지도 않았는데 무슨.”
짤막한 대꾸가 아프도록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었다.
곧은 등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린 모단이 그가 입고 있던 티셔츠 밑자락을 쥐고 반쯤 끌어 올렸다.
“이러면?”
조금 커졌던 견의 눈이 위험한 빛을 머금고 가늘어졌다.
“진도를 혼자 막 나가네.”
침대를 짚고 있던 팔을 뗀 견이 어깨 아래에 걸린 옷을 한 손으로 잡아 벗고는 아무렇게나 떨어뜨렸다.
“같이 나가야죠.”
그러고는 모단의 윗옷 안으로 짓궂게 손을 넣어 등을 훑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서툰 건지, 속옷 후크 위에서 손가락이 몇 번 미끄러졌다. 견의 귓가가 발그스름해졌다.
“원래 이렇게 복잡해요? 만져 보는 것도 처음이라…….”
처음이라니. 모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도 안 돼. 그럼 이제까지 막 그…… 그랬던 건 그냥 직진본능에 충실한 바보라서 그랬던 거야?’
그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쑥스러움까지 묻어나는 표정에 얼이 빠진 사이, 툭 하고 등이 허전해졌다.
“됐다.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손도 안 대고 풀었지?”
뭐라 대답하려던 모단의 입술이 다시 막혔다.
복잡하고 갑갑한 천 조각은 아까 던져 둔 견의 옷 위로 떨어지고, 뜨거운 손이 여린 살을 지극하게 품었을 때였다.
따르르르릉.
믿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습관적으로 들고 왔다가 어디 놨는지도 모르게 팽개쳐 둔 견의 휴대폰이었다.
몇 번을 무시했으나 소리는 끈질겼다. 결국 모단이 어깨를 두드렸고, 견은 반쯤 몸을 일으켰다.
“……부술까, 저거.”
이렇게까지 짜증이 난 표정은 처음 봤다. 분명 무서운 얼굴인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얼마간 귀엽기도 해서 모단은 작게 웃었다.
“계속 오는 거 보니까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얼른 받아봐요. 나 어디 안 가니까.”
견이 부스스 침대 아래로 몸을 내렸다.
새삼 모단의 뺨이 달아올랐다. 바지 하나만 걸치고 휴대폰을 찾아 헤매는 화난 등을 말끄러미 보던 모단은 슬그머니 시트를 끌어 올려 눈까지 덮었다.
현관 입구쯤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낚아채듯 주워 든 견이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뱉었다.
“얼른 받고 올게요. 미안해요.”
발코니로 나가는 동안 끊어졌던 전화가 곧바로 다시 울렸다. 견의 목소리에 꾹꾹 누른 분노가 가감 없이 담겼다.
“고모! 지금 몇 신 줄 알고 전화한 거야?”
[미안. 연구소에만 있다 보니 시간 감각을 잃어서……. 뭐야. 아직 자정도 안 됐잖아, 자식아!]
“됐고, 평소엔 한 번 해서 안 받으면 그만인 사람이 오늘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너 혹시 호르몬시터랑 잤니?]
예고도 없이 강력하게 치고 들어오는 말에 얻어맞은 견이 허, 하고 입을 벌렸다. 어디 도청장치라도 달려 있는 건가 싶었다.
“갑자기 무슨 그런…….”
[잤으면 그 이후로 뭐 달라진 거 없는지 말해주고, 아직 안 잤으면 일단 자봐.]
“고모!”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어. 관계 후에 오르가즘을 느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이 PMS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데, 너한테도 어느 정도 적용해 볼 가치가 있는 연구 결과인 것 같아.]
갑자기 높은 곳에 올라간 것처럼 귀가 먹먹해졌다. 견은 눈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네 호르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여자잖아. 그 희한한 유대관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봐.]
“다음에 얘기해, 고모. 지금 바빠.”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
“바쁘다니까. 나중에 내가 연구소로 갈게.”
전화를 끊은 견은 아예 전원까지 꺼버렸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넘기고 돌아서려다가 바로 눈앞에 머무는 달을 보고 멈칫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불안함 한 조각이 툭 떨어지더니 순식간에 번졌다.
괴물의 손이 심장을 금방이라도 터뜨려 버릴 듯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숨까지 가빠졌다.
견은 가까스로 몸을 돌렸다. 방 안으로 들어와 발코니 문을 닫고 커튼도 굳게 여몄다. 그러고는 모단의 온기와 체취를 찾아 침대로 파고들었다.
잠깐 사이 바깥바람에 식은 몸에서 전해지는 서늘함에 모단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누구 전화예요?”
“고모요. 취하셨나 봐요.”
모단이 싱겁다는 듯 웃었다.
견은 등 뒤에서 모단의 허리를 안고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깊숙이 안았다.
“모단 씨, 내 손 좀 잡아줘요.”
뭉그러진 견의 목소리에서 흐릿한 두려움을 느낀 모단이 갸웃했다. 매달리듯 저를 붙든 손 위에 제 손을 겹치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어디 아픈 거예요?”
어깨에 닿은 이마가 두어 번 좌우로 움직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가 싶었으나 쉽게 물을 수가 없었다.
벗은 등에 꼭 붙어 있는 가슴으로부터 쿵쿵대는 박동이 전해졌다.
모단은 어떤 공명(共鳴) 같은 것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처음의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림과 긴장, 미칠 듯한 흥분도 같이 느꼈듯, 뜻 모를 불안 또한 제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견은 동그란 어깨에 이마를 묻고 작게 떨리는 숨을 뱉어냈다.
‘일단 자보라니. 적용해 볼 가치가 있는 연구 결과라니. 그런 말을 듣고 나면 내가…….’
그녀에게 얼마간 치료의 역할을 바라고 있는 건 맞지만 방금 들은 말은 차원이 달랐다.
그날 같이 있어주고 닿는 것이 소독약 바르고 밴드 붙여주는 정도라면, 방금 지미가 한 말은 사람을 사다가 필요한 장기만 떼어 붙이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부작용이 있다고 해도 서슴없이 약을 삼키고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제가 속는 게 아니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고서 안을 수 있겠냐고.’
그저 모단이 너무 좋아서, 이끌리는 대로 거침없이 빠져들었을 뿐인데 그걸 이용해 보라니.
‘젠장, 아예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죄책감이 바위처럼 걸렸다.
만약 제가 모단이라면, 지미가 어떤 말을 했는지 알게 된 순간 한낱 도구나 제물이 된 것처럼 끔찍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모든 진심까지 거짓으로 오해하게 될 거다. 두 번 다시 안 보겠다고 하겠지.
‘그게 더 무서워.’
저보다 모단을 더 우선순위에 두게 된 지 오래였다.
여기서 더 좋아지지 않아도 된다. 되레 나빠진대도 좋았다. 모단을 잃게 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세상에 없다.
“……이렇게 같이 자요, 오늘.”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견은 숨이 막히도록 모단을 끌어안고는 눈을 감았다.
***
월요일 저녁.
모단은 새윤의 커피숍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줄곧 초점이 나가 있는 그녀를 보다 못한 새윤이 맞은편에 앉았다.
“정모단. 너 무슨 일 있어?”
“응? 뭐라고? 아니?”
“정신 쏙 빠진 얼굴로 아니란다. 누가 봐도 나 심란해요, 하고 있구만.”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들어온 은규가 한마디 거들었다.
“백견 씨한테 그새 차였냐? 만나보니 아닌 것 같다고 좋은 형 동생 사이로 지내자 그러디?”
“박은규. 오랜만에 형한테 뻥 차여보고 싶은가 보구나.”
“새윤아, 남편이 죽게 생겼는데 안 도와줘?”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자기가 너무 맞는 말을 했어. 쳐 맞는 말.”
남의 일처럼 응수하던 새윤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가게 뒷문 쪽을 가리켰다.
“맞다, 자기야. 진열장 안쪽에 램프 하나 나갔던데. 지금 갈아줄 수 있어?”
“어, 그래. 고마워.”
은규가 쏜살같이 자리를 피했다. 모단이 그래도 남편이라고 목숨은 살려주는 거냐, 하는 눈으로 혀를 찼다.
새윤이 테이블 위로 바짝 몸을 기울였다.
“주말에 백견 씨랑 어디 갔다 온다 그러더니 뭔 일 있었어?”
“일은 무슨…….”
뭔 일이 없었어서 문제다! 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견은 언제 어흥거렸냐는 듯 한동안 그녀를 안고만 있었다. 갑자기 싹 바뀐 태도에 걱정과 심란함이 한데 몰려온 건 당연했다.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어디 가지 마요.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어요.
등 뒤에서 속삭이는 말들을 듣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견은 여전히 꼭 붙은 자세로 곁에 머물렀다. 언제 입혀줬는지 속옷은 생략하고 티셔츠는 걸쳐져 있었다.
모단이 깬 걸 확인한 그는 소중하고 다정하게 입을 맞춰주고는, 씻고 준비 다 하면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제 방으로 돌아갔다.
‘기껏 벗겨놓고 고이 입혀준 후에 손도 안 대고 갔단 말이지. 처음부터 안 뜨거웠다면 모를까, 갑자기 식어버린 이유가 대체 뭐냐고.’
느지막이 나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커피숍에서 몇 시간 동안 느긋하게 머문 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날 밤에도, 오늘도,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모단은 마음 한구석에 계속 뭔가가 얹혀 있는 듯한 기분을 거둘 수가 없었다.
‘무슨 전화였을까? 애초에 그 전화 때문이었던 건 맞겠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상황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거나 그런 거라면…….’
‘속옷이 취향이 아니었나? 애초에 크게 취향 탈 일이 없는 무난한 거였는데. 제모도 피부관리도 완벽했어! 역시 군살이 문제였을까? 근데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사람이었잖아. 말랑말랑해서 좋다고 틈만 나면 배랑 옆구리 집적거리다가 맞고 그랬으면서.’
‘혹시 내가 아니라 본인 문제였나? 나한테 말하기 힘든 신체적 문제를 발견했다거나? 예를 들어 발ㄱ……!’
견이 알았다면 억울함에 뒷목 잡았을 병명이 모단의 머릿속을 스쳤을 때였다. 새윤이 물었다.
“혼자 끙끙대지 말고 은규 없을 때 빨리 말해봐. 뭔데? 하고 나서 보니까 피임 제대로 안 한 것 같아? 날짜 불안해?”
“그런 걱정을 할 일이 없었단다.”
“어디 손만 잡고 잤다고 해보려무나.”
“믿어라, 좀. 방도 따로 잡았어.”
새윤의 흰자위가 더럭 커졌다.
“겁나 참신하고 쓸데없는 돈지랄인데? 투숙객이 없어도 ‘자기야, 어떡하지? 방이 하나밖에 안 남았대’를 시전해야 할 타이밍에 뭐 하자는 거야?”
“그치? 보통은 그러지?”
너무 반갑게 동조했다 싶어진 모단이 얼른 말을 바꿨다.
“아냐. 방 따로 잡은 것까지는 미덥고 고마웠어. 근데…….”
“설마 모양 빠지게 네가 먼저 옆방으로 쳐들어간 거 아냐? 작정하고 자빠뜨렸는데 백견이 이러지 말라면서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그러디?”
“보통은 그 반대로 생각을 하지 않니?”
“그렇긴 한데, 지금 네가 풍기는 분위기가 보통이 아닌 쪽 같아서.”
예리한 여자 같으니.
모단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