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55화 (55/86)

#55. 내 여자친구 불러주세요. 지금 당장

2017.11.08.

예리한 여자 같으니.

모단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자빠뜨리진 않았지만 솔직히 조금 작정을 하긴 했는데, 왠지 나 혼자만 한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인달까, 민망하달까.”

새윤이 눈이 또 커졌다. 오늘 안에 제 크기로 안 돌아올 것 같았다.

“의외다. 수시로 여자 갈아치운다는 말을 들어서 정반대의 걱정을 했거든. 물론 네가 알아서 똑 부러지게 하겠거니 싶어서 말은 안 했지만.”

“너니까 하는 얘기지만 그 소문 잘못 난 것 같아. 그런 것치고는 너무 순수해.”

원래 과거 얘기는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견에게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 역시 저를 찾기 위해 수많은 여자를 만나긴 했지만 식사나 가벼운 술자리가 다였다고 했던 것 외에 따로 한 말은 없었다.

워낙 조건이 훌륭한지라 본인은 가만있어도 옆에서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는 의심이 조금 있었는데 이젠 확실히 믿게 되었다.

속옷 후크 앞에서 버벅대다 난감해하던 표정이 연기라면 그는 연기의 신, 아니, 연기의 악마쯤 될 거다.

“열아홉도 아니고 스물아홉이면 적당히 안 순수해도 될 나이 같은데. 네 직업이 아무리 교사라지만 남친까지 키우고 가르쳐야겠니? 설마 키스하는데 혀로 ABCD 쓰고 앉았든?”

“아니거든! 잘하거든!”

울컥 외친 모단이 머나먼 천장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새윤은 쓰읍 인상을 구겼다.

“좋으시겠습니다. 순수한데 키스는 자알∼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무튼 절대 숙맥은 아닌데, 성격대로 적극적이기도 한데, 그게 이렇게…… 선이 딱.”

모단의 얼굴에 답답하다는 표정이 스쳤다.

그날 밤의 일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아무리 곱씹어봐도 저도 모르겠는데.

“고도의 연기는 아니고? 너무 능란해 보여도 정떨어질 것 같으니까 일부러 적당히 순수남 코스프레를 하는 걸 수도 있잖아.”

“모르겠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왜 몰라?”

“당연히 모르지! 나는 지금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는 입장이니까.”

“하긴, 뭐든 좋은 쪽으로 보고 싶고 믿고 싶을 때지.”

고개를 주억거린 새윤이 판사봉 내려치듯 테이블을 탕탕 쳤다.

“그럼 믿어. 괜한 의심으로 불행을 자초하지 말고.”

“안 믿는 건 아니야. 그냥…….”

“혼자 걱정 싸매고 있지 말고 대화를 해. 말 안 해도 알아주겠지, 하는 거 서로 답답하잖아.”

“그렇긴 하지.”

“특히나 연인 사이엔 무조건 많이 해야 돼.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안에서도 하고 밖에서도 하고 침대 위에서도 하고…….”

전구를 갈아 끼운 은규가 하필 그때 돌아오다가 질색을 했다.

“저 여자들 혈기왕성한 것 좀 보게. 난 이미 틀렸지만 백견 씨라도 도망치라고 경고해 줘야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자기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새윤이 누가 봐도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많이 하라고, 대화.”

***

점심시간, 선해를 포함한 디자인팀 직원들이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말이 신입사원이지 누가 봐도 왕언니인 선해와 그녀의 후임으로 들어와 있는 현재 디자인팀 차장은 초반에 얼마간 어색해했으나, 다행히 일하는 스타일도 성격도 잘 맞아 지금은 별 무리 없이 지내고 있었다.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먼저 밥을 먹고 들어와 있던 견이 살갑게 인사를 했다. 선해가 손을 내저었다.

“마지못해 먹었어요. 배를 쥐어짜는 것 같은데 밥까지 안 먹으면 쓰러질 것 같아서.”

“어디 아프세요?”

“둘째 날이요.”

“저런.”

스스럼없는 선해의 대답과 태연한 견의 반응에 주변 사람들이 되레 당황했다.

“생리휴가 쓰지 그러셨어요. 힘들게.”

견이 대표였을 때부터 근무한 이들은 그제야 예전에도 그가 생리휴가에 관대한 상사였음을 기억해 냈다.

“옛날엔 편하게 썼는데 지금은 못 쓴대요.”

“왜요? 정당한 권리잖아요. 유급도 아니고 무급인데.”

“오늘 금요일이잖아요. 월요일하고 금요일에 생리휴가 말 꺼냈다간 온갖 눈총 다 받아요. 남들 눈엔 악용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없진 않고.”

여직원들 사이에 씁쓸한 공감이 스쳤다. 몇몇 남직원은 불편한 기색이었다.

“생리가 유세야? 이래서 여자는 안 돼. 이딴 소리 듣느니 일하고 말지.”

“맞아요.”

“난 그래도 버틸 만은 하니까. 나 때문에 진짜 심해서 움직이기도 힘든 사람들이 휴가 못 쓰면 안 되잖아요.”

견은 남의 일 같지 않은 마음에 혀를 찼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날짜를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아플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본의 아니게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네요.”

“그러니까요.”

“저, 백견 씨.”

신기하다는 눈으로 대화를 듣고 있던 여직원 중 작년에 입사한 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누나나 여동생 있으세요? 없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잘못 알았나 해서…….”

“외아들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이런 얘길 되게 자연스럽게 하시는 것 같아서요. 제가 아는 남자들은 그나마 여자 형제라도 있어야 좀 알까 말까 하던데. 너무 달라서.”

선해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누나 생리대 심부름 좀 해보고 여자친구 생리통 걱정 좀 해본 사람 같지 않아요? 근데 아니래.”

김 차장을 비롯해 남자 상사들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선해가 덧붙였다.

“저도 처음에 깜짝 놀랐어요. 전에 대표로 계실 때 너무 쿨하게 여직원들보고 왜 아무도 생리휴가를 안 쓰냐고 하셔서.”

“나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그냥 호르몬 때문이잖아요. 감기가 바이러스 때문인 것처럼.”

격하게 공감한 여자들의 눈동자에 ‘호르몬 개새X’ 하는 말이 떠올랐다.

견은 속으로 그보다 더 험한 욕을 했다.

그나마 그녀들의 호르몬은 생명을 품기 위한 준비라는 신성한 명분이라도 있지, 자궁도 생리휴가도 없는 제 호르몬은 대체 왜 미쳐 날뛴단 말인가.

“다들 백견 씨만큼 알고 있으면 얼마나 고맙겠어요.”

선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니까 진짜 한 달에 하루인 줄 아는 남자도 있고. 덩치 크면 생리대 대형 쓰는 줄 아는 남자도 있고, 심지어 소변처럼 참았다가 화장실 가서 하고 오면 되는 줄 아는 남자도 있고…….”

옆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듣고 있던 진우가 흠칫했다.

“아, 아니었어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선해의 눈에 저거 죽일까, 하는 말이 스쳤다. 진우는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형만 둘이라 몰라요! 누가 그런 얘길 해주겠어요! 제 주변 남자들도 잘 모른다고요! 그쵸? 선배님들도 잘 모르시죠?”

주변에 있던 몇몇 남직원은 도와주기는커녕 딴청만 피웠다.

“학교 다닐 때 성교육 안 받았어요?”

“학교에서 하는 성교육에선 그런 거 안 나온단 말이에요. 맨날 정자 난자 타령만 하고.”

“세상에. 아직도 그래요? 진우 씨랑 나랑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나 학교 다닐 때랑 똑같으면 어쩌자는 거야?”

생리휴가로 시작한 토론이 학교 성교육에 대한 문제로 번졌다가 되돌아왔다.

“됐어요. 연차도 제대로 못 쓰는데 생리휴가는 무슨. 진통제나 먹지 뭐. 아, 아까 밥 먹고 들어올 때 사올걸.”

“제가 드릴게요. 원래 어떤 거 드세요?”

손짓을 한 견이 제 책상 맨 아래서랍을 열었다. 선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약국이야? 무슨 진통제가 종류별로 있어요?”

“이건 아세트아미노펜 계열. 공복에 먹어도 돼요. 이부프로펜 계열은 진통 효과가 더 좋은 대신 위장 관계 부작용이 있어서 식사 후에 복용하는 게 좋고요. 심할 땐 이렇게 두 개 같이 먹어도 괜찮아요. 아니면 진통 효과가 더 센 나프록센 계열도 있고요.”

몇 개를 가리킨 견이 다른 하나를 꺼냈다.

“근데 아까 배가 쥐어짜는 것 같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진통제보다 진경제를 드시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자궁평활근이 경련을 일으켜서 나타나는 통증이 생리통이니까. 이거 드셔보세요. 진통제에 진경제 성분 같이 든 약이에요.”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너무 모르는 남자도 속 터지지만 너무 잘 아는 남자도 낯설었다.

그제야 제가 너무 약장수 같았음을 깨달은 견이 얼른 해명했다.

“제가 한때 진통제 좀 먹어본 데다…… 저희 고모가 희명병원 월경연구소 소장이시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잘 알게 됐네요. 하하하!”

모두가 아아, 하며 수긍했다.

“그럼 약 드시고 좀 쉬세요. 오후 회의 준비는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선해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약을 받아가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진통제를 남몰래 주머니에 넣은 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탕비실로 들어간 그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약을 삼켰다.

슬슬 월경전증후군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괜찮아.”

모단이 있으니까.

지난번에 유독 심했던 탓인지 이번 달엔 상대적으로 덜한 것 같기도 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고 매일 저녁 모단을 만나느라 덜 예민해진 덕인지도 모른다. 불안과 통증을 조장하는 호르몬을 상쇄할 만큼 좋은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는 건지도.

욱신대는 이마를 짚고 있다가 가볍게 목 스트레칭을 한 견이 사무실로 나왔다. 자료를 챙겨 회의실로 가려는데 여직원 한 명이 따라왔다.

“저도 같이 해요.”

그러고는 양손으로 서류를 든 견 대신 회의실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스치듯 흘린 견의 미소에 여직원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견이 프로젝터 화면을 확인하고 있는데 김광남 차장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동시에 여직원이 견에게 말을 붙였다.

“백견 씨는 매일 그 넥타이만 하시는 것 같아요.”

“네. 좋아하거든요. 완전 많이.”

“뭔데 그래? 애인한테 받은 건가?”

김광남이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좋은 분에게 선물 받으신 건가 봐요? 혹시 여자친구?’ 하고 물으려던 여직원은 뜨끔 입을 닫았다.

“누군지 몰라도 평생 돈 걱정은 안 하고 살겠네. 다른 걱정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근데 어느 집안 자제인가? 어지간히 있는 집 딸 아니면 잘 봐. 돈 보고 들러붙은 거 아닌지…….”

“김광남 차장님.”

견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모단의 조언을 받아들여 웬만하면 사또밥을 덜 까려 노력하는 요즘이었지만, 바야흐로 월경 전인 데다 모단을 건드리는 바람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사실은 제가 만나는 여자가 김 차장님 따님…….”

“뭐야?”

김광남이 벌떡 일어섰다. 여직원의 눈도 튀어나오려 했다.

견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끊었던 말을 유유히 이어 붙였다.

“……이라고 하지 않는 이상 지나친 관심은 삼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업무와 관련 없는 사적인 일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보이는 건 소통이 아니라 사생활 침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꼰대 탈출하기’라는 칼럼이었던 것 같네요. 다 같이 봐도 좋을 것 같은데, 기획팀 단톡방에 링크를 올려도 될까요?”

해맑게 웃는 견을 노려보던 김광남이 고함을 쳤다.

“거기가 업무 관련된 얘기 하는 곳이지, 쓸데없는 거 올리는 곳이야?”

“차장님께서 새벽마다…… 아니, 아침마다 올려주시는 것들도 업무와 관련은 없지만 쓸데 많습니다. 특히 오늘 보내주신 ‘뽕잎차의 효능’과 ‘직장인 성공명언’은 아주 감명 깊었습니다.”

결국 뽕잎차에서 무너진 여직원이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때마침 들어오려던 직원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소리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의아한 눈을 했다.

오늘도 사또밥을 굴려 먹고 씹어 먹은 견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오늘 전체 회식인 거 다들 알지? 신입사원 환영회니까 다들 빠지지 말고 참석하도록.”

늘 그렇듯 시간 대비 효율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회의를 마친 후, 변진상이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일요일에 가까운 데로 등산이나 갈까 하는데, 산 좋아하는 사람들은 같이 가지.”

한 달에 두어 번 꼴로 듣는 말에 남직원들의 안색은 흙빛이 되었다. 좋던 산도 싫어질 판이다.

별 이유 없이 불참했다간 좋지 않은 눈초리가 돌아오는 탓에 대부분이 반강제적으로 참석하곤 했다.

쉬는 날 일찍 일어나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내려오자마자 막걸리로 시작해 밤까지 술자리로 이어지는 통에 하루를 통으로 날리기 일쑤였다. 술병이라도 났다가는 주말을 다 버리는 수도 있었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가야 재밌는 법 아니겠습니까? 저는 꼭 참석하겠습니다.”

늘 그렇듯 제일 먼저 답한 김광남이 눈총을 주었다. 여기저기서 마지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가뜩이나 주중에 모단과 몇 시간밖에 보지 못했는데, 주말까지 못 본다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저는…….”

데이트가 있어서 못 간다고 당당히 말하려는데 어김없이 모단의 말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못 하는 말을 쉽게 할 때는 조심하라던 게.

“……가겠습니다.”

다들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안 간다 할 줄 알고 핀잔부터 준비했던 변진상은 잘됐다고 해야 할지, 안 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회의를 마무리하고 나온 후, 견은 화장실에 가는 척 사무실을 나와 백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저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무슨 일인데 근무 중에 전화를 다 했누?]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재차 확인한 견이 뭔가를 속닥거렸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이번 한 번이면 돼요.”

끌끌 혀를 차는 소리와 몇 마디 타박이 돌아왔다. 견은 막내 손주 전용 애교를 조금 더 흘리고는 통화를 마쳤다.

몇 시간 후, 퇴근을 앞두고 김광남이 말했다.

“회식 장소는 지난번에 갔던 갈비집이고, 주말 등산은…… 회장님께서 임원들 몇 분하고 전시회 관람 겸 점심식사를 한다고 하셔서 취소됐으니 그렇게 아세요.”

상사도 상사의 주말 스케줄에 휘둘리는 건 마찬가지로구나.

마지못해 등산에 가겠다고 했던 직원들 사이에 소리 없는 함성이 터지며 화색이 돌았다.

일에 집중하느라 못 들은 척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던 견의 입꼬리도 희미하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

첫 회식, 견은 자연스럽게 집게와 가위를 잡았다. 모단에게 배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할 기회다.

요새 회식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지만, 불행히도 그 변화의 물결이 아직 블랑아이까지는 오지 않았다.

거절하기 힘든 술잔들이 줄곧 앞에 놓였고, 견은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해 가며 천천히 마시려고 했다.

어느새 옆으로 온 은규가 넌지시 물었다.

“백견 씨,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견은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주량을 가늠해 가며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짐작보다 훨씬 빠르게 어질어질해지고 있었다.

지금이 월경전증후군 기간임을, 감정은 물론이고 체력도 들쭉날쭉하는 데다 낮에 약까지 먹었음을 간과한 거였다.

‘큰일 났다. 얼른 빠져야 되는데…….’

다행히 호프집에서의 2차도 얼추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견은 조금만 더 버티자고 다짐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어이, 백견 씨!”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광남이 크게 불렀다. 견은 자리를 옮겼다.

“오늘 내가 주는 술은 한 잔도 안 받았지?”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제가 먼저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얼굴빛이 불콰해진 김광남이 선선히 잔을 내밀었다. 맥주를 따르려 하자 제 손으로 소주병을 들더니 500㏄ 잔의 절반을 채웠다.

“난 소맥만 마셔.”

“네.”

이 정도면 보리향 나는 소주 아니냐고 생각하며 맥주를 채웠다. 그 와중에 술기운이 점점 올라와 손이 흔들린 걸 들킬 뻔했다.

맥주병을 넘겨받은 김광남이 옆에 있던 새 잔에 맥주를 따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백견 씨, 사회생활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그렇죠. 차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혼자 있을 땐 그나마 나아요. 처자식 있고 빚 있고 그러면은 더 힘들다고. 사직서 품고 다니는 것도 다 젊을 때 얘기고요, 나 같은 처지에는 감히 그러지도 못해요. 나라고 왜 안 때려치우고 싶었겠어요. 기러기아빠 노릇을 몇 년을 했는데. 동기들 중에 승진도 제일 늦었고…….”

어느새 반말이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백견 씨,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이해를 못 하겠지만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견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거렸다.

처음 블랑아이를 론칭하고 지금 직원의 반의반도 안 됐을 때의 회식은 지금보다 훨씬 단란한 분위기였다.

그때도 김광남은 취하면 기러기아빠 노릇이 힘들다며 하소연을 했고, 다른 직원들도 소소한 자기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그걸 사생활 침해라고 느끼는 이는 없었다.

김광남은 확실히 취했지만 저는 아직 안 취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데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나며 코가 시큰해지려고 했다.

“마셔요, 마셔. 이것만 마시고 3차 가야지.”

김광남이 먼저 잔을 들었다. 견도 테이블에 있던 잔을 들어 입에 댔다.

“……커윽!”

그게 제 잔이 아니라 김광남의 잔임을 깨달은 건, 소맥을 가장한 보리 맛 소주를 반 이상 목으로 넘겨 버린 후였다.

***

2차를 끝내고 나온 후, 변진상과 김광남을 부축한 몇몇 남직원은 3차로 가고 나머지는 각자 흩어졌다. 비교적 멀쩡한 사람들이 취한 자들을 하나씩 챙겼다.

“백견 씨, 회식이라 차 놓고 오셨다고 했죠? 택시 잡아드릴게요. 집이 어디예요?”

막잔 이후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진 견은 은규가 맡았다. 인사불성까진 아니고 휘청대는 정도인데도 워낙 기럭지가 길다 보니 부축이 쉽지 않았다.

“집이 어디냐니까요?”

“……은규 대리님.”

은규의 어깨에 한 팔을 걸치고 끌려가던 견이 걸음을 멈췄다.

“나…… 택시 말고…….”

어깨동무하지 않은 손으로 손나팔을 만든 견이 은규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내 여자친구 불러주세요.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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