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56화 (56/86)

#56. 아무리 알아도 모르는 게 더 많은

2017.11.12.

은규의 어깨에 한 팔을 걸치고 끌려가던 견이 걸음을 멈췄다.

“나…… 택시 말고…….”

어깨동무하지 않은 손으로 손나팔을 만든 견이 은규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내 여자친구 불러주세요. 지금 당장.”

은규가 그대로 굳었다. 견을 잡고 있던 팔뚝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백견 씨, 나인 줄 알고 그러신 거죠?”

“네, 박은규 대리님. 내 여자의 남자사람친구. 유부남이라서 통과!”

“감사합…… 아니지. 나도 취했나? 통과는 또 뭡니까! 왜 자꾸 큰일 날 소리를 하고 그러세요! 혹시라도 다른 직원이 들었으면 난리 났을 거라고요!”

지금 그를 챙기다 이 말을 들은 게 제가 아니라 말 많은 누군가였더라면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을 거고, 개중 정성껏 시간 낭비하는 취미가 있는 누군가는 끝까지 캐냈을 거다.

회장 손주가 만나는 여자가 사내어린이집 교사라는 사실이 소문나면 발칵 뒤집힐 게 뻔했다.

어린이집에 그런 선생님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을 사람들이 모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댈 걸 생각하면 골이 지끈거렸다.

“은규 대리님, 안 가세요?”

“네, 갑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안녕히 가세요오. 조심해서 가세요오. 월요일에 봬요오.”

그 와중에 견이 저도 인사한답시고 90도로 허리를 접었다가 어지러워서 못 올라오고 헤맸다. 같이 넘어질 뻔한 은규가 낑낑대며 간신히 받쳐 주었다.

은규의 어깨에 감고 있던 팔을 풀어버린 견이 가게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모단 씨 안 불러주면 집에 안 갈 거예요.”

“뭐라고요?”

“은규 대리님 쫓아가서 대리님네 집 거실에서 자야겠다.”

“예?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

견이 헤 하고 웃었다. 다들 가고 술집 앞에 둘만 남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은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견의 머리카락 대신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백견 씨 취한 거 처음 보는데, 와…….”

일전에 그가 대표로 있을 때도 술자리는 종종 있었다.

그때의 견은 길어야 2차 중간쯤까지만 같이 있다가 카드 주고 쿨하게 떠나곤 했다. 가끔 오래 있더라도 거의 마시지 않았기에 그가 취한 걸 볼 일이 없었다.

“뭐가 이래? 혀는 하나도 안 꼬였는데 내용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나네. 어휴.”

부르지 말라고 해도 모단에게 전화해서 네 남자친구 진상이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은규는 심호흡을 하고는 견의 팔을 잡았다.

“일단 일어나세요. 옷 더러워져요.”

“저 원래 옷 한 번 입고 버려요.”

“아…… 역시.”

“왜 다들 믿는 거야. 나 안 그래요. 옷은 빨면 되니까 모단 씨 불러줘요.”

“알았으니까 다른 데 가서 앉자고요. 사람들이 다 쳐다봐요.”

“나는 다른 여자 안 쳐다볼 거예요. 척추 접혀서 나풀대다가 염라대왕한테 업어달라고 해야 돼요. 아니지, 저승사자였나?”

“뭔 소리야…….”

“정모단 불러달라고요. 우리 모단이!”

쉴 새 없이 모단모단거리는 입을 틀어막고 싶은 걸 겨우 참은 은규가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다.

밖에 있는 테이블 앞에 견을 앉혀두고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가 술 깨는 음료 두 병을 샀다. 계산하는 동안 모단과 짧은 통화를 했다.

“백견 씨, 이것부터 드세요. 그리고 모단이 금방 온대요.”

“정말요?”

“근데 백견 씨가 전화했어도 됐잖아요. 왜 저한테 불러달라고 하신 거예요? 싸웠어요?”

“싸우진 않았는데 제가 하면 혼날 것 같아서…….”

“…….”

취한 와중에도 무서운 건 확실히 알고 있나 보다. 얼마나 잡혔으면 무의식에 새겨진 건가 싶어 짠해졌다.

“뒷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모단이 목소리 안 좋은데.”

대뜸 ‘네가 먹였냐?’ 하고 묻던 것을 떠올린 은규가 어깨를 떨었다.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긴 했는데, 안 말리고 뭐 했냐고 저까지 한 소리 들을 것 같았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얼굴을 했던 견이 다시금 눈동자가 안 보이도록 눈을 접고 웃었다.

“괜찮아요. 사실은 별로 안 아파요. 그 조그만 손으로 열심히 때렸는데 안 아파 보이면 실망할까 봐 아프다고 하는 거예요.”

취했어도 잘생겼네, 남자가 봐도 잘생겼네,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던 은규가 어휴, 했다.

“무슨 그런 배려까지 하고 그러세요. 정모단 버릇 나빠져요. 지금도 난폭한데.”

구시렁거리면서도 과히 싫지 않은 얼굴이다. 내 여동생을 남이 칭찬하면 내심 좋으면서 괜히 아니라고 흉보게 되는 그런 맘이랄까.

“근데요, 은규 대리님.”

모단이 온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헤실헤실 풀어져 있던 견의 눈매가 슬그머니 처졌다.

“전에 저한테 모단이는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은규는 한입에 털어 넣었던 술 깨는 음료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가 간신히 삼켰다.

“지금도 안 돼요……?”

“그럴 리가요! 됩니다, 돼요. 제가 뭐라고.”

그땐 나름 심각한 고민 끝에 제 밥줄까지 걸고 말했던 건데, 역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남의 연애사엔 안 끼어드는 게 상책이구나 싶다.

지금 생각해 보니 견이 악독한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이 무의식중에 깔려 있었기에 입이 떨어졌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다시 회사 동료가 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땐 모단이도 전혀 마음이 없다고 했고 백견 씨도 가볍게 그러시는 줄 알고 그랬던 거고요. 지금은 서로 좋다는데 제3자가 뭐라고 합니까.”

“감사합니다.”

견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은규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해빛이가 결혼할 때가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지금 여기서 밑도 끝도 없이 장인어른이 된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제가 그때 말씀을 못 드렸는데요, 나요, 모단 씨가 어렵게 맞춰야 하는 남자 아니에요.”

모단이는 굳이 어렵게 맞추지 않아도 되는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민망함에 뒤통수를 긁적이던 은규는 이어진 견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굳었다.

“내가 모단 씨한테 다 맞출 거거든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진심이네, 정말.’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지금 견의 표정과 눈빛을 본다면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해빛이가 즐겨 쓰는 말마따나 사랑에 빠졌다는 걸.

영원을 장담할 수는 없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그가 모단을 얼마나 생각하고 좋아하고 있는지.

모단도 느꼈기에 마음을 연 거겠구나 싶었다.

그사이, 견은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술 깨는 음료를 단숨에 마시고 인상을 찡그렸다.

“은규 대리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주사 축에도 못 껴요. 오히려 백견 씨 덕분에 김 차장 뒤치다꺼리 안 해서 좋기만 한 걸요.”

“그게 아니라, 옛날에.”

은규는 단번에 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분위기가 애매하고 씁쓸해졌다.

“제가 그때 앞으로 1년 정도밖에 못 산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공식적으로도 지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대주주들과 고위 임원들 사이에 반발이 생겨 밀려난 걸로 알려져 있긴 했다. 시한부 얘기까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정신적 문제라는 소문도 돌았고, 심하게는 블랑아이를 이용해 탈세를 하려 했다거나 비리를 저질렀다는 악성 루머까지 나온 적도 있었다.

애초에 롤모델로 따랐던 만큼 은규가 느낀 배신감도 컸다. 반면 한구석에는 끝까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최근의 사적인 만남, 그리고 공모전을 거치면서 실낱같던 그 믿음이 다시 부풀던 차였다.

“근데 기적처럼 정모단 씨를 만나서 안 죽었어요. 다시 열심히 살고 싶어졌고요.”

거기에 방금 들은 말까지 보태지자, 견에 대한 은규의 신뢰는 1프로의 여지도 없이 회복되었다.

“은규 대리님!”

“예, 예?”

“사람 하나 미친놈 만드는 건 참 쉽거든요. 근데 사실 멀쩡하다는 걸 증명하는 건 엄청 어렵더라고요. 너무 어려워요.”

견이 몸을 불쑥 내밀더니 은규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은규 대리님 같은 분들을 회사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아세요?”

“저, 저도 고맙습니다만 손은 놓아주셨으면…….”

“솔직히 옛날에는요, 블랑아이가 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해요. 근데 밖에서 보니까, 이렇게 힘들게 다시 돌아와 보니까 절대 아니라는 거 알겠고요, 내 직책하고는 상관없이 그냥 블랑아이가 잘됐으면 좋겠고, 또…….”

견의 어깨 너머를 본 은규의 눈이 더럭 커졌다.

“아이고, 손까지 맞잡고 분위기들 좋으시네.”

견의 등 뒤에 스윽 나타난 모단이 팔짱을 꼈다.

“안 취했으면서 굳이 나 불러낸 거면 둘 다 코피 터질 각오쯤은 해야 할 거…….”

“어!”

뒤를 돌아본 견이 벌떡 일어서더니 모단을 와락 끌어안았다.

“모단 씨이이.”

“와아이씨, 술 냄새!”

거 봐, 꽐라 맞잖아.

눈으로 변명한 은규는 한숨 돌리고 눈앞의 광경을 구경했다.

‘비슷한 장면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TV동물농장이었나? 지가 맹수인 것도 까먹고 사육사 어깨에 앞발 얹고 막 재롱부리던 호랑이가 떠오르려고 하는데.’

재롱을 떨거나 말거나, 잘생겼거나 말거나 매정하게 견의 얼굴을 밀어낸 모단이 그의 한 팔을 제 어깨에 걸치고 차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은규 넌 차 가져왔어? 대리운전 부를 거야?”

“아니. 택시 타고 가려고.”

“그럼 너도 타. 너 먼저 데려다줄게.”

“나도 묻어가도 돼?”

“당연하지. 고생했겠다. 미안해. 나중에 본인한테도 꼭 사과 받아라.”

견이 꼬마자동차 조수석에 앉았다.

운전석에 탄 모단은 긴 다리 때문에 심히 좁아 보이는 옆자리를 보고는 헛웃음을 삼켰다.

“좀만 참아요. 안전벨트 매고.”

견은 얌전히 안전벨트를 맸다. 그러고는 차가 움직인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스르르 눈을 감더니 잠이 들어버렸다.

“너만 징글징글하게 찾더라. 엄마 찾는 박해빛 보는 줄 알았다.”

뒷좌석의 은규가 투덜거렸다.

“조용히 해. 너도 술만 마시면 윤새윤을 자진모리장단으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어.”

“안 그래도 그때 생각나서 묵묵히 감상해 드렸다.”

“근데…… 설마 딴사람들 있는 데서 내 이름 부르고 그런 건 아니지?”

“그랬으면 내가 실례를 무릅쓰고 입 막았지.”

“그래. 조용히 살고 싶다. 교사 사생활까지 신경 쓰는 학부모님들도 있어서 프로필 사진도 마음대로 못 바꾸는 판에 소문이라도 나면, 아휴. 생각만 했는데도 수명 줄어드는 것 같네.”

모단이 진저리를 쳤다. 은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륜도 아니고 억울하겠지만 청첩장 인쇄하기 전까지는 감춰라. 그게 너 편하게 사는 길이야.”

“알았어…… 가 아니라 뭘 자연스럽게 청첩장 타령이야?”

“친구가 재벌가 사모님이 될 줄이야. 결혼식은 제일 좋은 호텔에서 할 거지?”

“해빛이가 불리하면 귀 닫고 자기 할 말만 하는 건 너를 똑 닮은 것 같구나.”

“중간에 고생을 하긴 했어도 역시 너랑 어머니는 잘살 팔자였던 거야. 아버님만 계셨어도 어머니도 여전히 사모님 소리 듣고 너도 제이네트웍스 상속녀라고 불렸을 거 아냐.”

오래 알고 잘 아는 사이라 할 수 있는 말이다. 모단은 픽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재벌 2세 축에 낄 수도 있었는데.”

“처음 네 관상을 봤을 때부터 돈이 보였어.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자.”

“시끄러.”

“근데 백견 씨도 알아? 너희 아버님하고 외할아버지 얘기?”

“아니. 친엄마 아닌 거랑 아빠 돌아가신 건 아는데 다른 얘긴 굳이 하기가 그래서. 외가 쪽은 말할 생각 자체를 안 했고.”

“하긴 사귄 지 오래된 것도 아니고 맞선 본 것도 아닌데 집안 얘기부터 시시콜콜 털고 가는 것도 그러네.”

“아빠 살아 계실 땐 우리 집도 좀 살았어요, 이런 말 웃기잖아. 그리고 외가 쪽에선 나랑 엄마의 존재 자체를 인정을 안 하는데 내가 왜 아는 척을 해? 그냥 남이야. 남보다 더 못 하지.”

다른 때였다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을 은규지만, 취기가 살짝 오른 김에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렇긴 한데, 난 솔직히 그런 생각 조금 했다. 네가 희명그룹 며느리 돼서 그 사람들 보란 듯이 무시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유치하게 그게 뭐냐? 게다가 속 모르는 사람들은 저러려고 희명그룹 후계자한테 들이댔나 보다 하고 수군거리기나 하겠지.”

“내가 볼 때 연애건 결혼이건 알려지는 즉시 그런 말은 나올 것 같은데. 남자 쪽이 조금만 돈이 많아도 꽃뱀이네 취집이네 남의 일에 막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냐.”

“그래, 그렇겠지. 근데 남들 관심은 내 알 바 아니고, 혹시라도 백견 씨가 오해할까 봐 그렇지.”

“은근히 닭살이다, 너?”

“너랑 윤새윤은 내 앞에서 닭살의 닭 자도 꺼내지 마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은규네 집 앞에 도착했다.

은규를 내려준 모단은 내비게이션에 견의 집 주소를 입력하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말했어야 했나……?”

모단이 혼잣말을 흘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성어패럴은 당연히 알 거고…… 제이네트웍스는 모를 수도 있겠다. 어렸을 때니까. 에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차렸다 망한 회사도 아니고 앞으로 볼 일도 없을 텐데.’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견을 힐끗 보았다가 육성으로 감탄했다.

“허업……!”

고민이고 뭐고 한 방에 날아갔다.

잘생겼다는 흔한 말 말고 훨씬 강렬하고 완벽한 수식어가 없나 고뇌하게 될 만큼의 잘생김이다.

이래서 남편이 잘생기면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얼굴 보고 화가 가라앉는다는 농담이 나왔나 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모단이 전방을 주시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저 얼굴로 세상 살면 어떤 기분일까…….”

그때였다. 어깨 위로 스윽 무게가 얹히더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축복받은 기분이요.”

“으악!”

기겁한 모단이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 깼대? 괜찮아요?”

“네.”

한참 동안 모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견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뺨이 발그스레하다.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안 취할 줄 알고.”

“그걸 말이라고.”

모단이 한 손으로 생수병을 찾아 건넸다.

고마워요, 하고 받은 견이 단숨에 반 병 이상을 들이켰다.

겨우 10여 분 남짓이었던 것 같은데,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깨니 속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술 깨는 음료도 얼마간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했다.

필름이 끊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뇌와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았었는데, 지금은 얼추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제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견은 운전에 열중하는 모단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 왔어요. 여기 맞죠?”

“모단 씨.”

먼저 안전벨트를 푼 모단이 돌아보았다. 견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눈만 맞췄다.

섭섭하게 여기면 안 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모든 걸 다 털어놓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도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건 저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것도 믿어줄지 어쩔지도 모르는 엄청난 비밀을.

그러나 아직 남은 술기운이 멋대로 입을 움직이게 했다.

“모단 씨는 아무리 알아도 모르는 게 더 많은 사람이네요.”

“네?”

“사실은 은규 대리님 계실 때 깼는데 계속 눈 감고 있었어요.”

“아…….”

모단의 눈가가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걸까.

“제이네트웍스가…… 내가 아는 곳 맞아요?”

난감한 눈을 한 모단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93년인가 94년에 벤처붐 타고 엄청나게 성장했던 네트워크 보안 플랫폼 회사.”

“……맞아요. 2000년에 코스닥 버블 붕괴에 휩쓸리면서 파산했죠.”

“2000년이면, 내가 열두 살 때…….”

열두 살.

어떤 촉이 견의 뇌리를 스쳤다.

“어떤 어른을 만나뵙고 어려운 부탁을 드려야 했거든요. 근데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서 막무가내로 거기까지 따라간 거예요.”

“그때 내가 백견 씨에게 뭔가 의미가 있는 사람이란 걸 바로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땐 어리고 철도 없었으니까 대놓고 협박하면서 돈 달라고 할 수 있었을 것 같거든요.”

그 어린 나이에 혼자 거기까지 찾아올 만큼 돈이 필요했다던 말.

무언가가 연결될 듯 말 듯 가물거렸다.

“혹시 이것도 알아요?”

차분한 모단의 목소리가 그 끝을 잡아주었다.

“제이네트웍스 사장이 누구 사위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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