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59화 (59/86)

#59. 실례는 그쪽만 저지를 줄 아는 게 아니거든

2017.11.22.

“정모단 선생님, 그거 아세요?”

“뭐요?”

견이 모단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더니 나른하게 웃었다.

“블랑아이 사무실에 있는 CCTV는 복도 쪽에서 입구가 보이게 설치한 것 하나, 서류보관함 쪽에 설치한 것 하나. 두 개밖에 없는 거요.”

그렇다면 여기는 직원의 초상권이 보호되는 사각지대요, 뭔 짓을 해도 볼 사람 없다는 뜻이겠구나.

알아서 알아듣자마자 입술이 닿았다.

사람의 눈도 기계의 눈도 없는데 저절로 몸이 파티션 뒤로 낮아졌다.

사탕을 맛보듯 물고 녹이고 빨며 말랑해진 숨을 주고받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제멋대로 기억 조작이 일어나고 있었다.

텅 빈 교실, 연필심 냄새가 떠도는 책상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가,

좁은 우산 속 쏟아지는 빗소리 안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가,

관객이 거의 없는 영화관 맨 뒷좌석에서 남몰래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입술을 뗀 견이 스르르 허리를 숙여 책상에 엎드렸다. 모단도 똑같이 책상에 뺨을 붙이고 눈을 맞췄다.

뺨에 닿은 책상의 차가움이 몽롱해진 정신을 조금씩 되돌려놓았다.

“큰일 났다. 이제 이 자리에 앉아서 일할 때마다 딴생각만 나게 생겼어요.”

견이 한 손으로 모단의 뺨을 쓰다듬었다.

“같이 퇴근하면 이상해 보일까요?”

“손잡고 같은 차에 타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럼 엘리베이터까지만 같이 가요. 모단 씨는 로비, 나는 주차장.”

“그래요. 정류장 지나서 맨날 기다리는 데서 있을게요.”

“영화 보기 전에 간단하게 저녁을 먹는 게 낫겠죠?”

“나 백견 씨 만나고 나서 살쪘어요. 어차피 팝콘 먹을 거니까 저녁은 생략하고 영화 끝나면 치맥이나 해요.”

“그래요. 팝콘은 옥수수고 치킨은 닭가슴살이고 맥주는 보리니까 살 하나도 안 찌겠다.”

모단이 방긋 웃었다.

“여기 CCTV 없다고 했죠? 누구 하나 코피 터지게 맞아도 아무도 모르겠네?”

“자비를 베푸소서…….”

둘은 책상 아래에서 손을 꼭 맞잡은 채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근데 언제까지 백견 씨라고 부를 거예요? 성까지 딱 붙여서?”

“왠지 견 씨라고 하면 입에 안 붙어서요. 개한테 견공(犬公)이라고 하는 거랑 어감이 비슷하잖아요.”

“개 견 자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럼 아예 다른 호칭은 어때요? 흔한 것도 괜찮아요. 모단 씨 음성지원이라면.”

“흔한 거 뭐요? 야, 어이, 이보쇼, 이런 거?”

“전직이 뭐였기에 그런 호칭이 흔해? 자기야 같은 건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들어봤어요? 혹은 오빠라든가.”

“내가 돌잔치를 먼저 치렀는데 오빠는 또 뭐야.”

“잘생기고 돈 많으면 오빠잖아.”

“됐고,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 마음대로 부르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이 나왔다.

활짝 편 견의 손을 손가락 두 개로 보란 듯이 꼬집은 모단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가위바위보 완전 못 해. 열 번 하면 아홉 번은 내가 이기네요.”

“사람이 다 잘하면 매력 없다면서요. 가위바위보 정도는 못 할 수도 있지.”

“맞다! 오늘 수요일이잖아요. 일곱 시면 사무실 불 다 끈다면서요? 얼른 나가요.”

둘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회사 안은 벌써 고즈넉했다.

“같이 있기만 하면 시간이 막 가네. 하여간 모단 씨 없을 때는 무슨 재미로 살았는지 몰라.”

지나가듯 하는 말에 모단의 심장이 새삼 콩닥했다.

“……나도요.”

카드가 토끼가 되고 꽃이 되는 마술처럼,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다른 무엇으로 바뀌는 것 같다.

아무리 아껴 먹어도 아쉽게 녹아버리는 솜사탕 같은 것으로.

견이 옆에 선 모단을 어깨로 톡 밀었다.

“그래서 나 뭐라고 불러줄 건데요?”

모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번을 더 졸라봤지만 입을 꾹 닫고 있을 뿐이다.

금세 1층에 도착하고 모단이 먼저 내렸다. 그러고는 열린 문 안을 돌아보았다.

“어이, 거기 키 크고 얼굴 반반한 애.”

직관적이어도 너무 직관적인 호칭에 견의 웃음이 터졌다.

모단이 건들건들 아재스러운 눈빛까지 장착하고 고개를 까닥했다.

“팝콘 사줄 테니까 누나랑 영화 볼래? 치킨도 사줄게.”

엘리베이터 문이 거의 닫히기 직전까지 웃던 견이 활짝 편 손을 들어 화답했다.

“알았으니까 이따 봐요. 가위바위보 할 때 맨날 가위부터 내는 누나.”

***

모두가 잠든 시각, 견은 콩쥐처럼 일하고 섭호에게 얻은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 안에 제이네트웍스의 시작부터 끝까지가 비교적 자세히 담겨 있었다.

물론 대외적으로 알려진 내용들이고, 그 뒤에 감춰진 일들은 모단에게 들은 얘기와 맞춰보았다.

제이네트웍스를 설립한 정상현은, 옥탑방에서 컴퓨터 한 대로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시절에 한성어패럴 한규철 사장의 외동딸 한사라를 만났다.

당연히 한규철은 무섭게 반대했다. 그러나 한사라는 집안과 연을 끊을 각오로 사랑을 택했고, 뱃속에 품은 딸을 낳았다.

모단은 서류상으로 어머니가 아예 없었다. 아마도 한규철이 혼인신고는 물론이고 딸이 출생신고도 할 수 없도록 손을 쓴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정상현은 딸을 제 호적에 올렸다. 지금도 미혼부가 혼자 출생신고를 하려면 절차가 엄청나게 복잡하다는데 그 당시엔 더했으리라.

그럼에도 사랑과 낭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태어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가난과 산후우울증에 질린 한사라에게는 제 자식에게 줄 사랑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단이 아주 어렸을 때조차도 엄마의 보살핌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하는 걸 보면.

그렇게 7년 만에 헤어졌다. 한규철이 몇 년 동안 해외에 나가 있던 딸이 돌아왔다고 한 시점과 맞물린다.

그러고 나서 얄궂게도 제이네트웍스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그때의 기세를 유지해 가며 지금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희명소프트 못지않은 큰 회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한규철 사장 또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을까.

그러나 몇 년 만에 사건이 터졌다. 몇몇 기업대표들이 증권회사 직원들을 매수해 고의적으로 주가를 올려 막대한 시세 차익을 챙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칵 뒤집혔다. 수사 명단에는 제이네트웍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상현은 억울함을 주장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몇 달 후 그가 사망했을 때 회사는 이미 산산이 분해된 후였다. 그의 부고(訃告)는 고작 며칠쯤 대중의 관심을 끌다가 잊혀졌다.

한때 벤처의 신화처럼 불렸던 그의 이름 위엔 혐의인지 누명인지 모를 오명만 남았다.

“……후.”

묵직한 한숨을 내쉰 견은 한 손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혹시…… 그때 나 때문에 정모단 씨의 인생이 안 좋은 쪽으로 바뀌었나요?”

“아뇨. 잠시 안 좋은 쪽으로 바뀌긴 했지만 백견 씨 탓은 전혀 아니에요.”

‘잠시 안 좋은 정도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금전적으로는 어려워 본 적 없이 살았기에 다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어린 모단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오죽했으면 은규가 ‘희명그룹 며느리 돼서 그 사람들 보란 듯이 무시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을까.

모단은 유치하게 그게 뭐냐고 했지만, 그녀의 성격상 남의 배경을 대신 두르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을 게 뻔하지만, 굳이 꾸역꾸역 쥐어주고 싶었다.

내 금수저 줄 테니까 가서 이걸로 거슬리는 사람들 다 때리고 와요, 하고.

‘살다 보면 유치해질 수도 있는 거지. 때론 유치한 게 제일 열 받기도 하고.’

견이 가볍게 늘인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마음에 들어. 꼭 실행에 옮겨야겠어.”

***

토요일 오후, <갤러리 한>에서 민옥 교수의 개인전 오프닝 행사가 있었다.

백 회장도 초대를 받았으나 얼마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어 움직이지 못하고, 대신 화환 정도만 보내려 했다. 그런데 견이 나섰다.

“제가 다녀올게요. 블랑아이에서 일하게 됐으니 거래처가 된 거잖아요. 이번에 다시 한 번 제대로 인사드리고 오죠.”

그렇잖아도 적당한 기회를 만들어 한규철을 만나보려 했었다.

그가 내친 손녀가 희명그룹 며느리가 되어 나타나는 아름다운 그림은 일단 모단이 제 청혼을 받아준 후에야 보여줄 수 있는 거니까, 그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직접 알아보고자 했다.

겸사겸사 전에 등산 가기 싫어서 변진상을 떠넘긴 전적도 만회할 속셈이었다.

백 회장은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화환 하나만 덜렁 보내는 것보다 훨씬 성의 있어 보일 테니 나쁠 것도 없었다.

견은 미리 휴가를 낸 섭호 대신 백 회장의 비서가 함께 가겠다고 하는 것도 만류하고 혼자서 갤러리로 향했다.

무심히 계단을 올라갔던 견이 멈칫했다.

제법 많은 사람들 속, 한규철 사장과 민옥 교수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싹싹한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숙이는 여자 역시 낯이 익었다.

여은이었다. 전에도 민옥 교수와 함께 오는 걸 본 기억이 났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아버님은 잘 계시고?”

“네. 귀한 자리에 저까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우아한 표정과 자세로 한 번 더 인사했다.

“민 교수가 아끼는 제자라고 얘기 들었어요. 손녀나 다름없는 아이라고. 우리 딸도 예전에 민 교수 제자였다 보니 딸 생각도 나고 해서.”

민옥 교수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결혼하고 나서 붓을 딱 내려놔서 나한테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있지.”

“교수님도.”

“그러지 말고 언제든 다시 그려봐요. 우리 갤러리에서 전시해도 좋겠군. 민 교수 제자라면 믿을 만하지.”

견은 그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시선을 멀리 두었다.

여은을 보는 한규철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게 거슬렸다.

그는 자신의 손녀도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주머니에 넣고 있던 한 손을 뺀 견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오, 백견 군.”

한규철이 먼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견은 정중히 악수를 했다.

“할아버지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전시회도 보고 사장님도 뵙고, 오랜만에 담소 나누고 싶으셨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고 말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런.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고. 많이 불편하신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다 보니 조심하시는 게 좋겠다는 권유가 있어서요.”

“그렇군.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게. 내가 나중에 따로 인사드리겠지마는.”

“알겠습니다.”

미소로 답한 견이 민옥 교수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십 년 만에 여시는 개인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저야말로 좋은 전시회를 보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민 교수의 옆에 서 있던 여은을 힐끗 본 견이 묵례를 했다.

여은은 다소 굳은 얼굴로 고개를 까닥했다.

“그럼 편하게들 봐요.”

“네.”

견이 먼저 물러났다.

그림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바로 갈 순 없으니 천천히 둘러보았다.

작품보다는 여기 와 있는 사람들 중 한규철과 친분이 깊어 보이는 사람이 누군지, 혹시나 아는 얼굴은 없는지 주목했다.

일전에 백 회장과 함께 왔을 때만 해도 미처 보지 못했던 갤러리의 규모와 구조, 분위기 등도 유심히 살폈다.

2층 전시실은 아래층에 비해 한적했다. 몇몇 관람객도 내려가고 홀로 남은 김에 조용함을 즐기고 있는데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났다.

무심코 돌아본 견의 눈가가 차게 굳었다.

“……안녕하세요.”

여은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견은 사늘한 눈길로 내려다보고는 지나치려 했다.

“요즘 만나는 여자가 있다면서요?”

견의 걸음이 멈췄다.

“일전에 오해가 있었어요. 백견 씨랑 만나는 분인 줄 모르고 실례를 좀 했는데.”

등 뒤로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정모단 씨가 얘기 안 하던가요?”

모단의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견의 눈매가 무섭도록 딱딱해졌다.

견이 몸을 돌렸다.

“누가 누굴 만나고 무슨 실례를 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냉랭한 무표정이 여은을 찔렀다.

“지금 저한테 줄 관심이 있으면 그때 형한테나 주지 그랬습니까?”

예상보다 훨씬 더 무람없는 응수에 여은의 눈매가 파르르 흔들렸다.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도 없고 관심을 가질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깜박하신 모양인데, 조심하세요.”

견은 가면처럼 우아하고도 오싹한 미소를 꺼내들었다.

“실례는 그쪽만 저지를 줄 아는 게 아니거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는 견의 뒷모습을 쏘아보는 여은의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

방향을 잘못 잡은 분노는 하나뿐이 아니었다.

견도 여은도 미처 보지 못한 위쪽, 관장실로 통하는 계단에서 사박 발소리가 났다.

***

“……그래서 요즘은 그쪽에 투자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군요.”

금지는 고무처럼 느껴지는 고기를 작게 잘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며 맞선을 보는 중이었다. 상대가 워낙 바빠 토요일에도 낮에는 시간이 되지 않는다며 양해를 구했다.

맞선남은 증권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다. 본인이 버는 돈도, 물려받을 예정인 돈도 모두 넉넉했다. 태도며 말투에도 여유가 보였고, 외모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그럼에도 놀라울 만큼 관심이 가질 않았다.

“금지 씨는 취미가 어떻게 되세요?”

“여행이요.”

“그래요? 보기보다 활동적이신가 봅니다.”

“그렇진 않고요, 혼자 조용히 여기저기 다니는 걸 좋아해요.”

“저도 여행은 혼자 다니는 게 좋더라고요. 혹시 즐기는 운동 같은 건 없으세요? 전 최근에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서핑이요? 흥미롭네요.”

속내야 어떻건 금지는 얌전한 태도와 적당한 반응으로 괜찮은 맞선녀 역할에 충실했다.

오빠가 신신당부를 넘어 경고까지 한 자리라 멋대로 굴 수는 없었다. 열에 아홉은 그러듯 도망쳐 피하는 게 최선이지만, 나올 수밖에 없게 된 자리에선 적당히 잘하는 게 차선이다.

애초에 사람을 보고 맺어주려는 자리가 아닌지라, 진상을 피워봤자 들어올 선이 안 들어오진 않고 골치 아픈 뒷말만 나돈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았다. 다음 만남 따위 절대 없을 테니 몇 시간만 잘하면 된다.

“식사 다 하셨으면 자리를 옮길까요?”

금지가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아홉 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아온 여자 같은 표정이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늦었다 보니.”

남자는 다행히도 눈치가 빨랐다.

“제가 사과드려야 할 일이죠. 더 일찍 만나뵙고 천천히 얘기 나눴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금지는 미소로 답했다.

계산을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금지가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았다.

“저도요.”

“댁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괜찮아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럼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두 번 권하지 않고 예의상 한마디만 덧붙인 남자가 깔끔하게 몸을 돌렸다.

얼마간 그 자리에 서 있던 금지는 로비로 나가려 했다. 그러다 익숙하지만 반갑지는 않은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선보고 나왔나 보구나.”

서슴없이 다가서는 여은에게서 알코올 향이 훅 끼쳤다.

“분위기 좋아 보이네. 잘됐나 봐?”

견을 자극하려다가 되레 모욕만 당한 후, 여은은 오프닝 행사장에 있던 칵테일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거로는 성에 차지 않아 갤러리를 나와 혼자서 더 마시고, 택시를 잡아탄 후에 가장 가까운 호텔 라운지 바를 찾아온 거였다.

백화점에서 함께 있던 지협과 모단을 마주친 그날 저녁, 민철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제 짐을 챙겨 집을 나가 버렸다. 병원에도 휴가를 냈다고 했다.

애초에 그가 있다고 해서 따뜻한 집은 아니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참을 수가 없었다.

지협과 있을 때 숨이 막혔던 건 정략결혼보다도 그가 품은 우아한 권위를 감당하기 힘들어서였다.

그가 제 세상에 들어오는 순간, 우위에 서는 쪽은 제가 아니라 그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뭐든 내려다보는 게 좋았다.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민철을 택했다.

본인이 엮인 하룻밤 때문에 희명그룹과 유손제약 사이의 암묵적인 계약이 깨진 걸 아느냐는 한마디에 창백해져서 벌벌 떨던 그라면, 이렇게 됐으니 책임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던 그라면 평생 저를 거스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 남자가 그토록 경멸 어린 눈빛으로 저를 보았다.

“……다 똑같아. 결국 다 똑같다고.”

어디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그를 찾기 위해 정모단이라는 여자 옆에 사람을 붙였다.

그 여자가 백지협과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이 돌아버렸으니, 어쩌면 그쪽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그러나 원했던 소식 대신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늦은 시각 그 여자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이는 백지협이 아니라 백견이었다.

설마 둘 다를 쥐고 흔드는 건가 싶었으나,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보자 답이 나왔다.

그 여자도, 백지협도, 심지어 황금지도, 부정하지 않거나 여지를 두었을 뿐이라는 걸.

교묘하게 갈라놓고자 했던 이들이 되레 단단히 얽혀 저를 농락했다는 걸.

“니들이 날 몰아붙일 자격이나 있어? 근데 뭐라고 하나같이 그렇게 당당해?”

금지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여은을 황당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늘 소름 끼칠 만큼 꼿꼿하고 완벽한 겉모습을 가장하던 여은이었다.

저를 비롯한 모두가 그녀의 자존심을 긋고 깨뜨리고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걸 알 리가 없으니, 될 대로 되라는 듯 보이는 지금의 그녀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너도 그런 식으로 결혼할 거면서 왜 날 그렇게 벌레 보듯이 보느냐고.”

“‘너도’라니.”

금지가 말문을 뗐다.

“그쪽은 사랑이 흘러넘쳐서 지협 오빠랑 그런 식으로 결혼 안 한 거 아니었어?”

금지의 입가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어렸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시겠다며. 팔려가기 싫다며. 설마 벌써 식었어?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만든 사랑치고는 유통기한이 너무 짧은 것 같은데.”

여은이 이를 악물었다.

“너도, 백지협도,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으로 날 갖고 놀았던데.”

“피해망상이 심하네.”

말을 섞는 것조차 짜증스러워진 금지는 그대로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발은커녕 시선조차 떼지 못했다.

“백견이랑 만나는 그 여자, 내 남편이랑 만나던 여자인 거 너도 알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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