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아윌킵유세잎
2017.11.26.
“백견이랑 만나는 그 여자, 내 남편이랑 만나던 여자인 거 너도 알았니?”
금지는 표정부터 굳게 다잡았다. 당황시키려는 게 분명한 수작에 놀아날 순 없다.
그러나 내심 크게 흔들리긴 했다.
여은이 견과 모단 사이를 알고 있다는 것도 소름 끼쳤고, 미처 몰랐던 모단의 과거도 충격이었다. 교묘하게 말하는 재주는 있어도 아예 없는 말을 하는 여자는 아니니 아마 사실이리라.
“생각해 봐, 금지야. 이게 정말 우연일까? 주제도 모르고 유치한 복수 같은 거 하려고 드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드니? 지협 씨가 안 넘어오니까 방향을 튼 것 같은데…….”
“누가 누굴 만나고 뭐가 어째?”
금지가 싸늘하게 잘랐다.
“헛소리건 주사건 적당히 해야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지. 도저히 못 봐주겠네.”
여은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백견이나 너나 똑같이 시치미 떼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
금지의 눈매가 차게 식었다. 박수까지 쳐가며 요란하던 여은의 웃음도 거짓말처럼 거둬졌다.
“금지야, 넌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
여은이 금지의 어깨를 지그시 쥐었다.
“없는 사람들은 쉽게 믿으면 안 돼.”
“누가 없는 사람인데?”
금지가 먼지라도 털어내듯 여은의 손을 밀쳤다.
“내가 보기엔 그쪽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주위에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사람.”
아니야? 하고 되묻듯 눈썹을 까닥한 금지가 옆을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여은이 그녀의 옷자락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나보고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목소리까지 불쑥 높아졌다.
“그래. 희명에다가 노블, 니들 눈엔 우리 집 따위 우습겠지. 그래서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본인 빼고 다른 사람은 죄다 무시하는 여자가 뭐라는 건지, 금지는 말문이 막혔다. 말이 안 통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네가 뭔데? 넌 뭐냐고! 다들 왜 나한테만!”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금지는 당황해서 주위부터 둘러보았다. 밖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게 식구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피곤해질 가능성이 컸다.
그때였다.
“아가씨, 여기 계셨네요.”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금지의 어깨를 잡았다.
“사장님께서 빨리 들어오시랍니다. 얼른 가보시죠.”
어깨를 잡은 손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부드럽게 밀었다. 금지는 어영부영 걸음을 뗐다.
“보는 사람 많습니다. 빨리 밖으로 나가십시오.”
손이 떨어지고 낯익은 목소리가 등을 떠밀었다. 금지는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뛰다시피 호텔을 벗어났다.
“여기서 잠깐만…… 아닙니다. 그냥 따라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줄곧 뒤에만 머물던 목소리가 앞으로 불쑥 나왔다. 그러더니 주차장 쪽으로 앞서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등, 익숙한 어깨.
“섭호 오빠.”
섭호는 대답도 없이 앞장섰다.
금지는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차가 세워져 있었다.
뒷좌석 문을 열어주는 것을 무시하고 제 손으로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곧 옆에 그가 앉았다.
“오빠가 왜 여기 있어?”
“약속이 어긋났습니다. 돌아가려던 길에 로비가 소란스러워서 보니…….”
“여자야?”
섭호는 입을 다물었다.
“만나기로 했다던 사람 여자냐고.”
긍정도 부정도 없다. 조용히 차가 움직였다.
무려 두 시간 전부터 섭호는 그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일어나 나오려다가 다른 남자와 마주 앉아 웃고 있는 금지를 보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며칠 전 연락이 온 그녀의 오빠가 다짜고짜 이 시각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애초부터 저를 직접 만날 생각 따위 없었고, 그저 제게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 있을 뿐이었음을.
보라고 불러다 앉혀놓은 거라면 똑똑히 봐줘야지.
섭호는 금지가 더 잘 보이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예의상 음식까지 시켜놓고 그녀의 맞선이 끝날 때까지 적당히 먼 곳에서 지켜보았다.
다른 남자 앞에서 예쁘게 잘도 웃는 걸 보면서도 마음엔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금지가 정말 즐거울 땐 저렇게 웃지 않는다는 걸 잘 아니까.
그 남자와 손을 맞잡고 인사하는 것까지 보았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먼저 돌아선 직후, 그녀가 두 볼이 빵빵해지도록 숨을 머금었다가 홀가분하게 내뱉는 것을 다 보았으므로.
그러나 마음이 굳건한 것과는 별개로 기분은 쓰디쓰게 가라앉았다. 금지 오빠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것만은 아니었던 거다.
말 한마디 없이 금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 보십시오.”
“안 가.”
아까 그 남자 앞에서는 수동적인 대답들만 꺼내놓더니 금세 본색을 드러낸다.
“나 오빠 따라갈래.”
운전대를 잡은 섭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손등 위로 힘줄이 투둑 솟았다.
“따라가게 해줘. 어차피 집에는 안 갈 거야.”
다른 때였다면 신경은 쓰여도 겉으로는 냉정하게 쳐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게 좋지 않았다.
“내가 지금 어디 가는 줄 알고 따라가겠다는 겁니까?”
다른 때와는 미묘하게 결이 다른 말투를 느낀 금지도 멈칫했다.
“오늘…… 시간을 많이 버렸습니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 없습니다. 할 일이 많으니 이만 내려주시죠.”
“어디든.”
금지는 보는 사람마저 턱이 아릴 만큼 굳어 있는 섭호의 옆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따라간다니까.”
그제야 섭호가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진 눈썹 아래, 처음 보는 빛을 띤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처럼 넘실거렸다.
“아주 먼 곳입니다.”
“상관없…….”
“자고 와야 한단 뜻입니다.”
없, 하고 다물어졌던 입술이 어어어, 하며 벌어졌다.
섭호는 언제 그런 눈으로 했느냐는 듯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가서 무슨 일이 있을지 저도 모릅니다.”
***
[모단 씨, 혹시 요즘 누가 따라오는 것 같다거나 지켜보는 것 같다거나 하는 기색 없었어요?]
난데없는 견의 말에 모단은 코끝을 긁적였다.
“누가요? 나를 왜요?”
[없으면 됐어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건 아니고요. 갑자기 신경이 쓰여서요. 회사건 어디건 괜한 말이 나돌면 모단 씨 피곤하잖아요.]
모단은 하긴, 하고 중얼거렸다.
이제껏 너무 쿨하게 만나긴 했다. 견이 회사로 들어오고 난 후부터는 나름 조심하고 있긴 하지만.
[아마 짐작했겠지만 나는 걸리면 바로 공개연애로 전환할 작정이에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결혼까지 가는 게 목표고요.]
“일부러 소문낼 만한 가장 유력한 범인이 여기 있었네. 그랬다간 번갯불에 백견 씨를 볶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알아서 해요.”
[각별히 조심할게요. 그보다 미안해요. 적당한 집안에서 적당히 잘생기게 태어날 걸.]
“술은 내가 마시고 있는데 왜 자기가 헛소리를 해요?”
[어, 방금 자기라고 부른 거 맞죠?]
“아닌데요, 백견 씨.”
[‘어이, 거기 키 크고 얼굴 반반한 애’는 무려 열세 글자고 ‘자기’는 달랑 두 글자인데 그걸 못 하나?]
모단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너무 간지러워서 못 하겠다는 말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 빼고 술 마시니까 재미있어요?]
“그럴 리가요. 자고로 술은 영앤핸섬 톨앤리치한 남자가 따라줘야 제맛이지. 여자들끼리 마시려니까 영 칙칙해서 술맛도 안 나네.”
[또 성별 바뀐 아재 같은 소리 한다. 2차까진 봐줄 수 있는데 클럽 같은 데 가기만 해봐요.]
“춤만 출 건데 그래도 안 돼요? 불타는 토요일 밤인데.”
[가봐요. 해빛이 업고 가서 ‘여보, 애 우는데 여기서 뭐 해’ 그럴 거니까.]
애초부터 갈 생각 없었지만 마지막 한 톨까지 싹 사라졌다. 이 남자는 말도 안 되는 짓일수록 더 빼어나게 해내는 경향이 있으므로.
통화를 마친 모단은 얼른 술자리로 되돌아갔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난 자리다.
“누구 전화야? 남자?”
“여자 아니면 남자겠지. 설마 개가 전화했겠니?”
모단이 ‘그래, 개가 전화했다’ 하는 말이 담긴 눈으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새윤은 짐짓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맥주만 들이켰다.
모단과 가장 자주 보는 새윤의 반응이 시큰둥한 것을 본 다른 친구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말하는 꼬라지 보니 별 볼일 없는 전화구만. 쯧.”
“정모단, 남자 없니? 응? 올해 크리스마스도 혼자 보낼 거야?”
“생일 주인공인 예수님도 솔로인데 혼자 보내면 뭐 어때서? 넌 남친 생겼다 이거지?”
수민이 헤헤 웃었다.
“근데 그 남친은 온다더니 왜 안 와?”
“거의 다 왔대. 너희들 너무 괴롭히면 안 된다.”
“괴롭히긴 왜 괴롭혀. 네 남자친구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우실 텐데.”
“야!”
몇 시간 후.
견은 새윤의 전화를 받고서 급히 차를 몰고 나온 참이었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누운 건지 앉은 건지 모를 자세로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여자친구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회식 때 주정 좀 했다고 복수하는 거야, 뭐야.”
새윤은 보이지 않았다. 견은 성큼성큼 다가가 모단의 뒤에 섰다.
무방비하게 하늘을 향해 있는 얼굴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잠든 건지, 내리감긴 모단의 눈꺼풀은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 예쁘고 있네.”
견은 충동적으로 몸을 굽혔다. 거꾸로 맞닿은 입술에서 쪽 소리가 났다.
허리를 세운 견은 어헉, 하고 굳었다.
하필 그때 편의점에서 물을 사서 나온 새윤이 흠흠거리며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빛의 속도로 한다고 했는데 그걸 또 걸렸다.
“아,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제가 죄송합니다. 1분만 늦게 계산하고 나올 것을. 게다가 이 시각에 전화까지 드리고…….”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분명 안 된다고 말렸거든요. 아침에 이불킥하고 싶지 않으면 참으라고. 근데 백견 씨 안 불러주면 집에 안 간다고 진상…… 아니, 난리를 쳐가지고.”
어째 회식 다음 날 고개 푹 숙이고 은규에게 들었던 말과 똑같은 것 같다.
견은 새윤에게 먼저 정중히 손짓을 했다.
“먼저 모셔다 드릴게요. 얼른 타세요.”
견이 가뿐하게 모단을 부축해 일으켰다.
백견 씨, 하고 아는 척을 한 모단은 다시 반쯤 잠든 상태로 돌아갔다.
급하게 나오느라 조수석의 짐을 미처 치우지 못한지라 뒷좌석에 태우고, 그 옆에 새윤이 탔다.
새윤의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자는 것 같던 모단이 불쑥 외쳤다.
“자기야! 자기야아아.”
커플 간의 흔한 호칭인 데다 저 역시 은규를 자기라 부르기에 새윤은 그런가 보다 했다. 오직 견의 등줄기에만 감격의 식은땀이 조르르 흘렀다.
새윤이 있어서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견은 운전에 방해될 만큼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러나 모단의 입에서 튀어나온 자기는 그 자기가 아니었다.
“내가 오늘 이 소리를 백 번 넘게 들었다고오.”
“응? 누구한테……!”
“짜증 나. 내 친구지만 짜증 나아. 젓가락이 떨어졌으면 저기요! 하고 직원을 불러야지 왜 자기야아앙 하는 거야? 그 자리에서 젓가락을 연성해 보라는 거야?”
혼돈에 빠진 견을 새윤이 구해주었다.
“친구 남자친구가 중간에 인사한다고 들렀거든요. 사귄 지 얼마 안 됐다고 어찌나 닭살을 떠는지.”
“나도 부르고 싶었는데.”
모단이 눈도 뜨지 않고 중얼거렸다.
“적당한 집안에서 적당히 잘생기게 태어나지. 아, 짜증 나.”
분위기가 애매하고 씁쓸해졌다.
견은 차마 입 밖으로 미안하다고 하지도 못하고 맘을 졸였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처럼 모단이 요즘 제게 지친 건 아닌지, 새윤과 은규의 호의적인 태도도 얼마간 식는 건 아닌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새윤이 대신 모단의 코를 꾹 꼬집어주었다.
“아얏!”
“복에 겨운 소리 하고 앉았네.”
새윤의 집 앞에 도착했다.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새윤이 얼른 집으로 올라갔다.
차를 세운 김에 견은 시트에 한 팔을 얹고 뒤를 돌아보았다.
손등으로 코를 몇 번 문지른 모단이 부스스 고개를 들다가 견의 눈빛과 마주하고 멈칫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견은 그저 웃기만 했다.
꿀이 뚝뚝, 눈으로 양봉 중인 견을 물끄러미 보던 모단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요. 안 덮칠 테니까.”
“대사가 나랑 바뀐 것 같은데.”
“진짜예요. 지켜준다니까요? 나 잘 참을 수 있어요. 아윌킵유세잎.”
“세잎…… 뭔 세잎? 한국말 하는 거 맞아? 설마 I’ll keep you safe?”
“귀여운 뚜루루뚜루…… 바닷속 아기상어…….”
또 튀어나오는 상어송에 견이 코를 잔뜩 찡그렸다.
“대체 그 노래 뭐냐고. 이제 죠스 OST처럼 들리는 거 알아요?”
삘 받은 모단은 뚜루루뚜루만 연발할 따름이었다.
방심하면 저도 모르게 같이 부르기 딱 좋은 마성의 노래이기에 견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앞을 보았다. 그리고 운전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새윤의 집과 모단의 집은 거기서 거기였기에 금방 도착했다.
먼저 차에서 내린 견이 뒷좌석 문을 열고 몸을 굽혀 모단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다 왔어요. 힘들면 업어줄 테니까 손…….”
그때, 모단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견의 목에 한 팔을 감고 힘주어 당겼다.
견은 한 팔은 시트를 짚고 다른 손은 안전벨트를 쥔 채 허리를 숙인 어정쩡한 자세로 속절없이 입술을 뺏겼다.
그래 놓고,
뇌까지 끈적하게 절여질 것처럼 다디단 숨을 섞어 한다는 말이,
“어흥.”
“…….”
“에헤헤.”
할 말을 잃은 견은 장난스레 웃고 있는 모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굳어 있던 견이 안전벨트를 놓고 허리를 폈다. 뒤로 물러나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모단이 눈을 두어 번 깜박이는 사이, 차 뒤를 돌아 반대쪽 문을 연 견이 뒷좌석에 나란히 탔다. 뒤이어 한 손으로 모단의 뒤통수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어지, 어지러운……!”
가지런한 이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반사적으로 입이 벌어졌다.
혀끝에 얹었던 말들은 서슴없이 침입하는 혀끝에 휘말려 집어삼켜졌다.
견은 몇 번이나 고개의 각도를 바꿔가며 모단을 탐했다. 급하게 숨 한 모금 삼킬 틈만 주고 바짝 몰아붙였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배인 체액을 술 대신 머금고 삼키며 같이 취해갔다.
입천장과 목구멍, 혀의 끝부터 뿌리까지 여린 점막들이 쉴 새 없이 마찰했다. 얼얼한 흥분이 미처 넘기지 못하고 흘러 버린 타액처럼 넘쳤다.
차 안의 공기가 끓어 넘칠 듯 뜨거워지고, 산소는 가파르게 줄어들었다.
발작하듯 튀어 오르는 감각들을 커다란 손이 달래다 부추기다 했다. 감은 눈꼬리가 뜨거워지며 눈앞에 혼탁한 빛무리가 쏟아졌다.
시트를 짓누르던 무게가 얼마간 덜어졌다.
모단을 일으켜 제 품에 안은 견은 평소보다 뜨거워진 체온을 음미했다. 그녀는 제 목덜미에 젖은 입술과 뺨을 묻고 기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쁘게 오르내리던 등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자는 거예요?”
모단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 견이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지던 귀 끝을 슬쩍 핥았다. 흐느낌 같은 소리가 새었다.
“들어가야지. 대문 앞까지 와놓고 외박할 거야?”
팔 안에 감겨든 허리가 움찔거리다 완전히 힘이 빠졌다.
“졸려, 힘들어…….”
모단의 머리카락을 사붓사붓 쓸어내리던 견이 한숨처럼 웃었다.
“내가 더 힘들어, 이 여자야.”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모단은 고른 숨만 내뱉었다.
견의 차는 아주 오랫동안 모단의 집 앞에 서 있었다.
***
“여긴 대체…….”
몇 시간 만에 도착한 낯선 장소를 몇 번이고 둘러본 금지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섭호가 설마 저를 여기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
“입고 있는 옷,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선을 본답시고 마지못해 차려입고 나온 옷이니 불편하긴 했다.
“그러니까 벗으라는 겁니다, 아가씨.”
금지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등에 벽이 닿았다.
사람은 둘밖에 없는데 벌써 산소가 부족해진 듯 숨이 찼다. 심장은 이미 한참 전부터 무섭도록 세게 뛰고 있었다.
그 소리가 섭호에게까지 들릴 것 같아 겁이 났다.
“나, 나 다시 집으로 보내주면 안 될까? 아니, 집은 싫고 다른 곳이라도…….”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은.”
섭호가 한 손으로 머리를 넘겼다.
늘 가지런히 모으고 있거나, 책이나 커피를 들고 있거나, 운전대에 올려두던 차분한 손이 거칠게 움직이는 게 낯설었다.
“그러게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말끝에도 희미한 짜증이 묻어났다.
“가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이런 종류의 딱딱함은 처음이었다. 급기야 금지가 입을 비죽거렸다.
“난 설마 이런 뜻인 줄은…….”
섭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이 꼭 저를 한참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 울컥했지만, 지금은 성숙한 척할 여유가 없었다.
“나 무섭단 말이야.”
평소의 그였다면 어떻게든 안 무섭게 해줬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정말 다른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툭 뱉을 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무섭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