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이래도 좋다고 할지 궁금해서
2017.11.29.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무섭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섭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막무가내로 조수석에서 버티는 금지를 차 밖으로 밀어버릴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기에 잠자코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시골에 있는 본가였다.
워낙 늦게 도착한 탓에 아버지 성근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인사는 아침에 드리기로 하고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금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섭호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평소 거의 쓸 일이 없는 손님방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금지를 불렀다.
급한 대로 지난 주말에 두고 간 제 티셔츠와 반바지를 꺼내주면서 이걸로 갈아입고 여기서 자면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고개부터 저었다.
옷도 안 갈아입겠다, 앉지도 않겠다, 자지도 않겠다, 무조건 다 싫다고 하는 통에 섭호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이런 시골 근처에도 와봤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보자마자 사람 못 살 곳에라도 데려온 것처럼 불편한 티를 내니 섭섭함인지 화인지 모를 것도 치밀었다.
“난 무서운 걸 어떡하란 말이야. 이렇게 작고 캄캄한 방에서 어떻게 혼자 자?”
“그럼 불 켜고 주무십시오.”
“너무 환하면 잠이 안 와.”
섭호니까 꼬박꼬박 다 받아주는 거지, 만약 견이었다면 ‘야, 이 스머프 반바지만 한 기집애야’를 시작으로 온갖 막말을 서슴지 않았을 거라는 걸 금지도 잘 알았다.
제가 생각해도 억지고 민폐라는 건 알았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버님이 계신 집으로 데려와 주다니, 엄청나게 감격스럽긴 한데 생전 처음 보는 환경인지라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환한 낮에 데리고 왔다면 ‘여기가 위섭호 생가구나! 완전 감동이야!’ 어쩌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답사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머릿속까지 깜깜했다.
금지는 간신히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그, 그럼 일단 씻으면서 생각해 볼게. 욕실은 어디야? 씻고 싶어.”
크흠, 낮게 헛기침을 한 섭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따뜻한 물 안 나옵니다. 일단 옷만 갈아입고 쉬세요.”
“여기서 어떻게 혼자 자란 말이야아…….”
70년대부터 썼을 법한 오래된 가구 몇 개가 다인 방은 섭호 눈엔 정다워 보였지만, 금지의 눈에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바람이 불면 유리가 달각이는 나무 창틀도, 자주 여닫지 않아 뻑뻑한 소리가 나는 문도 그랬다.
“화장실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며?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저 부르십시오. 같이 가드릴…….”
제가 말해놓고도 아니다 싶어진 섭호가 제 입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금지가 차마 고함도 못 지르고 돌고래나 들을 법한 초음파 비명을 질렀다.
“어딜 같이 가준다는 건데! 미쳤냐고!”
“제 말은, 아주 멀리서 손전등이라도 비춰 드릴 수 있다는…….”
“안 돼! 오빠랑 그런 것부터 틀 수는 없어! 서울 갈 때까지 참을 거야!”
“가능하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저 뒤에 있는 산에서 귀신 나올 것 같아아……!”
섭호에게는 산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동네 뒷산이었으나 금지에겐 산그림자와 밤하늘이 합쳐진 어둠 자체가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진짜 어둠 속에서는 바람에 나무 흔들리는 소리조차도 무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풀벌레 소리며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조차도 공포영화 속 불길한 효과음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가 없는 섭호는 매정하기만 했다.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귀신 같은 게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말해줘야지!”
“제 눈에 안 보인다고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례로 공기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짜증 나! 철학이고 논리고 다 망했으면!”
이성적 판단은 다 날아가고 원초적인 본능만 남은 금지가 결국 참고 참으려던 말을 던져 버렸다.
“여기서 오빠도 같이 자면 안 돼?”
섭호가 눈이 커진 채로 더럭 굳었다. 목덜미에서부터 화끈 홍조가 올랐다.
“오빠도 여기서 자라고. 나 혼자서는 죽어도 못 자.”
이번만큼은 사심보다도 공포심에서 우러난 부탁이었으나 섭호가 그러자고 할 리 없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럼 문 바로 앞에서 자겠습니다.”
“마루에서 자겠다고? 모기나 벌레들한테 된통 뜯길 일 있어?”
“모기나 벌레 같은 거 절대 없습니다.”
“귀신은 부정할 수 없다면서 모기랑 벌레의 존재는 어쩜 그렇게 단호하게 부정해? 그럼 나도 오빠 보이게 문 열어놓고 잘 거야.”
“안 됩니다. 밤에는 아직 춥습니다.”
“이 동네 밤바람은 고향 사람한테는 안 분대? 내가 추우면 오빠도 추운 거지! 그러니까 빨리 오빠도 여기서 자라고!”
철푸덕 주저앉은 금지가 깔아놓은 이불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섭호는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 눌렀다.
‘이래서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거지…….’
지금 같이 자자고 꼬시는 여자가 금지가 아닌 처녀귀신이었다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왕소금 가져다 뿌렸을 텐데, 차마 금지에게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실랑이하다 아침 되겠다 싶어진 섭호는 고민 끝에 창고나 다름없는 옆방으로 통하는 쪽문을 열었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넘어갔다.
“그럼 이렇게 문 열어두고 제가 여기서 자겠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비밀 통로처럼 빠끔 열린 문을 한참 바라보던 금지가 중얼거렸다.
“문 닫아줘.”
“이것까지 싫다고 하시면 저도 방법이……!”
“옷 갈아입고 내가 다시 열게.”
“아아.”
바로 수긍한 섭호가 건너편에서 얼른 문을 닫았다.
금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섭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티셔츠는 원피스나 다름없었고, 바지는 허리를 세 번 접어도 여전히 컸다.
느릿느릿 제 옷을 개켜 놓고 쪽문을 열었더니,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벌써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섭호가 보였다.
금지는 입을 비죽하고는 무릎걸음으로 이부자리까지 되돌아가 누웠다. 차마 불을 끌 용기는 나지 않아서 그대로 켜두고 대신 이불로 눈을 덮었다.
‘……겨우 몇 걸음 너머에서 오빠가 자고 있다니.’
고작 반나절 전, 호텔로 가기 위해 마지못해 옷을 입고 화장을 할 때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떡해. 너무 떨려서 못 잘 것 같아!’
그러나 채 10분도 되지 않아 금지의 이불 속에서는 얕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면, 쪽문 너머의 뒤척이는 소리는 늦도록 가라앉지 못했다.
***
“언제 왔댜? 왔을 적에 깨우지 않구.”
“야밤에 깨워서 뭣 헌대유.”
“늦게꺼정 일이 있었으믄 집에서 쉬지, 뭣 헌다구 여까지 오고 그려.”
“말했잖유. 병원서 괜찮다고 헐 때꺼정 별일 없음 온다구유.”
비몽사몽간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있던 금지는 속으로 갸웃했다.
‘내가 자기 전에 TV를 틀어놨나? 근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왜 이렇게 낯이 익지?’
다음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잠깐, 내 방에는 TV가 없잖아!’
금지는 이불을 홱 걷고 일어나 앉았다.
순간 눈앞에 보이는 낯선 광경에 아직도 꿈인가 싶었다가, 소리를 지르기 직전에 정신이 돌아왔다.
‘맞다, 나 어제 섭호 오빠네 집에……!’
“인자 괜찮여. 무릎이고 허리고 움직일 만혀.”
“내다 팔 것두 아님서 쓰잘데기없이 이것저것 하시니께 몸이 축나는 거 아뉴.”
“시골 살믄서 뭔 재미가 있냐? 소일거리는 있어야 할 거 아녀.”
“이게 소일거리유? 소가 와두 못 해먹을 일거리지.”
‘잠깐, 그러면 저 걸쭉한 말들이 섭호 오빠 입에서 나오는 거라고?!’
충격에 입만 벙긋대던 금지가 급히 이부자리를 정리하고는 문에 바짝 귀를 붙였다.
“간밤에 뭘 잘못 처먹은 겨? 별안간 시비부터 걸구 지랄이여. 내가 너한티 딸딸이(경운기)를 사달라고 혔냐, 트랙타를 사달라고 혔냐? 요새 트럭이 언덕빼기에서 빌빌대긴 한다마는.”
“시방 뭐라 그랬슈? 못 들었슈.”
“귓구녕이 제비새끼 주둥이마냥 지 멋대로 열렸다가 닫혔다가 허는구먼. 도련님은 잘 계시냐? 요즘두 자주 아프구 그려? 어릴 적부터 영 몸이 시원찮아서는.”
“시원찮기는 개뿔. 요새 그 양반 팔자가 늘어졌슈.”
“말 나온 김에 복분자청 챙겨줄 테니께 갖다가 도련님허구 같이 먹구 그랴. 직접 딴 꿀도 있는디 회장님 갖다 드리구.”
“그렇잖아두 도련님두 걱정되신다구 다음 주에 오신다구 혔슈. 그때 직접 손에 들려주든가 해유.”
“그나저나 손님은 아직 안 일어나신 겨? 시장할 것인디.”
“지가 적당히 멕일 테니께 아부지는 가서 볼일 봐유.”
언제 나가는 게 좋을지 전전긍긍하던 금지는 그래도 아버님께 인사는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손으로 대강 매무새를 정리하고 문을 열었다.
살살 연다고 열었는데 엄청나게 큰 끼이익 소리가 나는 통에 마당에 서 있던 두 남자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바지가 흘러내릴세라 허리를 꼭 움켜쥔 금지가 마루 아래로 내려서며 허리부터 숙였다.
“미리 말씀도 못 드리고 갑작스럽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 어렸을 때 견이 오빠랑 같이 뵌 적 있는데, 혹시 기억나실지…….”
“금지 아가씨 아니십니까.”
성근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전형적인 촌부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오래전 희명그룹 수석 비서였던 때의 태도와 말투가 다시금 배어 나왔다.
“언제 이렇게 곱게 자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전혀 곱지 못한 패션과 자다 일어난 얼굴로 그런 말을 듣자니 민망해진 금지가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 오게 될 줄 모르고 나온 거라 빈손으로 왔어요. 너무 죄송합니다. 밥값은 할게요. 아무거나 시켜주세요.”
“밥값이라니요. 그냥 시골 할아버지 댁 놀러 왔다 생각하고 편히 쉬다 가시면 됩니다.”
인자하게 미소 짓는 성근을 보며 마주 웃은 금지가 망설이다 입을 뗐다.
“근데 저…… 좀 전에 안에서 다 들었어요. 저 때문에 굳이 서울말 쓰지 않으셔도 돼요.”
금지가 나올 때부터 초조해 보이던 섭호의 얼굴 가득 낭패의 기색이 스쳤다. 성근도 머쓱함에 코를 훌쩍였다.
“그냥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 존댓말도요! 제가 섭호 오빠보다도 어린걸요.”
부자의 눈이 마주쳤다. 성근이 먼저 내려놓았다.
“그려, 그럼.”
아부지는 편해서 좋겄슈, 하는 섭호의 눈길을 여상히 받아넘긴 성근은 마루에 놓아두었던 밀짚모자를 집어 들고 텃밭으로 향했다.
“건건이(반찬)는 별루 없지만은 밥부터 차려 먹구.”
“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둘만 남은 마당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섭호가 본채와 따로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욕실을 가리켰다.
“온수 나오게 해뒀으니까 밥 먹기 전에 씻고 싶으면 씻으시죠.”
“와아, 나 방금 오빠 2개 국어 하는 거 본 것 같아!”
섭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래서 옛날에 서울말 못 한다면서 내 앞에서 말 안 하고 그랬구나?”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숨죽여 웃은 금지가 걸핏하면 그러듯 대놓고 고백했다.
“매력 터진다, 정말! 어쩜 사투리도 그렇게 미친 듯이 귀엽고 터프하고 그래?”
다시금 귀를 닫아버린 섭호가 뭔가를 내밀었다.
“뭔데? 이거 설마…… 나 입으라고?”
화려한 플라워 프린트와 실크 뺨치는 촉감까지 갖춘 일바지, 일명 몸빼바지였다.
“옆집 할매…… 아니, 할머니 댁에서 빌려온 겁니다. 티는 몰라도 바지는 불편하실 것 같아서. 종일 그러고 다니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섭호가 아직도 허리춤을 쥐고 있는 손을 향해 턱짓을 했다. 금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일바지를 받아들었다.
“근데 오빠.”
“뭐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사투리로 한 번만 더 말해주면 안 돼? 계속 해주면 더 좋고.”
안색이 창백해진 섭호는 이제부터 묵언수행이라도 할 기세로 홱 돌아섰다.
밥을 먹고 나서 금지는 성근을 졸졸 따라다녔다. 텃밭에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막내딸처럼 재잘대나 싶더니, 감자밭 가는 길까지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성근이 1톤 트럭의 운전대를 잡고, 섭호와 금지는 짐을 싣는 화물칸에 탔다. 금지가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며 냉큼 올라탄 거였다.
이번에도 섭호의 경고를 무시한 죄로, 금지는 거친 시골길을 온 엉덩이로 느끼며 끙끙거렸다. 섭호는 웃음을 꾹 참고는 모른 척해주었다.
길이 워낙 좁아서 트럭은 뛰어가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다 논둑길 안쪽에 서 있던 동네 아저씨가 아는 척을 했고, 성근이 차를 세웠다.
“섭호 왔냐?”
“야.”
“너 희명그룹 다닌담서? 거기 엄청 바쁜 데 아녀?”
“주말이잖유. 지 하나 없다구 회사가 안 굴러가겄슈?”
“그건 그려. 참, 너 저그 경로당에 테레비 좀 봐주고 가지그려? 희명전자 것인디 갑자기 소리가 안 난다지 뭐여.”
운전석에서 성근의 고함이 튀어나왔다.
“야는 희명전자 다니는 것도 아니구 기술자도 아니라고 몇 번을 말혀∼”
“그래두 우리보담은 잘 알 거 아녀∼ 거 테레비 좀 봐주믄 아들 손구락이 닳아 없어지남?”
아버지와 아저씨가 싸우는 사이 섭호가 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조수석 근처를 뒤져 종이와 볼펜을 꺼낸 그는 스피커 모양 위에 대각선을 긋더니 동네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여기유.”
“이게 뭐여?”
“테레비 리모컨 잘 보믄 이렇게 생긴 게 있을 거유. 이거 한 번만 눌러 보구 그래도 안 되믄 전화하셔유. 읍내서 기술자 오게 불러 드릴 테니께. 괜시리 돌아가믄서 한 대씩 테레비 후려패지 마시구.”
“그려. 고마워. 이래서 동네에 젊은 사람이 있어야 되는디.”
종이를 주머니에 잘 넣은 아저씨가 금지에게 넌지시 턱짓을 했다.
“근디 저 처자는 누구여? 섭호 색시여?”
“어머.”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엉거주춤하고 있던 금지가 뺨을 발그스레하니 붉혔다.
섭호가 딱 잘랐다.
“아뉴. 일당 받구 감자 캐러 온 일꾼이유.”
“이이. 그렇구먼.”
영 못 믿게 생겼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하는 눈치다. 성근이 얼른 차를 출발시켰다.
“……감자 캐러 온 일꾼? 내가 일당을 얼마나 달라고 할 줄 알고?”
금지의 도끼눈을 외면한 섭호가 뒤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밀짚모자를 푹 씌웠다. 진작 씌워서 가렸어야 했다고 생각하면서.
“이게 뭐야! 바지만으로도 쇼킹한데 이것까지 쓰면 진짜 일꾼 같잖아!”
“선크림 바르셨습니까?”
“아악! 피부에 기미 생기는 소리!”
비명을 지른 금지가 벗으려고 움켜쥐었던 챙을 되레 꾹 눌러썼다.
트럭이 제법 넓은 감자밭 입구에서 멈춰 섰다. 먼저 내린 섭호가 망설이다 손을 내밀었고, 금지는 얼른 그 손을 잡았다.
트럭에서 폴짝 뛰어내린 후에도 자연스럽게 계속 잡고 있으려고 했으나 섭호는 매정하게 제 손을 빼고 호미를 쥐어주었다.
“감자 캐본 적 있으십니까?”
“있어 보여?”
내가 뭘 물어본 거지, 하는 표정을 한 섭호가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호미로 감자 안 찍게 조심하십시오. 그전에 손부터 조심하셔야 하고.”
“사투리로 말해주면 안 돼?”
참으로 끈질겼다. 안 해주면 서울 가서까지 쫓아다니며 조를 기세다.
결국 버티다 못한 섭호가 몸을 일으키며 툭 던졌다.
“그만 성가시럽게 굴고 싸게싸게 일이나 혀.”
깔깔거리는 금지의 웃음소리가 휑한 밭을 울렸다. 섭호도 웃고 말았다.
30분가량이 지난 후, 성근이 조용히 섭호를 불렀다.
“애비가 농사짓는 게 싫음 말로 혀.”
“뭔 소리래유?”
“사람꺼정 끌구 와서 밭을 작살내 버릴 것까진 없잖여?”
“…….”
저 멀리 쭈그리고 앉아 있는 금지 주위에 호미에 찍혀 나온 감자가 널려 있는 게 보였다. 저 정도면 가히 감자 연쇄살해범 수준이다.
“죽어라고 허는디 안 고마운 경우도 있구먼유.”
“어쩌려고 그러는 겨.”
처음엔 감자밭 어쩔 거냐는 줄 알았으나 다른 의미임을 곧 알아들었다.
“노블그룹이 워딘지 모르냐? 황 회장을 몰러?”
“…….”
“그게 언제냐, 전에 도련님이 지나가는 말루다가 저 아가씨가 너 좋다구 환장함서 쫓아다닌다구 혔을 때도 설마 했는디, 어쩌자구 여까지 데리구 와.”
“입이 닳도록 그러지 말라구 혀두 막무가내로 따라오는 걸 워쩐대유.”
섭호가 제 목덜미를 쓸었다.
“이래도 좋다고 할지 궁금해서 안 말렸슈.”
성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뭐든 겪어봐야 알지. 말로는 뭔들 못 햐.”
섭호는 아랫입술을 질근 씹었다.
지긋지긋할 만큼 오랫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뀐 마음이다.
금지가 제가 나고 자란 세상으로 돌아가 줬으면 하는 마음과 제 세상으로 온전히 넘어와 줬으면 하는 마음.
마음을 따라 태도도 바뀌었다. 때로는 미련했다가 수시로 잔인해졌다. 가지 말라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이래도 안 갈래, 하는 심보가 자꾸 돋았다.
그러다 만약 정말로 가버리면.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체념할 자신도 없으면서.
그녀와 같은 세상의 냄새를 풍기는 남자와 마주 앉아 인형처럼 웃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만나러 나오지조차 않은 그녀의 오빠가 똑똑히 보여주려던 광경이.
“오빠, 오빠!”
섭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들었다.
“이거 봐! 흠집 하나 안 내고 내가 캤어! 완전 대박 큰 거!”
밀짚모자에 가려진 얼굴보다 손에 든 감자가 더 크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제 앞의 그녀와 어제의 그녀가 너무 달라서 눈가가 아릿해졌다.
“나 잘했지!”
섭호는 잠잠히 입가를 늘였다.
“예. 지금처럼만 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