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고생시키려고 좋아한 거 아니니까
2017.12.03.
금지가 호미로 찍어낸 감자와 옆집 할머니가 텔레비전 고쳐 줘서 고맙다고 보내준 음식들로 이른 저녁을 먹은 후, 상근은 아랫집 가서 화투나 치고 오겠다며 내려갔다.
섭호가 너무 늦기 전에 갈 거니까 금방 오시라고 했으나 어둑해지도록 소식이 없었다.
“또 십 원짜리 치다가 싸움 났나 보구만.”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마루에 앉아 있던 섭호가 투덜거렸다.
때마침 금지도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녀는 종일 천방지축으로 잘 입고 다녔던 섭호의 티셔츠와 옆집 할머니의 바지를 잘 개켜 내밀고는 옆에 앉았다.
“갑자기 무리해서 병이라도 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 보기보다 건강해. 애도 열두 명까지 낳을 수 있을걸?”
섭호는 한숨 대신 먼 산을 보았다. 금지는 그 옆모습을 보며 헤헤 웃었다.
마루를 짚은 손이 손가락을 살짝만 까닥해도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간절히 닿고 싶으면서도 혹여나 닿을까 꼼짝도 하지 못했다.
“먼 데 가서 자고 올 거라던 게, 가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던 게 시골집에서 자고 감자 캐는 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네.”
“…….”
“그럼 뭘 상상한 거냐고 물어봐 줘야지.”
“안 궁금합니다.”
“하긴 그러네. 말 안 해도 다 알 텐데 뭐가 궁금하겠어. 일부러 그런 상상하고 겁먹고 도망가라고 말한 거잖아. 그치?”
금지는 마루 아래로 내린 다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오빠도 나중에 나이 들면 여기서 살 거야?”
“글쎄요. 서울에선 안 살 것 같습니다.”
“그래? 난 백화점도 있고 커피숍도 있고 클럽도 있는 서울이 좋은데.”
섭호는 안 겪어보고 말로는 뭔들 못 하냐던 성근의 말을 떠올렸다. 역시 겪어보고 눈으로 보니 무턱대고 따라올 데가 아니라는 걸 알았나 보다 싶다.
금지는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한 양 보란 듯이 못을 박았다.
“근데 오빠가 더 좋아.”
그는 늘 제 마음을 얕은 도랑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부터 얼마나 컸는지, 지금은 얼마나 더 깊어졌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섭호의 등을 떠밀어서라도 제 마음 안에 풍덩 빠뜨려 버리고 싶었다. 발도 안 닿는 까마득한 데서 허우적거려 봐야 정신을 차리지.
마루를 짚었던 손을 뗀 섭호가 아버지의 부채를 들어 허공을 휘휘 부쳤다.
“있잖아, 오빠.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
“들어보고 나서 대답하겠습니다.”
“어려운 거 아닌데. 돈 드는 것도 아니야.”
“남한테는 안 어려워도 저한테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돈이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옛날처럼 금지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금지 주변으로 날아드는 날벌레들을 쫓아주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아가씨라고 하지 마. 지금 여기서만이라도.”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은 침묵이 둘 사이를 떠돌았다.
금지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리려 애썼다.
해는 이미 산 뒤로 숨어 어스름했다. 검기울어 가는 하늘에 옅은 흔적처럼 보이던 달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간밤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하나하나 다 무섭고 낯설기만 하던 시골 풍경과 소리에도 그새 친숙해졌다. 떠나기가 아쉬울 만큼.
그 순간, 아주 작고 반짝이는 것이 금지의 눈앞으로 휙 날아갔다.
“오빠! 방금 그거 봤어? 설마 말로만 듣던 반딧불…….”
“금지야.”
모든 것이 멈췄다.
심장만 고요히, 바닥을 모를 마음 안으로 내려앉았다.
어떤 얼굴로 제 이름을 불러주었는지 보고 싶었지만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섭호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다는 표정으로 저를 볼까 봐.
방금 들은 소리는 간절한 바람이 불러일으킨 환청이었을까 봐.
그러나 더욱 또렷해진 섭호의 목소리가 울렸다.
“집에서 다른 남자 만나라고 하면 만나십시오.”
금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었던 건지 모를 눈과 마주쳤다.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날카로워진 금지의 눈빛이 그렇게 다그쳤다. 담담히 받아내는 시선에서 잘못 듣지 않았음을 확신한 금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람 마음 다 알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섭호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에 금지가 먼저 화를 터뜨렸다.
“내가 우습지? 오빠밖에 모르는 거 아니까 만만하지? 근데 이제까지 흔들리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란 법은 없어. 내가 지금처럼 화가 났을 때, 지쳤을 때, 그래서 틈이 생겼을 때, 누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지금은 울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먼저 다그치면서, 금지는 참았던 말들을 쏟아냈다.
“오빠가 그냥 좋아졌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거짓말처럼 좋아질 수도 있는 거라고! 나 말고 타이밍에 배신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대체 뭘 믿고 다른 남자 만나라는 말을……!”
“잠깐만.”
섭호가 금지의 손을 꽉 잡았다. 금지가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머뭇거리다가 난처한 얼굴로 덧붙인다.
“그래야 방심하시니까.”
“방심이라니. 누가…….”
금지는 제 아버지와 오빠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티를 냈으니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기를 쓰고 집안 좋은 남자들을 죄다 불러다 붙이는 것도 알았다.
직접적으로 손을 쓰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놓고 섭호의 이름을 거론한 적은 없지만, 작은오빠가 애초에 그렇게까지 나설 수준조차 못 되는 놈이라고 하는 걸 얼핏 들었기에.
화도 나고 걱정도 되어 견에게 넌지시 물은 적도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안 맞는 오빠지만, 그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코가 찡해질 만큼 든든한 대답을 해주었다.
내 빽이 섭호 빽인데 누가 겁도 없이 걔를 건드리느냐고.
되레 저한테까지 화를 냈더랬다.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을 때의 각오쯤 되는 거 아니면 괜히 섭호 건드리지 말라고.
그런 걸 떠나서 섭호부터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줄 알았다.
동네 아저씨에게 일꾼이라 소개했던 것처럼, 제 가족들이 뭐라 한다 해도 ‘아가씨 마음이지 제 마음은 아닙니다’ 하면서 딱 잘라 버릴 것만 같았었다.
그랬는데.
그동안 혼자서 대체 무슨 일들을 겪고,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걸까.
“저도 압니다. 딱히 해준 것도 없고 당분간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 흔들려도 할 말 없고 말할 자격도 없다는 거. 하지만 어설프게 잡았다가 놓치면 다신 못 잡을 것 같아서…….”
지금 내 손 잡고 있다는 건 아는 건가?
드물게 뒤죽박죽한 섭호의 말들을 멍하니 듣다가, 금지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금지가 제 손을 잡은 섭호의 손 위에 다른 손을 겹쳤다.
“말 고르지 말고 말해봐.”
역시나 무의식적으로 잡은 것인지 이제야 움찔한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미리 따져 가면서 거르지 말고 그냥 말해보라고.”
그와는 달리 단 한 번도 고르고 거른 적 없던 눈동자로 매달렸다.
“제발, 딱 한 번만.”
내가 더 이상 지치지 않게, 누굴 만나도 손톱만큼의 틈도 생기지 않게, 그렇게.
섭호의 입술이 잘게 떨리나 싶더니 낮게 열렸다.
“……이대로 데리고 도망쳐 버렸으면 좋겠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지만 안 했습니다. 고생시키려고 좋아한 거 아니니까.”
이토록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나 뜨거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마음이 얕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한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빠가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놨어.”
말로 안 한 건 알아도 모른다고 하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오라는 것도 아니고, 믿는 구석이 뭔지도 안 알려주면서 무작정 기다리라니. 엉망진창으로 무책임한데 고작 이 말이 뭐라고 이렇게, 기뻐…….”
결국 눈물이 뚝 떨어졌다. 금지는 제 손으로 얼른 닦아내고 소리를 질렀다.
“나한테 이렇게 대놓고 어장 치는 남자는 처음이야!”
“뭐가 많이 있어야 어장인 거 아닙니까?”
섭호가 금지의 뺨 쪽으로 올렸던 손을 내렸다.
“딱 하나 있는 건 어장이라고 안 합니다.”
금지의 입에서 오빠아,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도 모자라 섭호를 덥석 끌어안았다.
“떨어지십시오.”
“먼저 손 내미는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내가 만든 분위기에 초만 치지 말아줄래?”
“지금 안 떨어지면 무슨 일이 있을지 저도 모릅니다.”
“이제 안 속거든? 어제도 그래 놓고 이렇게 좋은 데로 데려와 줬으면서. 왜? 이번엔 무슨 일이 있을 건데? 옥수수라도 따라고 시킬 거…….”
섭호의 목에 매달려 투덜대던 금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저를 감은 팔을 부드럽게 풀어낸 섭호가 몸을 기울여 입술을 겹쳐 오는 바람에.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시간에 떠밀리고 적당히 멀어져 편한 길로 가면서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는데, 아직도 그러지 못하고 처음 만난 순간에 머물러 있는 소년과 소녀가.
눈물이 날 만큼 달콤하게 맞물린 살갗 아래로 기억들이 지나갔다.
잊고 있던 사이 나무처럼 훌쩍 자라서 나타난 소년.
첫눈처럼 하얀 뺨을 적시며 좋아한다 말하던 소녀.
오빠가 나라 지키러 가는데 나는 나라를 잃은 것 같다며 눈이 붓도록 울던 여자는, 그가 제대하는 날까지 재잘대는 목소리를 꾹꾹 눌러 담은 편지들을 보내주었다.
혼자 타지에서 공부하던 여자가 향수병에 걸려 힘들어할 때, 여행 중에 잠깐 들렀을 뿐이라며 먼 나라까지 날아온 남자의 배낭엔 그녀가 좋아하는 한국 간식들만 가득 들어 있었다.
입 밖으로 낸 적 없을 뿐, 이미 서로에게 오랜 연인이었다.
다른 누구를 상상할 수도, 대신할 수도 없는.
***
“섭호야.”
견이 넌지시 불렀다. 그러나 섭호는 듣지 못한 듯했다.
“너 정말 그거 거기다 매고 회사 가도 괜찮겠어?”
“예?”
분명 목에 매려고 꺼냈던 타이를 시계 대신 손목에 두르고 있었음을 깨달은 섭호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타이를 목에 거는 섭호를 지켜보던 견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어젯밤에 좋은 거라도 본 거야?”
“보긴 뭘 본대유. 시골서 한밤중에 와가지구 자기도 바빴구먼.”
“그러게 다른 때는 일요일 저녁 전에 오더니 어젠 왜 그렇게 늦었어? 일이 그렇게 많았어?”
금지 때문에 늦은 거고 밤새 잠을 설쳤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견은 어물대는 섭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많이 힘들긴 하겠다. 평일엔 출근하고 주말엔 농사짓고.”
“얼마 안 남았슈. 얼른 아침부터 드셔유.”
넥타이를 바로 맨 섭호가 식탁에 올려놓은 접시를 가리켰다. 셔츠 소매 단추를 잠그고 단정하게 시계를 찬 견이 토스트 조각을 입에 물었다.
“참, 그때 말씀하신 자료 뽑아뒀는디 지금 드릴까유?”
“그래.”
섭호가 얇은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블랑아이 앞으로 나온 법인카드와 관련된 회계 자료였다.
견은 의자에 앉지도 않고 한 팔로 식탁 모서리를 짚은 채 서류를 찬찬히 넘겨보았다.
“서류상으로 보기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네.”
“그렇긴 합니다. 접대비가 정말 접대하는 데 쓰였고 첨부한 영수증이 죄다 진짜인지는 어둠의 경로로 확인해 봐야 될 것 같고요.”
“어둠의 경로 좋지.”
힐끗 눈을 든 견이 눈썹을 까닥했다. 섭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쪽 담당자가 누구지? 우일두 차장인가?”
“예. 본사 재무팀에 있다가 대표가 바뀔 때 블랑아이로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견은 잠자코 입안에 든 빵을 씹었다.
그날 오전, 견과 은규를 포함한 블랑아이 직원들 몇몇은 옥상 휴게실로 향했다.
분위기 봐서 우일두 차장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직원들 사이에서 먼저 말이 나왔다.
“참, 오늘 우 차장님 입고 오신 셔츠 보셨어요?”
“저 봤어요! 그 나이에 그런 색 소화하기 쉽지 않은데.”
“김 차장님하고 너무 다르지 않아요?”
“입사 동기에 나이도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 걸로 아는데 얼굴만 보면 상사랑 부하 같아.”
우일두 차장은 김광남과 같은 또래라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동안에 패션 센스도 젊은 직원들 못지않았다. 열심히 관리하고 있음이 배어나는 훈훈한 꽃중년이다.
“근데 같이 다니시는 거 보면 신기해요. 성격도 다르시잖아요.”
“두 분 다 기러기 아빠여서 밤마다 같이 술 드시다가 친해지셨다던데.”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우 차장에 대한 평가가 훨씬 좋았다. 서글서글하고 개방적이라 꼰대와는 거리가 멀었고, 능력도 있어 부하직원들의 신임도 두터운 편이라고 했다.
“김 차장님 식구들은 얼마 전에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셨다고 하지 않았어?”
“나도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맞아, 김 차장님 따님 유학 갔다 들어와서 외국계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잖아.”
“맞다, 그랬었지. 근데 왜 아직도 홀아비 같아 보이나 몰라.”
“그건 그냥 태가 안 나서 그러는 거야. 김 차장님 옷이며 구두 같은 것도 자세히 보면 비싼 거라니까. 얼마 전에 차도 바꾸셨던데?”
“정말?”
처음엔 견 앞에서 어떤 얘기도 편히 못 하던 직원들이었으나, 지금은 수시로 그가 회장 손주라는 걸 잊고 곧잘 이런저런 말들을 하곤 했다.
견은 과하게 맞장구를 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발을 빼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대화에 끼었다.
동시에 습관적으로 직원들의 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별거 아닌 수다 같아도 언제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그만 내려갈까요?”
“그래요.”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옥상 문이 열렸다.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가 넘어왔다.
“어린이집 애들 산책 나왔나 봐요.”
둘씩 손을 잡고 나란히 들어오는 아이들을 본 직원들이 귀엽다며 꺅꺅거렸다.
견은 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애들도 반갑고 모단은 더 반가워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은규와 견, 그리고 회의 때 본 다른 직원을 발견한 모단이 먼저 눈인사를 했다. 견도 자연스럽게 받았다.
“아빠아!”
은규를 발견한 해빛이가 폴짝대며 아는 척을 했다. 사내어린이집이다 보니 가끔 이렇게 근무 중인 부모님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동후의 손을 놓은 해빛이가 도도도 뛰어왔다. 쭈그리고 앉은 은규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는데, 그 옆을 매정하게 지나친 해빛이 뒤에 서 있던 견의 다리를 꼭 끌어안고 매달렸다.
“삼촌!”
견은 물론, 버림받은 은규와 저 멀리서 보고 있던 모단까지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순간 눈앞이 새하얘진 견이 어정쩡하게 손을 뻗는데, 은규가 먼저 다가와 해빛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미안해요, 백견 씨. 내 딸이 누굴 닮았는지 벌써부터 얼굴을 밝혀가지고. 박해빛! 잘생기면 다 오빠고 삼촌인 거 아니라고 했지?”
당황했던 직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이란 워낙 엉뚱한 데다, 지금 어쩔 줄 몰라 하는 견의 태도는 누가 봐도 모르는 아이가 갑자기 안겨서 놀란 것처럼 보여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해빛아, 마음대로 뛰어가면 어떡해. 선생님한테 오세요.”
얼른 다가온 모단이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강조해 가며 손을 뻗었다. 은규도 해빛이를 내려놓고 슬쩍 등을 밀며 보탰다.
“죄송해요, 선생님.”
“괜찮습니다, 해빛이 아버님.”
그때였다. 모단을 따라왔던 초은이가 불쑥 외쳤다.
“생각났다! 왕자님!”
초은이의 손가락이 정확히 견을 가리키는 통에 모두의 시선이 또 쏠렸다.
“옛날에 옥상에서 봤어요! 키 큰 오빠하고 같이 있는 거!”
“아아.”
‘오빠’ 소리를 듣자 그제야 기억이 났다. 전에 섭호와 함께 있을 때, 잘생기면 다 오빠라며 오빠는 누구냐고 묻던 게.
견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맞다. 그랬었지. 왕자님은 아니지만 인사해 줘서 고마워.”
초은이의 눈에 하트가 차올랐다. 몇몇 여직원도 덩달아 황홀한 눈을 했다.
“선생님!”
시선은 견에게 고정한 채로, 초은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 왕자님이랑 결혼해도 돼요?”
“으응?”
모단을 포함한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7세들의 만행은 끝이 없었다.
“이초은! 너 왕자님 아니야! 내 삼촌이야!”
해빛이가 빼액 하자, 초은이도 빼애액 했다.
“왕자님이가 왜 너 삼촌이야? 아니야!”
“아니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맞아 하는 거 아니야!”
“아니라고! 우리 이모랑 결혼할 거란 말이야!”
그 이모가 이 이모라며 가리키기 직전, 다급해진 모단이 황급히 끼어들어 말을 막았다.
“해빛아, 초은아. 여기서 싸우면 어른들이 놀라시잖아. 얼른 놀이터로 가자. 죄송합니다.”
남몰래 아빠의 눈총을 받은 해빛이는 그제야 어린이집에선 모단을 이모라 부르면 안 된다 했던 걸 깨닫고 풀이 죽었다. 초은이는 분해서 눈물이 글썽했다.
맘에 걸린 견이 초은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초은이가 결혼할 수 있을 만큼 컸을 땐 삼촌은 왕자님이 아니라 아저씨가 되어 있을 거야. 그땐 더 멋진 왕자님이 나타날 거니까 속상해하지 말고.”
뒤이어 해빛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삼촌이 이모랑 결혼할 거는 맞는데, 초은이가 들으면 속상할 것 같으니까 비밀로 하자. 알았지?”
얼굴이 환해진 해빛이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내려가야겠습니다.”
눈인사를 남긴 견과 해빛이를 한 번 더 안아준 은규,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옥상을 내려갔다.
모단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놀이터로 향했다.
언제 싸웠냐는 듯 초은이와 신나게 놀던 해빛이가 갑자기 뛰어왔다.
그러고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모단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이모, 아니, 선생님. 그래서 삼촌하고 언제 결혼할 건데?”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모단은 차라리 빨리 이모부로 만들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심장 쫄려서 살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