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64화 (64/86)

#64.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요

2017.12.10.

손을 털고 일어선 모단은 얼른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쑥스러워서 그에게 말은 못 하겠지만, 솔직히 주말 내내 많이 보고 싶었다.

“휴게소라더니 어떻게 벌써 왔…….”

모단은 대문을 반쯤 연 그대로 멈췄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견이 아니었다.

“……모단아.”

민철이었다.

이 남자가 왜 지금 여기 서 있는 건지.

너무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모단아.”

한 걸음 다가선 민철이 처음보다 조금 더 또렷하게 불렀다.

분명 아는 사람인데, 한때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이 제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생경했다.

그만큼이나 익숙해졌나 보다.

이 목소리 말고, 장난기가 배어 있는 낮은 목소리로 불러주는 제 이름에.

“내가 여기 올 자격 없는 거 아는데, 할 말이 있어서.”

똑똑히 발음하려 애쓰는 것 같긴 한데 자꾸 풀어지는 말투에서 술기운이 확 전해졌다.

모단은 대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잠깐만!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눈을 마주한 순간, 모단은 멈칫했다.

‘나, 이 정도로 정 없는 인간이었나?’

그래도 제법 오래 만났으니, 흔들릴 건 없다 쳐도 인간적인 연민쯤은 느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든 게 아니라, 그런 생각만.

그러나 이어진 말을 듣자마자 그조차도 먼지처럼 날아갔다.

“차라리 평생 마주치지 말걸. 그때 잠깐 보고 나니까 더 보고 싶어져서…….”

그때 그 상황을 두고 이토록 아련한 결론을 냈다는 게 황당할 따름이었다.

평생 마주치지 말걸 그랬다는 데까지는 동의하는데, 저는 그때 지협이 옆에 없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싶기만 했다.

저 혼자였더라면 그 여자가 그렇게나 금방 입을 닫지도 않았을 거고, 지협이 있었거나 없었거나 이 남자는 눈곱만치도 도움이 안 됐을 게 뻔하니까.

역시 말도 섞지 말고 문을 닫아버리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을 때였다.

“나 더 이상은 그 여자하고 못 살 것 같아.”

모단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이혼하려고.”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말이 목까지 치밀었다.

“너는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으면서 대체 왜 그 여자에겐……. 내가 어떻게 됐었나 봐. 정말로 나 때문에 흔들려서, 그래서 엄청나게 틀어진 줄 알았어. 근데 그 여자한테는 흔들리고 자시고 할 마음 같은 거 애초부터 없었더라고. 나는 그냥 핑계고 도구였어.”

기분이 초스피드로 더러워졌다.

모단은 험한 단어들이 심의도 거치지 않고 튀어나올세라 입안의 살을 세게 씹었다.

헤어지던 순간에도, 심지어 몇 달도 안 돼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그가 한심해 보이진 않았었다.

‘전 여친한테 부인 욕하러 온 놈이라니, 제정신이야? 원래 이런 놈은 아니었다고 믿고 싶다. 그래야 이 인간 좋다고 했던 과거의 나를 조금이나마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모단이 몸을 돌리려는데 민철이 절박한 얼굴로 다가들었다.

“너는 나처럼 되면 안 돼, 모단아.”

그러더니 모단의 팔을 붙잡았다.

“백지협이란 남자, 제약회사가 필요해서 여은이랑 결혼하려던 남자야.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하고는 다르다고.”

“이거 놔.”

“근데 왜 갑자기 너를 만나는 걸까?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었어?”

“놓으라고 했어.”

“그 사람이 먼저 너한테 접근한 건 맞지? 설마 네가 말도 안 되는 유치한 복수심 같은 걸로 일부러 희명그룹에 들어간 건 아니겠지? 우연히, 아니, 그러니까 너는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거겠지?”

숨을 몰아쉬며 눈을 치떴다 내린 모단이 사납게 돌아보았다.

찰나의 유치함이 이만큼이나 거대한 망상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

“희명그룹 여직원이 몇 명인지는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야?”

있는 힘껏 민철의 팔을 뿌리친 모단이 냅다 쏘아붙였다.

“몇백 명 중에 한 명, 그것도 같은 팀도 아니고 퇴근 전엔 어린이집 안에만 있는 사람이 그룹 후계자이자 이사를 만나서 서로 호감을 갖게 되는 일이 그렇게 쉽고 흔할 거라고 생각해? 유치한 복수심? 일부러 접근?”

그러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때려치우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민철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거야, 지금?”

“……뭐라고?”

손여은이란 여자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갑갑함이 가슴을 쳤다.

제 말만 하고 대화가 안 된다. 안 맞아서 이혼한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닮아 있지 않은가!

“그런 착각을 하지 말라는 거잖아! 운명도 우연도 아니라고! 그 자식이 일부러 너한테 접근한 거란 말이야! 그런 사람들한테는 누구 뒷조사쯤은 일도 아닐 테니까! 손여은이 자꾸 신경을 건드리니까 너를 이용해서……!”

“그럼 이사님 신경을 못 건드리게 그 여자를 말리지 그랬어. 지금 나한테 와서 이러는 것처럼.”

화가 치밀어 이마가 지끈거렸다.

견이 곧 올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초조해졌다. 싸우건 어쨌건 같이 있는 모습 같은 거 보이고 싶지 않았다.

“모단아.”

“내 이름 부르지 마. 부인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다 가진 사람이 왜 이러는 건데? 죽을 때까지 서로 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도 모자랄 판에 이제 와서 이딴 식으로 들러붙는 거 창피하지도 않아?”

“들러붙어……?”

안경 속 민철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진심으로 저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더 소름이 끼쳤다.

“그래,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어. 너만 정신 차린다면. 아무리 이젠 남이라지만 내 눈앞에서 네 인생 망가지는 걸 어떻게 그냥 보겠어? 그 사람, 너 갖고 놀다가 결국엔 더 좋은 집안하고 결혼할 거라고!”

듣고 있자니 지협에게까지 미안해졌다. 다 아니니까 제발 미친 오지랖 접고 꺼지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나 그랬다가 또 다른 오해와 망상을 펼칠까 봐 해명하기도 망설여졌다.

“가지고 놀건 말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참견을…….”

“너는 어차피 애도 못 낳잖아.”

“……뭐?”

주먹으로 맞았어도 이보다는 덜 충격적이었을 것 같았다.

말실수했다는 표정이라도 지을 줄 알았는데, 민철은 태연해 보였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 듣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토록 생각 없이 내뱉을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면서.

“몰랐어? 원래 재벌가에선 자식이 많을수록 유리한 거. 있는 재산 나눠 먹고 물려주려면…….”

쫘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민철의 말이 끊기고 고개가 홱 돌아갔다.

모단이 뺨을 후려친 거였다. 서로 합 맞추고 속 시원한 그림이 나오게끔 때리는 드라마 속 따귀가 아니라, 어설프게 빗맞아서 더 아픈 현실 따귀다.

“미쳤어?”

“미쳤구나?”

맞은 사람과 때린 사람, 둘 다에게서 미쳤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민철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화끈대는 얼굴을 감쌌다. 모단은 그의 뺨 못지않게 빨개진 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부터 팔, 어깨까지 덜덜 떨렸다.

“취하면 아무한테나 가서 아무 말이나 지껄여도 돼? 범죄를 저질러도 술 때문이라고 기억 안 난다고 하면 되레 봐주는 미친 세상이니까 이 정도 개소리는 그냥 넘어가 줄 것 같았어?”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아서 정강이까지 걷어찼다. 민철이 억, 하고 비명을 삼켰다.

이성을 잃은 모단은 닥치는 대로 손을 휘둘렀다. 통증을 못 이겨 쭈그리고 앉은 민철의 등이며 어깨에서 퍽퍽 소리가 났다.

“억울하면 경찰에 신고해! 본인 정신도 못 챙기는 주제에 다른 사람보고 정신 차리라고 하다가 정신 번쩍 나게 맞았다고.”

“자, 잠깐, 모단아!”

당황해서 맞고만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킨 민철이 그녀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모단이 먼저 돌아서더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문을 닫아버리나 했는데 금방 다시 나왔다.

그녀의 손에 마당 쓰는 빗자루가 거꾸로 들려 있는 것을 본 민철이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경찰에 잡혀가기 전에 술 마시면 되겠다. 그치? 두개골 안에 뇌가 아니라 소주뚜껑이 들어찬 것 같아서 확인해 보려고 뚝배기 깼다고 횡설수설하면 심신이 미약해 보일 거야.”

“그게 무슨, 그만, 야!”

빗자루도 빗자루지만, 이성을 잃고 뒤집힌 눈을 보자 덩치 차이고 힘 차이고 다 잊고 진심으로 겁이 났다.

모단이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헤어진 후에 비겁하게 후벼 파라고 내 아픈 데 말해준 거 아니었어.”

그제야 민철도 얼마간 술도 깨고 정신도 차린 눈을 했다.

“모단아…….”

“그래, 나 애 못 낳는다. 그래서 애 키우는 데 들일 돈 깽값으로 쓰고 죽을 거다.”

그때였다.

“모단 씨!”

다급한 외침과 함께 훤칠한 그림자가 뛰어들었다. 옷도 시커먼 데다 더 시커먼 모자까지 눌러쓰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저를 다짜고짜 안는 품에서 훅 끼쳐 오는 체향으로 견임을 알아챈 모단의 눈에 더럭 초점이 돌아왔다.

“모단 씨, 괜찮아요?”

빗자루를 뺏어 던진 견이 호들갑스럽게 모단의 손을 감싸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잘못 때리면 때리는 사람 손이 더 아픈 법인데. 안 아파요? 괜찮아요? 아, 손 빨개졌잖아!”

빗자루로 쥐어터질 뻔한 남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견은 오로지 모단의 손만 감싸고 호호 불어주었다.

민철이 버럭 외쳤다.

“너…… 너 누구야!”

견이 고개를 돌렸다. 모자챙이 만든 그늘에 가려 입술과 턱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왜 반말이야.”

목소리며 말투에서 전해지는 온도 차가 엄청났다. 조금 전 모단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눈치 없어서 걸핏하면 맞을 상이네. 딱 보면 몰라? 애인이잖아.”

눈도 안 보이는데 오싹했다. 언성 한 번 높이지 않는데도 본능적인 위압감에 짓눌렸다.

민철은 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얼굴이 안 보인다 해도 확실히 백지협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앞으로 이렇게 험한 일은 나 시켜요. 직접 하지 말고.”

애지중지 보듬고 있던 모단의 어깨를 놓은 견이 허리를 굽혀 아까 팽개친 빗자루를 주워 들었다.

“내 차에 더 좋은 거 있는데. 지금은 아쉬운 대로…….”

견이 서슴없이 민철 쪽으로 향했다. 장신의 남자 손에 제대로 각 잡혀 쥐어진 빗자루는 웬만한 무기 뺨치는 살기를 내뿜었다.

“치료비는 당신 직장으로 직접 찾아가서 줄게. 사람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 인생이 어디까지 꼬일 수 있는지도 알려줄 겸.”

몇 걸음 뗀 것 같지도 않은데 순식간에 코앞이었다.

“물론 멀쩡하게 출근을 할 수 있을 때의 얘기겠지만.”

긴 팔이, 그보다 더 긴 막대기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홱 올라갔다.

민철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거기까지가 다였다.

모단마저 숨을 삼킬 만큼 위협적으로 올라갔던 그림자가 차분히 내려갔다.

“이번까지만 말로 합니다, 김민철 씨.”

그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 순간, 민철은 그나마 남아 있던 술기운도 완전히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누구…… 너 누군데! 어떻게 날 알아?”

“어떻게 알았는지보다.”

그늘 아래 입꼬리가 슬며시 휘어졌다.

“왜 알아뒀는지가 더 중요할 것 같지 않아요?”

민철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누군지 몰라도 백지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놈은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이번까지만 말로 하겠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민철은 조금 전 모단에게 내 눈앞에서 네 인생 망가지는 걸 어떻게 그냥 보겠느냐고 했던 게 무색할 만큼 허겁지겁 자리를 피해 버렸다.

“모단 씨.”

견이 얼른 다가왔다. 여전히 한 손에 빗자루를 들고 있음에도 조금 전처럼 흉흉하기는커녕 어딘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일단 들어가요.”

견은 모단의 어깨를 감싸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굳게 문을 닫은 후에 빗자루를 대강 세워놓고 무릎을 굽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요?”

모단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견이 잡고 있던 손을 당겨 모단을 안았다. 치미는 살심도 다스릴 겸 조곤조곤 다독였다.

“나 같아도 모단 씨랑 헤어지면 목숨 걸고 매달릴 것 같긴 해요. 구질구질하건 어쨌건 다시 잡고 싶어서 별 짓을 다할 것 같고.”

품 안의 모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근데 다른 놈이 진짜로 별 짓을 다하는 꼴은 못 보지.”

얼마간 더 등을 쓸어준 견이 안았던 팔을 풀고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왜 아무한테나 문을 열어주고 그…….”

투정 반 걱정 반으로 내뱉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굳었다.

마주한 모단의 눈에서 거짓말처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 거였다.

“어어! 아니, 나는! 뭐라고 하려던 게 아니라. 나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걱정이 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견의 목소리를 들으며 모단은 울음을 그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한 번 터진 눈물은 제멋대로 자꾸 쏟아졌다.

내 사람, 믿는 구석을 마주하자 긴장도 서러움도 다 풀어지면서 억눌렀던 것들이 북받쳤다.

갖고 놀다가 결국엔 더 좋은 집안하고 결혼할 거라던 말.

재벌가에서는 무조건 많이 낳는 게 유리한데 너는 애 못 낳지 않느냐는 말.

그따위 말들에 보란 듯이 상처받은 스스로가 한심해서, 짜증 나서, 감정이 요동쳤다.

“울지 마요, 모단 씨.”

견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심상찮은 기색이 배었다.

“설마 나 오기 전에 무슨 일이 더 있었던 건 아니죠? 내가 들은 것보다 더 심한 말 했어요? 괜히 그냥 보낸 건가?”

지금이라도 다시 쫓아갈 기세다. 견의 팔을 붙잡은 모단이 고개를 저었다.

“……손 아파서요.”

“응?”

“나 태어나서 남의 뺨 처음 때려봤는데…… 처음이라 제대로 못 때린 게 너무 화나요……!”

눈물범벅에 빨개진 코를 내려다보던 견은 뒤통수를 타고 열이 오르는 동시에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묘한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지금 오지 말지…… 미안해요, 정말. 근데 지금 와줘서 고맙고, 흑…….”

코 훌쩍대는 소리를 참아보려 애쓰던 모단이 더 크게 컹 소리를 내고는 딸꾹질까지 터뜨렸다.

“미치겠다…… 내가 정말.”

두 손으로 모단의 뺨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준 견이 다시금 그녀를 안았다.

울린 놈 죽여 버리겠다는 말과 우는 거 귀여워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이 한 번에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하고는 헤어질 생각 하지 마요. 피구왕 통키한테 레슨 받고 와서 불꽃슛으로 따귀를 때려도 안 떨어질 거고, 빗자루 아니라 쇠파이프를 든다고 해도 질척거릴 거니까.”

품 안에서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소리가 새었다.

“울다가 웃지 말랬는데. 흉한 일 생긴다고.”

어깨를 뒤튼 모단이 견의 등을 툭 쳤다. 견은 소리 없이 웃고는 팔을 풀었다.

“기억할 가치도 없는 놈한테 들은 말 같은 거 다 잊어버려요. 어차피 다신 모단 씨 눈앞에 못 나타날 테니까.”

견이 모단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눈을 맞췄다.

“나 믿죠?”

그러고는 더없이 진지하게 속삭였다.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요.”

“물도 아니고 피…….”

결국 모단이 울던 얼굴로 웃었다.

견은 수만 가지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정말 조용히 못 가겠는데.’

“모단 씨.”

모단이 그새 부은 눈을 들어 견을 보았다.

“오늘 어머님 안 계신다고 했죠? 그럼 혼자 자는 거예요?”

“그렇긴 한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네?”

“마음이 안 놓여요. 방금 전에 그런 사달이 난 걸 보고 나니 그냥 갈 수가 있어야지.”

견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머님께 인사 한 번 제대로 못 드렸는데 안 계실 때 살금살금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굳은 눈매로 뭔가를 생각하던 견이 대문 쪽을 향해 까닥 턱짓을 했다.

“우리 집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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