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65화 (65/86)

#65. 그 사진은 뭐예요?

2017.12.13.

“우리 집으로 가요.”

견이 덤덤히 말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거기서 출근해요. 그게 안전하겠어요.”

모단은 어느샌가 깨물고 있던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혹시 그 인간이 또 올까? 아니지, 그렇게 간 큰 놈은 못 돼. 아니야! 술 먹고 찾아와서 진상부릴 놈도 아니라고 생각했었잖아? 간이 크지 않으니까 혼자 안 오고 뭔가를 더 달고 오면?’

견이 턱을 문지르며 대문 쪽을 휘 둘러보았다.

“솔직히 이 정도는 웬만한 성인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넘거나 딸 수 있을 것 같은데.”

오싹 소름이 끼쳤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집이고 다행히 도둑 한 번 든 적 없다.

혼자 있어도 집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갑자기 담이고 대문이고 현관이고 창문이고 죄다 허술하게 보였다.

굴욕적으로 얻어터지고 앙심을 품은 남자가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을 것처럼.

그럼에도 모단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주는 맘은 고맙지만 그래도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위 비서님한테 죄송해서.”

“섭호 없어요. 연차 써서 내일 밤에 올라온다니까.”

‘맞다, 그랬지! 그럼 더 못 가겠는데!’

덜덜덜 진동 모드로 바뀐 모단의 동공을 본 견이 픽 웃었다.

“드디어 내 차례인가 보네요.”

“뭐, 뭐가요?”

“I’ll keep you safe.”

매끄럽게 혀 굴러가는 소리에 헤에 감탄했다가 헉 하고 숨이 막혔다.

“지켜주고 싶다고요. 걱정돼서 미치겠다고.”

견이 팔짱을 꼈다.

“우리 집 가는 게 불편해요? 그럼 아주 편안한 호텔 스위트룸을 잡아줄까요? 아무나 들어오지도 못하는 데로.”

“뭐라고요? 그게 더 불편하죠!”

“그럼 편하게 모단 씨 집에 있던가. 난 밤새도록 이 앞에 있을게요.”

“예에?”

“차 안에서 새우잠 자면 되죠. 하루쯤 웅크리고 잔다고 영영 허리를 못 쓰게 된다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뭐예요, 그게!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눈매가 가늘어진 견이 한 손을 슬그머니 허리에 올렸다.

“……다른 데는 몰라도 거긴 안 된다는 눈빛인데.”

“뭔 소리를! 차 안에서 밤새는 걸 걱정한 거죠! 백견 씨가 그러고 있는데 집이고 뭐고 내가 편할 리가 있어요? 또 허리는 남자에게만 중요한 게 아니라 여자에게도 중요한…….”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요. 내 허리는 소중하니까.”

견이 더 이상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손짓했다.

“차를 멀리 대놔서. 가져올 테니까 들어가서 내일 출근할 때 입을 옷만 간단히 챙겨서 나와요. 알았죠?”

그러고는 얼른 대문 밖으로 나와 버렸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견은 맞은편 집의 담장 옆에 세워져 있는 검은 차를 흘깃 보았다. 그대로 지나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장소 비울 겁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알겠습니다, 하는 딱딱한 여자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까 신속한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철저히 해두어서 나쁠 것 없다 싶어 얼마 전부터 사설 경호원들을 모단의 출퇴근길과 집 주위에 붙여두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관찰하거나 낯선 차가 집 앞에 오래 머문다거나 하는 일이 있는지 살펴달라고.

결정적인 계기는 손여은이었다. 그 여자가 저와 모단 사이를 어떻게, 왜, 어디까지 아는 건지 알아낼 때까지 더 이상의 틈을 주지 말아야 했다.

혹시 한규철 쪽에서도 나설지 모른다는 불안함도 한몫했다. 솔직히 김민철은 거의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아예 안 만나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만…… 숨을 안 쉬고 살 순 없으니.’

좀 전에도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가려는데 경호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웬 남자가 찾아왔는데 아는 사람 같긴 하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일단 지켜보되 직접적으로 위협한다면 바로 나서달라고 당부한 후에 미친 듯이 뛰었다.

정말 모단이 웬 남자와 마주서 있는 게 보였다. 김민철이라는 걸 알아보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어디서 본 것처럼 그녀 앞을 막아선 후에 한 대 쳐주려고 했는데, 모단이 그럴 기회도 주지 않고 알아서 김민철의 뺨을 후려치는 게 아닌가.

제대로 얻어맞는 광경에 순간 얼이 빠졌다가, 빗자루까지 치켜들고 나오는 걸 보자마자 얼른 다시 뛰었다.

그러다 애 운운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버렸고, 저야말로 이성이 끊어질 뻔했다.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단 말씀이시죠. 네, 감사합니다.”

모단의 집 앞까지 차를 끌고 온 견은 방금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제집 쪽에도 특이사항 없다는 내용이었다.

모단뿐만 아니라 제집 주위에도 경호원을 두었다. 요 며칠 차도 바꿔 타고 오늘은 안 쓰던 모자까지 눌러쓰고 온 참이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견은 얼른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큼직한 숄더백을 든 모단이 나왔다. 세수라도 했는지 울었던 흔적은 한결 옅어졌다.

“오늘도 다른 차 끌고 왔네요?”

“아직 수리가 덜 끝나서요.”

태연히 답한 견이 트렁크에서 감자와 옥수수 등이 든 박스를 내렸다. 모단이 가리키는 대로 현관 앞에 내려두고 차로 돌아왔다.

조수석에 타려던 모단이 멈칫했다.

“이게 뭐예요?”

“뭐가요?”

운전석에 앉으며 돌아본 견이 당황한 눈을 했다.

“아, 그거…….”

모단은 조수석 시트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꽃묶음을 손에 들고 자리에 앉았다.

작은 민들레처럼 생긴 노란 꽃과 손톱만 한 보라색 꽃, 그리고 안개꽃처럼 흰 송이를 매단 초록 줄기들이 앙증맞게 어우러져 있다.

“아까 시골에서 봤는데 너무 예뻐서요. 모단 씨 보여주고 싶어서 가져왔는데 너무 금방 시들어서 못 주겠다 하고…….”

어둠 속에서도 견의 뺨이며 귓가에 홍조가 보이는 것 같았다.

모단은 손에 든 꽃을 두 눈 가득 담았다. 차가 너무 조용해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세라 얼른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혹시 꽃 이름도 알아요?”

“몰라요. 섭호도 잘 모른대요.”

“하긴, 모르면 어때요. 이렇게 예쁜데.”

견은 곁눈으로 모단의 옆모습을 보았다.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사랑스럽다.

아까는 그렇게 예뻐 보였던 들꽃인데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든 건 둘째 치고 모단이 온 시선을 다 가져가 버리는 통에.

“그렇게 좋아요?”

“네. 아까 보내준 사진, 그 옷…….”

말하다 말고 웃음이 섞였다.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꽃바지 입고 시골길에서 꽃 꺾고 있을 거 상상하니까, 아하하!”

“나 참. 상상력을 왜 그런 데다 쓰지?”

해말간 웃음소리가 차 안을 데굴데굴 굴렀다.

“집에 오기 직전에 옷 갈아입고 꺾었다고요. 물론 섭호는 옷하고 상관없이 미친놈 보는 눈으로 보긴 했지만.”

견은 얼마 툴툴대지도 못하고 다시 입매를 풀었다.

“아무튼 모단 씨가 웃어주니까 좋네요. ‘꽃 아야 하니까 눈으로만 봐야죠∼ 누가 지나가다 예쁘다고 백견 씨 목을 따면 좋겠어요?’ 할 줄 알았는데.”

“남의 직업병 걸고넘어지기 있어요?”

너무 헤벌어졌나 싶어 민망해진 모단이 뒤늦게 표정 관리를 했다.

“꽃보다 백견 씨 마음을 기쁘게 받은 거예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같은 풀이라도 먹을 수 있는 걸 꺾어 오지 그랬냐고 했을 텐데.”

“하여간 먹는 거 참 좋아해. 나는 먹지도 못하는데 왜 좋아해요?”

“먹을 수 있는데요, 난.”

모단이 몸을 기울이더니 견의 뺨에 장난스레 뽀뽀를 하고는 속닥거렸다.

“다른 여자들한테는 못 먹는 감이겠지만.”

눈치 빠른 신호등이 빨간 동그라미를 들었다. 고분고분 차를 세운 견이 몸을 틀고 제 입술을 가리켰다.

“먹을 거면 골고루 먹어요.”

불량식품보다 더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맛이 포개졌다.

“선생님이 편식하면 안 되지.”

***

얼마 후, 모단은 전에 한 번 와본 적 있는 크고 아름다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한 손에 조막만 한 꽃묶음을 든 채였다.

“내 방에서 자요. 나는 섭호 방에서 자면 되니까.”

거실과 주방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어느 방 앞에 선 견이 한 손을 들었다.

“1분만 기다려요.”

모단을 앞에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간 견은 빛의 속도로 방을 치웠다.

많이 지저분하진 않아 다행이었다. 잡다한 것들을 서랍으로 쓸어 넣고 흐트러져 있던 침대 시트를 가지런히 편 후에 섬유탈취제까지 칙칙 뿌렸다.

“들어와도 돼요. 가방은 편한 데다 놓으면 되고요.”

“고마워요.”

조심스레 들어온 모단이 문 가까운 곳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견은 옷장을 열어 갈아입을 옷을 꺼내고는 문 쪽으로 향했다.

“난 일단 씻을 테니까 모단 씨 편한 데서 쉬어요. 방이 불편하면 거실에 있어도 되고요.”

“그럴게요. 방 구경해도 돼요?”

“네. 속옷만 빼고 다 봐도 돼요.”

도발인 듯 아닌 듯한 말이 괜한 승부욕을 자극했다.

“속옷은 왜 안 되는데요? 뭐 굉장한 거라도 있어요?”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견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속옷 서랍부터 보여줘야겠네. 하나하나 소개해 줄 테니까 이리 와봐요.”

“아, 아니에요! 소개를 왜 받아! 안 봐도 돼요!”

견이 픽 웃고는 놓아주었다. 모단은 홈그라운드에서 낮저밤저 또라이를 건드린 걸 후회하며 툴툴거렸다.

“그럼 나 나갈 테니까 편하게 천천히 봐요. 모단 씨 취향인가, 아닌가.”

“안 본다니까요! 그리고 나 남자 속옷 취향 같은 거 없다고!”

“속옷 말고 방이요. 어휴.”

“뭔데요? 방금 그 한숨의 의미는 뭐냐고!”

견이 나갈 때까지 씩씩대던 모단은 가까스로 진정하고 방을 휘 둘러보았다.

크림과 베이지, 그레이 등 눈이 편안한 색들로 심플하게 정돈된 공간이다. 원목의 결을 살린 가구들이 아늑한 분위기를 더했다.

첫인상은 어른스러운데, 자세히 보면 곳곳에 놓여 있는 크고 작은 프라모델들과 피규어, 장난감 같은 장식품들에서 소년스러움이 넘쳤다. 주인과 꼭 닮은 방이다.

“내 취향이네.”

중얼거린 모단은 문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외쳤다.

“백견 씨! 나 안 보는 책 한 권만 빌려줘요!”

“아무거나 꺼내서 봐요!”

욕실이 제법 안쪽에 있는 듯 멀리서 대답이 돌아왔다.

모단은 책꽂이 쪽으로 향했다. 꽃이 더 시들기 전에 책 사이에 끼워 말릴 생각이었다.

“어?”

책꽂이 한가운데 차곡차곡 쌓아둔 퍼즐 박스 옆, 금빛으로 반짝이는 네모난 것이 눈에 띄었다.

설마 부자들은 24K 순금도 막 가지고 노나, 하고 기겁했던 모단은 헛웃음을 흘렸다.

“깜박 속았네. 터닝몬스터 레어카드 아냐?”

동후를 비롯한 남자아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고 와서 대결을 하네 교환을 하네 하는 통에 눈에 익었다.

“이런 것까지 모으나 보네.”

퍼즐 박스 옆에 조르르 꽂혀 있는 만화책 덕분에 위화감 따위 전혀 못 느낀 모단은 황금색 카드를 얌전히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손닿기 편한 위치에 있는 책들 중 적당히 두께가 있는 책을 뽑아 들었다.

그때, 한 뼘쯤 열려 있던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모단 씨!”

“아오, 깜짝이야!”

속옷 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소스라친 모단이 빼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뒤이어 아까보다 더 큰 비명을 질렀다.

“뭐, 뭐, 뭐, 뭔데요! 왜 옷도 안 입고……!”

“아니, 아니! 그게!”

느닷없이 들이닥친 견은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심지어 바지 후크까지 풀려 있는 매우 위험한 차림새였다.

씻으려고 옷을 벗다가 모단이 하고많은 책 중 하필 그 책을 꺼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쳐 정신없이 뛰어나온 거였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사진이 들어 있는 바로 그 책.

“뭔데요, 뭐! 욕실에 불이라도 났어요?”

탄탄한 가슴과 배에서 겨우 눈을 뗀 모단은 떨어진 책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런데 그 옆에 떨어져 있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눈을 찔렀다.

“이거……?”

“이 책은 섭호 책이거든요!”

견이 책과 사진을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아무 책이나 봐도 된다고 했는데 갑자기 섭호 책이 섞여 있다는 게 생각이 나서, 말해주려고.”

“아, 알았어요.”

모단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근데 그게 그렇게까지 급하게 뛰어나올 일이었어요?”

그제야 제가 헐벗고 있음을 깨달은 견이 책으로 얼렁뚱땅 가슴 앞을 가렸다.

“섭호가 책을 좀 많이 아껴서요.”

제가 생각해도 어설픈 변명에 견은 어디라도 숨고 싶어졌다. 모단은 아직도 얼떨떨한 눈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사진은 뭐예요?”

“사, 사진이요……?”

갸웃했던 모단이 손가락으로 정확히 책을 가리켰다.

“무탈이 사진이었는데?”

예전 무탈이 생일 때, 어린이집에서 함께 찍어 선물한 사진이 분명했다. 제 얼굴과 무탈이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책을 움켜쥔 견의 손등에 바짝 힘줄이 섰다.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차라리 지금 사실대로 다 말해 버려?

아니면 아예 무탈이 사진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

각자 반대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 나가는 생각들을 간신히 중간쯤에서 잡았다.

“아, 그거요. 무탈이가 지난번에 한국 왔을 때 여기서도 며칠 있었는데 두고 갔대요. 섭호가 잘 보관해 준다고 하더니 여기다 끼워놨나 봐요.”

다행히 목소리는 차분하게 나와주었다. 표정까지 완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단 씨도 있기에 나 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고.”

모단은 책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반응이 없자 더 초조해진 견이 목소리를 높였다.

“책도 책인데 더 급한 일이!”

“예? 급한 일? 뭔데요?”

“욕실에 이따만 한 벌레가 나왔는데! 그거 잡아줘요!”

모단의 한쪽 입꼬리가 주욱 치켜 올라갔다.

“나보고 잡아달라고요?”

“네. 나는 마음이 여려서 못 잡겠어요. 모단 씨는 잘 잡을 것 같은데. 빗자루 필요하면 빗자루 줄까요?”

“아오, 정말!”

울컥한 모단이 벌레보다 견을 먼저 잡았다. 맨살에서 찰싸닥 소리가 났다.

“이거 봐, 이거! 맨손으로 사람도 잡잖아!”

“시끄러워요! 욕실 어딘데요!”

“저쪽이요, 저기.”

모단이 거친 걸음으로 앞장섰다.

얻어맞은 어깨를 북북 문지르며 뒤따르던 견은 잽싸게 섭호 방문을 열고 책을 던져 넣었다. 바닥에 미끄러진 책이 침대 밑으로 쑥 들어갔다.

“벌레가 어디 있다는 건데요? 없잖아!”

“더 무서워! 그럼 그게 어디로 갔을까요? 나 자는데 막 스륵스륵 기어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오늘은 누구랑 같이 자야겠다.”

견이 은근슬쩍 몸을 옹송그리며 모단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곧바로 모단에게 한쪽 귀를 잡혔다.

“진짜 무서운 거 보여 드릴까? 응?”

“잘못했어요. 벌레 나와도 못 본 것처럼 조용히 씻을게요.”

고개를 내저은 모단이 욕실 문을 쾅 닫고 나간 후, 견은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쭈그리고 앉아 무릎 위에 걸쳐 둔 팔 위에 이마를 묻었다.

‘이렇게까지 말이 안 나올 줄은…….’

어떻게 이토록 태평하게 잊고 지낼 수 있었을까.

그녀에게 말해야 할 가장 큰 비밀이 남아 있다는 걸.

가끔씩 꿈을 꾸곤 했다.

묵직한 진실이 발목을 휘감고 끝도 없는 물속으로 우악스레 끌어당기는 꿈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머리 위에 보이는 모단의 손을 잡지 못하고, 끝내 멀어져 홀로 가라앉아 버리는 꿈을.

머리카락이 젖을 만큼 진땀을 흘리고 일어난 날이면 종일 갈비뼈 안에 돌이 들어찬 것 같았다.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아무리 쥐어짜 보아도 뾰족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모단을 마주하면, 좋은 것 빼고 나머지는 희게 지워져 버리게 마련이었다.

‘말해야 해. 혹시라도 먼저 알아버리기 전에, 내 입으로.’

미동도 없이 고개를 묻고 있던 견이 한 손으로 제 뒤통수를 느릿하게 헝클어뜨렸다.

‘……언젠가는.’

견의 방에서 다른 책을 꺼낸 모단은 거실 소파로 내려와 앉았다. 책장 사이에 꽃들을 꼼꼼히 끼워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무탈이 사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무탈이가 두고 간 거라던 견의 말을 저도 모르게 곱씹게 됐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바로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던 건 왜였을까.

‘그냥 말해주면 될 걸 온갖 법석을 떨면서 문을 열어젖히니까 정신이 쏙 빠져서 그렇잖아! 옷은 또 왜 벗어놓고 오냐고!’

벌레 잡아달라는 말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놈의 빗자루 놀림은 앞으로 몇 번 더 써먹을 게 뻔했기에 그것도 욱했다.

“나오면 가만 안 둘…….”

“모단 씨.”

고개를 든 모단은 그대로 멈췄다.

헐렁한 옷으로 갈아입은 견이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나른하게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제 눈에 슬로모션 효과가 걸린 건지, 그저 걸어올 뿐인데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물기처럼 뚝뚝 떨어졌다.

견이 머리 위에 수건을 얹은 채로 옆에 앉았다.

“이거 하려고 책 빌려달라고 한 거였어요? 남았으면 같이 해요.”

모단은 산뜻한 비누향이 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난생처음 깨닫고 숨을 참았다.

‘여기…… 아무래도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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