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66화 (66/86)

#66. 사랑해

2017.12.17.

견이 머리 위에 수건을 얹은 채로 옆에 앉았다.

“이거 하려고 책 빌려달라고 한 거였어요? 남았으면 같이 해요.”

모단은 산뜻한 비누향이 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난생처음 깨닫고 숨을 참았다.

‘여기…… 아무래도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탁 소리 나게 책장을 덮은 모단이 방긋 웃었다.

“다 했어요. 잘 간직할게요.”

들뜬 웃음이 견의 입가에 걸렸다.

“고마워요, 모단 씨.”

“준 사람이 고맙다고 하면 어떡해요?”

“내가 준 거 소중하게 여겨주니까 당연히 고맙죠. 그것뿐인가? 다른 사람 앞에서 안 울고 내 앞에서만 울어준 것도 고맙고, 내가 불안해하니까 여기까지 따라와 준 것도 고맙고, 다 예쁘죠.”

바스스 웃은 견이 수건을 끌어 내려 목에 걸고는 등을 기댔다.

“벌써 자기는 좀 이르죠?”

‘자, 자자고?’

혼자 뜨끔한 모단이 손을 꾹 말아 쥐었다. 반면 견은 태연했다.

“영화 한 편 보고 자면 시간 괜찮을 것 같은데. 혹시 보고 싶었던 거 있어요?”

모단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절대로 뭐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 아무거나 봐도 돼요.”

“제일 어려운 주문이네.”

견이 근처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상체를 굽히고 무릎에 팔을 걸친 편안한 자세로 영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일할 때만큼이나 진지한 옆모습을 바라보던 모단은 마른침을 삼켰다.

“백견 씨.”

“네.”

“일단 머리부터 말리면 안 될까요?”

“내버려 두면 금방 말라요. 어디 갈 것도 아니고.”

말 안 듣는 아들처럼 대꾸하던 견이 뭔가 깨달은 듯 돌아보았다.

“왜요? 너무 섹시해서?”

물기 탓에 더욱 새까매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매에 홀려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모단은 최선을 다해 평온을 가장했다.

“그럴 리가요. 젖은 머리로 있다가 감기 걸려서 앓아누울까 봐서요.”

가진 연기력을 모두 끌어모았다고는 하나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견은 웃음을 꾹 참고는 일어섰다.

“알았어요.”

어디론가 사라졌던 견이 헤어드라이어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고는 모단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럼 모단 씨가 말려줘요.”

“내가요?”

무릎 앞에 놓인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모단은 얼결에 헤어드라이어를 들었다. 남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건 처음이라 어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쾌감의 신세계에 입문하고 말았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점점 보송해지며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감촉이 이렇게나 중독성 있는 것인 줄 몰랐다.

얌전히 앉아 있는 듬직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대형견의 털을 말려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묘하게 심신이 안정되며 평화가 찾아오는 것 같다.

‘하아…… 이래서 반려견을 키우는 걸까? 집에 데려가서 키우고 싶…… 정신 차리자.’

그러나 얌전해 보였던 건 모단의 착각일 뿐, 견은 딱 죽을 지경이었다.

손끝이 젖은 머리카락을 헤치고 파고들어 조심조심 살갗을 스칠 때마다 절로 척추가 오그라들었다. 괴상야릇한 비명과 함께 온몸을 뒤틀고 싶어지는 것을 참느라 진땀이 났다.

‘미용실에서 머리 감겨주고 말려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당한 견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수그렸다.

“그만! 이제 그만 말려도 될 것 같아요.”

모단은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며 드라이어를 내렸다. 다음에 또 하고 싶다고 예약 잡아달라고 할 뻔했다.

심호흡 몇 번으로 평정을 되찾은 견이 고개를 젖혀 모단의 무릎에 뒤통수를 댔다. 거꾸로 봐도 잘생긴 얼굴 위로 조금 놀란 눈빛이 떨어졌다.

“배고프면 내 이마 먹어도 돼요.”

소리 없이 웃은 모단이 허리를 굽혀 견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뗐다.

“다른 것도 먹을래요?”

견의 입꼬리가 은근하게 휘었다.

“혹시 위스키 좋아해요?”

‘다른 거’에서 멋대로 다른 걸 떠올렸던 모단의 동공이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그러고 보니 어지간한 바에서 파는 것보다 집에 모아놓은 위스키들이 더 훌륭하다고 자랑했던 게 기억났다.

“아주 옛날에 한두 번 마셔본 게 다라서 기억이 안 나요.”

“그럼 오늘 제대로 마셔봐요.”

견이 모단에게 기댔던 몸을 떼고 일어섰다. 젖은 수건은 다용도실에 던지고 주방으로 향했다.

“내가 술을 고를 테니까 영화는 모단 씨가 고르는 게 좋겠어요.”

“음…… 혹시 만화도 괜찮아요? 애들이 열광하는 게 있던데 어른이 봐도 재밌다고 해서 궁금했거든요.”

“괜찮아요. 나 만화 좋아해요.”

모단이 영화를 찾는 사이 소파 앞 테이블에 황금색 액체가 찰랑이는 병과 튤립 모양의 잔이 놓였다.

“안주는 간단하게 초콜릿으로 할게요. 셰프가 없어서.”

견이 뜯지도 않은 새 초콜릿 상자를 내려놓았다.

하나하나 다 예뻐서 입을 대기도 전부터 즐거워졌다.

“근데 어쩌다 위스키를 좋아하게 됐어요?”

“소주나 막걸리는 왠지 누구랑 같이 먹어야 할 것 같고, 맥주는 취하기도 전에 배가 부르고. 와인은 다음 날 머리가 아프고. 그러다 찾은 게 위스키예요.”

“무슨 술을 그렇게 프로페셔널하게 종류별로 마셔봤어요?”

“살다 보면 누구나 있지 않아요? 술이라도 마셔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위스키를 따른 잔을 부드럽게 돌리는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모단이 고개를 들었다.

“깊이 자고 싶을 때, 아무 생각 안 하고 싶은데 의지로는 안 될 때. 수면제나 진통제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마셔봤던 거예요. 일단은 식품이니까.”

모단은 그윽한 향을 퍼뜨리는 액체 위로 시선을 옮겼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첫 만남에서의 싸늘한 눈빛과 말투가 아직도 생생했다. 한데 어쩐지 남의 기억처럼 낯설고 비현실적이다.

“그러고 보니 요샌 안 마신 지 꽤 됐네요. 모단 씨 만나고 나서부터는 혼자 술 찾을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잔을 내려놓은 견이 환히 웃었다. 모단은 역시 이쪽이 더 익숙하다는 생각을 하며 마주 웃었다.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앉아 영화를 틀고 잔을 부딪쳤다. 크리스털 잔이 맑게 울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오늘 고마워요, 백견 씨.”

머릿속에 아까의 일이 스쳤다. 아직도 진저리가 쳐졌다. 아마도 당분간은 대문 앞은 물론 골목에 들어설 때부터 흠칫대게 될 것 같았다.

견이 와주지 않았다면 혼자 집에서 떨거나 새윤이네 혹은 경찰서에 있을 거라 생각하니 골이 지끈했다. 지금처럼 고작 몇 시간 만에 평화를 되찾긴 어려웠을 거다.

“든든했어요, 정말.”

견은 대답 대신 한 팔을 모단의 어깨 뒤로 둘렀다. 장난스레 뒷목을 주무르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일상적인 손길에 많은 말이 들어 있었다.

모단은 위스키 잔을 입에 댔다.

“어때요?”

견의 눈빛이 아끼는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빛났다.

“나 진짜 어른 됐나 봐요.”

“고작 위스키 한 모금에?”

“그게 아니라, 이십대 초반에 마셨을 때는 독하고 쓰기만 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건 좋은 거라 그런지 몰라도…… 뭔가 깊은 매력이 있네요.”

“조만간 컬렉션 다 털리고 빈병 수집만 하게 될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죠?”

말과는 달리 흐뭇한 미소를 흘린 견이 초콜릿 하나를 집어 모단의 입에 넣어주었다.

“적당히 다크한 초콜릿하고 같이 마시면 더 맛있어요.”

“으음.”

독한 술을 부드럽게 중화시키며 감싸는 단맛에 어김없이 녹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위스키 봉봉 맛이 날 것 같은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견이 갈증을 참지 못하고 몸을 기울였다.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고.”

영화는 끝난 지 오래였으나 내용 따위 둘 다 기억하지 못했다. 애초에 뭘 봤어야 기억을 하지.

떠오르는 거라고는 위스키와 초콜릿, 초콜릿과 입술, 입술과 위스키가 쉴 새 없이 섞이며 만들어낸 뜨거운 맛뿐이었다.

흠뻑 빠져 과다섭취하다 보니 몸이 둥실 뜨는 것처럼 가물가물해졌고, 기분도 같이 풀어졌다.

“백견 씨…….”

눈이 반쯤 감긴 모단의 손이 치덕치덕 견의 등허리에 달라붙었다.

“아까 벗고 들어왔을 때 앞밖에 못 봤는데 뒤도 좀 봅시다. 등짝, 등짝을 보자…….”

“잠깐, 잠깐만요. 이제 그만!”

아찔한 괴롭힘에 못 이긴 견이 제 다리 위에 앉혀두었던 모단의 허리를 잡아 옆으로 내렸다.

“이제 그만 올라가서 자요. 데려다줄게요.”

“그놈의 ‘이제 그만’ 좀 그만할 수 없나.”

발개진 뺨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고서 입을 비죽 내미는 모단을 보자 머리가 핑 돌았다. 아주 척추를 녹여서 죽일 작정인가 싶었다.

“이왕이면 업어서 데려다줘요. 기절한 척하고 같이 자빠지게.”

“뒤에 붙은 꿍꿍이는 속으로만 생각했어야지.”

“이럴 거면 손끝 하나 대지를 말던가, 아님 언니라고 부르던가!”

세상 원통한 얼굴로 거실 바닥을 탕탕 두드리던 모단이 홱 정색했다.

“문 잠그고 자요. 내가 쳐들어갈지도 모르니까.”

“내 대사를 자기가 하고 있어.”

저야말로 이제 그만하고 확 자빠지고 싶은 마음이 터질 듯 끓는 와중에 온갖 귀여운 앙탈은 다 부리고 있으니 견이야말로 땅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고문이 따로 없다.

“오늘은 그런 농담 하지 마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에요.”

“나도 취해서 위험하다고요. 하지 말아요.”

심각해진 말투에 모단은 얼마간 술이 깬 눈을 했다.

그러다 진지하게 지적했다.

“그렇게 말고.”

“네?”

“위험한 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게 좋아요. 막연한 경고는 애들도 한 귀로 흘려듣거든요.”

이 와중에도 직업병이 도진 건가 싶어 웃으려다 말았다.

모단의 시선이 흐린 게 꼭 술기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뭐가 어떻게 돼서 얼마만큼 위험한지 설명해 주면 더 잘 이해한다고요. 어쩌다 직접 겪어본다면 더더욱. 마냥 조심하라고만 하면 말 안 들어요. 애건 어른이건.”

역시나.

무겁게 처지는 말끝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는 게.

긴 숨을 뱉어낸 견이 모단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껴서 아주 꼬옥.

“날카로운 걸 만지면 피가 나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면 뼈가 부러질 수 있고…… 그런 식의 설명은 해줄 수가 없어요. 뭐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니까.”

잡고 있던 손을 놓은 견이 한 손으로 모단의 귓가를 쓰다듬었다.

“그, 관계 때문에…… 혹시 모단 씨에게도 안 좋은 영향이 갈까 봐 무서워요.”

“영향이요?”

“그런 말 들은 적 있거든요. 가까운 여자들끼리 월경 주기가 비슷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물론 난 여자는 아니지만요, 하고 얼른 덧붙였다.

“그게 다 호르몬의 영향이니까, 나도 호르몬에 문제가 있는 거니까. 그저 내 걱정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모단 씨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얻기 전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후회한 후엔 이미 늦잖아요.”

꾹 다물고 있던 모단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이제껏 온갖 생각을 다 했지만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몰랐다.

“……그런 거였어요?”

“그런 거였어요. 말했잖아요. 어떤 것도 모단 씨 때문인 거 없다고. 또 혼자서 엉뚱한 생각 했죠?”

“많이는 안 했어요. 아주 가끔, 그냥 조금 생각이 나고 신경 쓰이는 정도? 근데 결정적인 것만 안 했을 뿐이지 많이 한 것 같은데 아직 나 말짱, 으읍!”

새삼 얼굴이 화끈해진 견이 팔을 뻗어 모단의 입을 막았다. 부릅뜬 흰자와 마주하자마자 깨갱 손을 떼긴 했지만.

견의 눈빛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굳게 빛났다.

“어쨌든! 최대한 빨리 구해올게요.”

“뭘요?”

“천국행 티켓…… 아니, 해결책이요. 모단 씨가 나랑 결혼 안 한다고 하면 안 되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10억, 20억, 아니! 전 재산도 투자할 수 있어요.”

“아하하.”

모단이 두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거 봐요. 자세히 말해주니까 훨씬 이해가 잘되잖아요.”

견을 올려다보던 모단의 두 눈 가득 미안한 기색이 그렁그렁 번졌다.

“알았어요.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모단이 방금 견의 손바닥이 닿았다 떨어진 입술을 혀로 훑었다. 본인은 의식조차 못 한 행동이었지만, 견의 가슴은 확 달아올랐다.

“아무것도 안 하든, 혹은 뭔가를 하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백견 씨는 나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 거죠?”

오랫동안 눈이 마주쳤다.

심장 뛰는 소리, 눈 깜박이는 소리, 하지 못한 말들이 혀 아래에서 굴러다니는 소리, 온갖 소리들이 어지럽혔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확신이 물결처럼 번지며 다른 것들을 가벼이 쓸어냈다.

그 눈만 봐도 알 것 같다고 말하려는데, 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랑하죠.”

아무 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둥실거리던 기분은 진작 가라앉은 줄 알았는데, 다시금 꿈처럼 붕 떴다.

“사랑해, 정모단.”

갑자기, 이제껏 살면서 좋았던 순간들이 눈앞에 촤르륵 지나갔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고, 가슴이 아릿거리던 찰나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지금과 꼭 같은 순간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모단은 천국행 티켓인지 뭔지를 가져오기 전까진 격하게 들이대지 않으려 했던 방금 전의 다짐 따위 까맣게 잊고 너른 품에 다짜고짜 얼굴을 파묻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탄탄한 가슴이 웃는 듯 잘게 떨렸다.

“갑자기 잠든 척하지 말고 대답.”

그냥 마음으로 듣고 넘어가지, 하고 투덜거린 모단이 뻐끔대던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소리를 흘렸다.

“……나도.”

“너도 뭐.”

머리 위로 쏟아지는 웃음소리가 한없이 다정했다.

모단은 견의 등허리를 안은 팔에 꼭 힘을 주며 그의 심장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백견.”

***

모단은 부스스 눈을 떴다.

한 뼘쯤 열린 커튼 사이로 희끄무레한 빛이 스몄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느낌에 당황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여기 우리 집 아니었지.’

눈동자만 굴려보았다. 목 아래를 받치고 길게 나와 있는 팔이 보였다.

결국 이 방도 저 방도 아닌 소파에서 꼭 껴안고 같이 잠들었다. 제가 먼저 잠들고 나서 견이 가져온 건지 얇은 담요도 걸쳐져 있다.

모단은 한 손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켜보니 기가 막히게도 알람 울리기 3분 전이다.

조심조심 그의 품을 벗어나 소파 아래로 내려왔다. 세상모르고 잠든 와중에도 허전한지 견이 미간을 찡그렸다.

3분 동안, 모단은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잠든 견을 감상했다. 퍼지고 부어도 굴욕 따위 없는 축복받은 얼굴이다.

‘자고 일어나면 이런 얼굴이 눈앞에 보인다…… 라. 괜찮은데? 결혼할까?’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소신마저 날려 버릴 뻔한 찰나, 정신 차리라는 듯 알람이 울렸다. 바로 끈 모단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백견 씨, 일어나요. 망할 월요일 아침이에요. 출근해야죠.”

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단은 그의 어깨를 잡고 몇 번 더 불렀다.

“백견 씨. 견이 씨. 야, 백견. 어이!”

눈썹이 꿈틀대는 걸 보니 얼마간 정신이 든 것 같은데 버티는 듯했다.

끈질기게 깨워보던 모단이 손을 거두고 한탄조로 읊조렸다.

“그럼 그렇지. 밤새도록 쪽쪽대던 좋은 시절은 금방 지나가고, 눈뜨자마자 일어나라 뭐 해라 귀찮은 잔소리부터 하게 되는 게 현실이겠지. 이래서 살아보고 결혼해야 한다는 말이…….”

갑자기 견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 일어났어요…….”

비죽배죽 뻗친 머리카락을 하고, 눈은 뜨지도 못한 채로 잠겨 갈라진 목소리를 흘려냈다.

“늦게 자서, 알람이 원래 금방 일어나요……. 잔소리 귀찮게 없어요…… 살아보는 거 결혼하는 거 아는데…….”

“몇 살인데 옹알이를 하는 거야. 정신 차려요.”

“스물아홉 살이 잘 차려요…….”

견이 눈도 안 뜨고 용케 소파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 비척비척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윗옷을 반쯤 끌어 올렸다.

“으악! 뭐 해요!”

“언제 현관이 내 방 앞에, 여기 아니구나.”

그때서야 겨우 한쪽 눈이나마 뜬 견이 안쪽을 가리켰다.

“모단 씨는 저기 1층 욕실 써요. 나는 저기 위에서, 이따 봐요…….”

모단은 아까부터 터지려는 웃음을 피식 흘리고는 알았어요, 했다.

견의 방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다시 들고 내려왔다. 아래층 욕실은 거의 쓰지 않는지 물을 틀기가 미안할 정도로 말끔하고 보송했다.

최대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조심조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화장대는 없는 것 같아 욕실 거울 앞에서 간단하게 화장을 했다.

다시 거실로 나오니, 어느새 멀쩡해진 견이 주방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모단 씨, 속 괜찮아요?”

“네. 살짝 쓰린 정도? 역시 비싼 술이라 깔끔하네요.”

“지금 냉동실에서 꺼낸 국 데우고 있어요. 직접 끓여줄 실력은 안 돼서 미안해요.”

“별게 다 미안하네요. 나 제대로 앉아서 아침 먹고 가는 게 손에 꼽을 정돈데 호강이죠.”

모단이 식탁 의자를 당겨 앉으며 웃었다.

단정히 갖춰 입은 셔츠에 머리 손질까지 마친 이 남자가 좀 전에 눈감고 횡설수설하던 새집머리 맞나 싶었다.

“아침에 엄청 약하네요, 백견 씨는. 그래서 바로 물부터 끼얹고 정신 차리는 건가 봐요?”

“어젠 너무 늦게 자서 그래요. 원래 알람 들으면 금방 일어나요. 모단 씨가 귀찮게 잔소리하게 만들 일 없어요. 살아보고 결혼하면 알겠지만.”

“아까 그 말이 이 말이었다고요?”

“네. 이렇게 낭만적인 옹알이 처음 듣죠?”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밥과 국을 그릇에 옮겨 놓아준 견이 맞은편에 앉으며 씩 웃었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신혼부부 같지 않아요?”

“잘 먹겠습니다.”

“쑥스러워하기는.”

새초롬하니 흘겨본 모단이 물컵을 들었을 때였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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