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어디서 개가 짖어서
2017.12.20.
새초롬하니 흘겨본 모단이 물컵을 들었을 때였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도 손님이 와요? 혹시 비서님이 일찍 오셨나?”
“자기 집 들어오면서 벨 누르는 애 아닌데.”
“아, 그렇겠네요.”
견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올 사람이 없는데……?”
먼저 먹고 있으라는 말을 남긴 견이 거실 인터폰 쪽으로 향했다.
대문 앞을 비추는 화면 속에는 택배기사처럼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누구시죠?”
[백견 씨 댁 맞습니까?]
“그런데요.”
[전달해 드릴 물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누가 보낸 거죠?”
[그건 모르겠습니다. 전 그냥 운송업체 직원이라서요. 어제도 몇 번이나 왔었는데 아무도 안 계셔서 지금 왔어요. 최대한 빨리 전달 바란다고 했는데…….]
인터폰 가까이 대고 있는 얼굴에서 짜증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섭호가 있었다면 이런 정체불명의 물건은 안 받는다고 문도 열어주지 않고 딱 잘라 돌려보냈을 터였다.
그러나 견은 받든 안 받든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견이 밖으로 나간 후, 모단은 국물을 몇 숟가락 먹다가 내려놓고 거실로 나왔다.
대문까지 나갔던 견은 금방 들어왔다. 짐작보다 훨씬 커다란 물건을 들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 액자 같은데.”
“그림이에요.”
“그림이요? 무슨 그림을 이 아침에…….”
모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짐작 가는 게 있네요.”
딱딱한 투로 답한 견이 앞을 싸고 있던 포장재를 벗겨냈다.
“……역시.”
크기를 보고 짐작한 대로, 한규철 사장이 주겠다던 그 그림이었다.
견은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넘겼다.
“문 앞에서 확인하고 바로 돌려보냈어야 하는…… 모단 씨!”
벽에 기대놓은 그림을 본 모단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견이 놀라 어깨를 짚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모단은 넋이 나간 것처럼 눈앞의 그림을 바라보기만 했다.
누구보다 잘 아는 그림이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림.
***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아빠에게 불쑥 물은 적이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열 살인데 나만 아홉 살이야. 왜 그래?”
“모단이 넌 남들보다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으니까.”
“왜?”
“언니, 오빠들하고 같이 공부해도 될 만큼 똑똑해서.”
잊어버려서 다시 물은 건 아니었다. 같은 대답을 몇 번 듣더라도 아빠와 얘기하고 싶었다.
“어제 공개수업 때 친구들 엄마는 다 왔는데 나만 안 왔어. 그건 왜 그래?”
사실 다 온 건 아니었다. 회사에 간 엄마들도 많았으니까.
아빠가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나를 돌아보았다. 엄청 곤란해하는 표정이다.
아빠가 처음 해준 요리가 너무 맛이 없어서 내가 입에 문 채로 울음을 터뜨렸을 때처럼.
“엄마랑 아빠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떨어져 살게 됐다고 말했지.”
안다. 그걸 이혼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나는 똑똑했으니까.
“사랑하다 안 하다 할 수도 있는 거야?”
“어른들끼리는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그건 어른들 간의 사정이고, 엄마이자 아빠로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평소엔 무뚝뚝하고 바쁜 아빠인데 이런 얘기가 나오면 지금처럼 길고 다정하게 말해주려고 애쓴다.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그래서 전혀 궁금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은 엄마 얘길 자꾸 꺼내는 거다.
“아무튼, 어른들 잘못 때문에 너까지 속상하게 해서 미안하다.”
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다 알고 있었으니까.
아빠도 많이 속상할 거라는 걸.
무엇보다도 엄마는, 이혼하지 않았어도 날 보러 학교에 와주진 않았을 거라는 걸.
어느 날, 아빠가 엄청나게 곤란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았다.
얼마나 곤란해 보였느냐 하면, ‘엄마는 더 이상 아빠를 사랑하지 않아서 다시 엄마 집으로 간대’ 하는 말을 나한테 꺼냈던 날만큼이나 그랬다.
아니, 그보다 더 힘들어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엄마가 모단이 보고 싶다는데.”
의아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바로 앞에 있어도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안아달라고 하면 귀찮다며 뿌리쳤는데 보고 싶다고 할 리가.
“아빠랑 헤어졌어도 엄마는 계속 모단이 엄마니까. 하룻밤만 엄마 집에 가서 자고 올 수 있겠어?”
“아빠도 같이?”
“아니. 모단이만.”
바로 싫다고 하고 싶었는데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물었다.
“엄마 집엔 엄마만 살아?”
“아니. 외할아버지하고 외할머니도.”
크고 좋아 보이던 차를 끌고 와서 엄마를 데려가던 무서운 어른들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 갈래.”
아빠의 표정이 더욱 곤란해졌다. 내가 백설공주 책을 읽다가 엄마도 새엄마였어? 하고 물었을 때만큼이나.
하지만 아빠가 너무 어려운 표정으로, 그러니까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 얼굴로 말해서 더 이상 싫다고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마지막 부탁이래.”
엄마의 집은 어마어마한 궁전 같았다. 아빠와 내가 살고 있는 곳도 크고 좋은 아파트였지만 그보다 더 굉장해 보였다.
다행히도 무서운 어른들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만 있었다.
“왔니?”
나는 선뜻 인사하지 못하고 올려다보기만 했다. 엄마가 맞나 싶어서.
발레리나처럼 날씬했던 엄마는 뼈만 남아 앙상했다. 예쁜 장미꽃이 다 시들어서 마른 넝쿨만 남은 것 같았다. 눈 아래 있는 점만 빼고 다 달랐다.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가 많이 아프대. 병원에 가도 고칠 수 없는 병이래.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단숨에 알아버렸다.
죽는 병이구나. 곧 죽는구나.
엄마는 생전 처음으로 학교생활이며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물어봤고 나는 그럭저럭 대답했다. 제일 싫어하는 산수시간만큼이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저녁을 먹을 때는 엄마의 엄마, 아빠가 돌아왔다. 우리 집 도우미 아줌마가 차려주는 밥과는 비교조차 안 될 만큼 근사한 차림이었으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어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밥을 먹은 다음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니?”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좋았지만, 학교에서 상도 탔지만 자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림 그릴래? 가르쳐 줄까?”
어쩌다 보니 엄마를 따라 2층에 있는 작업실로 올라가게 됐다.
열린 문 안을 보자마자 감탄했다. 처음 보았다. 이렇게 큰 이젤과 종이, 물감과 붓들이 있는 풍경을.
엄마가 화가라는 건 알았지만 그림 그리는 걸 직접 본 기억은 없었다. 이런 물건을 놓을 만큼 집이 넓지도 않았었다.
엄마와 나란히 종이 앞에 앉아 붓을 쥐었다.
“마음에 드는 색 골라서 칠해봐. 하고 싶은 대로.”
한동안 종이를 노려보다가 아무 색이나 찍어 묵묵히 의미 없는 선을 긋고 네모를 그렸다.
그림 그릴 줄 모르는 아이처럼. 그림 따위 귀찮아하는 것처럼.
엄마는 내가 칠해놓은 면을 유심히 보더니 다른 색으로 비슷하게 따라 그렸다. 다음엔 내가, 또 엄마가, 그렇게 여러 가지 색으로 종이가 꽉 채워졌다.
완성된 그림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생각보다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조금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유작이 되려나.”
유작(遺作)이란 말의 뜻을 몰랐기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엄마가 웃으면서 얘기해서 오히려 좋은 말인 줄 알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니? 하고 싶은 말 없어?”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엄마는 나를 돌아보았다.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혼낼 틈만 찾는 것처럼 차게 흘겨보거나 아예 무시하듯 내리깔고 있던 눈이 아니었다.
그 눈빛을 믿고 말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주세요.”
왜 그 순간에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나중에 아이 마음에 대한 공부를 하고 나서야 어린 나를 조금쯤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는 나쁜 부모와 좋은 부모를 구분할 능력이 없다. 나쁜 부모라도 내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기준이자 기둥이 되는 거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사람이 사랑해 주어도 정작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스스로가 아무 쓸모 없는 존재처럼 느껴져 무너지고 마는 건데.
날 그렇게 망치고 죽일 뻔했으면서, 그 여자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난 너한테 미안한 게 없는데.”
죽기 직전에 조금이나마 죄책감이 들었던 거라면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았다. 아빠가 성공하는 걸 보고, 본인이 아프다는 걸 알고 나서 다시 아빠에게 돌아오고 싶어 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나라도 이용하려 했던 거였음을.
어쨌든 그 한마디 덕에, 나는 나중에 엄마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도 울지 않을 수 있었다.
***
급히 무릎을 꿇고 앉은 견의 낯빛이 모단보다 더 창백해졌다.
“모단 씨, 갑자기 왜 이래요? 어디 아파요? 괜찮아요?”
줄곧 시선이 가 있었기에 그림 때문이라는 건 알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이거…… 누가 보낸 거예요? 왜, 이걸 왜 백견 씨한테……?”
한규철이 일부러 견을 불러 이 그림을 주려 했다는 걸, 거절하자 집으로 보냈다는 걸 듣자마자 모단은 견의 팔을 꽉 붙잡았다.
차게 식은 손끝에서 전해지는 한기에 견의 살갗에도 자디잔 소름이 끼쳤다.
“알고 그런 거예요. 모르고는 그럴 수 없어요.”
모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턱이 덜덜 떨려서 제대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 그림에서 한규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착각하지 마라, 얘야. 너는 내 딸의 아이도, 내 손녀도 아니야. 너만 아니었어도 내 딸이 그렇게 쉽게 그놈을 따라나서진 않았을 거다. 비루하게 살다가 죽지도 않았겠지. 그런데도 내가 널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남이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왜, 아직도 나를.
“나 때문이에요. 우리가 만난다는 걸, 가깝다는 걸 아는 거예요.”
오싹한 경고였다. 그 음습하고 시커먼 의중이 질척하게 들러붙었다.
“백견 씨가 아니라 내가…… 내가 이 그림을 보게 되길 바랐던 거라고요.”
견의 턱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만약 어젯밤 모단이 저희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일이다. 누구의 그림인지 알았건 몰랐건 돌려주려 했겠지만, 한규철은 어떻게든 받게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언젠가는 모단이 이 그림을 보게 될 테니까.
만에 하나 모단이 이 그림을 보기도 전에 흐지부지한 관계가 된다면, 그땐 그때대로 다시 그림을 가져가려 했겠지.
제대로 한 방 맞았다. 갤러리에서 나눴던 대화를 곱씹을수록 분노가 치밀며 뒷목이 묵직해졌다.
손여은에게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그 여자는 한규철에 비하면 그저 할퀴는 수준에 불과했다.
삐뚤어진 분노를 지독할 만큼 집요하게 쏟고 있던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견과 모단은 말없이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모단의 손이 얼마간 제 체온을 되찾았을 때쯤, 견이 낮게 물었다.
“혹시…… 그래도 핏줄인데, 라고 생각해요?”
“아뇨.”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상관없는 거죠?”
“상관없어요. 남이 어떻게 되든.”
실컷 울고 난 후처럼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아팠다.
“알겠어요. 내가 지켜줄게요.”
견이 미소를 지었다. 오싹할 만큼 다정한 미소였다.
“손끝 하나 못 대게, 상처 하나 못 내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
몇 시간 후, 견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고급 일식집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지만 예약하셨습니까?”
“안에 일행이 있습니다.”
한 손을 들어 직원의 안내를 거절한 견이 좁고 긴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똑똑 두드린 후에 대답을 듣지도 않고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문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규철이 커진 눈으로 견을 올려다보았다. 앞에 앉아 있던 일행이 돌아보고는 놀란 소리를 흘렸다.
“백견?”
한규철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옮긴 견도 내심 놀랐다. 그와 마주 앉아 있던 남자는 변진상이었다.
“두 분이 같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태연히 눈인사를 한 견이 문밖을 향해 손짓했다.
“식사 중에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뒤따라 들어왔다.
미술작품 전문 운송업체 직원이었다. 받을 때보다 더 꼼꼼하게 포장한 그림을 들고 있었다.
“여기다 놔주세요. 아주 살살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유명한 작가의 그림은 아니지만 갖고 있다 보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거든요.”
한규철의 이마에 부득 힘이 들어갔다. 견과 그림을 번갈아 보던 변진상의 눈에도 묘한 빛이 어렸다.
“고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림을 내려주고 가는 운송업체 직원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견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한규철이 씹어뱉듯 흘렸다.
“일을 크게 만드는군.”
“처음부터 분명 사양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떤 오해도 받고 싶지 않다고.”
“왜, 이 정도 성의로는 마음에 안 차나?”
견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네. 솔직히 이 그림은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둘 다 웃고 있었으나 오가는 눈빛은 냉랭하기만 했다.
서로 다 알고 있음을 알아버린 사이, 적대감을 흘리는 것도 서슴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제 아내가 될 사람과 함께 봐도 좋을 만한 그림 하나 추천 부탁드리죠.”
고약한 껍데기 같은 웃음을 걸친 채 한규철이 손짓했다.
“밥은 먹었나? 온 김에 앉아서 같이 들지.”
“제가 두 대표님들 사이에 끼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일개 사원의 점심시간은 한 시간뿐이라서요. 바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견이 변진상을 돌아보았다.
“대표님께서 직접 보셨으니 오히려 잘됐네요.”
한규철을 볼 때와는 달리 누그러진 눈매였다.
“한성어패럴 사장님께서 대표도 담당자도 아닌 제게 따로 뭘 주셨다고 해서 다른 오해 같은 건 마십시오. 저는 분명 돌려 드렸습니다. 제가 이런 걸 받는다고 해서 뭘 해드릴 수도 없구요.”
변명인지 확인사살인지 모를 말이 변진상의 심기를 제대로 거슬렀다.
견이 회사로 돌아오면서부터 생긴 위기감, 앞에서는 다들 저를 대표라 부르지만 실세는 다시 견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정통으로 찌른 거였다.
각자의 이득으로만 묶인 얄팍한 신뢰 위에 보란 듯이 돌을 던진 견은 빈틈없는 인사를 남기고는 몸을 돌렸다.
“……옘병.”
한 손으로 운전대를 쥔 견의 입에서 모단에게 배운 욕이 튀어나왔다. 미간에 좀처럼 펴지지 않을 것 같은 금이 갔다.
모단은 그랬다. 그저 제 존재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화인 것 같다고. 제 딸의 인생을 망쳐 놓고 혼자 잘 사는 건 못 보겠다는 심보일 거라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견이 보기에도 그랬다. 뱃속에 몹쓸 것을 품었다던 말에 담긴 게 암세포만을 지칭한 게 아님을 분명히 느꼈다.
이제까지는 조용했던 걸로 봐서, 아마도 평범한 남자와 적당히 결혼해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면 내버려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명그룹 며느리가 되는 건 껄끄러웠겠지.’
모단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같지만 견은 다른 이유도 짐작이 갔다.
외동딸이 죽고 없는 지금, 모단이 친자 확인이라도 하겠다고 나서서 재산을 챙기겠다고 우기면 일이 커진다.
물론 손녀의 출생신고조차 막아버린 인간이니 어지간한 정도는 잘라 버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희명그룹이라는 배경이 받쳐 준다면 쉽지 않아질 테니 그것만큼은 막으려는 것이리라.
그렇게 가정하면 모르긴 몰라도 어렸을 때부터 내내 모단을 살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적이지. 그런 뱀 같은 핏줄 아래서 모단 씨가 나왔다는 게.’
골이 지끈거려서 생각을 돌렸다.
일부러 목격자가 있는 데서 직접 그림을 돌려주려 했을 뿐인데 뜻밖의 수확까지 얻었다.
‘단둘이 식사할 정도의 친분이라. 변진상이 대표가 되자마자 독점 거래처가 한성어패럴로 바뀐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은데.’
심증에 심증 하나가 추가됐다. 이제 물증만 잡으면 된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알지만 저장해 두진 않은 번호다.
견은 별 고민 없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꼈다.
“네.”
[후회할 짓은 관두는 게 좋지 않겠나.]
대뜸 넘어오는 한규철의 목소리에 견은 비죽 웃었다.
“뭐라고요? 잘 못 들었습니다. 갑자기 어디서 개가 짖어서.”
[이……!]
“굉장히 요란하게 짖네요. 꼭 겁 많고 약한 개가 지레 나서서 큰 소리로 짖더라고요. 조용히 지나가려던 사람 기분 잡치게.”
수화기 너머에서 분에 못 이긴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전 후회 같은 거 안 합니다. 시작한 일은 맘에 들게 끝날 때까지 관두지도 않고요.”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희명그룹 건물을 향해 운전대를 꺾는 손놀림이 부드러웠다.
막힘없이 방향을 트는 차의 움직임은 매끄럽다 못해 우아하기까지 했다.
“저는 필부(匹夫)가 아니라 희명그룹의 후계자라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