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68화 (68/86)

#68. 널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2017.12.24.

“은규 대리님, 외근 가세요?”

“네. 원단공장에요.”

은규가 급히 서류파일 몇 개를 챙기며 구시렁거렸다.

“김 차장님이 저보고 대신 다녀오라고 하시네요. 대표님이 갑자기 다른 일 시키셨다고.”

햇볕이 무섭게 내리쬐는 창밖을 본 은규가 넥타이 매듭을 슬쩍 잡아당겼다.

“보기만 해도 덥네. 하필 차도 안 가져온 날…….”

은규의 시선이 스윽 사무실 안을 훑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양 고개를 푹 숙였다. 흡사 선생님이 ‘나와서 이 문제 풀어볼 사람?’ 하고 물어본 직후의 교실 같다.

단 한 명과도 눈을 마주치지 못한 은규의 눈썹이 팔(八)자로 처졌다.

아무리 틈만 나면 회사 탈출을 꿈꾸는 회사원들이라지만 이런 날씨엔 예외다.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사무실을 두고 밖에 나가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알았어요. 혼자 갑니다, 가.”

“다녀오세요, 대리님∼”

살가운데 얄미운 인사를 등에 업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견이 조용히 따라 나왔다.

“대리님, 저 업무 일찍 마무리했는데 같이 가도 될까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1초 정도 그래도 되나, 했던 은규의 낯빛이 활짝 피었다.

“그럴까요?”

거래처 가르쳐 주려고 같이 갔다고 우기면 될 것 같았다. 견이 대표로 있을 때 직접 거래를 튼 곳이라 은규보다 더 잘 안다는 사실은 깜박한 걸로 하기로 했다.

“김광남 차장님이 뭐라는 줄 아세요? 전달만 하고 바로 와! 땡땡이치지 말고! 이러시는 거 있죠. 학생한테 심부름 시키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신다니까. 그래서 정말 땡땡이 안 치실 거예요?”

“백견 씨가 사내고발만 안 하신다면 치고 싶습니다.”

“재밌는 건 같이 해야죠.”

견의 차를 타고 공장으로 가는 길, 두 남자는 공장에서 회사까지 가는 길 중 가장 멀리 돌아가면서 바람 쐬기 좋은 코스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했다.

“아이고, 이게 얼마만입니까!”

시킨 대로 사무실에 서류만 전달하고 드라이브 코스로 새려고 했는데, 견이 온 김에 사장님께 인사나 드리고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딱 붙들렸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다시 업무에 복귀하셨다고.”

견과 은규는 그리 넓지 않은 사장실에 앉아 믹스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장은 여전히 말이 많았다.

“백 대표님이 계실 때가 좋았는데 말입니다.”

김광남이 들었다면 난리가 나고도 남았을 말을 시작으로 온갖 옛날 얘기가 나오더니, 요즘은 옛날 같지 않고 갈수록 불황이라는 말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박 대리님. 원단 단가 올려주실 때도 된 것 같은데…….”

“저한테 말씀하셔도 어떻게 해드릴 수가……. 다음에 차장님 오시면 말씀 꺼내보시는 게 어떨까요?”

은규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얼렁뚱땅 빠져나가려 했다.

제 선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보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냥 튀었으면 될 걸 굳이 사장을 찾은 견까지 조금 원망스러워지려고 했다.

“에이, 박 대리님이 봐도 너무하다 싶지 않아요? 우리가 블랑아이랑 거래한 지가 몇 년짼데. 김 차장은 맨날 말로만 알겠다고 하고 말이야.”

사장은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들을 수는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끈질기게 말을 꺼냈다.

그래야 은규가 윗선에 말이라도 전하리라 계산한 듯했다. 견이 아직도 힘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일부러 더 어필하는 것도 있었다.

어딘가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으로 유심히 듣던 견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장님, 몇 달 전에 단가 협의 새로 하시지 않았나요? 세 번째였다고 본 것 같은데…….”

은규가 먼저 갸웃했다. 견이 재입사한 이후는 물론, 그전에도 제가 알기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사장 역시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었다.

“응? 그런 적 없는데요. 대표님이, 아니지. 백견 씨가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구먼. 단가 협의를 하자고 한 거지 한 게 아니에요.”

“아, 그랬군요. 제가 다른 일이랑 헷갈렸나 봅니다.”

견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장은 그럴 수도 있죠, 하고 사람 좋게 덧붙이고는 재차 당부했다.

“아무튼 말 나온 김에 잘 좀 전해줘요. 이번 분기 끝나기 전에 꼭 하자고.”

돌아가는 길, 차 안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올 때와는 달리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견의 옆모습을 살핀 은규는 덩달아 입을 다물고 앞만 보았다.

“대리님,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정말 공장이랑 단가 협의 없었나요?”

은규는 얼마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없었습니다.”

견은 섭호와 함께 확인한 서류를 떠올렸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입수한 자료엔 분명 세 번의 단가 협의가 이루어진 걸로 되어 있었다.

은규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아까도 그렇고 그건 왜……?”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견은 자신의 사람 보는 눈과 직감을 믿고 빠른 판단을 내렸다.

“박은규 대리님.”

“네, 네?”

은규의 머릿속에서 본능적인 불안 경보가 울렸다.

“제가 어려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고 해도 됩니까?

분명 뇌에선 그렇게 문장을 완성했는데, 입 밖으로 뱉기도 전에 고개가 제멋대로 끄덕여지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역시 회사에서 제가 믿을 만한 분은 은규 대리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 허허헝…… 예에…….”

우는 것 같은 웃음을 매단 은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먼저 오늘 외근 같이 갔던 건 다른 분들에게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일부러 조용히 나왔으니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사장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리죠.”

처음부터 오늘 공장에 갈 생각이었나 보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더위에 찌들어 겨터파크가 폭발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치솟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부탁한다면서요!

차마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울부짖음이 맴돌았다. 괜한 일에 휘말려 또 밥줄이 간당간당해지는 건 사양하겠다고 외쳐야 했다.

그러나 이어진 견의 말을 듣는 순간, 말문이 완전히 막혀 버리고 말았다.

***

“역시 서류가 두 개였네요.”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서류를 내려다보던 섭호가 팔짱을 꼈다.

한쪽은 섭호가 빼온 상부의 최종결재서류, 다른 쪽은 은규가 사무실 서류보관함에서 찾아 복사해 준 서류였다.

누가 뭘 봤는지까지 일일이 확인하진 않지만, 서류보관함 쪽에 설치된 CCTV에 견의 모습이 담기면 나중에 골치 아파질 수 있으므로 근처에도 가지 않고 은규에게 부탁했다.

공장에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견이 사내 비리를 의심하고 있음을 털어놓자, 안색이 창백해진 은규는 붕어처럼 뻐끔대기만 하다가 간신히 외쳤다.

언더커버 보스 같은 거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냐고.

비리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사원으로 들어온 거였냐고.

견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거창한 정의 구현까지 할 생각은 없었고 사적인 욕심으로 재입사한 건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말렸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 그 모호한 얼버무림이 은규에게는 긍정적인 확신을 주었다. 더불어 그간 김광남과 변진상에게 받은 온갖 핍박들도 떠올랐다.

처자식 딸린 이후로는 참을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됐지만 원래 불의를 못 참는 은규였다. 보통 일이 아니다 보니 생각이 많아 보이긴 했으나 못 돕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도 협의를 한 적이 없는데 여기엔 단계적으로 단가를 올린 것으로 나와 있네.”

견의 손가락이 서류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래 놓고 대금은 예전 단가대로 지급했단 말이지. 그럼 거기서 발생한 차액은 누구누구 주머니로 들어갔을까?”

변진상과 김광남이 대강 얼마만큼의 부당함을 누렸는지 알아보고는 있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캐낼 계획은 아니었다. 블랑아이를 다시 뒤숭숭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가까운 곳에 제가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위 관행이라 불리는 몹쓸 일들은 얼마간 끊어지리라는 계산이 있었고, 이미 회사에 끼친 손해는 조용히 해결할 작정이었다.

한데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큰 데다, 다른 데도 아닌 한성어패럴과 얽힌 이상 어느 한 곳만 조질 수가 없게 되었다.

“일타쌍피라고 해야 할지,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지…….”

딱, 따닥.

견의 손끝이 신경질적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원래는 김광남 차장이 직접 공장에 가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박은규 대리님을 보내면서 서류만 전달하고 바로 오라고 신신당부했대.”

“어휴, 수상해라. 누가 봐도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의 태도네요.”

“변진상은? 뒤져서 나오면 천 원에 한 대 불러도 될까?”

“원 없이 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둘이서만 오붓하게 삥땅을 쳤을까? 나 같으면 재무팀에도 몇 명 심어놨을 것 같은데.”

“저 같아도 그럴 것 같습니다. 친한 사람이든 돈이 궁한 사람이든 약점을 잡힌 사람이든, 뜻대로 굴릴 만한 사람은 찾으면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요.”

견이 혀를 찼다.

“생각보다 흔해빠진 수법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렇죠. 저 위에 알면서 모르게 만든 사람이 더 있다고 봐야죠.”

침음을 흘린 견이 좌우로 목을 꺾었다. 느릿한 동작에서 피로와 짜증이 묻어났다.

“이쯤 되면 우리끼리만 재밌을 일이 아닌 것 같아.”

견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지협이 형한테 같이 놀자고 해볼까.”

***

퇴근하는 길, 모단은 양손 가득 엄마가 좋아하는 냉채족발을 대자로 포장해서 들고 들어왔다.

“엄마, 우리 오늘 둘이서 술 마실까?”

“갑자기 웬일이래? 너 뭐 사고 쳤어?”

“아니거든!”

며칠을 고민했다. 제가 티끌만큼만 다쳐도 태산만큼 걱정하는 혜숙이 이 일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심란하실까 싶어서.

‘그래도 계속 감췄다가 만에 하나 더 큰일이라도 터지면…….’

먹을 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깨작대며 술만 한참 비운 후, 모단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전에 말했던 남자친구가 사실은 희명그룹 회장의 손주라는 말.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한규철이 견을 통해 저에게 경고했다는 말.

다 듣고 난 혜숙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민철이 집 앞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는 얘기까진 안 한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미안해, 엄마.”

너무 면목이 없어서 할 말도 없었다. 거하게 파혼한 걸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재벌가에 얽혀들다니.

자상하고 성실하고 돈 잘 버는 남자한테 시집가서 편히 사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거라고, 엄마의 바람은 절대 소박한 게 아니라고 괜히 툴툴거려 볼까 하다가 말았다.

너무 조용해서 숨이 막힐 때쯤, 혜숙이 쥐어짜듯 한마디 했다.

“그런데도 헤어질 생각은 없고?”

심장이 뚝,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더불어 생각도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러네. 배경 너무 벅찬 것 같다고 헤어지자 하고 편해질 수도 있는 거였네.’

‘아니지. 그 사람에겐 내가 필요해. 엄마에겐 말할 수 없는 이유지만.’

‘근데 그렇다고 꼭 사귀거나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맨 처음 합의했던 대로 한 달에 한 번, 아주 잠깐만 만나도 되는 거잖아?’

‘아니, 아니야. 다 핑계야. 다 필요 없고 이제는…….’

앞에 놓여 있던 술을 홀짝 마신 모단이 차마 눈은 마주치지 못하고 대답했다.

“나중에 안 맞아서 헤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는 못 헤어지겠어.”

한동안 침묵하던 혜숙은 창백하게 웃었다.

“우리 딸, 많이 변했네.”

다시금 모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혜숙이 농담조로 그런 말을 했었다. 재벌 만난다고 다 팔자 피는 거 아니라고. 엄마처럼 고작 몇 년 사모님 소리 듣고 끝일 수도 있는 거라고.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완전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끼리 맞춰가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아빠와 그 여자처럼.

그런 애가 재벌 중의 재벌을 만나고 있느냐고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백견 씨는 다른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걸. 가끔씩 현타 오게 만들 때가 있긴 해도…… 아니, 이 말은 빼자. 사람 대 사람, 남자 대 여자로 이보다 더 잘 맞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 같이 있기만 해도 편하고 재밌다고 느낀 건 처음이라고.’

모단은 뇌를 최대치로 돌려가며 온갖 말들을 짜깁기했다. 그런데 혜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에 민철인가 하는 놈이 속 썩일 때.”

그 이름이 나올 줄은 짐작도 못 한 탓에 애써 만든 장문의 변명이 싹 지워지고 말았다.

“그땐 네 입으로 먼저 헤어져야겠다고 했어. 그러고 나서 오히려 맘이 더 편해 보였고. 내 딸이지만 저 독한 것, 그랬는데.”

‘내가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새윤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눈물과 술독에 빠져 지내지 않았다 뿐이지 나름 이별에 아파했다고 생각했는데, 되새겨 보니 저를 힘들게 한 건 민철이나 그와의 추억 같은 게 아니라 한마디 말이었다.

결국엔 너 마음고생하기 싫어서 나 정도는 쉽게 포기가 된다 그거잖아, 라던 말.

처음엔 억울했는데 생각할수록 정말로 그랬던 것 같아서. 매정하고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구나 싶어서.

‘그랬지. 그랬는데, 지금은 쉽게 포기가 안 되는 건…….’

“좋으면 만나야지.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모단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혜숙의 눈은 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그리는 듯 아득해 보였다.

‘아빠 생각 하시는 건가…….’

여자로서의 혜숙의 삶은 어땠을까.

애까지 딸린 이혼남을 만나겠다는데 주변에서 오죽 많은 말을 들었을까.

혜숙의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저를 달가워하지 않는 외조부모를 한 쌍 더 얻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혜숙의 인품을 본다면 부모님도 좋은 분이셨을 거다. 엄마가 생긴 걸로도 모자라 살갑게 할아버지, 할머니라 부를 수 있는 분들까지 복에 넘치게 얻었을지도.

“모단아.”

“응?”

“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

미처 갈무리할 틈도 없이 코끝부터 일그러지며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았다. 모단은 눈을 세게 깜박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난 엄마도 행복해야 돼.”

혜숙은 옅게 웃었다.

“그래. 행복하자.”

힘껏 고개를 끄덕이는 모단의 입가에도 꼭 닮은 미소가 번졌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모단이 아이처럼 혜숙의 다리를 베고는 꼭 끌어안았다.

“엄마아.”

“징그러, 이것아.”

헤헤거리며 더 파고드는 모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혜숙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널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

“엄마한테 말씀드렸어요. 백견 씨 얘기.”

모단의 말을 들은 견의 눈썹이 일순 올라갔다가 스르르 처졌다.

“걱정 많이 하시죠?”

“아무래도 그렇죠.”

“뭐라고…… 하셨어요?”

웬만해선 긴장하는 법이라고는 없는 견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좀만 더 뜸을 들이면 손톱까지 물어뜯을 것 같았다.

“감자랑 옥수수 잘 먹었다고 전해달라고 하셨고.”

“정말요? 다행이다……. 그럼 다음엔 감자밭을 사드리겠다고! 아니지, 밭 같은 건 필요 없으시겠구나. 그럼 건물을…….”

“정신 차려요. 누가 여자친구 집에 인사드리러 가는데 부동산을 사들고 가요?”

횡설수설하던 견이 태엽 다 감긴 인형처럼 딱 멈췄다.

“인사드리러…… 라고 했어요?”

“주말에 시간 나면 집에 한 번 데리고 오라셨어요.”

너무 오래 멈춰 있어서 걱정이 될 때쯤 다시 입술이 움직였다.

“나, 나 정말 데리고 갈 거예요……?”

주인을 만난 강아지에게 인간의 언어가 탑재된다면 딱 이렇게 묻지 않으려나.

“그럼 모단 씨도 나랑 결혼하기로 맘먹은 거라고 받아들인다 해도?”

아, 이런 말은 안 하겠구나.

짧은 망상에서 빠져나온 모단은 앞에 놓인 음료수를 홀짝 마셨다.

“당장 데려간다고는 안 했어요.”

“안 데려간다고도 안 했잖아요.”

벌써부터 싱글벙글했다.

보는 사람 심장은 생각도 안 하고 마냥 무방비하게 웃던 견이 저도 최근에 알아낸 일들을 지협에게 전했다는 말을 했다.

“세상 골치 아픈 일은 다 물어가지고 온다고 짜증 내긴 했는데,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임원쯤 되면 여기저기서 적당히 접대받고 갑질하는 건 알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역시 다들 그런 거예요? 설마 백지협 이사님도…….”

“형은 아무리 이사라도 흠 잡힐 짓은 한 적이 없죠. 그걸 바탕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거구요. 본인이 꿀릴 게 없으니 맘만 먹으면 얄짤없을 거예요.”

말은 시원시원하게 하는데 어딘가 모르게 복잡해 보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모단이 테이블 위에 올려둔 견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무슨 생각 해요?”

견의 눈동자가 가지런히 책을 꽂아둔 서가를 훑듯 느리게 움직였다. 적당한 말을 고르는 듯했다.

“한성어패럴은 당연히 깔 거지만 블랑아이까지 뒤집어야 한다는 게 맘이 편치 않아요. 직원들은 또 불안해지는 거잖아요.”

모단은 견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게 왜 백견 씨 때문이에요? 대표 잘못 뽑은 탓이지.”

딱 잘라 말하긴 했어도 그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잠깐이야 뒤숭숭하겠지만 더 탄탄해질 거잖아요. 이건 백견 씨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에요.”

견이 고마워요, 하고 속삭였다.

“모단 씨도 심란하죠?”

“심란하다기보다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