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뜻밖의 육탄전
2017.12.27.
“모단 씨도 심란하죠?”
“심란하다기보다는…… 생각할수록 후회되긴 해요.”
“뭐가요?”
“아무리 어리고 몰랐다지만 그런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했던 게.”
이번에는 견의 손이 위로 올라왔다.
“나도 후회돼요.”
“뭐가요?”
“힘들어하는 부모님 생각해서 혼자 거기까지 온 아이였다는 걸 알았으면 그렇게 안 보냈을 건데. 왜 우느냐고, 울지 말라고 말이라도 한마디 걸어줬어야 했는데.”
모단의 눈썹 머리가 왈칵 이지러졌다.
“그래도 그날 거기 와준 덕분에 나를 만났잖아요.”
견의 손이 세게 감긴 눈두덩 위를 가만가만 쓸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나 줘서, 지금도 이렇게 가까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쓸어주던 손으로 은근슬쩍 눈을 가리고 입술을 포개려는데, 모단이 눈 감고도 다 보이는 사람처럼 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찍어 밀어냈다.
“아무리 칸막이 있는 데라고 해도 식당이잖아요, 식당!”
“하고많은 식당 중에 칸막이 있는 데로 온 이유가 뭐겠어요?”
“그야 당분간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읍.”
견이 입술로 잔소리를 막았다.
잘못 써먹으면 안 맞을 것까지 맞을 때도 있지만, 타이밍만 좋으면 눈 한 번 흘기고 넘어갈 때도 있다. 지금처럼.
“가만 보면 이러려고 은밀한 데만 찾아다니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어디까지나 보안을 위해서지. 꼭 톱스타랑 비밀 연애하는 것 같고 재밌지 않아요?”
“말 돌리기는.”
“그러고 보니까 진짜로 여기 연예인들도 오는 것 같던데. 문 앞에 사인 봤어요?”
“봤어요! 박도결하고 하나 사인 붙어 있는 거! <더비 앤 데뷔> 진짜 재밌었는데.”
홀딱 넘어와 주는 모단의 단순함에 흐뭇해하던 것도 잠시, 견의 표정이 갈수록 떨떠름해졌다.
“내가 학교 다닐 때도 아이돌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거기서 박도결 춤추는 거 보고 뻑 가서 한동안 앓았잖아요. 새윤이랑 오닉스 콘서트 갈 계획까지 짰었다니까요.”
“박도결이 잘생겼어요, 내가 잘생겼어요?”
맥락 없는 질투에도 모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형님한테 박도결이 뭐예요? 버릇없이. 도결 오빠가 백견 씨보다 나이 많아요.”
“도결 오빠? 오빠아아아?”
“서른 넘어봐요. 양심의 가책 없이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별게 다 감사하네.”
견은 한참을 더 구시렁거렸다.
“나도 연예인 할걸. 모단 씨한테 오빠 소리나 듣게.”
“백만 명의 소녀들에게 오빠 소리 듣는 대신 나랑은 길에서 손도 못 잡았을 텐데 진심이에요?”
“아뇨.”
견이 그제야 불평을 거뒀다. 모단이 옜다, 하고 던져 주었다.
“그까짓 오빠 소리 잘생기고 돈 많으면 듣는 거지. 갑시다, 견이 오빠.”
“‘도결 오빠’에 비해 열정과 애틋함이 부족하게 들리는데?”
“양심의 가책 탓이에요. 가자고요.”
계산을 마친 후 견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사라졌다.
입구에 남은 모단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박도결과 하나 사인을 찍어갈까 말까 고민하는데, 한 남녀가 들어왔다.
“……콜록.”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담배 냄새와 향수 냄새 콤보를 뒤집어쓴 모단이 잔기침을 터뜨렸다.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빠앙, 여기 분위기 완전 좋다아!”
고작해야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의 콧소리가 청각까지 공격했다.
아무리 젊게 봐도 40대 아래로는 안 보이는 남자에게 서슴없이 ‘오빠’라 칭하는 데서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오빠 소리는 역시 저렇게 내야 하는 건가 보구만.’
모단은 속으로 ‘오빵’을 몇 번 연습해 보다가 닭살이 돋아 때려치웠다.
“오빠가 좋은 데 데려와 줬다고 자랑해야지. 여기 엄청 비싼 데 맞지?”
여자가 셀카를 찍는데 남자가 황급히 옆으로 피했다.
“야, 야. 나 안 나오게 찍어. 집사람 눈썰미 귀신같다고 했잖아.”
“치잇. 나도 알거든? 지난번에 오빠 차에서 찍은 사진 올렸다고 나한테 막 화냈던 거 아직 안 잊어버렸거든?”
“구두 사주면 없던 일로 한다더니 자꾸 얘기할래? 그만하고 얼른 와.”
“잠깐만. 아까 사준 팔찌랑 가방도 나오게 오빠가 찍어줘.”
‘꼴값들을 떨고 있네.’
모단은 혀로 볼 안쪽을 밀어 띠꺼운 표정을 했다가 아예 몸을 돌려 버렸다.
‘처자식 놔두고 딴 년한테 헛돈 쓰는 놈이나, 임자 있는 남자 간 빼 먹는 년이나. 나중에 똑같이 돌려받아라.’
카운터 안에 있던 직원이 상냥하게 물었다.
“어느 분 성함으로 예약하셨습니까?”
“우일두요.”
“야, 미쳤어? 내 이름으로 예약하게? 혹시 몰라서 네 이름으로 했어.”
여자가 새빨간 입술을 뾰로통 내밀고는 제 이름을 댔다. 남자가 직원에게 덧붙였다.
“자리는 최대한 구석으로 해주신 거 맞죠?”
남녀가 직원을 따라 들어가고, 얼마간 더 있다가 견이 나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나오다가 회사 사람을 봐서요.”
“아, 인사하느라?”
“아뇨. 그쪽은 날 보면 안 돼서 혼자 은밀하게 관찰하느라.”
“예에?”
견은 씩 웃고는 차로 향했다.
나란히 걷던 모단은 방금 입구에서 본 커플 이야기를 꺼냈다.
“대박이죠? 요새 애인 없으면 바보니 어쩌니 하는 나사 빠진 유부남녀들이 그렇게 많다더니 진짜로 볼 줄은 몰랐네.”
“혹시 그 남자 쪽이 파란색 옷 입고 있지 않았어요? 여자는 짧은 원피스 입고.”
“맞아요. 안에서 봤어요?”
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 어린 여자에게 환심 사려면 어지간한 직장인 월급 가지고는 턱도 없겠죠?”
“그렇겠죠. 딱 봐도 사랑밖에 모르는 커플 같진 않았으니.”
견이 모단의 어깨를 한 팔로 꼭 끌어안았다.
“오늘 모단 씨랑 밥 먹으러 여기로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도움이요?”
어리둥절해하는 모단을 안은 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
‘대체 한 사장이 백견을 왜 만난 거지?’
임원회의 도중, 변진상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전에 백견이 대표로 있을 때 틀어진 줄만 알았다. 그런데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뒤에서 수작질이라니.
‘뱀 같은 노인네. 누구 덕분에 독점계약을 한 건데.’
회의 내용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변진상은 안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내 물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용을 썼다.
‘설마하니 백견이 다시 실세가 될 거라고 믿는 건가? 그럴 만한 근거도 없이 나설 양반은 아닌데. 나 모르게 아는 거라도 있나?’
변진상의 시선이 반대쪽 끝에 앉아 있는 염훈 재무이사 쪽을 찔렀다.
‘……시작은 저 인간 때문이었지.’
백지협과 유손제약 딸의 약혼.
가족들 외엔 거의 모르는 사실을 어렵게 알아냈다던 염훈의 말만 믿고 차명으로 유손제약 주식을 대량으로 구매했는데 얼마 안 돼서 파혼 소식이 들렸다.
쉽사리 처분하지도 못하던 차에 뜻밖의 악재까지 터지며 주식은 완전히 휴짓조각이 되었다.
그때 날아간 비자금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저 못지않게 손해를 본 염훈이 최측근을 들쑤셔 본 결과 뜻밖에도 그 파혼이 백견 때문이었다고 했다.
온갖 루머를 몰고 다니는 백견을 보다 못해 유손제약 손 사장이 파혼을 선언했다는 거였다.
신랑도 아니고 시동생 될 사람이 망나니라는 이유로 희명그룹을 포기할 수가 있나 싶었으나, 얼마 안 되어 교육자 집안의 의사 아들과 결혼시키는 걸 보니 돈보다 체면을 따지는 집안이라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변진상은 흘긋 지협을 훑었다.
‘본인은 흠 하나 없으면서 제 식구 흠 때문에 약혼이 깨졌는데, 아무리 사촌이라 한들 좋은 감정만 있을까? 백견 그 미친놈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동안 뒤치다꺼리한 것만도 얼만데.’
돈이 피보다 진하다 믿는 변진상의 사고방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직위가 있건 없건 회장 손주라는 이유만으로 다들 어려워하는 백견을 막 대한 것도 그래서였다. 백 회장이 죽고 나면 그야말로 개털이 될 게 뻔해 보였으니까.
근데 다시 백견이라니.
“이것으로 임원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변진상이 주먹을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회의가 끝났다.
담배 생각에 얼른 일어나려던 변진상은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지협을 보고 멈칫했다.
수업 잘 듣고 복습까지 철저히 하는 모범생처럼 회의 내용을 적은 메모를 차분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일부러 미적대는 사이 다들 나갔다. 수첩을 덮고 일어선 지협이 그제야 변진상을 본 사람처럼 물었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이제 일어서려던 참입니다.”
변진상이 함께 나서며 말을 붙였다.
“얼마 전에 백 사장님을 우연히 뵀는데 말입니다, 아주 걱정이 많으시더라고. 장가갈 때도 됐는데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여자 만날 생각도 없어 보인다면서.”
지협은 조금의 동요도 없는 눈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틀 뿐이었다.
“회장님이야 늘 정정하시지만 그래도 빨리 좋은 소식 들려 드리는 게 도리 아닐까 싶은데. 안 그래요? 백 이사 정도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테고. 정말로 만나는 여자 없나?”
“줄 선 여자도 만나는 여자도 없고, 결혼 생각도 없습니다.”
지협이 걸음을 멈췄다. 쌀쌀맞은 대꾸에 속으로 욕 몇 마디를 뱉던 변진상도 덩달아 멈췄다.
“회사에서 사적인 얘기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뜨끔해진 변진상이 다른 말을 꺼내려는데, 지협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실례를 무릅쓰고 저도 사적인 질문 하나만 드리죠.”
“……?”
”견이는 잘 하고 있습니까?”
“아아.”
얼마간 긴장했던 변진상의 입매가 미미하게 틀어졌다.
“언제 봐도 우애가 참 깊으십니다. 친형제라도 이렇게까지 챙기진 않을 것 같은데.”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닙니다. 엄연히 일개 신입사원인데 혼자 특별대우라도 받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다른 직원들 보는 데 그럴 수야 없지요.”
“제가 괜히 죄송하네요. 견이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대표님이 얼마나 불편하시겠습니까. 하필 어려운 시기에 맡으셔서 아직까지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으니 가뜩이나 생각이 많으실 텐데.”
방금 전 임원회의에서 블랑아이의 매출 부진 이야기가 나왔던 것을 떠올린 변진상의 미간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재계약 기간은 다가오는데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고. 일개 신입사원이 들고 들어온 프로젝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대표로서 책임지셔야 할 부분도 적지 않을 텐데 그것도 부담스러우실 테고. 여러모로 제가 대표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말은 면목이 없다는데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직 배가 덜 고파서 먹잇감을 이리저리 굴려보는 포식자처럼 여유로웠다.
“그래도 저는 변 대표님이 그 자리에 오래 계셔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표님이 물러나시면 누가 그 자리에 앉겠습니까?”
변진상의 머릿속이 바삐 뒤엉켰다.
“어이, 변 대표!”
저 앞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아까 간 줄 알았던 재무이사 염훈이 다가왔다.
“백 이사도 있었구만. 둘이서만 무슨 얘길 그렇게 하시나?”
지협도 변진상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염훈이 변진상의 어깨를 짚었다.
“몸뚱이가 영 찌뿌둥해서 이따 사우나나 같이 갈까 하고 불렀지. 백 이사도 생각 있으면 같이 갈래요? 요샌 젊은 사람들도 많던데.”
“괜찮습니다.”
지협이 변진상 쪽을 돌아보며 짧은 미소를 흘렸다.
“나중에 따로 식사나 한 번 하시죠.”
실실 웃고 있던 염훈의 눈초리가 굳었다.
“다음 주주총회 때 뵙겠습니다.”
단정한 인사를 남긴 지협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꼿꼿한 뒷모습을 지켜보던 염훈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제 식구들 빼면 죄다 지뢰로 보이나? 공식적인 자리 아니면 밥 한 끼를 같이 안 먹으려고 하니.”
그때까지도 어깨를 짚고 있던 손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근데 자네한테는 식사나 한 번 하자고 하는 거 보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변진상은 전혀 안 들리는 사람처럼 먼 허공만 노려보고 있었다.
***
‘와, 씨, 젠장, 옘병……!’
사우나 안으로 들어선 견은 소리 없는 내적 비명을 터뜨렸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고급스러운 곳이었으나 견의 눈에는 끔찍한 신세계일 뿐이었다.
전혀 보고 싶지 않은 타인의, 그것도 남자들의 알몸을 봐야 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저까지 벗어야 하다니.
주위 사람들을 힐끔힐끔 따라 해가며 어영부영 로커에 옷을 넣은 견은 허리에 수건부터 둘러맸다. 뒤이어 머리에도 수건을 푹 뒤집어쓰고 심호흡을 했다.
아까 지협에게 연락이 왔다. 변진상과 염훈이 같이 사우나에 간다는 말을 들었으니 따라가 보라고.
안 그래도 우일두 차장 혼자서 그 많은 장부들을 조작했을 것 같진 않아 재무팀 전체로 추적 범위를 넓힌 참이었다. 뭔가 잡힐 것 같다는 촉이 오긴 했는데 사우나라는 데서 걸렸다.
“나 사우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형이랑 같이 가면 안 돼?”
[재무이사 만난다는 것까지 알려줬으면 됐지, 옷까지 같이 벗어줘야 해?]
안 그래도 그 사람들이 같이 가자는 거 거절했는데 뒤늦게 갔다가 눈에 띄기라도 하면 꼴이 우스워진다는 말까지 듣자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역시 섭호뿐이었다.
“나랑 사우나 갈래?”
회사에서 전화를 받은 섭호는 공손하게 잘랐다.
[싫습니다.]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싫다니. 나는 좋아서 가자고 하는 것 같아? 사정이 있어서 그래. 일종의 잠복취재 같은 거야. 가자.”
[그런 거라면 더욱 곤란합니다. 저는 너무 커서 시선이 쏠립니다.]
“너만 크냐? 나도 크거든?”
[저보다는 작지 않습니까. 키가.]
“그래, 키가.”
[아무튼 혼자 가십시오. 전 야근입니다.]
괘씸하긴 했으나 섭호가 워낙 큰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시골에서 광합성 좀 적당히 하고 나 정도만 클 것이지. 농구선수 할 것도 아니면서.’
은규가 얼핏 떠올랐지만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여자친구에게도 못 보여주고 아껴둔 몸인데 여자친구 절친의 남편과 먼저 트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깊은 한숨과 함께 마음을 다진 견은 쓰개치마 둘러쓴 조선시대 여인네처럼 코앞에 수건을 모아 쥐고 눈만 내놓은 채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저 인간들 벗은 걸 왜 보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탕 안에 앉아 있는 변진상과 염훈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견은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러고는 과감하게 같은 탕에 발을 담갔다.
‘커헓! 뭐가 이렇게 뜨거워! 저 인간들은 어떻게 저렇게 평온할 수가 있지? 감각이 마비된 거 아니야?’
당장 발을 빼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견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가까스로 몸을 낮췄다.
둘은 수건을 부여잡고 슬슬 앉는 그를 흘긋 보긴 했으나 이내 고개를 돌리고 하던 대화를 이었다.
“참, 유손제약 딸 내외 말이야. 이혼하네 마네 한다던데. 손 사장이 우리 집안에 이혼은 없다고 결사반대해서 난리도 아니라는 모양이야.”
“아직도 그 집안에 관심이 가나? 나는 그때 날린 주식 생각하면 유손의 유 자만 들어도 혈압이 오르는데.”
견은 수건 아래 날카로운 눈빛을 감추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울리는 데다 이런저런 소음들이 섞이긴 해도 잔뜩 집중하면 그럭저럭 들리긴 했다.
잡담 가운데 쓸모 있는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열탕지옥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참, 얼마 전에 한 사장 만났다고 하지 않았나? 얘기는 잘됐고?”
“그게, 뜻밖의 손님이 끼어들었단 말이지.”
견의 신경이 더욱더 곤두섰다.
“밥을 먹고 있는데 말이야, 갑자기 백…….”
그런데 그때, 웬 배불뚝이 중년이 견 옆으로 들어오더니 정체불명의 신음성을 흘리며 몸을 담갔다.
첨벙첨벙에 이어 어푸푸거리는 소리, 그리고 간신히 적응한 뜨거운 물이 다시 요동치며 살을 익혀대는 고통에 견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긴 한데 말을 안 해주니.”
수영이라도 할 기세로 요란하게 물을 끼얹던 남자가 저만치 자리를 잡고 나서야 다시 변진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견은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뭐, 어쨌든. 자고로 사람은 치고 빠지기를 잘해야 된다잖나. 그때도 잘 빠졌으면 좋았을 것을.”
탕 모서리에 팔을 걸친 변진상이 목을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잘 빠져야겠어. 내가 이제 와서 그 건방진 놈이 벌인 일 뒤치다꺼리나 해야 되겠나?”
“어허, 혼자 빠지면 쓰나. 어쩔 생각인데?”
“조금 더 지켜보면서 챙길 거 챙기고. 이번엔 단가 말고…….”
견이 저도 모르게 몸까지 슬쩍 기울일 만큼 집중하는데, 아까 그 배불뚝이 중년남이 또다시 물살을 헤치고 푸헉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들리지도 않는 건 물론이요, 뜨거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 된 견은 도저히 못 참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탕 밖으로 발을 빼는 견의 옆모습을 본 염훈이 휘파람을 부는 모양새를 하고는 위아래로 훑었다.
“나도 젊었을 땐 저랬는데 말이야.”
“안 그런 사람도 있나? 막말로 그때 같지 않으면 어떤가. 요즘도 룸 가면 아가씨들이…….”
잔뜩 인상을 찡그린 견은 가장 구석에 있는 샤워기 쪽으로 향했다. 얼른 헹구고, 집에 가서 다시 박박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협의 말대로였다. 너무 정확해서 소름 끼칠 정도다.
제가 있는 곳이 안전치 않다는 걸 알았을 때 자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고, 누구보다 빨리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변진상 같은 기회주의자들은 분명 후자일 거라고. 조금만 궁지로 몰아도 본색과 약점을 한데 드러낼 거라고.
뜻밖의 육탄전을 벌이느라 발갛게 익어버린 몸을 찬물 아래서 대강 식힌 견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치고 빠질 때가 아니라 맞고 잡힐 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