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70화 (70/86)

#70. 꼭 지켜야겠어요, 이 가족

2017.12.31.

토요일 오후, 모단의 집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백견이라고 합니다.”

혜숙에게 인사하는 견을 모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훈훈한 체격과 특유의 아우라 때문에 가뜩이나 좁은 현관이 터질 것 같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하나부터 열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눈이 퀭해지도록 걱정하더니, 막상 오니 멀쩡하다 못해 빛이 났다.

“만나서 반가워요. 모단이 엄마 이혜숙이에요.”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혜숙은 그 남자 언제 데리고 올 거냐며 생각날 때마다 물었다.

누구 만난다고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적이 없어 의아했으나, 이번엔 궁금할 만도 하지 싶긴 했다.

조심스레 시간 되느냐고 묻자 견은 당황하면서도 감격했고, 생각보다 빨리 약속을 잡게 됐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견이 들고 온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두 손으로 건넸다.

“아이고, 예뻐라. 고마워요.”

기분 좋게 선물을 받아 든 혜숙이 먼저 몸을 돌리며 손짓했다.

“얼른 들어와요. 밥부터 먹게.”

견의 집과는 달리 현관에서 몇 걸음 들어오면 거실이고 몸만 돌리면 주방이었다.

대문 앞까지 나던 맛있는 냄새의 정체, 식탁이 부러지게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본 견은 와아, 하고 감탄했다. 그러다 죄송해했다.

“주말에 쉬셔야 하는데 괜히 번거롭게 해드린 건 아닌지…….”

“괜찮아요. 원래 주말엔 거하게 해 먹고 그래요. 앞으로도 집밥 생각나고 그러면 편하게 놀러 와요.”

“감사합니다.”

”남자끼리 산다고 밥 못 먹고 다니진 않죠?”

“네.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오셔서 청소랑 반찬 같은 거 해주고 가세요. 그래도 냉장고에서 꺼낸 음식이랑 이렇게 바로 해주신 음식이랑은 천지 차이죠.”

살갑게 대답한 견이 재킷을 벗어 단정히 걸쳐 두고 자리에 앉았다.

“얼른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견은 혜숙이 먼저 들기를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었다.

혜숙은 가만히 견을 살폈다.

곱고 바르게 자란 티가 나는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긴장은 하되 주눅은 들지 않는 여유가 엿보였다.

모단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도 제법 잘 어울렸다. 습관처럼 서로를 살피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 짓는 것이 몸에 배인 듯 자연스러웠다.

흐뭇함과 먹먹함이 한데 이는 가운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 내 딸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자 보호자가 이 남자가 되겠구나. 내가 아니라.’

혜숙은 시큰해지려는 코를 훌쩍 문질렀다.

이런 비교는 하면 안 되지만, 민철도 밥을 얻어먹으러 온 적이 있었다. 너무 어려워하는 통에 덩달아 불편해서 대화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백견 씨, 원래 가지 잘 안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엄청 잘 먹네.”

“이게 가지라고요?”

“가지구이를 반 넘게 먹어놓고 이거 가지냐니.”

모단에게 웃음 섞인 타박을 들은 견의 귓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예비 장모님께서 가지도 모르는 바보, 혹은 캐비어는 먹어봤어도 가지는 못 먹어본 것 같은 놈에게 내 딸을 줄 순 없다고 하실까 봐 겁난 견이 서둘러 덧붙였다.

“가지가 이렇게 맛있을 리가 없는데?”

“뭔 소리람. 난 또, 우리 엄마가 한 거라고 억지로 먹는 거면 안 그래도 된다고 할랬더니.”

“그냥 맛있어서 계속 먹은 거예요. 무슨 고기나 버섯인 줄 알았는데.”

피식 웃은 모단이 가지구이를 견 앞으로 당겨주었다.

“그렇다고 이것만 먹지는 말고 골고루 먹어요. 편식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죠?”

“알아요. 정모단 선생님한테 참교육 받는 거. 근데 먹기 싫은 게 있어야 편식을 하죠. 다 맛있는데.”

견이 간신히 홍조를 가라앉히고는 웃었다.

혜숙의 눈가에 잡힌 주름이 곱게 깊어졌다.

“맛있게 잘 먹어주니까 음식 한 보람 있고 고맙네. 많이 먹어요.”

화기애애한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차까지 마신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거실로 옮겼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화투판이 벌어졌다. 견이 소파 아래 곱게 놓여 있던 꽃무늬 담요를 방석으로 착각하고 깔고 앉았다가 일어난 게 발단이었다.

“백견 씨, 저기.”

견의 옆에 바짝 붙어 앉은 모단이 어깨 너머로 속닥거렸다.

“새 있네. 새 먹어요.”

맞은편에 앉은 혜숙이 눈에 불을 켰다.

“저 기집애가 아까부터 자꾸. 그럴 거면 네가 치든가!”

“이번 판까지만 봐줘, 엄마. 백견 씨 맞고 처음 쳐본다잖아.”

모녀가 싸우는 사이 새를 찾아 기웃거리던 고스톱 무식자 견이 화투짝 하나를 호기롭게 내쳤다. 쫙 소리와 함께 모단의 고함이 터졌다.

“와아이씨! 그걸 왜 내요!”

“왜요? 여기 똑같은 그림 있는데?”

“그거 아니라고! 어휴!”

얼른 몰고 가달라고 펼쳐져 있던 새 두 장을 놔두고 엉뚱한 패를 낸 거였다.

혜숙이 바로 경고했다.

“낙장불입 알지?”

모단이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며 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일단 뒤집어봐요.”

견이 시킨 대로 패를 뒤집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혜숙이 외쳤다.

“쌌네, 쌌어! 미안해서 어째?”

바닥에 있는 피와 견의 피까지 싹쓸이한 그녀가 만세를 불렀다. 모단은 허무하게 날아간 고도리를 찾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리고에 흔들고 피박이니까…… 에이, 상한가 없이 할걸. 만 원만 줘.”

백 원짜리 판이 만 원도 되는구나.

기막힌 수익률에 감탄한 견이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돈을 드리려는데, 모단이 홱 낚아채더니 천 원짜리 두 장을 빼고 혜숙에게 건넸다.

“그건 왜 가져가는 거예요?”

“개평 몰라요?”

“아아, 노름하다 딴사람이 떼주는 거?”

“그렇죠. 노름이라 그러니까 좀 그러네. 놀이라고 합시다. 전통놀이.”

“네 덕분에 딴 돈도 아닌데 아까부터 왜 자꾸 떼가?”

“엄마는. 선수끼리 왜 이러실까.”

제 주머니에 돈을 넣은 모단은 견이 가져온 과일바구니에서 꺼내 깎은 사과를 포크로 찍어 혜숙의 입에 넣어주었다. 하나를 더 찍어 견에게도 건넸다.

흡사 명절날 오후에 가족들이 모인 것처럼 느긋하고도 즐거웠다.

“이제 감 잡았을 것 같은데. 딱 한 판만 더 할까나?”

혜숙이 모단에게 손짓했다.

“안방 가서 내 지갑 좀 갖고 올래? 잔돈이 하나도 없네.”

“얼마나 더 뜯으려고 그래?”

모단이 툴툴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혜숙이 나직이 불렀다.

“백 군.”

“네?”

어설프게 화투패를 모으던 견이 고개를 들었다.

“실은 모단이 모르게 자네한테 할 말이 있는데.”

“저한테 말씀이십니까?”

견의 눈이 커졌다. 혜숙은 안방 쪽을 힐끔 보고는 빠르게 덧붙였다.

“나중에 따로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 아까 받은 명함에 있는 번호로 연락해도 괜찮을까?”

지그시 마주쳐 오는 혜숙의 눈빛이 어딘가 절박했다. 견은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얼른 대답했다.

“네. 편하신 시간에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모단이 방에서 지갑을 들고 나왔다.

견에게만 보이게 고개를 끄덕인 혜숙이 화투패를 넘겨받아 섞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판은 모단이 없이 우리 둘이서 하기. 알았지?”

“다음에 또 봐요.”

현관에서 배웅해 주는 혜숙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견은 모단과 나란히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러다 대문 옆에 세워져 있는 빗자루를 보고 피식 웃었다.

“왜 웃어요?”

“오늘 너무 즐거워서요.”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맞을 게 뻔했기에 자연스럽게 넘겼다.

“다행이네요. 불편하진 않았어요?”

“전혀요. 그냥 다 좋았어요.”

견이 모단의 손을 꼭 잡았다.

“가족을 선물 받은 것 같았어요. 조금 눈물 날 것 같기도 한데 슬픈 건 아니고…… 사람들한테 막 자랑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라고 하면 알겠어요?”

모단은 잠잠히 웃고는 견의 뺨을 한 손으로 토닥였다. 얌전히 뺨을 내주고 있던 견이 속삭였다.

“모단 씨네 집 거실에서 마당 잘 보여요?”

“보면 보이겠지만 엄만 이제 드라마 보실 거예요.”

모단이 견의 목에 팔을 감았다. 견이 기다렸다는 듯 가느다란 허리를 당겨 안았다.

“고마워요. 우리 엄마 앞에서도 착하고 멋있어줘서.”

“멋있는 건 항상 가능하지만 늘 착하진 않은데, 모단 씨가 나를 착하게 만드는 거예요.”

빈틈없이 꼭 붙어 체온을 나누는 동안, 한 가지 생각이 견의 머릿속을 채웠다.

‘꼭 지켜야겠어요, 이 가족.’

이 아늑한 집에,

고맙도록 다정한 모녀의 일상에,

그리고 미래에도 좋은 일만 있도록.

잔잔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 함께할 수 있도록.

모단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견은 나오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는 대문 밖으로 나섰다.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던 손이 멈췄다. 진지하던 혜숙의 눈동자를 떠올리자 골똘해졌다.

‘근데 따로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뭐지……?’

***

며칠 후, 견과 섭호는 각자 퇴근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지협의 집으로 향했다.

셋이 사석에서 모인 건 오랜만이었다. 평소였다면 게임기를 붙들고 축구게임에 몰두하거나 술을 마셨겠지만, 오늘의 주제는 진지하고 어둑했다.

“재무이사랑 공범 확실해. 사우나에서 내가 보고 들었어.”

“좋은 거 많이 봤슈?”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까 조용히 해.”

견이 섭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섭호는 물론이고 지협도 피식거렸다.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씻는 곳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견이 얼마나 큰 정신적 충격을 입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겨우 웃음을 거둔 섭호가 비즈니스모드로 돌아왔다.

“변진상 부인 계좌로 거액이 입금된 정황이 있습니다. 한성어패럴과 독점 계약한 시기와 겹치고요. 부인 외에도 차명계좌가 몇 개 더 있는 걸로 나옵니다.”

지협이 뜨악한 눈을 했다.

“또 쌍으로 해킹했어? 이번에는 은행이고?”

“도련님께서 일 복잡해지면 돈으로 발라줄 테니까 맘 놓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하지 않으면 알아낼 도리가 없는데 어쩌라고.”

대놓고 도른자 티를 내는 동생1과, 티는 안 나지만 도른자랑 지나치게 죽이 잘 맞는 동생2를 돌아보는 지협의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웠다.

“……국정원으로 가셔야 할 인재들이 왜 희명그룹에 들어와서 나까지 피곤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나랏일까진 관심 없고, 정의를 위한 불법이야.”

“불법인 거 알긴 아네.”

“법 알기를 개똥으로 아는 놈들 상대하면서 나만 준법정신 발휘할 필요가 있어? 엄한 사람한테 피해만 안 주면 되지.”

지협은 알겠다는 투로 한 손을 휘휘 저었다. 섭호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변진상이 그 차명계좌 중 하나로 유손제약 주식을 대량 샀었습니다.”

“유손제약?”

견과 섭호가 동시에 지협의 눈치를 살폈다. 지협의 짙은 눈썹은 아까 삐딱해진 각도 그대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네. 그게 이사님 약혼 직후인 걸로 보아 정보가 샜던 것 같습니다. 결국엔 비싼 쓰레기가 됐겠지만요.”

이래저래 여러 사람 보내 버리는 여자네, 하는 말을 삼킨 견의 입꼬리가 비죽 틀어졌다 돌아왔다.

잠자코 팔짱을 끼고 있던 지협이 한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린 목과 어깨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회사 돈 탐낼 만한 이유들도 가지가지였네. 주식 손해 본 거 메꾸려고, 국내외로 씀씀이 큰 아내하고 딸 비위 맞추느라고, 젊은 상간녀한테 갖다 바치고 저도 펑펑 쓰느라고.”

“뭐야. 형도 김광남하고 우일두 뒷조사했어?”

“가끔 그런 일도 해줘야 심부름센터 직원들도 먹고살지.”

“무서운 일을 착한 일처럼 포장을 하네. 누가 홍보팀 이사 아니랄까 봐. 직업병이야?”

“직업병이고 뭐고.”

지협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틀었다. 한 번 더 우둑 소리가 나며 끄응 하는 신음까지 흘러나왔다.

“골치가 안 아프게 생겼어? 이거 터뜨리고 나면 회사 이미지가 어떻게 될 거야. 그거 누가 어떻게 다 수습할 거냐고.”

“어…… 형이 아름답게 잘?”

스윽 돌아보는 지협의 눈길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견은 다소곳이 두 손을 모았다.

“원단공장이랑 단가 협의 없었다는 것도 확실하게 정리했어. 얼마 전에는 단가를 못 건드리니까 품질을 건드렸더라고. 양선해 씨한테 조용히 확인 부탁했더니 원래 들어오던 원단보다 한참 떨어지는 게 맞대. 샘플하고 견적서도 다 챙겨뒀어.”

“발뺌할 수는 없겠네.”

지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께는 언제 말씀드릴 거야?”

견의 낯빛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임시주총 때 터뜨릴 거니까 그전엔 말씀드려야겠지. 작은아버지께서는 뭐라셔?”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많이 충격받으실까 봐 걱정하시긴 하는데, 우리끼리 잘 해결해 보라고 하셨어. 안 그래도 변진상이 이런저런 선물들을 몇 번 보낸 적이 있었는데 거절하길 잘했다고 하시더라.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라고.”

“응.”

세 남자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근데 한성어패럴 쪽이 좀 약해 보이는데.”

지협이 툭 던졌다. 생각에 골몰해 있던 견이 눈을 들었다.

“약하다니?”

“그림 받은 사람들의 리스트하고 탈세 증거들 확보한 것까진 좋은데 확실히 잡을 만큼은 아니야. 발뺌하거나 기껏해야 벌금쯤 내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것 같은데.”

견도 내심 걱정하던 바였는데, 지협의 냉정한 목소리로 듣자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안 돼. 어떻게든 제대로 무너뜨려야 해.”

비장하게까지 보이는 견을 살핀 지협이 눈을 찌푸렸다.

“한성어패럴에 왜 그렇게까지 집착해?”

섭호 역시 궁금한 눈을 했다.

거절한 그림을 억지로 다시 보낸 건 충분히 거슬릴 만했다. 그러나 지협과 섭호의 눈에는 그들만의 저열한 방식으로 견에게 잘 보이려 한 것으로만 보였다. 사양한 돈봉투를 은근슬쩍 다시 찔러주는 것처럼.

그런 사람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평소대로 무시하면 그만인데, 견은 오히려 변진상을 비롯한 희명 사람들보다 한규철에게 더한 적의를 내비쳤다.

뇌물도 호의도 아닌 지독한 악의라고, 모단의 개인사를 제 입으로 말할 순 없었던 견은 답답함과 분노를 꾹 눌렀다.

“나중에 말해줄게. 당한 만큼 갚아줄 게 있다는 것만 알아줘.”

***

“검사 끝나셨습니다.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모단은 진료복을 벗고 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치료실을 나왔다.

몇 년 동안 본 낯익은 산부인과 의사가 앞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초음파상으로 봤을 때 특별한 이상 없습니다. 지난주에 하신 혈액검사 호르몬 수치도 양호해요.”

다른 날이었다면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일어섰을 텐데, 모단은 가방을 쥐고 머뭇거렸다.

“저, 선생님.”

“더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네. 그러니까…… 이렇게 아무 이상이 없는데 왜 월경이 없고 임신이 안 되는 걸까요?”

의사의 눈가에 난처함이 스쳤다.

처음 무월경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다닌 환자지만 한 번도 치료에 대한 의지를 비친 적은 없었다.

진담인지 자기위로인지는 몰라도 별 이상 없고 월경 안 하면 편하고 좋죠, 라고 한 적도 있었다.

정기검진을 받을 때마다 희한하게도 결과는 항상 말짱해서, 혹시나 다음 검진 때는 월경을 시작했다고 하는 게 아닐까 의사가 내심 기대할 정도였다.

“음…… 아무래도 이제 결혼적령기시다 보니 더 신경이 쓰이실 수밖에 없겠네요.”

“꼭 그런 것 때문은 아니고요, 이상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모단의 귓가가 미미하게 달아올랐다.

“저도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정모단 씨는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라……. 아예 초경부터 없는 원발성 무월경은 보통 신체적 이상이나 특정 질병이 원인인 경우가 많은데 그것도 아니거든요.”

“네…….”

“만약 이제라도 적극적인 치료를 원한다고 하시면 여기보다 더 큰 병원으로 가보시는 걸 권해 드릴게요. 희명병원 산부인과에 백지미 교수님이 이쪽에선 가장 유명하세요. 일반진료를 거의 안 보시긴 하지만 학교 선배님이시라서 따로 소견서를 써드릴 수도…….”

“아, 아니에요!”

백지미 교수님이라면 견의 고모님이 아닌가. 모단은 허둥지둥 일어섰다.

“그냥 한 번 여쭤본 거예요. 감사합니다. 다음 검진 때 뵐게요!”

따라 나온 간호사에게도 눈인사를 하고 수납하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아 조금 기다려야 했다.

모단의 시선이 진료실 앞 소파에 앉아 있는 부부에게로 향했다. 무심코 본 건데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게 되었다.

볼록하게 부푼 배 위에 한 손을 얹고 있는 여자와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다정히 웃고 있는 남자.

눈을 맞추고 얘기를 주고받다가 동시에 웃으며 배를 쓰다듬는 부부를 멍하니 보던 모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웃는 것도 뭣도 아닌 표정을 짓고 있었음을 그제야 깨닫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정모단 씨.”

“네.”

진료비를 계산한 후에 몸을 돌렸다. 그런데 몇 걸음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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