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71화 (71/86)

#71. 백견이나 잘 가져요

2018.01.03.

몇 걸음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걸음을 빨리한 모단이 앞에 가던 여자를 가볍게 잡았다. 돌아본 그녀의 눈도 커졌다.

“모단 언니!”

“금지 씨, 어떻게 여기서 보네요.”

반가운 맘에 불러놓고 모단은 찔끔했다.

저야 워낙 오래 산부인과에 다닌 데다 부끄러운 곳이라고 생각을 안 해서 거리낄 게 없지만 신경을 쓰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다행히 금지는 해맑게 웃었다.

“친구가 이 병원에서 아기를 낳았거든요. 산모랑 갓난아기 보고 가던 중이었어요.”

“그랬구나.”

“근데 언니는 어떻게 여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금지가 말하다 말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다른 손으로 모단의 팔을 콩콩콩 때렸다.

“어머! 설마! 세상에! 언니, 축하해요!”

“엥? 뭐를요?”

“근데 백견 그 오빠 미친 거 아니에요? 사고는 같이 쳐놓고 어떻게 언니 혼자 병원에 보낼 수가 있어요?”

금지가 당장에라도 견의 멱살을 잡으러 갈 기세로 도끼눈을 떴다.

그제야 무슨 오해를 해버렸는지 깨달은 모단의 눈썹이 사정없이 올라갔다.

“아직 무사고거든요? 그런 거 아니고 그냥 검진 받으러 온 거라고요!”

“에이, 뭐야.”

금지가 좋다 말았네, 하며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모단은 한숨을 내쉬고는 덧붙였다.

“근데…… 백견 씨한테 나 산부인과에서 봤단 말 하지 말아줘요.”

“아앗! 역시……!”

금지의 두 뺨 가득 다시 화색이 돌았다.

“아닌 게 아닌 거 맞죠? 나중에 초음파 사진 딱 보여주면서 오빠 놀래켜 주려고 그러는구나! 자기야, 우리 꼬물이래. 아빠 돈 많이 벌어오쩨요∼ 하면서!”

“자기는 무슨, 꼬물이는 무슨! 아니라니까요!”

“진짜 아니에요? 쳇. 오빠랑 언니 외모 반반 섞고 성격은 딱 언니만 닮은 조카 보고 싶었는데.”

순간 모단의 말문이 막혔다. 웃어넘기든 수줍어하든 해야 하는데 입 근육이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금지가 모단의 팔짱을 꼈다.

“언니, 시간 괜찮으시면 근처에서 차 한잔하고 가요. 오랜만에 봤으니까.”

“그래요.”

나란히 병원을 나온 둘은 근처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저 오늘 신생아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어요. 완전 인형만 한 거 있죠. 저런 애기가 어떻게 뱃속에 있었을까 싶고.”

“나도 제일 친한 친구가 첫 아이 낳았을 때 그랬어요. 너무 신기하고 예쁘고.”

태어난 지 몇 시간밖에 안 된 해빛이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것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너무 부럽더라고요, 언니.”

자몽에이드를 휘휘 젓던 빨대를 놓은 금지가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나도 빨리 내 가족 갖고 싶은데.”

마치 가족이 없는 사람 같은 말투였다. 모단은 의아해졌다.

“부모님하고 오빠들도 가족은 가족이지만 그 가족의 주인은 내가 아니거든요. 난 그냥 잘 만들어진 케이크 위에 올라간 설탕 장식 같은 거예요. 있으면 더 예뻐 보이지만 없어도 딱히 먹는 데 지장은 없는.”

노블그룹 황만석 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늦둥이 막내딸.

모단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속내를 담담히 내놓은 금지가 방긋 웃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소원이었어요. 늘 우아해 보여야 하는 가족 말고, 아무도 안 보는 산속에 우리끼리만 살아도 시끌시끌 즐겁고 행복한 가족과 사는 게. 그래서 결혼 빨리 할 거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꽃받침처럼 금지의 얼굴을 받치고 있던 손이 한쪽으로 맥없이 기울었다.

“섭호 오빠가 드럽게 협조를 안 해줘가지고. 하아…….”

모단은 작게 웃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위 비서님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예 테이블에 엎드렸던 금지가 삐죽 고개를 들었다.

“견이 오빠가 처음에 언니한테 뭐라고 고백하면서 사귀자고 했어요?”

“어…… 무턱대고 자기 책임지라고 했던 것 같은데.”

“구제불능이다, 정말.”

금지의 얼굴 가득 한심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문자로 비키니 사진을 받았을 때 견이 지었던 것과 똑같았다.

“그럼 언니가 제일 감동받았던 말은 뭐예요?”

사춘기 소녀처럼 반짝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모단은 슬그머니 허공을 보았다.

견이 한 수많은 말들이, 목소리가, 눈빛이 그려졌다.

“감동받은 말이…….”

책임지라고,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없으면 못 산다고.

예쁘다고, 보고 싶다고, 고맙다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너무 많아서.”

“어어, 언니 얼굴 빨개진 거 처음 봐요!”

고개를 푹 떨어뜨렸던 모단이 커피를 맥주 마시듯 원샷하고는 얼음을 와작와작 씹었다.

“다행이에요. 언니도 견이 오빠 많이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금지는 정말로 들떠 보였다.

그리고 아주 조금쯤, 슬퍼 보이기도 했다.

“혼자만 좋아하는 것 같은 기분, 내가 너무 잘 아는데 그거 많이 힘들거든요. 상대방이 조금만 표현해 줘도 얼마나 기쁜데.”

금지와 헤어진 후, 버스에서 내린 모단은 집을 향해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견이 제게 해준 말과 행동들을 두서없이 더듬다가 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모단 씨.]

그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설레게 만들어주는 사람.

“백견 씨.”

그에 비하면 저는 호칭부터 너무 딱딱한가 싶다.

“견이 씨.”

변해가자. 좋은 쪽으로.

매일 조금씩이라도 더 솔직하게.

“지금 어디예요?”

[맞추면 5억 줄게요.]

“이놈의 철딱서니, 어디서 돈지랄을……! 아효.”

고작 1분 전에 한 다짐 따위 다 날아가고 또 험한 말이 나오게 만들다니. 금지 말마따나 드럽게 협조 안 해준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딘지만 말해요. 보고 싶으니까.”

박력에 치인 듯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낮은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그럼 더 빨리 왔어야지.]

“네?”

[빨리 걸어요. 뛰어오면 더 좋고.]

모단은 고개를 들었다.

제집 앞에 세워져 있는 차와 그 차에 기대서 있는 견이 보였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다른 손에는 커피 두 개가 든 종이 캐리어를 들고 있다.

저 멀리 웃고 있는 입술의 움직임이 보였다. 귀에 댄 휴대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스카페모카, 맞죠?”

“날마다 선생님 것까지 사가지고 기다렸는데. 맨날 혼자서 두 잔 다 마시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다구요.”

언젠가 그가 했던 말들이 노래처럼 들려온다.

“대뜸 책임지라고 한 말은 미룰게요. 일단 천천히 서로 알아가도록 할까요?”

“남자친구 있어요? 있다고 하면 안 쫓아다닐게요.”

“그럼 3초 안에 대답해 봐요. 정모단 선생님 남친은 몇 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을 쌌을까요?”

모단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내 뛰는 거나 다름없어졌다.

그대로 견의 허리를 와락 감으며 안겼다.

“어어, 커피 쏟아질 뻔했어!”

휘청한 견이 커피를 든 손을 멀찌감치 뻗었다. 휴대폰을 얼른 주머니에 넣고 그 손으로 모단의 등을 감쌌다.

“이렇게까지 격하게 보고 싶었는지 몰랐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모단이 몸을 조금 떼고 견을 올려다보았다.

“견이 씨만 그런 거 아니에요. 나도 그래요.”

“오늘 왜 이래? 누구세요? 정모단 어디 갔어요?”

나 여기 있다, 하고 한 대 때려 버릴까 하다가 맘을 바꿨다.

“3초 안에 대답해 봐요.”

“뭘요?”

“견이 씨는 몇 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 쌌어요?”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하다고?”

“셋, 둘.”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인가? 아, 여덟 살이요! 엄마가 너 학교 가지 말고 다시 유치원 가라고 구박해서 학교 가방 끌어안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는데.”

모단의 웃음이 터졌다.

영문도 모르고 모단이 웃으니까 같이 웃던 견이 제 허리에 매달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너무 늦으면 어머님이 걱정하실까 봐 집 앞에서 딱 커피 한 잔만 같이 마시고 들여보내 주려고 했는데…….”

“했는데?”

“납치해야겠다.”

견이 차 문을 열어주며 눈짓했다.

“타요. 안 타면 좋은 데 안 데려가 준다.”

“납치치고는 퍽 정중하네요.”

언젠가, 열 번 찍어 안 넘어오면 한 달에 한 번씩 납치라도 하고 싶었던 것을 떠올린 견은 웃기만 했다.

모단이 조수석에 오르려는데 전화가 왔다. 은규였다.

“여보세요? 헉, 정말? 그 정도야? 알았어, 바로 갈게.”

모단이 다급히 몸을 돌렸다. 견도 놀란 눈을 했다.

“무슨 일 있어요?”

“새윤이가 가게에서 과일 다듬다가 손가락을 베었는데 상처가 깊은가 봐요. 응급실 가서 꿰매야 할 것 같은데 해빛이 봐줄 사람이 없어서 부탁 좀 한다고.”

“그래요? 그럼 얼른 가야죠.”

차는 그대로 세워둔 채 새윤의 커피숍으로 향했다.

둘이 같이 오는 것을 본 은규와 새윤이 미안한 눈을 했다.

“야, 데이트 중이었으면 말을 하지. 미안하게.”

“뭐가 미안해. 세상에, 피 많이 난 것 같은데 얼른 가봐.”

“고마워. 죄송해요, 백견 씨.”

“천만에요. 걱정 마시고 치료 잘 받고 오세요.”

삼촌, 하며 반가워하는 해빛이의 손을 잡아준 견이 미소를 지었다.

은규의 차가 멀어지고, 모단이 해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다쳐서 많이 놀랐겠다. 괜찮아?”

“엄마 손가락에서 피가 엄청 많이 났어. 아빠가 119에 신고해야 된다고 막 울려고 그랬는데 엄마가 해빛이까지 놀라잖아! 조용히 하고 차 키나 가져와! 그랬어.”

소란했을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모단은 웃고 말았다.

“병원 가서 의사선생님이 치료해 주시면 금방 나을 거야. 이모랑 삼촌이랑 잠깐만 놀고 있자. 뭐 하고 놀까?”

“나 거기 가고 싶어! 저어기 미용실 옆에 인형 많이 있는 데.”

“미용실 옆에? 아, 인형뽑기 가게 말하는 거야?”

해빛이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축 처져 있던 동그란 눈에 금세 생기가 돈다.

“새윤이가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전에 은규가 술 먹고 거기서 몇만 원 쓰고 겨우 인형 하나 들고 왔다고 욕을 바가지로…….”

혼잣말을 웅얼대는 모단의 눈치를 살핀 견이 해빛이를 덥석 안더니 서둘러 앞장섰다.

“어디야? 가자. 나 그거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삼촌이 예쁜 인형 뽑아줄게. 가자!”

“저 인간이, 한 번도 안 해봤다면서 뭘 장담을……. 잠깐만! 갔다가 못 뽑으면 애 운다고요!”

기계 안에 있는 인형이 밖으로 못 나올 수도 있다는 걸, 더군다나 원하는 인형이 딱 나와 줄 확률은 더더욱 낮다는 걸 애들이 이해할 리 없다.

그러나 일곱 살 어린이와 스물아홉 애어른은 이미 신이 나서 저만치 가고 있었다.

“내가 못 살아…….”

“으엡! 아오오오, 또!”

모단이 빈 집게만 덜렁거리는 인형뽑기 기계를 노려보다가 철푸덕 주저앉았다.

한 팔에 포동포동한 토끼 인형을 안고 구경하던 해빛이 가게 구석으로 향했다.

“삼촌. 이모 그만 말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환전하는 기계 앞에서 5만 원을 만 원짜리로, 만 원을 천 원짜리로 바꾸고 있던 견이 웃었다.

“그냥 두자. 이모가 재미있어하니까. 다행히 삼촌은 돈도 많고.”

“재미없어 보이는데? 이모 울 것 같아요.”

“울면 삼촌이 달래주면 되지. 인형 하나 뽑아주던가 사줘도 되고.”

해빛이 애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고는 엄마가 아빠에게 종종 하는 말을 흉내 냈다.

“아무리 이뻐도 그렇게 오냐오냐하기만 하면 안 된다니까요.”

“뭐?”

깜찍하고도 묵직한 팩트폭력에 얻어맞은 견을 내버려 두고 모단에게 간 해빛이 새윤과 꼭 닮은 말투로 한마디 했다.

“이모. 그 돈이면 인형 하나 사고도 남았겠어.”

“이모가 고작 인형 하나가 탐나서 이러는 것 같아? 이모도 해빛이한테 꼭 하나 뽑아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모단이 눈을 이글대며 다른 기계로 옮겨갔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던 견이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한 방에 인형을 뽑아주는 걸 보고 저렇게 쉬운 거였나 싶어 도전했다가 ‘천 원만 더’의 늪에 빠진 거였다.

“해빛아, 뭐 갖고 싶어? 아니지, 갖고 싶은 것보다 잘 뽑힐 만한 게…….”

“그렇지. 이제 요령을 알았나 보네.”

모단의 등 뒤로 견의 가슴이 겹쳐졌다. 뒤이어 팔과 손까지 포개졌다.

“목표는 저기 저 조그만 왕관 쓰고 있는 강아지 인형.”

견이 조이스틱을 쥐고 있는 손에 슬쩍 힘을 주었다. 기습 백허그에 혼미해졌던 모단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집중했다.

“어어, 됐다! 된 것 같은데? 으악! 우와!”

집게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올라온 인형이 코앞에서 미끄러졌다가 극적으로 굴러 떨어졌다. 하얀 강아지 인형을 꺼낸 모단이 폴짝 뛰어 견의 목을 끌어안았다.

“와, 대박 신기해!”

“같이 하니까 되네요. 그죠?”

“네! 나 이런 거 뽑아본 적 처음…….”

잔뜩 신이 났던 모단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저렇게들 좋을까’ 하는 눈으로 코를 후비적거리고 있는 해빛을 보고는 얼른 떨어졌다.

“해빛아, 선물.”

모단이 내미는 강아지 인형을 힐끔 본 해빛이 고개를 저었다.

“난 토순이만 있으면 돼. 이건 삼촌처럼 생겼으니까 삼촌 줘요. 근데 나 목말라.”

모단이 손에 든 인형을 보고 새삼 견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닮았는데요? 나 가져도 돼요? 침대에다 놓게.”

입모양으로 침대, 하고 중얼거린 견이 단호하게 인형을 뺏었다.

“안 돼요. 가자, 해빛아. 음료수 사 먹으러.”

“와아! 삼촌 최고!”

한쪽 옆구리에 본인 닮은 인형 하나씩을 끼고 다른 손은 꼭 붙잡고 가게를 나서는 둘의 뒷모습을 보던 모단이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그거 내가 뽑은 거잖아요!”

“같이 뽑은 거죠. 내 돈 넣은 거고.”

“치사하게! 돈 줄 테니까 내 개 내놔요! 내 개!”

견이 걸음을 멈췄다.

개타령을 그친 모단이 옆에 서자마자 몸을 숙여 이마를 콩 부딪고는 핀잔했다.

“훨씬 크고 비싸고 잘생긴 개 여기 있네. 백견이나 잘 가져요.”

***

퇴근 후, 견은 낯선 동네로 향했다.

얼마 전 정말로 혜숙이 연락을 해왔다. 모단에게 말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한 번 더 하는 것과 함께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는 제법 큰 커피숍이었다. 아무도 없는 3층 구석에 자리를 잡고 조금 기다리자 혜숙이 올라왔다.

“내가 늦었네. 미안해.”

“아닙니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잘 지냈지?”

살갑게 안부를 물은 혜숙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집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단정한 투피스 차림이었고, 표정도 얼마간 고단해 보였다.

“백 군이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인지 나름대로 가늠해 볼 시간이 필요했어.”

대체 무슨 얘길 꺼내실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견은 긴장으로 축축이 젖은 손바닥을 테이블 아래서 바지에 문질렀다.

“부담 주는 것 같아 이런 것까지 물어보기 미안하지만…… 혹시 우리 모단이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나?”

“네.”

민망할 정도로 바로 나오는 대답에 혜숙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솔직하게 말해줘도 괜찮아. 백 군은 아직 서른도 안 됐으니까 충분히 이해해.”

“요즘 추세에 비해 이른 건 사실이지만, 더 일찍 만났다고 해도 당연히 결혼부터 생각했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확고할 줄은 짐작 못 한 탓에 혜숙은 내심 당황했다. 확신인지 치기인지 쉽사리 가늠이 되지 않기도 했다.

“뻔한 걱정이지만 백 군 정도면 집안도 무시할 수 없을 텐데. 집안에서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부모님이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셔서 할아버지께서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이신데, 그런 욕심 전혀 없으십니다. 직접 모단 씨를 만나신 적은 없지만 벌써 마음에 들어 하고 계세요.”

무턱대고 우기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견은 더욱 진중하게 진심을 전하려고 애썼다.

“사내어린이집 교사로서의 능력도 인정받고 있고, 무엇보다도 제가 모단 씨를 만난 후에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걸 보면서 오히려 놓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혜숙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견의 피가 바싹 마르는 소리까지 들렸을지도 모른다.

“전에 봤을 때부터 느끼기는 했지만, 백 군은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

혜숙의 손이 열없이 찻잔 위를 덧그렸다.

“내가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지, 해야만 하는데, 너무 미안해서…… 그럴 정도로.”

어딘가 울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 같았는데, 막상 마주한 눈은 흠칫할 만큼 건조했다.

“모단이에게 얘기 들었어. 이번에 블랑아이하고 한성어패럴이 엮여 있는 비리를 터뜨릴 생각이라고.”

회사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견은 얼결에 고개만 끄덕였다.

“한성어패럴 한규철 사장이 누군지도 모단이에게 들었겠지?”

“네.”

혜숙의 어깨가 크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난 그 사람으로부터 모단이를 지키기 위해서 이제까지 침묵했어. 내 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거든. 물론 나 혼자였다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처럼 덤볐겠지만.”

아주 작게, 짓씹어 토해내듯 꺼내는 말들에 심장이 먼저 놀라 뛰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백 군이라면.”

혜숙 역시 지금껏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백 군이 가진 힘에…… 내가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것들까지 더해진다면 이번에야말로 한규철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랫동안 갖고 계셨던 것…… 이요?”

혜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단이 아버지가 만들고 내가 도왔던 회사. 제이네트웍스를 어이없이 몰락시킨 게…….”

그녀가 고된 시간의 흔적이 남은 눈가를 짚었다.

“한규철 사장이라는 증거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