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개뼈다귀 같은 헛소문
2018.01.07.
혜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단이 아버지가 만들고 내가 도왔던 회사. 제이네트웍스를 어이없이 몰락시킨 게…… 한규철 사장이라는 증거 말이야.”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을 듣는 동안 견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잘나가던 벤처기업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주가조작이 일어나고 있었고, 곧 터질 것임을 안 한규철이 펀드매니저들을 매수해서 제이네트웍스 주가도 부풀려 놓았다는 것.
사건이 터졌을 때 당연히 휘말릴 수밖에 없었고, 모단의 아버지는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제이네트웍스랑 거래하는 즉시 한성어패럴과는 거래가 끊길 거라는 말로 거래처들을 협박해 필사적으로 재기하려던 노력마저 짓밟아 버렸다는 것.
처음에는 운이 나빴다고만 여겼던 모단의 아버지는 배후에 한규철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고 나서 충격을 이기지 못해 쓰러졌다고 했다.
“그 사람이 마지막까지 했던 말이, 미안하다는 말 다음으로 많이 했던 말이…… 모단이만큼은 눈에 안 띄게 해달라고. 한성어패럴하고는 조금의 관련도 없이 살게 해달라고…….”
모단이 다칠까 봐, 아플까 봐 입 밖에도 내지 못했던 비밀.
“그 사람하고는 혼인신고도 하지 못했어. 서류가 뭐가 중요한가 싶기도 했고, 재산 바라는 거 아니냐며 수군대는 사람들 말도 듣기 싫었고……. 그렇게 허무하게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질 못해서, 필요하면 나중에라도 하면 그만이겠거니 했어.”
처연하리만치 무거운 고요가 감돌았다.
“그런데 서류상 남남이다 보니 그 사람이 죽고 나서 빚이 전부 모단이한테만 가게 생긴 거야. 얼른 상속 포기부터 해주고, 험한 채권자들이 찾아올까 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만큼은 해결하고 그랬지. 그러고 나서 지금껏 숨죽여 살았는데.”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들릴 만큼 희미한 달그락 소리가 아까부터 들리고 있었다.
“근데 이제는…… 제대로 숨통을 트고 살고 싶어. 죄를 지은 건 내 남편이 아니니까. 모단이는 더더욱 아니고.”
그 소리가 혜숙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쥐고 있던 찻잔 손잡이를 지나 잔받침을 울리는 소리임을 안 견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딸 좋아한 죄로 이런 부탁까지 듣게 해서 미안하단 말밖에 할 수가 없네. 이기적이고 염치없지만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혜숙이 가까스로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만약 내가 가진 자료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어.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어렵다고 한다면, 지금껏 그랬듯 죽을 때까지 묻고 살아도…….”
“아닙니다. 저 그 자료 꼭 필요합니다.”
혜숙의 눈이 커졌다.
“정말 필요한 거였습니다. 안 그래도 횡령 정도로는 그 인간을 확실히 보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뭐가 더 없나 찾고 있었거든요.”
누군가를 위해서만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임시주주총회는 다가오는데 건질 건 없고 미칠 노릇이었는데, 저 지금 동굴에서 빛 본 기분입니다.”
이번에는 진짜 미소가 혜숙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다시금 눈가를 쓸어내는 그녀의 손끝이 아직도 떨리고 있는 것을 견은 놓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들입니까?”
“많아. 거래내역서부터 장부, 매수당한 펀드매니저들 목록에다 몇몇 거래처 사람들의 증언 녹음한 것까지.”
혜숙이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한규철은 얼마든지 진실도 거짓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인간이니까. 딱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귀한 증거가 허무하게 종잇조각이 될까 봐 섣불리 내놓을 수가 없었어.”
“그런 것들을 고스란히 갖고 계시면서 묻을 수밖에 없었던 마음이 어떠셨을지, 저는…….”
감히 짐작도 못 하겠다는 말이 목에서 턱 막혔다가 꾸역꾸역 내려갔다. 갈비뼈 사이가 뻐근했다.
“……감사합니다. 저 믿어주셔서요.”
“내가 고맙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혜숙이 고개를 숙였다.
“모단이에겐 내가 말할게. 많이 화내겠지만.”
“이제 괜찮을 겁니다. 모단 씨는 다 컸고,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고, 또…… 어머님도 계시고 저도 있으니까요.”
모단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어 기뻤다. 제가 가진 것에 이토록 감사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를 다시 살게 해준 사람이니, 더한 것이라도 할 수 있다.
“참, 어머님. 저도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혜숙이 얼른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벌 받아 마땅한 사람들 다 치우고 나면요, 나중에…….”
견이 눈부실 만큼 맑게 웃었다.
“또 맛있는 밥 얻어먹으러 갈 테니까 고스톱 가르쳐 주세요.”
***
“대표님.”
결재 서류를 들고 대표실로 들어간 김광남이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백견이 뭔가 눈치챈 것 같습니다.”
“뭘 눈치채?”
“일전에 원단공장에 박은규 대리를 대신 보낸 적이 있는데, 엊그제 조 사장이 박 대리님이나 백견 씨가 별말 없더냐고 묻더라고요.”
“갑자기 웬 백견?”
“저도 똑같이 물어봤더니 당황하는 게 영 수상한 겁니다. 그래서 계속 추궁하니까 사실은 그날 백견이 같이 왔었다면서, 그냥 인사만 드리러 온 거니까 말하지 말라 그랬다고…….”
초조해 보이는 김광남과는 달리, 변진상은 시큰둥했다.
“그것만 가지고는 모르는 거잖아. 괜히 회사에 붙어 있기 싫으니까 따라나섰다가 걸리면 욕먹을 게 뻔하니 말하지 말라고 한 건지 어쩐 건지.”
“그렇다기에는 단가 얘기까지 들었다는 게…….”
학교 땡땡이치는 애처럼 철딱서니 없는 심보로 한 짓 같지는 않다는 말이 김광남의 혀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다 나오기도 전에 변진상이 툭 잘랐다.
“단가가 어쨌다는 얘기를 들었대도 제까짓 게 뭐 어쩔 건데?”
의자 팔걸이에 몸을 걸치고 삐딱하니 앉아 손톱 거스러미를 뜯던 변진상이 꼬고 있던 다리를 들어 발길질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진작 말했지? 멋대로 나대게 만들지 말고 짓밟아놓으라고. 뭐든 틀어지면 자네 책임이야, 이건.”
“예? 그게 어떻게…….”
울컥 반박하려던 김광남은 입을 다물었다. 불길하고 수상했다.
‘이렇게 여유 부릴 인간이 아닌데……?’
“매번 뭘 그렇게 백견을 무서워하나. 나도 지긋지긋하긴 하다만은.”
‘갑자기 대범한 척은. 백견이 회사 들어온다는 말만 듣고도 똥 마려운 개새끼마냥 대표실 의자에 제대로 앉지도 못해놓고서는.’
김광남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부르쥐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렇듯 한 대만 시원하게 치고 싶은 충동이 울컥거렸다.
변진상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얼른 의자를 밀고 일어서며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알아서 도장 찍어서 올려.”
전화를 받으면서 대표실을 나가는 변진상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김광남은 짜증스레 몸을 돌려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우일두 차장의 자리로 향했다.
“우 차장,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갈까?”
아무도 없는 옥상 휴게실, 김광남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우일두의 입에서 담배 연기와 조소가 한데 새어 나왔다.
“똥진상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니네. 나대게 만들지 말고 짓밟아놓으라는데 뭘 믿고 공장까지 가게 뒀어?”
“내가 보낸 게 아니라니까! 아무래도 뭘 알고서 기회만 엿보다가 일부러 간 것 같은데…….”
“그럼 더 문제지. 그럴 틈을 왜 주느냐고.”
무슨 말을 들어도 좀처럼 펴지지 않는 김광남 이마의 주름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본 우일두가 담배를 끄고는 팔짱을 꼈다.
“일단 백견부터 어떻게 하자. 다시 들어올 때부터 영 거슬렸는데 이거 봐. 대번에 귀찮은 일이 생기잖아.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이 한 숟가락쯤 더 먹는다고 지 금수저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씨…….”
“어떻게? 구린 데라도 파보자 이거야?”
“그건 너무 번거롭지. 그냥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 만한 소문이나 대충 뿌려두자고. 뭔 말을 해도 사람들이 안 믿게끔. 뭘 떠벌리기도 전에 못 견디고 회사 때려치워 주면 더 좋고.”
우일두가 담배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사실이건 아니건 듣기에 그럴듯하고 사람들이 신나서 떠들고 다닐 만큼 자극적인 거. 그런 얘기 몇 마디면 돼. 사회생활하면서 이미지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때 옥상 문이 열리고 여직원들 몇 명이 올라왔다. 우일두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잽싸게 집어넣었다.
“어머, 차장님. 안녕하세요.”
“일하다 피곤해서 바람들 쐬러 왔나 보네. 음료수 하나씩 마실래요?”
“와, 감사합니다!”
김광남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자판기 쪽으로 향하는 우일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처 끌 생각을 하지 못한 담배를 들고 있는 그에게로 힐끗대는 눈총이 쏠렸다.
아무리 실외라지만 어린이집 애들도 오는 데서 웬 담배, 게다가 안 피우는 사람들까지 왔으면 좀 꺼줄 것이지, 하는 시선들이었다.
‘저런 놈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얽히지 않았을 텐데.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꽁초를 비벼 끈 김광남은 소름이 돋은 팔을 슬그머니 문질렀다.
***
아이들이 모두 하원한 후, 남아서 교구를 만들던 교사들 사이에 소소한 수다가 오갔다.
“맞다. 다들 그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
“회장님 손주 있잖아요. 백견.”
“아옭!”
장식에 글루건을 묻히려다 삐끗해서 제 손을 찍은 모단이 괴성을 질렀다. 글루건에 수도 없이 데어봤지만 이번엔 심하게 화끈했다.
“어휴, 큰일 날 뻔했네. 모단 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조심해야지. 근데 백견이 왜요?”
“아, 맞다. 백견이 있잖아요, 글쎄…….”
효림이 잔뜩 뜸을 들여가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어렸을 때 사고 쳐서 낳은 아들이 있다네요.”
“뭐어?”
우당탕.
모단의 손에 들려 있던 글루건이 떨어졌다. 모두가 화들짝 돌아보았다.
“아, 하하. 죄송해요. 이 글루건 고장 났나 봐요. 손잡이까지 뜨겁네.”
모단이 애먼 글루건 줄을 주섬주섬 잡아당겼다. 연경이 효림을 쿡쿡 찔렀다.
“그게 진짜야? 애가 있다고?”
“네. 원래 있는 줄도 몰랐는데 애 엄마가 불쑥 나타나서 맡기고 사라졌대요. 옛날에 블랑아이 대표로 있을 때요. 집안이 발칵 뒤집어져서 애 엄마를 찾네 어쩌네 하느라 회사에도 거의 못 나오고 하다가 대표 자리에서도 잘린 거라는 거 있죠.”
“웬일이니. 그래서 그런 거였다고?”
“맞다, 그때 한참 사람이 제정신 아닌 것 같다는 말도 돌았었잖아요.”
“팔자에도 없는 애가 생겼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어머, 세상에.”
오가는 말들을 넋 놓고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모단이야말로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견에게 숨겨둔 애가 있다니, 대체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 같은 헛소문이란 말인가.
“어쨌든 어쩔 수가 없으니 숨겨서 키우다가 학교도 보내야 하고 하니까 요새 조금씩 내보낸다는데요, 그 애가…….”
효림이 또 조마조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진행자 뺨치는 솜씨다.
“그 애가 바로……!”
그러고는 하필 모단을 바라보며 터뜨렸다.
“무탈이래요.”
“느에에에엑?”
모단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뜻밖의 격한 리액션이 효림을 더 신나게 했다.
“그래서 백견 비서가 데리고 다니는 거였다고요! 회장님이 특별 지시하신 이유가 증손주라서 그런 거였단 말이에요! 엄청나지 않아요?”
모단뿐만 아니라 다른 교사들도 적잖이 충격받은 분위기였다.
“어쩐지 애가 귀티가 좔좔 흐르는 게 잘사는 애 같더라.”
“그러고 보니 백견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저 방금 소름 끼쳤어요. 그러고 보니 백견이 재입사하고 나서부터 무탈이 안 오지 않았어요?”
혼자 입만 벙긋거리던 모단이 겨우 말을 보탰다.
“사실인지 소문인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게 막…… 사람을 함부로 말밥에 얹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앞뒤가 너무 잘 맞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지, 그렇지.”
더 있다가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모단은 화장실 다녀오겠다며 어영부영 자리를 피했다.
“……나 참, 그 인간이 어딜 봐서…….”
처음에 속옷 후크 푸는 법도 몰라서 헤매던 남자라고, 지금도 수시로 어흥거리긴 하지만 세상 순수한 짐승이라고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고, 나 홀로 환장대잔치였다.
그런데 그때, 견의 집에서 보았던 무탈이의 사진이 떠올랐다.
다급하게 사진을 책과 함께 감추던 것도.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눈 밑의 점부터 시작해서 꽤나 닮은 얼굴도.
그리고…… 언젠가 해빛이가 견에게서 무탈이 냄새가 난다며 킁킁대던 것도.
하염없이 흘러내려 가는 물줄기를 응시하던 모단이 수도꼭지를 잠그고는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한껏 얼빠진 얼굴이 비쳤다.
모단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에이, 말도 안 돼.”
***
며칠 후, 견과 모단은 차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한 수목원으로 향했다. 야간개장을 하는 곳이라 일부러 늦은 오후에 나왔다.
“견이 씨.”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모단이 잡았다.
“나 할 말 있어요.”
“뭔데요?”
견의 어깨가 보이지 않게 굳었다.
어쩐지 오는 내내 말수도 적고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더라니, 어머님께서 드디어 말을 꺼내셨나 보다 했다.
“어처구니없는 소문을 들어서요.”
“소문이요?”
“네. 말 그대로 소문이니까 먼저 본인한테 확인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뭔데 그래요? 말해봐요.”
그러나 모단이 꺼낸 말은 상상조차 못 한 것이었다.
“혹시 나한테 말 못 하고 숨겨둔 아이가…… 있어요?”
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회사에 이러저러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까지 들은 견은 한동안 말을 못 잇고 앞만 노려보았다.
백견이 무탈이고 무탈이가 백견이니 닮은 건 당연한 건데 부자 관계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방향이 빗나가긴 했지만, 모단이 저와 무탈이의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한성어패럴부터 보란 듯이 처리하고 나서, 제가 블랑아이에 남게 되든 또 쫓겨나든 다시 자리를 잡고 난 후에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 고비까지 넘겨야 비로소 정식으로 청혼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지금은 아니었다. 무탈이는 사실 제 아들이 아니고 저예요, 라니. 불난 데 기름 붓는 격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일말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서 견은 필사적으로 웃어 보였다.
“처녀가 애 낳았다는 말 들은 것 같네. 설마 믿은 거 아니죠?”
당연하죠, 그냥 물어본 거예요, 할 줄 알았는데 모단의 웃음이 상당히 어색했다.
“뭐야. 믿었는데?”
“믿었다기보다는 그게, 그냥 숨겨놓은 애가 있다고만 했으면 코웃음을 쳤을 텐데 그게 무탈이라니까, 안 그래도 좀 닮았다 싶던 차에…….”
견의 목소리가 와락 높아졌다.
“아, 그럼 잘생긴 꼬맹이들은 다 내 아들이냐고!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단 씨가 그걸 믿을 수가 있어요!”
“믿은 건 아니었다니까요! 안 그래도 혼자 의심하고 오해하기 싫어서 물어보는 거잖아요. 나도 그 누구보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마음이…….”
견이 몸을 홱 돌리더니 양손으로 모단의 어깨를 꽉 잡았다.
“잘 들어요, 모단 씨.”
“네, 잘 들어볼게요.”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러더니 더 이상 진지할 수 없는 눈으로 말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 수정을 하고 착상을 해서 애가 될 거 아닙니까. 근데 내 정자들은 29년 동안 단 한 번도 난자를 만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견이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까닥했다.
모단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나 싶더니 제 어깨를 짚은 견의 손을 잡아 홱 꺾었다.
“아악! 아니라는데 왜 이래요!”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지 뭘 정자 난자까지 들먹이고 난리야.”
귓가가 발그스름해진 모단이 흥 하고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견은 소리 없이 웃고는 얼른 뒤를 따랐다.
“내가 틀린 말 했어요? 생물 시간에 배운 거 맞잖아요.”
“배웠죠. 재미없는 성교육 시간에도.”
“나도 성교육 시간에는 푹 잤어요. 그 시간에 안 가르쳐 주는 것들에 훨씬 관심이 많아서.”
“어련하시겠어요.”
둘은 평소처럼 자그락대며 나란히 손을 잡고 수목원 안으로 들어섰다.
“나 정말 별생각 다 했던 거 알아요?”
“무슨 생각 했는데요?”
모단이 눈을 내리깔고 긴 숨부터 내뱉었다.
“만약 정말 견이 씨 아이가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