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모든 날이 다 아무 날이에요. 같이 있으면
2018.01.10.
“만약 정말 견이 씨 아이가 있다면…….”
“있을 리가 없지만 있다면?”
“엄마가 날 키워줬듯이 좋은 엄마가 되어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까지 해봤다고요.”
아직도 심란한 주름이 가 있는 이마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한없이 다정했다.
“뭘 그런 고민까지 하고 그랬어요.”
반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짓궂기 짝이 없었다.
“애 엄마가 알아서 키울 테니 돈만 달라고 하면 굳이 모단 씨가 엄마 노릇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이건 또 무슨 양아치 같은 소리지? 진짜 있는 거 아니야?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다가 닥치는 대로 유전자검사를……!”
견이 한 손으로 제 머리를 가리며 크크 웃었다.
“그래서 결론은요? 예쁘고 착한 새엄마 가능해요?”
“존재하지도 않는 애한테는 미안하지만…… 장담은 못 하겠더라고요. 엄마한테 더 효도하기로 했어요. 역시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구나 싶어요.”
깍지 껴서 잡고 있던 손을 당긴 견이 모단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옆을 지나던 사람들이 힐끔 쳐다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어머님이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무슨 얘기요?”
말간 눈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아직 말을 꺼내지 못하셨나 보다.
꼭 해야만 하는 말을 혀 밑에 묻어두고 사는 기분을 제가 어찌 모를까.
“그냥 뭐, 우리 사위 보고 싶다고 하셨다던가.”
“생긴 건 아삼삼한데 고스톱 솜씨는 영 심심해서 같이 못 치겠다는 얘긴 하셨어요. 레벨 차이가 너무 난다고.”
“걱정 마요. 나 요새 밤마다 섭호한테 특강 듣고 있거든요. 걔가 동네 할머니들 사이에서 세 살 때부터 패를 쥔 애야. 다음에 가면 꿀잼 오브 꿀잼 보여 드릴 수 있어요.”
“예, 예, 타짜 돼서 오세요.”
화려한 꽃이 피어 있는 온실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 시원하게 솟은 나무 사이를 걷는 동안, 온도까지 맞춰놓은 듯 딱 좋은 바람이 불었다.
천천히 해가 지고, 천천히 노을이 드리우고, 천천히 하늘이 어두워졌다.
수많은 별이 뜨고, 수많은 불빛이 켜지고, 수많은 말들과 웃음이 흩어졌다.
닿고 싶으면 닿고, 안고 싶으면 안고, 걷다 말고 눈을 맞추다 입까지 맞추기도 했다.
서로의 눈 속에 담긴 자신을 보고 있다 보면 최면에 걸린 듯 오감이 몽롱해졌다. 둘만의 우주인 듯 황홀한 착각이 일었다.
“다리 아프지 않아요? 업어줄까요?”
“난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나 좀 업어줘요. 나 다리 아파요.”
“드럽게 병약하네, 정말.”
의뭉스런 웃음을 흘린 견이 모단의 뒤로 가더니 어깨에 팔을 걸치고 정수리에 턱을 올렸다.
“아윽! 무거워!”
“힘센 거 다 아니까 빼지 말고 제대로 업어봐요. 매너손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실컷 더듬어주고.”
“다리가 질질 끌리는데 업기는 뭘 업어요. 떨어져, 떨어져!”
코알라처럼 매달려 치덕거리던 견이 팔을 풀었다. 모단이 돌아서려는데 견이 갑자기 어, 했다.
“가만있어 봐요.”
“왜요?”
“여기 벌레 붙었어요.”
“아아악!”
“가만있으라니까. 내가 떼줄게요.”
모단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뻣뻣하게 굳었다. 목 근처로 다가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깨가 움찔대며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갔어요? 안 갔어요? 어디, 어디 붙었는데?”
“잠깐만요. 다 됐어요.”
어깨를 훑듯이 두드린 견이 앞으로 왔다. 모단은 그제야 눈을 떴다.
“쫓았어요?”
“아뇨. 산 채로 잡았어요.”
견이 모단의 얼굴 바로 앞에 손을 올리더니 쫙 폈다. 모단은 뭘 생각할 틈도 없이 펄쩍 뛰었다.
“끼야악! 악! 어?”
오만상을 찌푸리고 두 손으로 얼굴 앞을 마구 휘젓다가 견까지 때릴 뻔한 모단이 우뚝 멈췄다.
견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던 것을 살짝 흔들었다.
“언제부터 예쁜 걸 그렇게 무서워했어요?”
벌레는커녕, 가느다란 금빛 체인에 물방울 모양의 투명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눈앞에서 반짝거렸다.
놀란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을 반사하는 목걸이를 따라 한들한들 흔들렸다.
견이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 위에 목걸이를 올려놓았다.
“오다 뽑았어요. 뽑기 기계에서. 그때 봤죠? 나 엄청 잘 뽑는 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모단이 피식 웃고 말았다.
“딱 봐도 보석인데 뭔 소리예요.”
“와. 여자들은 보면 안다더니 진짠가 보네요. 난 아무리 봐도 큐빅이랑 다이아몬드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던데.”
“다, 다이아몬드요?”
모단의 동공이 떨리다 못해 트위스트를 추기 시작했다. 견이라면 오히려 가짜를 본 적이 없겠지 싶어 찍은 건데 정말일 줄은 몰랐다.
“내가 걸어주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가선 견이 길게 팔을 둘러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예쁘다. 잘 어울려요.”
모단은 아직도 얼떨떨한 눈으로 머뭇거렸다.
“생일도 아니고 아무 날도 아닌데…….”
“모든 날이 다 아무 날이에요. 같이 있으면.”
견의 손끝이 목걸이가 자리한 쇄골 사이의 살갗 위를 슬슬 문질렀다. 담백한 듯 농밀한 손길이었다.
“이번 일로 모단 씨도 나도 많이 힘들어지겠지만, 그래도 같이 잘 버텨보자고 주는 뇌물이에요.”
다정하게 올라온 손이 뺨을 쓰다듬고, 귀를 매만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 믿어달라고요.”
“이런 거 안 받아도 믿어요.”
견의 입가에 잔즐대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모단의 왼손을 잡아 끌어당긴 그가 손등과 약지손가락이 이어지는 부분의 도도록한 뼈에 제 입술을 올렸다.
“반지는 조금 더 있다가 줄게요.”
이렇게나 미덥고 달콤한 약속이라니.
“고마워요, 정말.”
모단의 눈동자가 초근하니 부풀었다. 심장 어딘가가 우릿해졌다.
“여기 사람도 없고 조용하니 좋네. 조금만 앉아 있다가 가요.”
견이 저 앞에 보이는 자그마한 나무의자로 이끌었다. 둘이 앉으니 꼭 맞았다.
“나도 견이 씨한테 줄 거 있어요.”
냉큼 눈을 감은 견이 입술부터 내밀었다.
혀를 쯧쯧 찬 모단은 가방 안에서 손바닥만 한 물건을 꺼내 주욱 나온 입술에 찰싹 붙여주었다.
“아야! 이거 뭔데요?”
“선물이에요. 별건 아니지만.”
손등으로 두어 번 입술을 문지른 견이 얼른 포장지를 뜯어보았다. 세련된 체크무늬 손수건이었다.
언제 어디서 코피가 터질지 몰라 항상 짙은 색의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됐는데, 모단이 그걸 유심히 살펴본 모양이었다.
“생일도 아니고 아무 날도 아닌데 선물 주는 거 나도 한 번 해보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선수를 뺏겼네요.”
애꿎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모단과 부드러운 손수건을 번갈아 보던 견이 뭔가를 발견했다.
“잠깐. 이거 내 이니셜 맞죠?”
손수건 귀퉁이에 작게 자수가 놓여 있었다. 모단이 어색하게 웃었다.
“새윤이가 최대한 쉬운 도안으로 알려주긴 했는데 처음 해본 거라 삐뚤어요. 너무 자세히 보지 마요.”
“주문한 게 아니라 모단 씨가 직접 한 거라고요?”
두 손으로 손수건을 떠받든 채 굳어 있던 견이 모단을 꼭 끌어안더니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나 죽으면 관에다 이 손수건 같이 넣어줘요. 꼭…….”
“나 참.”
“아니다. 그냥 모단 씨를 같이 묻어달라고 해야겠다.”
“무서워서 먼저 죽던가 해야지.”
모단의 목덜미와 어깨에서 한참을 비빚거리던 견이 몸을 떼더니 진지한 눈을 했다.
“그냥 한 70년쯤 같이 살다가 같이 죽으면 되겠다. 관은 2인용으로 짜고 수의도 커플룩으로. 좋죠?”
“좋기는 뭐가 좋…….”
견이 모단의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입안을 감치고 도는 혀끝은 늘 그렇듯, 설탕이 가득 묻은 입가를 훑고 들어온 것처럼 다디달았다.
죽음이라는 단어마저도 함께라는 조건이 붙으면 영원을 약속하는 밀어가 되는 순간.
무수히 뿌려진 별들 아래, 그만큼이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서로를 알아본 연인의 속삭임이 오래도록 깊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자리에 누운 모단은 시선을 천장에 고정한 채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자수를 놓아 보느라 바늘에 몇 번쯤 찔린 손가락 사이에서 자그락자그락 만져지는 감촉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무 사이 밤하늘에 가득하던 별도, 땅에 떨어진 별처럼 반짝이던 조명들도 너무 예뻤지만 이 목걸이가 품은 은은한 빛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했다.
똑똑 손기척 소리가 났다. 모단이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혜숙이 문을 열었다.
“모단아, 시간 괜찮으면 엄마랑 얘기 좀 할래?”
“응. 무슨 일 있어?”
모단은 선선히 옆자리를 내주며 머릿속에 남아 있는 황홀한 여운을 걷어내려 애썼다.
그러느라 혜숙의 눈가가 힘겹게 일그러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엄마가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
백 회장이 머무는 본가에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였다.
지협과 견, 섭호가 들어서자 지협의 어머니이자 에버월드 전무를 맡고 있는 허수현 여사가 환한 미소로 맞았다.
“우리 아들들 왔네요.”
희명리조트 백주승 대표도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대뜸 물었다.
“F&J푸드 사장이 큰딸 시집보낼 때가 됐다면서 운을 떼던데. 선 볼 사람?”
“예쁩니까?”
“예쁘장하던데.”
“안 봅니다.”
재킷 단추를 풀고 자리에 앉는 지협에게로 백주승의 따가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럴 거면서 예쁜지 안 예쁜지는 왜 물어봐?”
“얼굴이라도 아는 사람을 들이미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허 여사가 남편의 어깨를 짚으며 지협을 흘겨보았다.
“내 아들이지만 참 정 없다, 너. 웬만하면 혼자 살아. 엄한 여자 마음고생 시키지 말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견이는 당연히 안 볼 테고. 막내는 어때? 보잘것없는 형들에 비하면 우리 섭호가 진국이지.”
섭호가 웃으며 사양했다.
성근의 따끔한 교육 덕에 늘 깍듯한 비서의 자세를 유지하다 보니 남들 눈에는 상하 관계로 보이지만, 백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섭호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었다.
“일단 앉아라. 앉아서들 마저 듣자.”
한가운데 앉은 백 회장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조금 전 백주승에게 회사 내부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들은 참이었다.
단정하게 앉은 지협과 견이 변진상과 재무이사, 우일두와 김광남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슬과 한성어패럴과 블랑아이 사이의 비리까지 비교적 상세히 털어놓았다.
이마를 찌푸린 백 회장이 끄응 하며 이마를 짚었다. 내내 염려하는 눈으로 지켜보던 허 여사가 바로 일어나려 했으나 백 회장이 만류했다.
“실은 얼마 전에 한규철 사장을 갤러리에서 만났었다. 젊은 사람이 아직 시야가 넓지 못해서 치기를 부리는 것 같은데, 일을 크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견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돋았다. 지협과 섭호의 눈매도 서늘해졌다.
“내 자세히는 몰라도 견이 너와 블랑아이 관련된 문제가 있나 보다 짐작을 했다.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다고, 이제 아무런 힘도 없는 뒷방 늙은이일 뿐이라고 눙치고 말았지.”
“뒷방 늙은이라뇨, 할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았느냐, 지금껏.”
“죄송해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기도 했고, 충격받아서 몸이라도 상하실까 봐…….”
백 회장의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견이 넌 어쩔 생각이냐? 어떤 의도에서든 회사를 이만큼이나 시끄럽게 만들었으면 너도 책임을 져야지.”
백 회장의 눈빛이 한층 형형해졌다.
“대표 자리가 다시 탐이 나서 작정하고 쓸어내려는 거냐? 없는 일을 만들어서라도?”
“아니죠, 당연히! 제가 블랑아이를 만들면서 이루려고 했던 목표들이 아쉽고 욕심났던 건 사실이지만 자리를 탐냈던 건 아니에요. 그랬으면 딴 데 가서 사장 노릇 했겠죠. 지금처럼 사원으로 같이 일해도 전혀 불만 없어요.”
“감히 제 자리에 앉은 사람이며 저한테 상사 노릇 한 사람한테까지 괘씸죄 갖다 붙인 건 아니고? 회장 손주의 철딱서니 없는 화풀이 아니냔 말이야.”
“말도 안 되죠!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세요? 없는 일을 만든 건 눈곱만큼도 없다고요.”
“알 게 뭐냐? 어렸을 때 사고 쳐서 낳았다는 애 하나도 책임 못 지는 개차반이라는데 그 정도 갑질쯤 못 할 건 또 뭐야. 이래저래 다 쳐내고 다시 대표 자리에 앉은들 누가 따를꼬.”
“할아버지!”
견이 펄펄 뛰었다.
백 회장의 입을 타고 나온 일련의 소문들을 모를 리 없는 다른 이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시선만 주고받았다.
“진짜를 아는 사람들은 여기 있는 사람들밖에 없는 게 현실이야. 맘 굳게 먹어야 할 거다.”
부러 몰아쳤던 백 회장이 어깨에 힘을 뺐다.
“일이 커지건 어쨌건 곪은 데는 도려내야지. 수술 무서워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백 회장의 한숨이 깊었다.
손주부터 회사까지 염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오래 살아온 사람으로서,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경영자로서 피할 수 없는 파도라는 것을 알았다.
밀려오는 동안 얼마만큼 커질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나갈 것이며, 기둥이 튼튼하다면 휩쓸리되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시기와 감각을 타고난 이는 때론 파도 위에 올라탈 기회를 얻기도 한다는 것도.
“최대한 회사에 폐를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마무리까지 책임지겠습니다.”
견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비롯한 수많은 감정들을 담아 그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모두의 눈에 잠잠한 신뢰가 어렸다.
***
“……크으.”
소주잔을 내려놓은 김광남이 소맷부리로 아무렇게나 입가를 문질렀다.
불판이 딸린 둥그런 철 테이블 몇 개가 다인 허름한 술집이다. 맞은편에 앉은 우일두는 옷에 고기 굽는 연기가 배는 것이 영 못마땅해 아까부터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임시주주총회 잡혔다는 거 들었지?”
“듣긴 들었지.”
“임시주총이라는 게…… 보통은 해임이나 감사처럼 부정적인 안건으로 잡지?”
빈 잔에 술을 따르는 김광남의 손이 부들거리는 것을 본 우일두가 짜증스레 소주병을 뺏어 잔을 채워주었다.
“그렇겠지. 자세히 알아볼랬더니 염훈 그 새끼는 갑자기 코빼기도 안 비치네. 하는 일도 없는 놈이 갑자기 바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연락 피하는 게 존X게 수상…… 야, 천천히 마셔!”
우일두가 병을 내려놓기도 전에 잔이 비었다. 김광남의 얼굴이 벌써 시뻘겠다.
“일두야, 내가 오늘 봤다.”
“뭘?”
“변 대표 책상에 말이야, 명함이 있더라고.”
중역이나 최고경영자를 필요로 하는 기업과 고위경력자를 연결해 주는 대형 헤드헌팅 업체의 명함이라는 말을 들은 우일두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허. 이제 와서 저는 다른 데로 튀면 그만이시다?”
김광남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칙칙한 회색빛이었다.
“하긴, 다른 계열사로 옮겨도 되고 어지간한 중소기업 사장 자리 하나쯤 꿰차도 되고. 속 편하겠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배를 하나씩 꺼내 물었다.
“개새끼들이 어디다 뒤집어씌우려고. 야,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우리는 잘리면 끝이잖아. 그래서 진작에 적당히 하자고…….”
“우리가 잘리기 전에 윗대가리들을 보내 버리면 되지.”
그는 코웃음을 치고는 김광남을 툭 쳤다.
“어차피 지들은 편히 앉아서 받아 처먹기만 했지 밑에서 개고생한 건 우리잖아. 손 좀 보면 우리가 역으로 먹일 수가 있다고.”
“…….”
“우리만 떨어져 나갈 순 없잖아. 안 그래?”
대답 대신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김광남이 꽁초를 짓눌러 껐다. 짓씹힌 필터 끝이 너덜너덜했다.
재떨이를 끌어당겨 재를 턴 우일두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안 되면 물고 늘어져서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곱게 당하진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