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이 끔찍한 저주만 아니었어도
2018.01.21.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제집에서 나오던 지협과 섭호가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말을 들은 견은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가 간신히 벽에 기댔다.
[섭호가 좀 다쳤어. 난 괜찮고.]
괜찮다고는 하지만 지협의 목소리도 썩 좋진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견아. 섭호도 나도 생명에 지장 가고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러나 이미 견의 귀에는 수화기 너머의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오래전 부모님과 고모에게 일어났던 사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을 때, 나를 살리려다 죽고 다친 사람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견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견아. 백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견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협이 날카롭게 외쳤다.
견은 무릎에 힘을 주고 의식을 붙잡았다.
[넋 놓고 있을 때 아니니까 잘 들어. 사고 낸 차가 이상했어.]
“……이상했다니?”
[작정한 것처럼 갖다 박더니 곧바로 도주했어. 음주나 뺑소니라고 하기엔 너무 망설임이 없었고 목적이 확실해 보였다고. 요즘 블랙박스 없는 차가 거의 없는 걸 알 텐데도 대놓고 그런 걸 보면 추적해 봤자 소용없는 대포차 쪽일 것 같고, 내 느낌엔 백 프로…….]
“의도적인 사고인 것 같다고?”
[그래.]
아득해진 견과 달리, 지협은 냉정했다.
[내가 아니라 네가 탄 차라고 생각한 것 같아. 그러니까 넌 꼭 보란 듯이 주주총회 참석해. 아무 때나 금방금방 모을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게다가 시간을 많이 주면 줄수록 빠져나갈 구멍을 더 크게 뚫어놓을 테니까.]
무슨 정신으로 통화를 마쳤는지도 모르게 전화를 끊고 나서, 견은 한 손으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지협과 섭호가 병원에 있는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건 저밖에 없다.
그때처럼 어린애도 아닌데 충격에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한 견은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런 일까지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의 그림자를 먹고사는 사람들을 동원할 만큼의 재력과 대담함, 동기까지 모두 가진 사람은.
완전히 이성적인 상태였다면 좀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 보며 판단을 미뤘겠지만, 들끓는 분노가 눈앞을 가렸다.
신호가 세 번 가기도 전,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한규철이 전화를 받았다.
[이 시각에 자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병원에 드러누워 있어야 할 인간이 전화를 해서 놀랐습니까?”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오늘 임시주총이 있다고 들었는데, 긴장해서 애처럼 잠이나 설치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건가?]
견의 잇새에서 빠드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겁먹고 짖어대는 걸로도 모자라서 물어버리셨다?”
[누가 겁을 먹었다는 건가. 비리고 횡령이고 마음대로 엮어보게. 내가 손해 보지 않는 한에서 장단은 맞춰줄 테니.]
“살인까지 저지를 뻔했으면서 장단? 당신 미쳤어?”
껄껄대던 웃음소리가 잦아들며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하긴, 사람 죽인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겠지. 꼭 직접 죽여야만 살인인가? 분하고 억울해서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만드는 것도 살인이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은 견은 한 손으로 핸들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지독한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비리고 횡령이고 마음대로 엮어보라고? 그게 다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 당신, 오래전에 저지른 죗값까지 다 받을 거야. 자기 자식 핑계로 남의 자식 다치게 한 것, 그 X 같은 체면 세우느라 죄 없는 사람들 쓰러뜨렸던 거 내가 꼭 받게 만들 거라고!”
한 글자씩 씹어 내뱉는 경고에 차디찬 독기가 어렸다.
“나도 당신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죽일 수 있어. 끝까지 가보자고.”
전화를 뚝 끊어버린 견이 시동을 걸었다.
호텔을 빠져나가 회사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병원으로 가서 지협과 섭호가 얼마나 다쳤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만큼 혼자서도 계획했던 일들을 잘 해내야만 했다.
절반쯤 왔을 때, 한규철에게 전화가 왔다.
[저런, 이제야 소식을 들었지 뭔가. 작은 사고가 있었다면서?]
작은 사고라니.
기어코 견의 입에서 욕설 섞인 고함이 튀어나가기 직전, 한규철이 말을 이었다.
[한데 착오가 있었나 보네. 내가 가지고 있던 사진은 다른 건데 말이야.]
거꾸로 솟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끝까지 가보자고 했나? 기꺼이 그러지.]
축축한 뱀이 다리를 휘감고 올라와 목을 감고 조이는 것만 같았다.
[벌써 그렇게 놀라 앞뒤 못 가리고 날뛸 정도인데, 이번엔 어떨지 모르겠군.]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바로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급히 핸들을 돌려 갓길에 차를 세우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눈앞이 핑 돌며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집에 들어가는 모단과 혜숙을 멀리서 찍은 사진이 화면 가득 떠 있었다.
“안 돼…….”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모단에게 연락을 했으나 받지 않았다. 곧바로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었다.
[네, 어린이집입니다.]
“정모단 선생님 거기 있습니까?”
[실례지만 누구시죠?]
“거기 있느냐고요!”
[교, 교실에 계신데…….]
“확실히 있죠? 누가 찾아왔다거나, 아무도 모르게 나갔다거나! 그런 거 아니고 거기 잘 있냔 말입니다!”
고함 소리에 놀랐는지 한동안 조용하다가, 떨리는 대답이 들려왔다.
[네, 지금 CCTV 보니까 확실히 계시긴 한데 대체 누구…….]
“오늘 어린이집에 외부인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주세요. 바깥에도 절대 나가면 안 됩니다!”
모단의 경호를 부탁했던 팀장에게 급히 연락을 하고, 곧바로 혜숙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 역시 받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제가 그보다 더 악독하지 못한 게 미치도록 분했다.
당장 한규철을 찾아가 목이라도 졸라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예전에 받은 혜숙의 명함을 찾아 회사로 전화를 했다.
“이혜숙 씨 계십니까?”
[오늘은 조금 늦게 출근하시는데요. 오실 때 다 됐는데 메모 남겨 드릴까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견은 무작정 혜숙의 회사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차의 속도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했다. 얼른 도착해야 한다는 마음과 중간에 엇갈리면 안 된다는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뒤차가 빵빵대거나 말거나, 옆 차선으로 추월해 가며 욕을 하거나 말거나 차창 밖의 차도와 인도까지 필사적으로 살피며 차를 몰았다.
“어……!”
그때, 저만치 보이는 횡단보도 앞에 혼자 서 있는 혜숙이 보였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안도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혜숙이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반대쪽 차선에서 시커멓게 선팅한 승용차 한 대가 속도도 줄이지 않고 직진해 오는 것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던 말이 귓가를 지잉 울렸다.
길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 정신없이 뛰어내렸다. 운전석 문도 채 닫지 못한 채였다.
횡단보도로 뛰어든 견이 혜숙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있는 힘껏 당긴 탓에 둘이 같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제대로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던 혜숙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견이 어깨를 잡고 온몸으로 감싸준 덕분에 땅을 짚은 손목이 시큰거리는 것 빼고는 아무렇지 않았다.
“백 군……!”
견은 통증을 느낄 틈도 없이 급히 혜숙을 부축해 일으켰다.
콰지직!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지나친 차 바퀴 아래서 혜숙이 떨어뜨린 휴대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견이 잡아채지 않았다면 혜숙이 거기 서 있었을 터였다.
끼이이이이익.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저만치 멀어졌던 검은 차가 유턴을 했다. 그러고는 다른 차들이 횡단보도 너머에 서 있어 비어 있던 차선을 역주행해 다시 혜숙과 견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견은 믿기 힘든 광경에 넋이 나간 혜숙을 이끌고 일부러 복잡한 차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견의 생각대로 다른 차들을 밀어버리면서까지 사고를 내긴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검은 차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가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공기 중에 타이어 타는 냄새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그사이 신호가 바뀌고, 길 복판을 점령하고 있는 견의 차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는 소리가 뒤엉켰다.
“얼른 타세요!”
제 차 조수석에 혜숙을 태운 견은 급히 운전석에 올라 액셀을 밟았다.
“이게 다, 갑자기 대체 이게 무슨……!”
숨을 고른 견이 지협과 섭호의 사고 얘기와 한규철의 이름을 꺼냈다.
혜숙의 낯빛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새파랗게 질렸다.
“모단이…… 모단이는?”
“회사에 있습니다. 경호원 붙여뒀고요. 어머님께서도…….”
“잠깐, 자네……!”
혜숙이 놀란 눈으로 견의 얼굴을 가리켰다.
네? 하고 되물었던 견은 익숙한 것을 느끼고는 아득해졌다.
뭉클 치밀어 올라 주륵 흘러내리는 뜨듯미지근한 감촉.
“코피가…… 아까 다친 거야? 아니면 그전에 무슨 일이라도…….”
“괜찮…… 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손으로 핸들을 더 세게 쥐고,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모단이 선물해 준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았다. 비릿하고도 끔찍한 피 냄새에 정신이 몽롱해지려고 했다.
‘왜 하필 지금, 이걸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뭐부터 해야 하지?’
30분이면 여기서 희명그룹 본사까지 가는 데도 빠듯했다. 모단을 불러내기는커녕 어린이집으로 곧장 뛰어들 시간조차 없다.
“일단 안전한 곳에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 불러 드릴 테니까 절대 혼자 계시지 마세요.”
조금 더 가다가 눈에 띄는 파출소에 혜숙을 모셔두고 나와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박절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길 한복판에서 어른의 옷을 뒤집어쓴 아이가 되어버린다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아무도 와줄 수 없다.
세상에 혼자 던져진 것 같았다. 잡고 있던 손을 놓친 아이처럼 막막해졌다.
손수건을 떼었다가 다시 대려던 견이 멈칫했다. 모단이 직접 놓아준 자수가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세게 감은 견의 주먹이 핸들을 쾅, 쾅 내려쳤다.
해야 하는데. 해야만 하는데.
할 수 있었는데!
이 끔찍한 저주만 아니었어도!
견이 탄 차가 날카로운 파열음을 터뜨리며 빠르게 멀어졌다.
***
“뭐 하자는 겁니까? 바쁜 사람들 모아놓고.”
대회의실에 모여 있던 임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벌써 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안 오는 겁니까?”
“대체 왜 모이라고 한 건지…….”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는 일이라 계열사 감사보고 건이라고만 전달해 두었기에 불평이 더 컸다.
지협이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건 아까 통보를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는데, 그를 대신해 임시주주총회 안건을 올릴 거라던 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웅성대는 소리가 적당히 부풀었다 싶을 때쯤, 변진상이 툭 찔렀다.
“나 참. 회사 일이 장난도 아니고.”
가까이 있던 이들이 먼저 돌아보았다. 변진상의 목소리가 슬쩍 높아졌다.
“아무리 대주주고 오너 일가라지만 사내에서는 엄연히 직책이란 게 있고 절차라는 게 있는 법 아닙니까. 사원이 이사의 대리인으로 세워지고, 그나마도 무책임하게 잠적이라니. 이래서야 무슨 말을 한들 신뢰가 가겠습니까?”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염훈도 넌지시 거들었다.
“……무책임한 게 처음도 아니지요.”
변진상에게 향했던 시선이 일제히 옮겨갔다.
“일전에 대표 자리에서 내려올 때도 그렇고, 최근에는…… 커흠. 입에 담기도 껄끄러운 소문까지 돌지를 않나.”
대회의실 안이 더욱 소란해졌다. 아는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바삐 전했다.
백견이 숨겨두었다던 아이에 대한 소문은 돌고 도는 사이 더욱 자극적인 살까지 붙어 있었다.
애 엄마가 술집 여자라더라, 어떤 그룹 회장의 첩이라더라, 그게 아니라 누구한테 스폰을 받던 연예인이라더라, 그 아이를 호적에 올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집안 분위기가 흉흉해졌다더라, 등등.
“그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외부에서 크게 터지는 순간 회사에도 타격이 갈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오너는 물론이고 오너 주변 사람들이 잘못해도 바로 불매운동 들어가는 세상이에요. 그 피해는 애꿎은 주주들하고 직원들한테 고스란히 돌아온다 이겁니다.”
변진상과 염훈이 주거니 받거니 말을 쏟아내는 동안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해졌다.
“말하다 보니 이거, 임시주총은 우리가 요구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해명할 게 한두 가지여야 말이죠.”
“오너 일가의 사적인 감정이나 경영권을 둘러싼 모종의 목적 때문에 이 많은 분들이 휩쓸린 게 아니어야 할 텐데요.”
변진상이 강력하고 노골적인 비난까지 쏟아낸 순간, 대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일시에 조용해지며 시선이 쏠렸다.
비서를 대동하고 나타난 백 회장을 본 모두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꼿꼿한 걸음으로 들어와 선 백 회장이 고개부터 숙였다.
“어렵게 자리해 주신 여러분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총회는 다른 날로 미루고자 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백 회장은 변진상과 염훈을 힐끗 보았다.
다른 이들과 시선을 주고받으며 웅성대는 그들에게서 무엇도 가늠할 수 없음에 자괴감마저 느껴졌다.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끄응 소리와 함께 이마를 짚는 백 회장을 비서가 얼른 부축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괜찮아.”
내색은 할 수 없었으나 백 회장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두 아이는 병원에 있고 하나는 어디에도 있지 못하는 모습이 되었다니, 차라리 진작 본인이 나서서 칼을 휘두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치밀었다.
임원들도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서 웅성웅성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변진상과 염훈의 눈이 마주쳤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듣자마자 직감했다. 그 사고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는 걸.
‘변진상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람까지 죽이려 드는 인간이었나? 발 빼면 그만이라더니 왜 이렇게까지……!’
‘염훈 저놈을 너무 얕봤어.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나올 줄이야. 앞으로는 최대한 엮이지 말고 몸 사려야겠어.’
한배에 탄 척, 그러나 언제든 서로의 등을 떠밀 틈만 노리는 둘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근데…… 백견은 어떻게 된 거지?’
***
“정 선생님.”
아이들이 유희실에서 음악 수업을 받는 동안 교실로 올라와 다음 수업 준비를 하고 있던 모단은 원장의 목소리에 얼른 일어섰다.
“네, 원장님.”
“선생님, 사실은 아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떤 남자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었다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묻는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오지 말라고 했다고요?”
견이 전화를 했다면 지난번처럼 핑계를 대고 어린이집 밖으로 불러내서 옆에 있어달라고 했을 텐데, 뭔가 이상했다.
모단은 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견과 혜숙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고, 낯선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
백 군, 사고, 부서진 휴대폰, 경찰서.
혜숙이 보낸 문자 내용을 본 모단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정 선생님, 괜찮아요?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저, 저, 원장님, 사고가…… 엄마가 사고를 당할 뻔하셨다고…….”
“뭐?”
눈이 휘둥그레진 원장은 다른 교사들과 학부형들에게 양해를 구해둘 테니 얼른 가보라고 손짓했다.
모단은 허겁지겁 앞치마를 벗고 가방을 챙겨 어린이집을 뛰어나왔다.
그런데 문 앞에 나오자마자 웬 낯선 여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혼자서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 여자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 몇 명이 더 있었다. 사복을 입고 있음에도 자세나 눈빛이 절도 있고 날카로워 저절로 검은 정장이 연상되는 이들이었다.
“누구세요?”
“사설 경호팀입니다. 정모단 씨를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누가…… 혹시 백견 씨가요?”
여자가 침묵으로 수긍했다.
보는 사람도 많은 회사에 경호원을 보낼 정도라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온몸을 잠식했다.
“백견 씨 어디 있어요? 지금 무슨 일 있는 거죠?”
다급히 묻는 것과 동시에 견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신호만 갈 뿐 받지 않았다.
“제발, 지금 어디…… 엄마, 우리 엄마한테 가봐야 해요!”
모단이 막으면 밀쳐 버릴 기세로 뛰었다.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은 경호원들이 급히 뒤를 따랐다.
“그럼 같이 움직이시죠.”
경호팀장이 모단의 한 팔을 가볍게 잡아 이끌었다.
정신없이 따라가며 견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해보던 모단은 은규에게 전화를 했다.
“은규야, 견이 씨 사무실에 없어?”
잔뜩 목소리를 낮춘 은규가 빠르게 말을 전했다.
지협과 섭호의 사고와 견의 잠적으로 임시주총이 연기됐다는 말을 들은 모단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다시금 전화를 걸었다. 질리도록 이어지는 신호음에 눈물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깨물고 있던 입술이 터졌는지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