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77화 (77/86)

#77. 나는 모단 씨가 없으면

2018.01.24.

“괜찮아?”

지협의 걱정스런 눈길이 침대로 향했다.

찢어진 이마에 붕대를 동여맨 섭호가 누워 있었다. 전신 타박상에다 갈비뼈에 금까지 가서 최소 일주일은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다.

머리 위에 매달린 링거병을 본 섭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러진 것도 아니고 저절로 붙는다는데요, 뭘. 이사님이야말로…….”

“난 안 다친 거나 다름없어. 그 정도 사고에서 이만큼으로 끝났으면.”

목 보호대를 하고 왼팔에 반깁스를 한 지협은 극구 아무렇지도 않다며 입원을 거부했다. 섭호가 본능적으로 조수석 쪽을 보호한 덕에 충격이 덜하기도 했다.

“네 덕분이야. 미안하고 고맙다.”

“무슨 그런 말씀을…… 으윽.”

고개를 내저으려던 섭호는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밀려오는 통증에 눈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도련님은…….”

“조금 전에 전화가 왔더라고. 중간에 일이 생겨서 정모단 씨를 못 만나고…….”

지협이 씁쓸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려져 버린 목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도 착잡했지만, 더 충격적이었던 건 사고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비로소 털어놓은 한규철 사장과 모단의 관계였다.

“그래서 도련님이 한성어패럴을 그렇게……. 일전에 제이네트웍스에 대해 물어보셨던 것도…….”

섭호의 흐릿한 중얼거림 뒤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똑똑한 척은 다 했지만 결국 이쪽이 너무 순진했던 거라고, 지협은 생각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한다 한들 얼마든지 막을 수 있겠지 했던 건 너무나도 오만하고 안일한 판단이었다.

결국엔 한 수 아래였던 거다. ‘설마’가 아니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비밀스러운 저주와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돈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돈과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몰랐다.

누군가에게는 그것들이 타인이 가진 전부나 심지어 목숨보다도 우위라는 것도, 머리로는 알았지만 겪어본 적은 없었던 거다.

“그래서 도련님은 지금 어디 계신답니까?”

“일단 집으로 가긴 했는데, 바로 나온 모양이야.”

“그 몸으로요? 차라리 집에 숨어 계시는 게, 어차피 일주일이면…….”

“나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지금 꼭 가야 할 데가 있다더라고.”

찡그린 섭호의 미간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견을 찾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지협이 침대 모서리를 짚고 있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걱정 말고 누워 있어. 애 하나 숨길 데 없겠어? 내가 나가서…….”

똑똑 소리가 났다. 급히 말을 거둔 지협이 네, 하자마자 병실 문이 열렸다.

좀 전에 경찰서에서 병원으로 넘어온 혜숙과 모단이었다. 넘어지면서 삐끗한 혜숙의 손목을 치료받느라 내려갔다 온 참이었다.

그 뒤로 금지가 따라 들어왔다.

“흑, 어떡해, 오빠……!”

이미 빨개져 있던 커다란 눈에서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쏟아졌다. 들고 있던 가방도 팽개친 금지가 침대로 뛰어들려는데 지협이 얼른 막았다.

“접근 금지. 갈비뼈 나갔어.”

“뭐……?”

끼익 멈춰 선 금지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이내 얼굴을 다 덮고는 풀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어쩌다 그 정도까지……! 대체 어떤 놈이야? 죽여 버릴 거야. 오빠 갈비 몇 개 나갔어? 내가 똑같이 척추 뽑아버릴 거야!”

피식 웃었던 섭호가 곧 오만상을 찡그렸다.

“웃기지 마십시오, 아가씨.”

“웃기지 말라고 했어, 지금? 웃겨? 뭐가 웃겨! 내가 못 할 것 같아?”

“그런 뜻이 아니라, 웃으면 너무 아픕니다…….”

끙끙 앓는 섭호를 본 금지는 또다시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단이 나서서 다독여 주었다.

“나도 옛날에 한 번 금 가봐서 아는데 숨만 쉬어도 아파요. 일단 여기 앉아요.”

혜숙까지 자리에 앉고 난 후, 지협이 넌지시 물었다.

“근데 너, 여기 와도 돼?”

사고며 임시주총 연기 소식이 임원들 사이에서 여기저기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을 테니 황 회장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식구들의 감시망에서 한두 번 튀어본 게 아닌 금지는 태연했다.

“지금 내가 문제야? 모단 언니한테 대충 들었어. 그럼 또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할 말이 없었다. 모두의 입이 굳게 닫히고 그늘만 드리웠다.

“오빠들이 잡을 사람 다 잡는 동안 모단 언니랑 어머님은 나랑 같이 계시는 걸로 하면 어때? 치사하게 견이 오빠 꼼짝 못 하게 하려고 건드린 거라며. 견이 오빠도 겁날 게 없어야 성질대로 하지.”

“네가? 어떻게?”

금지가 말을 꺼내는 것과 함께 지협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순간, 모단은 놓치지 않았다.

발신자를 확인한 지협이 제 눈치를 보고 조용히 구석으로 향하는 것을.

직감이 왔다. 견에게 온 전화 같았다.

응,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지협을 살피던 모단이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아까부터 셀 수도 없이 견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조금 전에야 도착한 문자가 다였다. 지협이 형에게 부탁했으니 걱정 말라는 말뿐이었다.

다부지게 숨을 몰아쉰 모단이 성큼성큼 지협 옆으로 다가갔다.

“견이 씨죠? 바꿔주세요.”

“네? 아니…….”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모단이 실례를 무릅쓰고 휴대폰을 낚아챘다. 보란 듯이 견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모단은 곧바로 귀에 댔다.

“여보세요. 견이 씨. 어디예요?”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 소리도 넘어오지 않았다.

“지금 어디 있느냐고요! 괜찮은 거죠? 왜 말을 안…….”

뚝.

아예 끊어져 버린 전화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모단이 지협의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근데…….”

말문이 턱 막혀 버린 모단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안 그래도 걱정돼 죽겠는데 화까지 나기 시작했다.

지협이 입을 열었다.

“금지 말대로 하죠. 교통사고든 다른 이유든 회사에 휴가 내시고 며칠만이라도 다른 데 가 계시는 걸로요.”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급한 투였다.

“정모단 씨가 집에 들러서 간단하게 짐만 챙겨 나오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운전할 테니까 같이 갑시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지협이 차 키를 챙겨 앞장섰다. 사고가 난 차 대신 벌써 다른 차를 가져다 놓았다.

“그렇게 해요, 언니.”

금지도 걱정 가득한 눈으로 부탁했다. 심란해 보이던 혜숙마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단은 마지못해 지협을 따라나섰다.

한 손이라도 운전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모단의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나오세요.”

“네, 고맙습니다.”

모단은 차에서 내렸다.

눈에 익은 골목, 익숙한 집을 보니 종일 쌓인 피로와 서러움이 한데 몰려왔다.

훌쩍 삼키고 걸음을 떼는데, 웬 그림자가 대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당한 일이 있어 소스라쳤다. 비명도 못 지르고 다시 차로 뛰어가려다가 멈칫했다.

‘어른이…… 아니잖아?’

이 어둑한 시각에 웬 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얼핏 귀신처럼도 보였으나, 사람이 훨씬 더 무섭다는 걸 알아버린 후라서인지 별로 오싹하지도 않았다.

“저기…….”

경계심을 덜어낸 모단이 조심스레 다가서며 불렀다.

아이가 흠칫하더니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모단은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무탈아!”

아는 아이일 줄은, 그것도 무탈이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른 뛰어간 모단은 무릎을 접고 앉아 작은 어깨를 짚었다.

“어떻게 여기 왔어? 선생님 집은 어떻게 알았어?”

“택시 타고…….”

대답은 그게 다였다.

모단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지협의 차 외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왜 혼자 있어? 누구랑 온 거야? 위 비서님도 모르시는 것 같던데…… 누가 데려다줬니?”

“혼자 왔어요.”

모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되어야 혼자 버스든 택시든 탈 텐데, 고작 일곱 살짜리가 혼자 왔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일단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뭐?”

“난 백견 아들이 아니니까.”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백견 집에 있었다고 하면…… 백희명 회장님 집이나 백지협 이사 집에서 나온대도, 사람들은 역시 백견 아들이 맞나 보다 그럴 테니까.”

고작 손가락 두 마디나 될까 말까 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고 있자니 견디기 힘들 만큼 가슴이 아팠다.

“무탈아…….”

모단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무탈이를 꼭 끌어안았다. 작은 몸이 바짝 굳는 것마저 안쓰러웠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은 향이 코끝을 스쳤다.

몇 번 숨을 들이마신 끝에 견의 향수임을 깨달았다. 가장 익숙한 향임에도 아이와 매치하기는 힘든지라 금세 떠올리지 못했다.

‘견이 씨 집에서 나왔다고 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진하게 밸 일이…….’

아이의 목소리로 흘려낸 ‘백견’이라는 이름이 웽웽 귓가를 맴돌았다.

그 와중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과 분노마저 스쳤다.

‘어린애가 그런 소문을 어떻게 안 거지? 안다 한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나? 이게 일곱 살짜리 한테서 나온 말이고 생각이라고? 애가 이런 말을 다 듣고 상처받는 동안 어른들은 대체 뭘 한 거야?’

그때 작은 손이 올라오더니 모단의 어깨를 슬쩍 밀어냈다.

“선생님.”

“응?”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눈동자가 모단을 담았다.

묘한 예감에 휩싸인 모단은 무탈이의 손을 꼭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일단 들어가자.”

하나로 이어진 두 개의 그림자가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사이드미러로 보고 있던 지협의 잇새에서 침음이 새었다.

모단이 금방 나오지 못할 것임을 안 그는 뒤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

“소파에 앉아 있어, 무탈아. 물이라도 줄까? 춥진 않았어?”

“괜찮아요.”

모단이 부엌으로 가려는데 작은 손이 저를 잡고 끌어당겼다. 얼결에 다시 앉은 모단은 찬찬히 아이를 살폈다.

다시금 익숙한 향이 감돌았다. 밤새 저를 안고 있던 몸에서 나는 향이 이 아이에게서 난다는 게 어쩐지 난감했다.

“견이 삼촌이랑 같이 있었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를 마주 보다가, 모단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랬으면 너 혼자 여기 보낼 리가 없지. 그게, 견이 삼촌이 쓰는 향수 냄새가 나서.”

차라리 같이 있었다고, 그렇게라도 견이 어디 있는지 알려줬으면 했는데 엉뚱한 대답이 나왔다.

“일부러 많이 뿌리고 왔어요.”

“응?”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렇다고 다시 말해보라고 하기도 뭐했다.

실제로는 몇 분 안 됐을지도 모르지만 체감상 엄청나게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아이가 어렵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한참 후, 아이가 뭔가를 가만히 꺼내놓았다.

“이거……!”

모단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제가 견에게 선물한 손수건이다. 그런데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거, 이거 뭐야? 어디서 났어? 견이 씨 다쳤어? 호,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머릿속에 스치는 온갖 끔찍한 상상들에 진저리쳤다.

손수건을 움켜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단을 보던 여린 눈매가 일그러졌다.

“……코피.”

“뭐라고?”

“코피가 났어요.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자그마한 손이 모단의 목을 가리켰다.

“……그거.”

손짓을 따라 시선을 내린 모단은 목걸이를 가리키며 이거? 하고 되물었다.

“네. 그 목걸이 줄 때 했던 말 기억나요?”

“했던 말이라니?”

“이번 일로 많이 힘들어지겠지만, 그래도 같이 잘 버텨보자고 주는 뇌물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 믿어달라고 했던 거.”

쿵, 쿵, 쾅쾅쾅쾅.

어느덧 빨라진 심장 소리가 귓속을 연신 때렸다.

아무리 보아도 눈앞의 아이는 무탈이인데, 아닌 것 같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이런 거 안 받아도 믿어준다고 했죠.”

그날, 목걸이를 선물받던 순간의 모든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무슨 얘기인지는 다 알아듣겠는데,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반면 아이의 눈동자는 침착하다 못해 비장하게까지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라도 그럴 테니까.”

모단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는 작은 손만 멍하니 좇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건,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진이에요. 알죠?”

흔들리는 모단의 눈동자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제 얼굴을 담았다. 바로 옆에 있는 무탈이의 얼굴도.

아이와 단둘이 어린이집에서 생일파티를 했었다.

그 기억 위로, 책에서 떨어진 이 사진을 허겁지겁 집어 감추던 견이 겹쳤다.

“이게 나예요.”

무탈이의 손가락이 사진 속 제 얼굴을 가리켰다. 거의 손끝으로 짓누르다시피 했다.

“이 아이…… 나라고요.”

그래, 그게 너인 거 나도 알아.

그런데 왜, 그런 표정으로…….

“모단 씨가 옆에 있어줘야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다는 건, 진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건 이런 뜻이었어요.”

방금, 선생님이 아니라 모단 씨라고 했어.

꿈을 꾸고 있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말하는 토끼와 맞닥뜨린 앨리스가 된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도 가슴도 무언가로 단단히 막힌 것만 같았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이의 눈 아래, 견과 똑같은 위치에 있는 점이 유난히도 눈을 찔렀다.

“나는 모단 씨가 없으면, 한 달에 한 번씩…….”

그 점 위로, 거짓말 같은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아이로 돌아가요…….”

이 사진을 찍던 날 그렇게 말했었다.

“선생님, 이 사진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거죠? 제가 가져도 돼요?”

“생일선물 고마워요. 선생님하고 같이 있던 것 자체가 선물이었어요.”

“무탈아, 선생님이 그렇게 좋아?”

“네. 살면서 본 여자 중에 제일 예뻐요. 지나간 남자친구들은 왜 예쁜 말을 안 해줬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만날 남자는 엄청 많이 해줄 거예요, 분명.”

그래도 마냥 사랑스러웠다. 가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말을 할 때도 있지만, 항상 솔직하고 천진한 눈으로 저만 바라보았기에.

그러니까, 꼭 그처럼.

“우리 선생님한테는 절대 화내지 마. 우리 선생님 속상하게 만들지 마. 알았지?”

“매일 애기들 안아주느라 고생 많으시니까. 선생님은 내가 안아줄게요.”

아이의 얼굴과 어른의 얼굴이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목소리와 어른의 목소리가 함께 말하기 시작했다.

“달이 커지면 저를 잡아먹을 것 같아서 무서워요.”

“나 보름달 완전 싫어하거든요. 근데 오늘은 처음으로…… 낭만적으로 보여서.”

저를 잡던 손. 제가 잡아주었던 손.

저보다 훨씬 큰, 아니, 아주 작고 보드라운, 아니, 내 손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크고 단단한 손이, 아니, 제 손가락 하나를 꼭 움켜쥐던 앙증맞은 손이…….

“진짜 소원 이루어져요? 그럼 저는 선생님하고 결혼할래요.”

“걱정 마세요. 선생님이 할머니가 되어도 선생님하고 결혼한다고 할게요.”

“반지는 조금 더 있다가 줄게요.”

“그냥 한 70년쯤 같이 살다가 같이 죽으면 되겠다. 관은 2인용으로 짜고 수의도 커플룩으로. 좋죠?”

장난인가?

아니, 그럴 리가.

꿈인가?

그럼 왜 깨질 않지?

진짜가 아니라면, 견이 했던 말들을 어떻게 무탈이가 그대로 알고 있는 거지?

아이한테 그런 말을 왜 해? 한다 한들 저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꺼낼 수 있을까?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와중에도 모단은 손을 뻗어 동그란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가 울고 있으니까.

끅끅대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눈물방울만 뚝뚝 떨어뜨리는 얼굴이 일곱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럽고 괴로워 보여서, 달래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진심이 뭔데요?”

“진짜 마음. 거짓말하지 않는 마음.”

“진짜 마음이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요. 진짜 마음이 너무 무겁거나 안 예쁘면 살짝 꾸미거나 감추고 싶어질 수도 있지 않나요?”

커다란 화살이 날아와 박힌 것처럼, 묵직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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