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홀가분해
2018.02.07.
‘살다 보니 구치소 면회를 와보는 날이 다 오네.’
모단은 썰렁한 대기실 안을 둘러보며 하릴없이 손발만 꼼지락거렸다.
당일에 와서 면회 신청을 하면 오래 기다릴 수 있다더니, 벌써 30분 가까이 여기 앉아 있다.
십여 분이 더 흐른 후에야 제 차례가 됐다는 안내가 나왔다. 모단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면회실 안으로 들어섰다.
유리벽 너머에 한규철이 죄수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틀에 박힌 인사라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여기 안녕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어서.
모단은 잠자코 유리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오래전 무섭도록 커 보였던 그는 생각보다 작았다.
좋은 집도 좋은 옷도 두르지 않은 그는 언뜻 모르는 노인처럼 보였다. 하나 사람을 짓밟는 듯한 눈빛과 저를 낳아준 여자와 꼭 닮은 눈매는 그대로였다.
모단을 뚫어져라 보는 한규철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속에서는 폭풍이 일고 있었다.
그 당돌하고 되바라진 여자애가 이만큼이나 자랐다.
사라가 세상을 떠났을 때와 비슷한 나이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곳곳에서 보이는 딸의 얼굴이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결코 없었다. 남들 다 받아먹는 뇌물쯤 별것도 아닌 일로 만들고 넘어가면 그만이었기에.
고작 그걸로 큰 건수라도 잡은 양 을러대는 것이 가소롭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백견이 전화에 대고 한 말을 듣자마자 치밀어 버린 살의가 이성을 짓뭉개며 결국 제 손발을 묶어버리고 말았다.
‘오래전에 저지른 죗값이라고? 자기 자식 핑계로 남의 자식을 다치게 했다고?’
얕봤던 놈이 거기까지 알아낸 것도 열이 받았지만, 죄라는 말에 피가 거꾸로 솟고 눈이 뒤집혔다.
‘뭘 안다고. 그놈을 따라나설 때 한 번, 세상을 등졌을 때 두 번, 하나뿐인 귀한 자식을 두 번이나 잃은 내 심정을 네깟 것들이 뭘 안다고 죄라고 지껄여?’
그래서 사람을 보냈다.
겁이나 좀 주라는 말과 함께.
그 아이가 엄마라 따르는 여자를 치워 버리면, 백견도 그 아이도 충분히 알아듣고 다신 입도 벙긋 못 하겠지 싶어서.
고작 몇 분밖에 되지 않는 면회 시간이 벌써 반이나 줄어들었다. 모단이 먼저 입을 뗐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얼굴 뵙고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한규철은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서 더 이상 말이 나돌지 않게 해주셨더라고요.”
제이네트웍스를 파산까지 몰고 간 이유에 대해서, 한규철은 사업상의 문제로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고 그대로 기사가 나갔다.
그걸 본 순간 모단은 최소한 한 가지만큼은 한규철과 같은 생각이었다는 걸 알았다.
저를 낳아준 부모에 대한 이야기와, 저와 한규철이 한 핏줄이라는 사실만큼은 알려지지 않고 묻히길 바란 거라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합니다. 난 그 여자의 딸이 아니니까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토록 바라는 대로, 애초에 그 여자는 아이 같은 거 낳은 적 없다고 믿으세요.”
나에게 엄마란 존재는.
“언젠가 꼭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 이혜숙 씨 한 사람뿐이라고.”
모단은 겁을 먹기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도 총기 어린 눈을 하고 또박또박 힘주어 내뱉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절 감시하고 괴롭히는 일이 또 생긴다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던 눈빛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날카로워졌다.
“당신이 가진 거 아무것도 탐나지 않아요. 돈밖에 모르는 당신네들 세상에선 어떨지 몰라도, 제 상식으로는 남이 가진 게 많던 적던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으니까.”
‘남’이라는 단어를 특히 강조한 모단이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이라도…….”
모단은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은 눈을 한 한규철을 고요히 쏘아보았다.
“저한테 미안하다고 해주세요.”
면회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떨어진 한규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쩌면 기대했던 그대로였다.
“난 너한테 미안한 게 없다, 조금도.”
모단은 그만 웃고 말았다.
“따님과 똑같이 말씀하시네요. 부전여전인가.”
뜻밖의 웃음 앞에서 한규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제라도 미안하다고 하셨으면, 그래서 제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면 언젠가 희명그룹 사돈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요만큼이라도 있었을 텐데. 말 한마디로 싹 날려 버리셨습니다.”
실은 무릎 꿇고 싹싹 빈다 해도 죽을 때까지 외할아버지라 부를 일 따위 없을 테지만, 불부터 지르고 봤다.
“이……!”
“하나 더 있습니다.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재판 내내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하셔야 할 거라고 전해달라더군요. 저와 결혼하게 될 사람이.”
한규철이 벌떡 일어섰다.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무섭지 않았다. 그가 당장 유리벽을 부수고 뛰쳐나와 제 목을 조른다 해도 태연히 뿌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언젠가처럼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르다.
고작 할아버지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목소리를 덜덜 떨던 약한 아이는, 피보다 더 진한 사랑을 받고 자라는 동안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뿌리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또 다른 사랑까지 듬뿍 받고 나날이 활짝 피어나는 중인데, 어떤 바람이 두려울까.
“앞으로 또 저나 엄마에게 위해를 가하실 경우, 예전에 한규철 사장님께서 쓰셨던 방법 그대로 한성어패럴과 거래하는 모든 곳을 가차 없이 잘라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결혼하게 될 사람의 할아버지께서.”
눈에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며 서 있던 한규철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네가 할 줄 아는 건 여전히 없는 거냐?”
지금 놀릴 수 있는 건 혀밖에 없으니, 그것으로라도 모단을 할퀴고 피를 보겠다는 악독한 의지가 전해졌다.
“고작 몸뚱이 하나로 남자 홀려서 도와달라 구걸하는 거 외에 할 줄 아는 건 없느냔 말이야. 지금은 그 남자가 가진 돈이며 빽이 다 네 것 같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 본래 없는 것들이 손에 뭐라도 좀 쥐여주면 천지분간 못 하고 날뛰는데…….”
“세상 제대로 헛사셨네요.”
함부로 내뱉는 말속의 내가 진짜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모단은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다.
저를 이토록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빽은 그 남자가 가진 돈이 아니라, 넘치도록 받고 있는 마음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사람도 도움도 항상 알량한 돈으로만 얻어가며 사셨으니, 돈 안 받고 도와주는 건 다 구걸로 보이시나 봐요?”
모단은 짐짓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저 걱정하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본래 있는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던 게 먼지처럼 날아가면 천지분간 못 하고 엉망진창 망가지던데.”
면회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모단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앞으로 더 이상 뵐 일 없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휠체어 선물이라도 해드릴까요?”
“뭐가 어째?”
“기자들 앞이며 재판장에 나오실 때 휠체어 타고 나오셔야죠. 다들 꼭 그러던데요. 들어갈 땐 비싼 차에서 내려서 제 발로 잘들 들어갔으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새파랗게 질린 한규철을 보며 모단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필요 없으시면 말고요.”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를 할까 하다가 이번에도 그냥 삼켰다.
남이 아무리 안녕하라고 빌어봤자 본인 마음에 안녕하지 못한 것들만 들어차 있으면 아무 의미 없을 테니까.
모단은 그대로 몸을 돌려 면회실을 빠져나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구치소를 나섰다.
손갓을 하고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덤 속처럼 침침하고 고즈넉하던 담장 안과는 달리 바깥 날씨는 유난히도 화창했다.
제가 구속됐다가 풀려난 것도 아닌데,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모단은 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견이 씨. 하늘에 구름이 있는데 하얀 강아지같이 생겼어요.”
낮은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간질였다.
[이제 막 하늘만 봐도 내 생각이 나고 그러는구나.]
“그건 아니고 전에 견이 씨가 뺏어간 인형 생각이 났어요. 그거 진짜 안 줄 건가?”
[이젠 공짜로 못 줘요. 가격이 많이 올랐어요. 내가 밤마다 안고 자서.]
“그렇게 말하니까 더 탐나네. 얼마면 돼요?”
[얼마는 무슨. 나 하나 데려가면 다 따라가요. 인형 말고도 아주 많이.]
모단은 시려오는 눈을 감고는 웃었다.
“오늘 어떤 사람한테 백견 씨를 나하고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잘한 거 맞죠?”
하, 하고 벅찬 숨소리가 넘어왔다.
제대로 말할 기회도 안 주고 어쩌고 하는 혼잣말도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고 나서 견이 대답했다.
[앞으로는 그렇게 길게 말하지 말고 딱 두 글자만 해요. 남편이라고.]
***
생전 처음으로 구치소 면회를 가게 된 건 견도 마찬가지였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유리벽 너머의 김광남은 짧고 희미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사이 몰라보게 꺼칠하고 해쓱해져 있었다.
“제가 만나뵙자고 했을 때만 해도 생각이 많아 보이셨는데, 바로 움직여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모단에게서 김광남과 우일두가 나눈 대화에 대해 전해 듣고 난 후, 견은 치열한 고민에 빠졌다.
한쪽은 죄책감인지 뭔지 몰라도 최소한 겁은 먹고 있고, 다른 쪽은 그마저도 없다.
충분히 파고들어 볼 만한 틈이라는 판단이 섰다.
아직 무탈이의 몸을 하고 있었기에, 추적이 되지 않는 메일로 아무도 모르게 김광남에게 연락을 했다.
모든 증거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주범은 우일두 쪽이고 단순 공범인 것으로 보이니 차라리 자수를 해서 감형을 받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몇 번 더 메일을 보낸 후에, 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가 은밀히 만나자는 말을 꺼냈다.
일단 약속 장소에 나와 준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이라 생각하며 간곡히 설득했다.
그 자리에선 끝내 대답을 안 했지만, 결국 김광남은 자수하러 가는 쪽을 택했다.
“……예전에 백견 씨가 대표로 있을 때였어.”
김광남의 입에서 뜻밖의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당시에 본사 재무팀 과장이었던 일두가 법인카드를 횡령하는 걸 우연히 알게 됐어. 그때만 해도 난 명실상부한 백견 라인이라…….”
뒤에서 누가 뭐라 하든, 목적이 뭐였든 간에 아들뻘인 상사에게 유난히도 깍듯했던 이였다.
오래전 그의 어머님이 직접 달이셨다며 가져다준 홍삼진액을 한입 삼켰을 때처럼 입안이 쓰디썼다.
“내가 백견 씨한테 바로 고발할까 봐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져가지고 한 번만 눈감아달라고 사정을 하더라고.”
“…….”
“같은 기러기아빠라고 술도 몇 번 마시면서 공감대도 있었고…… 물론 불법이지만은 그때만 해도 금액이 그렇게까지 크지도 않은 것 같아서 내가 큰맘 먹고 봐준다고 생색을 내면서 넘어갔었지.”
꾹 모아 쥔 김광남의 손은 줄곧 미미하게 떨렸다.
“근데 얼마 안 돼서 대표 자리가 비고, 블랑아이 자체가 없어질 뻔하게 생기면서 끈 떨어진 연이 된 거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 와이프하고 딸한테 돈이 제일 많이 들어갈 시기였는데…… 일두가 나를 꼬신 거야.”
잠자코 듣고만 있던 견의 가슴마저 답답해졌다.
“처음엔 펄쩍 뛰었는데, 사정이 다급해지니까 결국 손을 대게 되더라고. 어라, 이거 안 들키네? 아무도 모르네? 싶으니까 쓸데없는 용기가 생겨서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
다들 그렇게 무뎌지고 닳는 거겠지.
조금이라도 더 잠기기 전에 빠져나오는 것보다는, 어쩔 수 없이 휩쓸린 것처럼 포장할 이유를 찾는 게 더 쉬우니까.
“쪼들리더라도 상식적인 선택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김광남을 살피던 견은 망설이다 물었다.
“아내분과 따님은…….”
뜻밖에도 김광남은 허허 웃었다.
“외국 놈하고 바람까지 핀 거 알고 이혼하자 했을 때는 적반하장으로 죽어도 못 한다면서 내 지갑을 붙들고 늘어지더니, 이제 지가 먼저 하자네.”
견은 할 말을 잃었다. 김광남은 그제야 견의 눈을 보았다.
“홀가분해. 전부 다.”
그 안에 많은 의미가 들어 있음이 전해졌다.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으나,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도 자수하시고 적극적으로 수사에도 협조하셨으니 확실히 감형 처분을 받을 거라고 합니다.”
“받아봤자 얼마나 받겠어. 저 윗사람들은 돈을 때려 부어서 좋은 변호사 줄줄이 달고 나설 테고, 그러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봐주면서 결국은 집행유예나 받겠지. 나 같은 사람이나 멍청하게 징역 살고 그러는 거야. 나오면 전과자 되는 거고.”
자포자기한 듯 중얼거리는 김광남을 바라보던 견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김 차장님께 붙여 드릴 변호사가 그 사람들 변호사보다 훨씬 유능할 겁니다.”
김광남의 눈이 커졌다.
자수하시라는 말을 꺼냈을 때처럼, 견은 간절한 눈으로 김광남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쁜 마음 먹지 마세요.”
***
얼마 후, 희명그룹 본사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수많은 기자를 앞에 두고 지협이 단상에 올랐다.
“……사회적 책임과 의무가 있는 기업으로서 내부의 문제를 이렇게 드러내게 되었음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더 완벽해 보이는 외모 덕일까, 지협은 홍보이사라기보다는 이사님 역할을 맡은 배우처럼 보였다.
희명은 상속자 얼굴로 홍보하고 경영하고 복지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기자들은 대충 찍은 기사 사진도 영화 스틸컷처럼 만들어 버리는 미모에 홀려 미친 듯 셔터를 눌러댔다.
“블랑아이뿐만 아니라 전 계열사를 상대로 대대적인 감사가 이루어질 것이고, 문제가 있다면 즉시 시정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더욱 발전하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반보 뒤에 서 있던 백 회장이 나서더니 지협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고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지협도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기자들 사이에 작은 술렁거림이 일었다.
어차피 대기업에서 내놓는 대국민사과 내용이야 거기서 거기일 터, 사과라도 하는 게 어디냐 생각하며 예의상 받아 적으려 했다. 그런데 보기 드물게 진심과 신뢰가 전해지는 게 아닌가.
그동안 견이 잠깐 방황했던 것을 빼면 희명은 신기할 만큼 별문제가 없던 곳이었다.
그마저도 일종의 루머라고 밝혀졌고, 오히려 각종 선행과 미담이 넘친다는 것까지 떠올린 기자들이 슬금슬금 태도를 바꿨다.
덕분에 기자회견이 끝난 후, 대체로 호의적인 기사들이 쏟아졌다.
길지 않은 기자회견을 마무리하고 본가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백 회장이 지협에게 물었다.
“그래, 일은 어떻게 되어간다더냐?”
“저희 쪽에서 준 자료가 워낙 방대하고 구체적이라 수사에는 별 무리 없는 것 같고요, 오히려 파면 팔수록 더 나온다네요.”
백 회장은 흐음, 하고 코끝으로 숨을 내쉬었다.
“참, 원래 한규철 변호를 맡기로 했던 변호사가 갑자기 손을 떼겠다고 했답니다.”
“그래? 여론이 극악해서 부담을 느낀 모양이로구나.”
지협은 전혀 아닐 거라는 투로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글쎄요. 돈만 많이 주면 회사 아니라 나라를 말아먹어도 변호해 주는 사람도 있던데요.”
“그렇긴 하지.”
“근데 한규철의 경우엔 아무리 거액을 제시해도 어떤 법무법인도 나서질 않는다고 해서 난리가 났나 봅니다. 잘못하다간 제 변호 제가 하게 생겼다네요.”
뭔가를 곱씹던 백 회장이 혀를 끌끌 찼다.
“견이 짓이로구나.”
“제 생각도 그래요. 안 봐도 뻔하죠.”
“하여간, 속에 뭐가 들어앉았는지 모를 놈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하며 지협은 생각했다.
역시 백견은 절대 적으로 둬서는 안 될 놈이라고.
백 회장 역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놈이 나쁜 길로 갔으면 우주라도 말아먹었을 놈인데, 퍽 다행이라고.
뒤숭숭하던 사내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미뤘던 임시주주총회가 열렸다.
참석한 주주들뿐만 아니라 회사 안팎의 수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었다.
새 재무이사 선출과 특별감사팀 구성 등 굵직굵직한 안건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변진상의 구속으로 공석이 된 블랑아이의 대표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가였다.
평소보다 훨씬 길었던 총회의 끝에 마지막 안건이 가결됐다.
“그럼 이로써 블랑아이의 신임 대표이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