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2018.02.21.
“……그래서 회사에 소문 다 났어요.”
“아하하. 너무 좋은데?”
자칫 임신설까지 퍼질 뻔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견은 저렇게 좋을까 싶을 만큼 좋아했다.
“좋기는 뭐가 좋아요! 출퇴근할 때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선생님들이며 학부모님들까지 날 어려워한단 말이에요! 좀 있으면 다들 사모님이라고 부를 기세야!”
“사모님은 사모님이지 뭘 그래요. 내가 사장님이 될 거니까.”
몸을 일으킨 견이 침대 아래로 내려가 책상에서 뭔가를 찾았다.
모로 누워 있다가 엎드린 모단은 견의 침대에 굴러다니던 강아지 인형을 가져다 가슴 아래를 편히 받쳤다.
얼마 전 섭호가 따로 집을 구해 이사를 나간 후부터 둘의 데이트 장소는 주로 견의 집이 되었다.
침대로 돌아온 견이 옆에 나란히 엎드리며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한번 읽어봐 줄래요?”
“뭔데요?”
“사업계획서예요. 인생의 동반자에게 먼저 검토를 받아볼까 하고.”
“난 경영의 경 자도 모르는데요?”
“괜찮아요. 경영은 내가 할 테니까 모단 씨는 일반적인 소비자 입장에서 솔직한 의견만 말해주면 돼요.”
고개를 끄덕인 모단이 사업계획서를 펼쳤다. 첫 장을 보자마자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월경용품 멀티숍이요?”
“네.”
계속 보라는 손짓을 한 견이 프레젠테이션하듯 설명을 보탰다.
“패션 쪽은 이미 편집숍이 많이 있고, 화장품도 드럭스토어가 있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월경용품도 종류와 브랜드에 상관없이 한곳에 모아서 판매하는 오프라인 멀티숍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을 위한 장소라고 하면 맞을 것 같네요.”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넘겨보던 모단은 고개만 끄덕였다.
처음엔 뭔가 싶었다가 순식간에 혹 빠져들게 만드는 내용들을 읽느라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회용 생리대를 브랜드별로 들이고, 직구로만 구입 가능한 해외 제품들도 들여오려고 해요. 천 생리대와 탐폰, 생리컵도 당연히 갖출 거고요.”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직접 보고 고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그날 필요한 다른 물품들도 추가될 수 있을 거예요. 찜질팩이나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진통제, 아로마오일, 허브티, 간식 같은 것부터 위생속옷이나 피부 트러블에 좋은 화장품까지. 신진 업체에서 개발 중인 여성 관련 상품들을 가장 먼저 선보일 수도 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왠지 눈앞에 그려졌다.
한 달에 한 번, 어쩌면 한 달에 몇 번이라도 가고 싶어질 것 같은 매장이.
“남자들도 당당하게 드나들 수 있다면 더 좋겠어요. 요즘은 아빠가 딸에게 초경파티를 해주기도 하고, 여자친구의 그날을 챙겨주려고 하는 남자들도 많으니까.”
종이를 넘긴 모단의 손이 사진을 보고 멈칫 굳었다.
“이건…… 전에 나한테 선물해 줬던 거네요?”
생리대와 파우치, 찜질팩 등이 들어 있는 예쁜 상자는 전에 본 적이 있는 거였다.
“맞아요. 초경이나 완경 때 이벤트로, 혹은 연인이나 부인에게 선물할 수 있는 기프트박스를 기획해 봤어요. 제일 먼저 받은 사람이 모단 씨고.”
이렇게까지 큰 그림의 일부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때 어떠냐고 물어봤던 거구나 싶었다.
“성인용품 매장도 길 가다 보이는 세상인데, 월경용품을 눈치 보면서 까만 봉지에 담아서 사갈 필요가 뭐 있겠어요. 안 그래요?”
모단이 슬쩍 눈을 흘겼다.
“성인용품 매장은 또 언제 가봤대?”
“가봤다고는 안 했어요. 길 가다 봤다고만 했지. 왜요,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말을 말아야지, 내가.”
모단은 가지런히 덮은 사업계획서를 들고 일어나 앉았다.
새삼 견이 달리 보였다.
남자친구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경영인으로서도 엄청난 사람이구나.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어요? 아무리 본인이 월경을 해봤다지만 정말 여자들이 하는 것과는 달랐잖아요.”
“사실은…….”
그녀를 따라 일어나 앉은 견이 슬금슬금 몸을 뒤로 뺐다.
“모단 씨 일기장에서요.”
“예? 내 일기장이라니? 나 일기 같은 거 안 쓰는데?”
“옛날 일기요. 난 절대 안 봤어요. 무탈이가 봤지.”
“뭔 소리야! 그놈이 그놈인데!”
최대한 뒤로 빠진다고 빠졌음에도 덥석 멱살을 잡힌 견이 얼른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제야 모단은 제가 고등학교 일기장에 적어둔 ‘생리가 창피한 건가?’라는 말과 ‘혹시 예쁜 캐릭터나 명품 브랜드 로고가 그려져 있으면 당당하게 들고 다닐지도?’라는 말이 견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는 걸 알았다.
“매장은 아주 모던하게, 로고와 쇼핑백은 명품 뺨치는 퀄리티로 뽑을 예정이에요. 어때요? 잘될 것 같아요?”
견이 너덜너덜해진 티셔츠 앞자락을 손으로 툭툭 펴며 물었다.
장난스레 물었지만 내심 초조해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단은 솔직하게 답했다.
“대박. 난 천상 사모님 소릴 들을 팔자구나 싶어요.”
“하하.”
견의 눈가에 희미하게 어려 있던 일말의 긴장과 불안들이 비로소 사라졌다.
“소문 때문에 어린이집 다니기 불편하면 그만두고 내 회사로 들어올래요?”
사업계획서를 돌려받아 바닥에 내려놓은 견이 스카우트인지 개수작인지 모를 것을 던졌다.
“내 비서 하는 거 어때요? 섹시한 사장님과 더 섹시한 비서. 좋지 않아요?”
“에로회사 사장님이야, 뭐야. 내가 사장이고 백견 씨가 비서라면 모를까 안 내키네요.”
“낙하산으로 채용시켜 줄랬더니 사장 자리를 탐내 버리네. 바지사장이라도 할래요?”
“안 해요. 바지사장 되려고 공부 열심히 하고 자격증 딴 줄 아시나.”
혜숙과 아빠가 그랬듯 전공이 통하는 데가 있었다면 일적으로도 좋은 동료가 되고 그의 말마따나 섹시한 사내연애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쉽긴 했다.
“근데 브랜드네임은 뭐로 할 건데요? 그게 빠져 있네. 아직 못 정했어요?”
“아뇨, 정했어요.”
“근데 왜 없어요?”
“주인한테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해서.”
“주인이요?”
“네.”
견이 모단의 손을 잡았다.
“이름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이름이요? 내 이름?”
“네. 브랜드네임을 <모단>으로 하고 싶어요.”
상상조차 못 했던 제안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간판들을 좋아해요. 본인이나 가족 이름을 내거는 거요. 어떤 신뢰와 각오 같은 게 느껴진달까. ‘희명’도 그렇고.”
견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모단(모ᄃᆞᆫ)’은 ‘모든’의 옛말이래요. ‘빠짐이나 남김이 없이 전부’라는 뜻. 영어로는 ‘Modern’이라는 단어와 겹쳐요. ‘최신의, 새로운, 선구적인’이라는 의미요.”
제 이름 두 글자를 이렇게나 근사하게 해석해 낼 수 있다니.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죠. 절대 먹칠할 수 없는.”
어디서 이런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사랑하게 된 걸까.
모단은 눈앞의 잘생긴 유니콘 같은 백견을 물끄러미 보다가 답했다.
“몸도 갖고 마음도 갖고 인생도 가졌는데 이름쯤이야. 다 가져요.”
견이 말 그대로 다 가진 사람처럼 웃었다.
“고마워요, 다 줘서.”
내내 꼭 잡고 있던 손을 놓은 견의 눈빛이 돌변했다.
“제일 중요한 계약까지 따냈으니 이제 좀 쉬어야겠다.”
입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티셔츠를 다시 끌어 올리는 팔뚝을 본 모단이 창백해졌다.
“쉬는 시간 아닐 것 같은데?”
“그럼 즐거운 시간.”
입술이 말을 막았다.
손이 손을 가두고, 몸과 몸이 겹쳐지며 또다시 침대가 푹 꺼졌다.
***
“……누구야?”
“그러게. 우리 회사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노블그룹 본사, 홀연히 나타난 한 남자로 인해 로비가 술렁거렸다.
훤칠하다 못해 위압적인 키에 완벽한 슈트 핏을 자랑하는 남자는 혼혈 혹은 외국인처럼 보이는 이국적인 미남이었다. 단연코 눈에 띄는 존재감에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 힐끔거렸다.
“외국 바이어인가? 연예인 뺨치게 생겼는데.”
“진짜 연예인 아니에요? 오늘 우리 회사에서 뭐 촬영하나?”
“글쎄요. 궁금해 죽겠네.”
저를 찌르는 시선들을 느낀 섭호는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걸어오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조용히 회장실로 향했다.
비서가 정중히 안내했다. 그러나 문 안에서 먼저 마주친 건 금지의 큰오빠였다.
“네가 제 발로 여길 와?”
“오늘은 회장님과 독대하고자 온 자리입니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면 언제든 따로 뵙겠습니다.”
늘 차분하긴 했지만, 묘하게 더 당당해진 섭호의 태도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듣자 하니 희명그룹에서도 쫓겨났다면서?”
“노블에서는 회사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상태에서 제 의지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후임에게 인수인계까지 완벽하게 한 후에 퇴사한 사람을 두고 쫓겨났다고 합니까?”
“건방진 놈이……!”
기어코 언성이 높아졌다.
“뭐가 어떻게 됐든 이제 희명 그늘까지 없으니 더더욱 볼 게 없어진 거 아니냔 말이야!”
“희명 그늘에 머무는 일개 비서라서 마음에 차지 않으셨던 걸로 압니다. 이제는 아무 그늘도 없는 사람이니 좋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에서 황 회장의 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손님 붙잡고 웬 소란이야? 얼른 들여보내.”
금지의 큰오빠가 못내 못마땅한 얼굴로 물러섰다.
섭호는 정중히 묵례를 하고는 응접실을 가로질러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황 회장이 눈을 들었다.
금지와는 키 작은 거 빼고는 조금도 닮지 않은 인상이다. 생각보다 젊어 보이기도 했다.
그를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오빠들이 거의 대부분의 실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는 백 회장보다도 더 모습을 비추지 않기로 유명했다.
“안녕하십니까. 위섭호라고 합니다.”
“앉아. 목 아프네.”
공손히 인사부터 한 섭호는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며칠 전, 퇴직과 이사까지 모두 마무리한 후에 황 회장의 비서실로 다짜고짜 연락을 넣었다.
만나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전해달라 하긴 했으나 정말로 오라는 답변이 올 줄은 몰랐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시간인 거 알면 본론만 빨리빨리 얘기해.”
“알겠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거다. 한 번에 승부를 봐야 한다.
섭호는 들고 온 브리프케이스에서 단정한 갈색 봉투를 꺼내 두 손으로 건넸다.
“이걸 먼저 봐주셨으면 합니다.”
적대적이라기보다는 귀찮은 표정으로 안에 든 것을 꺼내 휘리릭 넘겨보던 황 회장의 눈가가 점점 굳어졌다.
알파케미컬 장남, 태산무역 장남, 케이엠홀딩스 차남.
그들의 이력이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 말고, 돈으로 악착같이 묻어둔 더러운 과거들.
인물뿐만 아니라 회사의 치부도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걸 왜, 어떻게.”
“설마하니 그토록 딸을 아끼시는 황 회장님께서 다 알면서도 따님을 이런 집안에 보내시려고 했던 건 아닐 거라 믿습니다.”
황 회장이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내가 이 자료를, 그리고 자네를 어떻게 믿나?”
“못 믿으시겠다면 더 확실한 증거를 보여 드리면 되겠지요. 이 중 아무거나 하나만 터뜨려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겠죠.”
‘별 볼 일 없는 놈이 아닌 것 같은데.’
황 회장이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섭호를 훑었다.
아들들에게 들은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저 그런 놈이라고 해서 정말 그런 줄 알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는데 전혀 아니지 않은가.
문득 아들놈들 뒤통수를 한 대씩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위 집안들을 들이민 건 아들들이었다. 그쪽 사람들에게 좋은 말만 듣고 원하는 것만 보느라 제대로 알아볼 생각들도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하나뿐인 딸을 팔지 않고는 유지가 안 될 만큼 노블그룹 경영 상태가 안 좋습니까?”
“뭐가 어째?”
“그 정도로 어려우시다면 회사 깔끔하게 접으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오늘 여러 번 크나큰 충격을 받은 황 회장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네놈이 뭔데 날 모셔? 가진 것도 하나 없는 놈이 말만 번드르르해서는.”
“가진 게 하나도 없진 않습니다.”
다른 봉투 하나가 더 나왔다.
아들놈들이 걸핏하면 돈 달라며 들이미는 허무맹랑한 계획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꼼꼼한 사업계획서와, 얼마 전 한 지인이 ‘몇 년 전에 거길 샀어야 하는데’라고 한탄하던 지역의 땅문서였다.
“땅은 몇 년 전에 사둔 거고, 저축에 퇴직금까지 합치면 현금도 제법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먹고살 만한 가게 하나와 마당 있는 집 정도는 충분히 지을 수 있습니다.”
물론 노블그룹의 규모에 비하면 슈퍼카 앞에서 세발자전거 굴리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섭호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장담하건대 회장님께서 사윗감으로 생각하셨던 사람들 중에 부모 재산 빼면 저보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보다 뭘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처음의 귀찮아하던 기색은 완전히 거둔 황 회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섭호를 살피다 툭 던졌다.
“노블그룹 사위로 들어올 생각이면 계열사 중에 하나를 책임질 생각을 해야지, 웬 시골구석에 코딱지만 한 가게 타령이야?”
“금지 아가씨와 만나는 걸 허락해 주십사 하고 온 것이지 노블그룹 계열사를 주십사 하고 온 건 아닙니다.”
사위에 계열사라니, 일부러 도발해 보는 게 분명하다 여긴 섭호는 더더욱 정신을 바짝 차렸다.
“굳이 시골에서 코딱지만…… 아니, 소규모의 가게를 택한 이유는, 전에 금지 아가씨가 했던 말 때문입니다. 큰일 하느라 얼굴도 못 보는 가족보다 작은 일을 매일매일 같이 할 수 있는 가족이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황 회장이 다리를 꼬았다. 그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이거 들고 나가서 딴 여자 만나.”
“회장님.”
“딱 보니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들을 일 없는 사람 같은데 굳이 왜 이 집안에 들어와서 모진 대접 받으려고 그러나?”
“그야…….”
우리 딸 마음고생시키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잘난 얼굴이 슬그머니 붉어지나 싶더니, 한마디 한다.
“금지 아가씨가 이 집안 딸인 걸 어쩌겠습니까.”
이놈 봐라, 하는 시선과 장인어른이라 부르는 것을 허해주십시오, 하는 시선이 허공에서 파직파직 맞닥뜨렸다.
본래 노블그룹은 금지의 외가 쪽 재산을 바탕으로 커온 회사였다. 지금도 집안일에 있어서는 아내의 의견이 우선이었다. 재산의 상당 부분도 아내가 쥐고 있었다.
금지의 결혼에 관해서도 아내가 주변의 딸 가진 집들 중 가장 시집 잘 보냈다는 말을 듣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것과 금지가 좋아하는 남자는 결사반대라는 것만 알았다.
처음엔 금지가 안쓰러워 몇 번 끼어들어 봤으나 지청구만 들었고, 막상 제 딸을 주려니 대통령 아들이라도 맘에 안 차는 건 저도 마찬가지라 아내며 아들들이 실컷 재고 따지게 내버려 두었던 거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딸아이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어렴풋 알 것도 같지 않은가.
“자네…….”
황 회장이 입을 떼자마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금지옥엽우리막내♥’라고 뜨는 것을 본 그는 보란 듯이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전화를 받았다.
[아빠악!]
오냐, 소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앙칼진 고함이 넘어왔다.
[나 할 얘기 있어! 정말 확실하게 얘기하는데 섭호 오빠 아니면 결혼 안 해!]
“너 이 녀석, 그게 다짜고짜 애비한테 전화해서 할 소리냐?”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 막 나갈 거야!]
언젠 안 그런 것처럼 말하고 있어.
황 회장과 섭호의 눈에 잠시 같은 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 섭호 오빠 못 만나게 하면 전에 큰오빠가 세금 많이 나온다고 내 앞으로 사둔 땅 다 팔아버릴 거야! 작은오빠가 내 명의로 돌려놓은 차는 대포차로 넘길 거고!]
“금지 너!”
[엄마가 양도세보다 증여세 내는 게 낫다고 나한테 돌려놓은 건물도 다 팔아치워 버릴 거야! 그리고 그 돈으로 섭호 오빠 데리고 멀리멀리 숨어서 딱!]
“딱?”
[애부터 낳아버릴 거야!]
황 회장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섭호를 찔렀다.
섭호는 절대 그럴 계획까진 없다는 말을 담아 필사적으로 두 손을 내저었다.
[분명히 말했어. 나 지금 집에 있는 서류하고 도장 다 챙기고 짐 다 쌌어. 엄마 금붙이랑 막내오빠 달러까지 다 쓸어 담았다고. 딱 사흘 안에 허락한다는 말 안 나오면 어떻게든 현금으로 바꿔서 들고 튈 거야.]
폭풍처럼 쏟아낸 그녀가 딱 한 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 잡아봐라.]
휴대폰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황 회장이 끄응 하고 침음을 흘렸다.
“금지한테 여기 온다고 말했나?”
“아닙니다, 절대.”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부쩍 늙어 보이고 더 피곤해 보이는 황 회장이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던졌다.
“진짜 애부터 가져 버리는 건 어떤가? 그럼 제 엄마도 별수 없을 것 같은데.”
“아니, 아닙니다! 안 그럴 겁니다!”
펄쩍 뛰는 섭호를 빤히 보던 황 회장이 손짓했다.
“일단 오늘은 가봐.”
어쩐지 그 말속에 다음에 또 보자는 의미가 감춰져 있는 것 같아, 섭호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볼일을 보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간 섭호는 거실 불을 켜자마자 제 눈을 의심했다.
아직 짐 정리가 다 끝나지 않아 휑한 거실 한복판에서 금지가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으음…….”
형광등 불빛에 잔뜩 찡그리고 눈을 비비던 금지가 섭호를 보자마자 얼른 일어나 다가왔다.
“오빠! 우리 아빠 만나러 갔었다면서!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금지가 섭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욕 많이 먹었어? 설마 때린 건 아니겠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뺨이라도 맞은 거 아닌가 싶어 짚어보는 금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린 섭호가 미간을 찡그렸다.
“근데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이사했다는 말은 했지만 당연히 비밀번호까진 가르쳐 준 적 없었다.
“그게, 그냥 오빠 올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내 생일 눌러보니까 문이 열리잖아.”
뜨끔해진 섭호가 눈동자를 굴렸다. 금지의 커다란 눈은 벌써 울멍울멍했다.
“너무 감동적이라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다시 집에 가서 전 재산 챙겨가지고 나오면서 아빠한테 전화해서 오빠 아니면 결혼 안 한다고 했어.”
그게 하필 제가 황 회장과 마주 앉아 있던 때였다니.
“이번엔 정말로 된다고 하실 것 같은데. 오빠, 나랑 결혼하자. 응?”
대답 없는 섭호의 반응에도 익숙해진 금지는 살짝 물러섰다.
“일단 나 사흘만 여기 있으면 안 될까?”
‘사흘이 일주일 되고 그러다 한 달 되고 평생이 되는 거지, 뭐.’
생각에 잠겨 있던 섭호가 정색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요?”
“오빠잖아.”
“그러니까요. 언니가 아니라 오빠라서 무슨 일이 있을지 저도 모릅니다.”
“어째 들어본 말 같…….”
설마 질질 끌어내진 못하겠지 싶어 여차하면 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려던 금지가 움찔했다.
갑자기 마주 선 섭호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제 눈이 뭐 어때서요.”
영혼 없이 대꾸한 섭호가 바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여긴…….”
식구들이 당연히 저부터 찾지 않겠느냐고, 그러니까 다른 데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하려는데 등 뒤에서 자그만 온기가 덮쳐들었다.
“계속 그런 눈으로 봐도 되는데. 무슨 일 있어도 되는데.”
금지의 팔 안에 갇힌 섭호의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나 괜찮아. 정말 괜찮아. 준비됐어. 나 하나도 안 무서워.”
“무슨 준비 말입니까.”
섭호가 금지의 팔을 풀고 돌아섰다.
“애부터 낳을 준비?”
“응?”
야릇한데 이상했다. 금지가 헉 하고 입을 벌렸다.
“설마 아빠랑 통화할 때 거기 있었던 거야?”
“네.”
‘그런 눈’을 힘겹게 거둔 섭호가 차분히 말했다.
“회장님하고 약속했습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어른들 허락부터 받고 나서 그때…….”
때르르르릉.
금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헉! 저거 다시 꺼놨어야 했는데! 벌써 위치추적당한 거 아냐?”
허겁지겁 전화를 집어들자마자 신호가 끊겼다. 냅다 전원을 끄려는데 간발의 차로 문자가 날아들었다.
―엄마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으니까 시집을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대신 갖고 나간 거 그대로 다 싸들고 들어와! 그놈하고 같이!
엄마의 문자를 한참 보던 금지가 그대로 섭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전원을 꺼버렸다.
“……설마 했는데.”
그녀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번졌다.
“진작 돈으로 할 걸 그랬네. 식구끼리도 말로는 안 되고 돈으로만 되다니. 오빠한테 엄청 부끄럽다. 우리 집이 이런 집이라. 내가 대신 사과할게.”
황 회장이 온 가족을 모아놓고 결혼은 차치하고서라도 둘이 만나게라도 내버려 두라고, 그러다 헤어지거든 마음대로 하라 했다는 걸 아직은 알지 못했다.
황 회장마저 본인이 가진 주식 다 팔아버리겠다고 전에 없이 강경하게 나오는 통에 아내고 아들들이고 꼼짝할 수 없었다는 것도.
물론 금지가 챙겨 나온 것들도 타격이 크긴 했다.
“걱정하지 마, 오빠. 나중에 딴소리하시진 못할 거야. 나한테 준 거 다시 뺏어가려고 하실까 봐 도장이랑 서류랑 다 따로 숨겨놨거든. 결혼만 시켜준다고 하면 내 손으로 다시 드릴 의향도 있지만.”
헤헤 웃은 금지가 은근슬쩍 다가들었다.
“그나저나, 아까 오빠가 뭐라고 했지?”
“뭐 말입니까?”
“어른들 허락부터 받고 나서 그때 하자며. 허락 받았는데?”
제 눈으로 문자를 봤음에도 실감이 안 나서 평소 속도로 뛰고 있던 섭호의 심장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열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더 멋있게 차려입었네.”
앙큼한 손이 은근슬쩍 올라왔다.
“입고 있는 옷, 불편하지 않아?”
어디서 들어본 말 같은데, 하는 것과 동시에 재킷 단추가 풀어졌다.
“왜 이러십니까? 무섭게.”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무섭다고 하면 어떡해, 오빠.”
역시나 어디서 들어봤는데, 하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금지가 까치발에 점프까지 동원해 섭호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 박치기부터 선사한 거였다.
진득하게 매달린 금지가 젖어서 더 오동통해 보이는 입술로 속삭였다.
“어, 아까 그 눈이다.”
섭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머금은 빛이 아까보다 더 짙어져 있었다.
아직은 꿈인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조금씩 감격이 밀려왔다.
“……금지야.”
늘 이렇게 부르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금지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바르르 떨렸다.
“와…… 너무 좋다.”
늘 간절히 듣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을.
“이제 아가씨라고 안 할게.”
“……응.”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더 실감이 났다.
너무 벅차서 가슴이 뻐근해졌다.
“존댓말도 안 해.”
“가끔 해줘도 되는데. 섹시하거든. 물론 사투리만큼은 아니지만.”
소리 없이 웃은 섭호가 금지의 허리를 안았다. 그러고는 한껏 등을 굽혀 작은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금지는 눈을 꼭 감았다.
혹시 꿈일까 봐 다시 눈을 뜨지도 못하게 된 여린 마음을, 달콤한 목소리가 어루만졌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훨씬 많이…….”
이제부터 시작될 긴 밤을,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밤까지 눈부시게 물들일 한마디가 둘 사이에 굳게 맺혔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