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86화 (86/86)

#86. 다정히 손을 잡고

2018.02.25.

“견이도 가고 섭호도 가고 거기에 금지까지 가는데, 제일 큰 놈이 뭐 하고 앉았어!”

모친 허 여사의 고함이 귓전을 때렸다. 지협은 이러다 마흔도 되기 전에 보청기 끼게 되는 거 아닌지 염려하며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견이도 가고 섭호랑 금지도 가는데 저까지 가면, 단기간에 연달아 축의금 세 번 내야 하는 하객들 생각은 안 하세요? 최소 1년 정도는 간격을 두는 게 예의 아닙니까.”

“낯도 모르는 하객들한테 예의 차리는 소리 말고 너 낳아주고 키워준 엄마한테나 효도해, 이 녀석아!”

“어디 가서 여쭤보세요. 이만한 효자 또 있는지. 아들한테 효도 받으면 됐지 왜 꼭 남의 집 딸한테까지 효도를 받으려고 드세요? 각자 자기 부모님한테 효도하면서 잘 사는 게 최고지.”

“아이구, 혈압이야!”

허 여사가 뒷골을 잡고 누웠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능숙하게 아내를 받아준 백주승이 눈짓을 했다.

“그러지 말고 엄마 소원 들어주는 셈치고 만나보기라도 해.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진짜 마지막이죠?”

그렇게 나온 인생 마지막 맞선 자리에서, 지협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여자를 만났다.

사진도 제대로 보지 않아서 오롯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맞선 끝나고 클럽이라도 갈 생각인지 화장부터 차림까지 대단히 요란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현주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백지협입니다.”

그녀가 자리에 앉고,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다가왔다.

“식사부터 시키죠. 먼저 고르십시오.”

현주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핸드백을 뒤적여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저는 갈릭버섯오일파스타 먹을게요. 마늘을 싫어해서요.”

지협의 눈과 현주의 눈이 마주쳤다.

뭐 문제 있느냐는 시선에서 아재개그 아니고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지협은 직원을 돌아보았다.

“같은 걸로 주시고요, 혹시 마늘 들어갈 일 있으면 제 거에 대신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직원이 웃음을 꾹 참는 얼굴로 물러가고, 긴 침묵이 흘렀다.

현주가 당장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가도 될 것 같은 긴 파마머리를 어깨 너머로 팔랑 넘겼다.

“억지로 가식적인 얘기 나누는 것도 웃긴 것 같고, 솔직하게 본론만 말씀드릴게요.”

“네.”

“저 희명그룹 며느리 되고 싶은데, 웬만하면 결혼하시죠?”

지협은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웬만한지 안 한지 아직 결론이 안 났습니다.”

“딱 보면 나오지 않나요? 어떤 타입인지.”

무례하지 않을 만큼의 시선으로 그녀를 살핀 지협이 대꾸했다.

“안 나오는데요.”

“답답하네. 저 같은 타입 마음에 안 드셔서 말 돌리는 거 아니에요? 막 범생이같이 차분하고 단정한 스타일을 좋아하시나?”

툭툭 던지는 말이 거의 시비조다. 그럼에도 지협의 반응은 무던하기만 했다.

“어떤 타입인지 알 수가 없네요. 푹 파인 옷을 입고 계시긴 한데 평소엔 전혀 그런 옷 안 입으시는 사람처럼 손이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시상식 나온 여배우처럼 가슴골을 가리고 있던 손이 흠칫 떨렸다.

“화장은 엄청나게 진한데 손톱은 짧고 단정하고.”

떨리던 손이 답삭 오므라들며 손톱마저 감췄다.

“가방은 최고급 명품인데 자기 거 아닌 것처럼 버클도 한 번에 못 열고 헤매시고, 거기서 나온 휴대폰은 그 흔한 케이스며 장식 하나 없는 구형 제품이고.”

현주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엇보다도, 아까 들어오실 때 걸음걸이가 누가 봐도 하이힐 많이 안 신어본 사람 같았습니다.”

조목조목 지적당한 그녀의 얼굴 가득 낭패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오늘 컨셉이 뭡니까?”

적당히 반박할 말을 찾아 헤매던 눈동자가 포기한 듯 가라앉았다.

“……텐미닛이요.”

지협의 포커페이스가 삐끗 무너졌다.

“십 분 만에 차이고 소문 쫙 퍼져서 다신 맞선 자리 안 들어올 여자 컨셉이었는데 안 먹혔네요.”

아까까진 쨍쨍 울리던 현주의 목소리가 본래의 차분한 톤을 되찾았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지협은 픽 웃었다.

“무례보다는 무리였던 것 같네요. 이제부터라도 편하게 원래대로 하세요.”

알 수 없는 눈으로 지협을 바라보던 현주가 제 정수리를 잡더니 쑥 잡아당겼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미역다발처럼 휙 딸려 나갔다.

그 장면에선 지협도 제법 충격을 받았다.

“……가발까진 몰랐네요.”

벗은 가발을 대강 구겨서 가방에 집어넣은 현주가 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어깨 조금 위에서 똑 잘린 까만 단발머리가 손빗질 몇 번에 그럭저럭 가지런히 가라앉았다.

아직도 남은 진한 메이크업과의 부조화가 우스꽝스러웠으나 지협은 웃지 않았다. 그녀 역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마침 음식이 나왔다. 아까 주문을 받았던 직원은 그새 다른 여자로 바뀐 현주를 보고 동공을 달달 떨다가 얼른 접시를 놓고 사라졌다.

제 앞에 있는 접시엔 마늘이 없고, 대신 지협의 접시에 마늘이 소복한 것을 본 현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백지협 씨는 저를 차긴 차도 소문은 안 내실 분 같네요. 아쉽게도.”

“아직 찬다고 안 했습니다.”

포크를 들려던 현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안 차실 거예요? 왜요? 일부러 정 떨어지라고 거짓말도 막 하고 완전 이상하게 굴었는데?”

“안 찬다고도 안 했고요.”

현주가 헐, 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저랑 결혼하시게요?”

그녀를 빤히 보던 지협이 꾹 참았다가 새어 나오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현주의 가슴속 나비 한 마리가 팔락 날갯짓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무표정하고 오만해 보여서 제 타입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텐미닛 컨셉도 거침없이 밀어붙인 건데…….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하고 할 겁니다.”

아무래도 첫인상과는 많이 다른 사람인 것 같다.

“그럼 여기 왜 나오셨어요?”

“그 사랑하는 사람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까요.”

이번에는 지협이 물었다.

“그쪽이야말로 보자마자 정 떨어지길 바라면서 왜 나왔습니까?”

“엄마가 치사하게 협박해서 나오긴 나왔지만, 이런 데서 좋은 사람을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방금 전의 번드르르한 대답은 대외용이고 사실은 저도 딱 그 이유로 나온 데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지협은 뜨끔해서 아무 말이나 했다.

“그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데는 어딘데요?”

“딱 어디라고 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맞선은 아닌 것 같았어요. 너무 올드하고 낭만도 없잖아요.”

현주가 진한 아이라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해사한 볼웃음을 머금었다.

“더 우연히, 영화처럼 만나지는 그런 거 있잖아요. 우연인 줄 알았는데 인연인 것도 좋고, 보자마자 인연이구나 싶은 것도…… 왜 웃으세요?”

지협은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제가 웃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헛기침을 한 지협이 식사로 눈을 돌렸다.

반쯤 먹었을 때쯤, 지협의 접시를 뭔가 탐내는 시선으로 흘끔거리던 현주가 넌지시 한마디 했다.

“저기, 마늘 너무 많으시면 조금만 주셔도 되는데…….”

지협은 소리까지 내어 웃어버렸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전자회사 사장의 장녀인 그녀는 아버지 회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좋아하는 책이 겹쳤고, 취향도 제법 비슷했고, 가치관이 같았다.

외모 등을 칭찬하는 데 어색하고 인색한 지협이 어렵게 용기를 내서 목소리가 매력적이라는 말을 건네자, 현주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사실 성우가 되는 게 꿈이라 아무도 모르게 퇴근 후에 학원도 다니고 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올 때, 지협은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놀랐다.

처음 만난 사람과, 그것도 여자와 비즈니스 이외의 일로 단둘이 몇 시간을 함께 있어본 건 처음이었다.

“애프터 신청 하실 거예요?”

“할까요?”

“간 보실 거면 하지 마세요. 내가 하게.”

현주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덧붙였다.

“제가 오늘은 몰골이 이래서 커피도 못 마시러 가지만 다음엔 꼭 사드릴게요. 다음 주에 시간 언제 되세요? 저는 월화 빼고 다 괜찮은데.”

“그럼 수요일로 하죠.”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대답을 들은 현주가 환히 웃었다.

“우리, 그전에 막 문자 주고받고 통화도 하고 그러는 거죠?”

‘우리’라는 말이 이렇게나 말랑하고 간지러운 소리였나.

처음의 새빨갛던 립스틱이 다 지워졌는데도, 여전히 붉고 예뻐 보이는 입술에서 지협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늘부터 썸 타는 사이니까.”

수요일 저녁, 화장기가 거의 없는 얼굴로 나와 환히 웃는 그녀를 보자마자 지협은 생각했다.

어머니 말씀대로 낯도 모르는 하객들한테 예의 차리지 말고 빨리 효도나 해야겠다, 하고.

***

몇 년 후.

모단은 어디선가 불어든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어놓고 얼굴을 간지럽히는 통에 눈을 떴다.

소파에 앉아서 잡지를 보다가 까무룩 잠든 것 같은데 어느새 푹신한 베개를 베고 누워 있다.

포근한 담요도 어깨까지 덮여 있었다. 견이 챙겨주었나 보다.

잠이 느릿느릿 물러가는 사이, 모단은 정면으로 보이는 벽을 응시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결혼사진들.

지금 살고 있는 집, 견이 어렸을 때부터 쭉 살아온 이 집 정원에서 최소한의 하객만 초대해 식을 올렸다.

편한 사람들뿐이라 마음껏 즐기고 행복해하던 그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벽을 채우고 있다.

심플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집 앞 계단에 앉아 있는 저와, 제 발에 웨딩슈즈를 신겨주던 견이 눈을 맞추고 웃는 찰나.

나른한 시선이 옆으로 옮겨갔다.

고운 색감을 뽐내는 모란꽃 그림이 걸려 있다. 백 회장이 손수 그려 선물한 거였다.

지금도 희명 사내어린이집에서 근무 중인 그녀는 최근 취미로 민화 공부를 시작했다. 백 회장과 함께.

여전히 정정한 그는 손주며느리와 담소를 나누며 같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주말에 모단은 본가에 들어 백 회장과 시간을 보내고, 견은 혜숙과 영화를 보거나 외식을 한 후에 집에서 맞고를 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혜숙은 점쟁이가 늘그막에 귀한 아들을 볼 팔자라기에 환갑 다 돼서 늦둥이라도 낳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 아들이 이 아들이었다며 견을 마냥 예뻐했다.

견 또한 열이면 열 사위가 아니라 막내아들인 줄 알 정도로 늘 싹싹했다.

모단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보다 만 잡지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바람이 불어 몇 장이 팔랑팔랑 넘어갔다. 공교롭게도 아까 보던 페이지가 펼쳐졌다.

―주목해야 할 젊은 경영인, <모단(Modern)>의 백견 대표.

국내 최초 월경용품 멀티숍을 선보인 백견(32) 대표가 ‘경영천재’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끄는 월경용품 멀티숍 <모단(Modern)>은 파격적이면서도 트렌디한 콘셉트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쉬쉬하던 여성의 ‘월경’을 친근하고 즐거운 문화로 풀어내고 있다는 평.

업계 최초로 포장지에 인기 캐릭터와의 콜라보레이션 디자인을 도입한 한정판 생리대와 파우치 세트를 출시하고, 초경과 완경을 축하하는 기프트박스를 내놓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연일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전국으로 지점을 확대 중이며, 해외 진출 계획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금 기사를 읽은 모단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베란다 문이 열려 있고, 정원과 이어지는 나무데크 위에 맨발로 나선 견이 쭈그리고 앉아 뭔가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야옹아! 이거 봐라∼ 너 지난번에 왔다가 간 애 맞지? 또 올 것 같아서 내가 간식 사다 놨는데.”

우연히 들어온 길고양이와 밀당 중인 것 같은데, 딱 봐도 간택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먹을래? 먹고 싶지? 안 먹으면 내가 먹는다? 근데 진짜 맛있는 냄새 나네. 사람이 먹어도 되나?”

진짜로 고양이 간식을 입 앞까지 대가며 킁킁거리는 것을 본 모단의 표정이 묘해졌다.

‘경영천재…… 저 바보가……?’

소파에서 내려온 모단은 살금살금 다가가 웅크려도 널찍한 등에 업히듯 폭 기댔다.

“그걸 자기가 왜 먹어요?”

“어, 일어났어요?”

간식을 내려놓은 견이 반쯤 몸을 틀어 모단을 보았다. 그사이 사사삭 다가온 길고양이가 간식을 입에 물고 우아하게 멀어졌다.

“야, 그냥 가져가는 게 어딨어! 털 한 번은 만져 보게 해줘야지!”

“그렇게 엉큼한 심보로 꼬드기니까 고양이도 안 오는 거예요.”

못내 아쉬운 눈으로 고양이가 떠난 담장 쪽을 보다가 몸을 일으킨 견이 모단을 꼭 안았다. 모단도 맞춘 듯 허리를 감고 안겼다.

“근데 출장가방은 다 싸고서 놀고 있는 거예요?”

“아…… 출장…….”

견은 내일 프랑스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통증 완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유기농 허브오일을 만드는 곳과 정식 수입 계약을 맺기 위해서였다.

견이 모단의 목과 어깨 사이의 부드러운 곡선에 이마를 묻고 비비적거렸다.

“가기 싫다, 자기야. 24시간 옆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캐리어에 넣어서 데려갈까…….”

이마가 아니라 입술이 닿나 싶더니 답삭 들어 안은 채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긴다.

얼결에 뒷걸음질을 치던 모단은 정확히 침실 쪽으로 가고 있음을 깨닫고 견의 귓가에 한마디 했다.

“아직 안 끝났으니까 들러붙지 마라.”

견이 입을 한 보따리 내밀고는 물러났다.

“그놈의 월경은 왜 맨날 하는 것 같지? 꼭 너무너무 안고 싶을 때 터지고…… 아, 매일 안고 싶으니까 확률상 어쩔 수가 없구나.”

모단이 열심히 구시렁대는 견의 팔을 툭 쳤다.

“불편하면 다시 가져가요. 안 그래도 다시 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17년이나 대신 해줬으면 됐지 뭔 소리냐고 할 줄 알았는데, 견의 시선은 애틋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진짜 그러고 싶다. 모단 씨 안 아프고 편하게 내가 계속 하는 게 나을 뻔했어요. 난 그래도 보름만 잘 넘기면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는데…….”

“뭔 소리예요. 시간 지나니까 기억이 미화됐나 본데, 잘못 넘기면 말도 안 되게 엄청난 지장이 있었잖아요.”

되레 미안해진 모단이 얼른 말을 바꿨다.

“복에 겨운 농담이었어요. 다른 남자들은 평생 한 번도 대신 해주지 못하는 걸 그만큼이나 가져가 줬으면 됐지. 막상 해보니까 불편하고 힘든 것도 있긴 한데, 안 해서 초조했던 그때 마음을 생각하면, 뭐.”

가만히 내려다보던 견이 뺨을 쓰다듬어 주고는 입을 맞췄다. 모단도 똑같이 화답했다.

“손 씻고 방으로 와요. 같이 가방 챙기게.”

“안 가고 싶다…….”

“참, 다음 주에 은규도 출장 간다던데. 과장 되고서 더 바빠졌대요.”

“그럼 새윤 씨랑 해빛이 놀러 오라고 해서 같이 있지 그래요?”

“그래야겠어요. 박해빛 초딩 되더니 쪼그만 게 맨날 바쁜 척하고…… 아, 맞다.”

캐리어를 꺼내 열고 능숙하게 옷가지 등을 챙겨 넣던 모단의 눈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새윤이가 그러는데 해빛이가 지금도 가끔 무탈이 얘길 한대요. 무탈이는 어디 초등학교 다닌대? 핸드폰 없대? 하면서.”

견의 눈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1년 내내 같이 다닌 친구도 아니고 며칠밖에 못 봤는데도 용케 안 잊어버렸네요.”

“그러니까요. 새윤이도 그게 신기해서 무탈이가 아직도 기억나느냐고 물어봤더니 뭐라고 했다는 줄 알아요?”

“뭐랬다는데요?”

모단이 그윽한 눈으로 답했다.

“‘당연하지. 첫사랑인데.’ 그랬대요.”

견은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되게 미안하네, 괜히.”

“나는 오죽하겠어요. 조카의 첫사랑을 데려다가 쑥쑥 키워서 결혼까지 했는데.”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릴.”

견이 모단의 코끝을 가볍게 톡 쳤다.

“출장 갔다 올 때 해빛이 선물 좋은 거 사와야겠다.”

둘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금세 캐리어를 채웠다. 출장이 잦아지다 보니 짐 싸는 요령도 늘었다.

“오늘은 외식할까요? 나가서 데이트해요.”

말을 꺼낸 모단이 견의 감수성을 콕 찔렀다.

“당분간 못 보잖아.”

“그런 말 하지 마요…….”

계획대로 눈이 그렁그렁해진다. 언제 봐도 참 청순하게 울먹일 줄 아는 남자다. 묘하게 섹시하기도 하고.

‘역시 난 변태가 확실해.’

모단은 병 주고 약 주는 심정으로 견을 꼭 안고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 주었다.

“고작 3박 4일 출장이잖아요. 누가 보면 몇 달 헤어지는 줄 알겠네.”

“안 보면 몇 달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그렇지.”

“하여간…….”

***

자주 가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모단이 말을 꺼냈다.

“참, 우리 그 헌책방 좀 들렀다 가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도록이 있는데 거긴 있을까 싶어서요.”

예전에 견이 섭호와 함께 전국의 헌책방을 닥치는 대로 뒤지고 다닐 적에 우연히 발견한 곳이 있는데, 분위기도 아늑하고 건질 만한 책도 많아 시간이 나면 가끔 들르곤 했다.

“안녕하세요.”

입구에 앉아 있는 낯익은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둘은 좁은 통로를 지나 동굴처럼 널찍한 안으로 들어섰다.

종이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낡은 시간의 향기가 뭉근히 감돌았다. 다른 손님은 없는지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모단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서가 사이를 찬찬히 훑었다. 견은 얼마간 따라오는 듯하더니 흥미로운 걸 발견했는지 한자리에 머물렀다.

원하던 도록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민화에 관련된 책과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동화책 한 권을 들고 나왔다.

저 앞에 서가 맞은편 벽에 기대 앉아 있는 견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낡아 보이는 책을 들고 있는 그를, 조금 높은 곳에 뚫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잠잠히 비추고 있었다. 그 안에 떠다니는 먼지들의 반짝임이 아니었더라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을 것 같았다.

모단은 가만히 그의 옆에 다가가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

견은 조금 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책을 돌려 표지를 보여주었다.

지금은 바래서 갈색에 가까워 보이지만, 원래는 선명한 빨강색이었을 것 같은 표지에 <귀애랑(貴愛郞)>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단 씨도 한번 읽어볼래요?”

두어 번 눈을 깜박인 모단이 뭔 소리냐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다 한자인데요……?”

간간이 아는 글자가 있긴 해도 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견이 아, 하더니 자세를 고쳤다.

“나도 잘은 모르겠긴 한데 대충 무슨 내용이냐면, 귀한 자손이 태어나 연(宴), 잔치를 열었는데…… 방울과 막대를 든 이가, 피가 났다? 아니, 피 냄새가 났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언제 들어왔는지, 헌책방 주인이 다가오더니 견과 모단의 맞은편에 편하게 쭈그려 앉아 술술 풀어주었다.

[귀한 자손이 태어나 잔치를 열고 축원을 하는데, 방울과 막대를 든 이가 이르기를 피 냄새가 진동하여 천지신명은 안 오시고 잡귀들만 몰려오는구나 하더라.

잔칫상에 피 한 방울 묻은 것이 없는데, 가만 보니 음식을 나르던 어린 계집종의 다리 사이에 핏자국이 묻어 있더라.

혹독히 고문하여 가두고, 누구든지 눈이 마주치거나 닿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라 하였더라.

계집종이 이레 만에 숨을 거두고, 하나뿐인 자손은 계집종이 죽은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매달 보름마다 피를 쏟다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명을 달리하였더라.]

“계집종에게 묻어 있었다는 피가 월경혈일 거라고 해석을 합니다. 고대에는 그런 믿음이 있었거든요. 여성의 월경혈은 불결한 것이고, 월경하는 여성은 어떤 불길한 힘을 가진다고요. 지금도 월경 때에 제삿밥을 뜨면 안 된다거나 절을 못 하게 하는 경우도 있죠.”

거기까지 말해준 주인이 자리를 뜨고, 견은 한참 동안 그 책을 더 내려다보았다.

“왠지 우리 집안 얘기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모단 역시 그런 직감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집안의 저주가 맞긴 맞았네요.”

견이 쓰게 웃었다. 모단이 넌지시 그의 팔 위에 제 손을 올렸다.

“플리니우스였나? 고대 로마의 한 철학자가 ‘생리혈이 닿으면 포도주가 시큼해지고, 곡물은 시들고, 나무는 죽고, 씨앗은 마르고, 열매는 떨어지고……’ 같은 말을 남겼다는 걸 본 적 있어요.”

모단이 견의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았다.

“월경하는 여자가 식물에 물을 주면 죽는다, 물을 보면 홍수가 나고 불을 보면 화재가 난다, 남편의 물건에 손을 대면 남편이 다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월경을 불결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죠.”

“그런 인식을 긍정적인 쪽으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잖아요.”

모단이 기특하고 자랑스럽다는 눈으로 견의 어깨를 다독다독했다.

“선조의 무지를 후손이 이렇게 풀고 있으니, 덕분에 저주도 풀린 것 아닐까요?”

“내 저주는…….”

……해서 풀린 거잖아요.

몸을 기울인 견이 귀에다 대고 노골적인 말을 속닥였다. 모단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근데 하나뿐인 귀한 자손이 죽었는데 어떻게 대가 안 끊겼죠?”

“그러게요.”

모단이 무심코 던진 의문에 둘 다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한참 후에 모단이 말을 꺼냈다.

“만약 내가 그 계집종이었으면요…… 방울과 막대를 든 이도 같이 저주했을 것 같은데요. 따지고 보면 그 말 때문이잖아요.”

“아…… 그럴지도…….”

어쩐지 헌책방 안의 공기가 조금 낮아진 것 같기도 했다.

견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모단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책도 보여줄 겸 주말에 섭호네 놀러 갈까요?”

“그래요. 내가 금지한테 연락해 놓을게요.”

책을 계산하고 나온 두 사람은 비슷한 생각에 잠겼다.

머나먼 과거가 어떠했든 이제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지금은 이렇게 다정히 손을 잡고 같은 곳으로 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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