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 나는 당신이 싫어 (2)화 (2/61)

〈2〉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라엘?”

언제인지 이곳으로 달려온 라엘은 그 모습을 채 그리기도 전에 제게 붙어 있던 헬렌의 어깨를 확 밀어 냈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메이샤의 모습에 대충 상황은 알 수 있었다.

‘뒤에서 보고 있었구나,’

“예법도 모른다고는 들었지만 행동이 너무 무례한 게 아닙니까, 헬렌 양.”

라엘 특유의 무거운 목소리가 그 사이를 훅 파고들었다.

“……아, 전하의 전속 시녀이신가?”

비틀거리며 제게서 밀려 난 헬렌은 잠시 라엘을 바라보다 툭툭 그녀와 닿은 어깨를 털어 냈다.

“시녀가 이리 손이 거칠어서야, 원. 제게 예법을 따질 상황이 맞으시려나 모르겠네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며 어깨를 떠는 모습에 라엘은 쓴 웃음을 뱉었다.

“무지한 건 이길 수도 없다더니,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라엘의 시선이 매섭게 헬렌을 내려다 보자 헬렌 역시 기울어진 미소로 그 시선을 받아쳤다.

머리가 심하게 아파 온다.

아무리 봐도 끝나지 않을 기 싸움을 계속 보고 있다가는 더욱 그럴 것만 같았기에,

“라엘, 그만.”

“전하.”

“더 말할 것도 없다. 돌아가자.”

결국 나는 먼저 걸음을 돌려야 했다.

“벌써 가시나요. 후에 또 뵈어요, 비전하.”

그 모습에 곱게 휜 눈매로 저를 바라보던 헬렌 역시 내리쬐는 햇볕을 맞으며 여유로운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고, 그렇게 간신히 멈추는 줄 알았던 싸움은……

“대답해라!”

헤일론이 내 앞에 등장하자마자 나의 완패로 돌아갔다.

‘전하께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시다니.’

그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사람들 중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크게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자신 또한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

그 모습에 내심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헤일론은 분명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지만, 그만큼 다른 여인들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한데 지금 그가 그녀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라면, 헬렌, 그 여자는 도대체 그에게 무슨 존재란 말인가.

태자비인 자신조차 엄두 내지 못한 곳에 그녀가 올라가 있었다.

자신이 몇 년째 바라보고만 있던 그의 마음에, 너무도 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전하.”

그 사실만으로 지금까지 아슬아슬 참아 오던 무엇인가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아이는…… 전하께 무슨 존재입니까?”

“지금 할 말이 그것밖에 없는가?”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소와는 별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가 충분히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내게 티 내려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사과를 한다면, 헬렌에게 내 잘못을 인정한다면 이 일을 넘어가 준다는 뜻이었다.

‘사과해야 해. 전하께 더 이상 미움받지 않으려면…….’

머릿속이 핑핑 돌며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제가, 제가…….”

그 순간 먹먹해진 목소리를 뚫고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이제 그럴 의미가 더 남은 걸까?’

“……전하께서는, 제게 하실 말이 그것밖에 없으십니까?”

이미 그와 나의 관계는 끝이 난 것을 알고 있잖아.

“허?”

제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헤일론의 표정이 훅 찌푸려졌다.

“저와 언제 마지막으로 대화를 하신 줄은 아십니까? 자그마치 2주일 전입니다. 그마저도 헬렌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가는 목소리가 처음으로 그를 막아섰다.

“그렇게 2주 만에 제게 건넨 첫마디가 그 무엇도 아닌 그 아이의 이름이었을 때, 제 심정이 어떨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니…… 그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런 상황에, 다른 이들이 저를 어떻게 바라볼지는 고려해 보셨습니까?”

지금까지 억눌러 왔던 감정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간 혹여나 그가 자신을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들에 쉽사리 내뱉지 못한 말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그리 고대하던 말들이 있었는데. 정작 말을 뱉기 시작하자 물기가 서린 목소리는 가늘게 떨려 올 뿐이었다.

“……저는 전하의 비가 아닙니까. 전하의 곁에서 전하와 나아가는 것이 제 역할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저는 무엇입니까? 하루, 한 달, 몇 년을…… 매일같이 방 안에만 숨어 사는 저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야가 뿌예졌다. 지금까지 쌓아 왔던, 자그마치 몇 년간의 설움이 한순간에 쏟아져 내렸다.

‘태자비로서 행동하라.’

이전에 들었던 그의 말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이 오늘로서 완전히 헛수고가 되었다. 어떻게든 그의 곁에 남고 싶어서 발버둥 치던 몸부림에도 힘이 빠졌다.

고개를 떨어뜨린 내게는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의 인정이라도 내어 준다면 이 감정이 어느 정도는 누그러질 텐데.

감히 그런 기대를 했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헤일론. 그가 누구인지 잠시 잊어버린 채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네가 할 일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뿐이라고.”

얼음장보다 차가운 시선이 나를 내려다본다.

쯧, 미련 없이 혀를 차며 뒤를 돈 그는 방문을 향했다.

“앞으로도 네가 헬렌을 괴롭힌다는 말이 내 귀에 들린다면, 두 번은 없을 줄 알거라.”

쾅!

방문을 거세게 닫아 버린 헤일론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의 집무실로 향했고, 홀로 남은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보여 주기 식 태자비를 원한 황태자의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

그것이 뇌리에 너무도 선명히 박혔다.

매일 그만을 바라보던 나였다.

언제나 ‘태자비’다운 행동거지를 강조하는 황실이 불편했지만,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하고.’

오직 그의 눈에 들기 위해,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죽도록 노력해 나의 태자비답지 않은 모든 것들을 바꿔 갔다.

하지만 결국 난 그의 어느 무엇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피하고 또 피하다 결국 마주해 버린 심장은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가슴 한편이 시큰해졌다.

나는 왜 항상 이런 꼴인지.

가문도 친구도 처음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도, 어떤 시작을 하든 왜 항상 그 마지막은 추락인지.

허탈하면서도 이제는 그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미웠고 또 서러웠다.

겨우겨우 잡고 있던 마지막 동아줄마저 내 손을 떠났다. 모든 것이, 비참해지더라도 잡고 있던 내 전부가, 끝난 기분이었다.

휘이잉—

때마침 활짝 열린 창문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방 안을 에워쌌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터덜터덜 창가로 향했다.

어두운 밤의 달빛이 얼마나 밝은지, 눈가에 맺힌 눈물조차도 내 눈동자색으로 함께 반짝였다.

철컹—

두 발이 차가운 난간을 천천히 넘어섰다.

저 아래 보이는 까마득한 지면이 내게 불러오는 두려움은 한순간 온몸이 굳어 버릴 정도였지만, 그것보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배는 컸다.

더는 이곳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갈 곳도 없었다.

‘이젠 지쳤어.’

헬렌, 그녀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도, 헤일론, 그를 뒤쫓는 것도, 날 무시하는 고용인들의 시선도, 아무것도 모른 채 내게 기대를 품은 제국민들의 눈빛도 전부.

자그마치 4년을 태자비라는 이름의 책임감으로 버텨 냈다.

그 4년간 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나의 사람들을 모두 잃어 갔고, 이제 내게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텅 비어 버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었다.

나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자리를 내 손으로 박차고 나온다는 생각에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때는 내 마지막 동아줄로만 알았는데.’

두 눈꺼풀은 스르륵 내려가 내 시야를 가렸다.

“제발. 이젠 두 번 다시는 보지 말자.”

받아 주는 이 하나 없는 짧은 인사를 내뱉은 내 발은 주저하지 않고 허공을 향해 덜덜 떨리는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점차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몸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미동조차 없었다.

쿵.

공중에서의 멍해진 느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몸과 지표면이 거세게 부딪혔고, 그로 인한 큰 고통이 바닥과 맞닿은 곳부터 삽시간에 온몸으로 퍼져 갔다.

아, 아파.

예상보다 더 큰 고통에 툭,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라리 죽을 거면 한 번에 죽지, 이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저를 빼고 행복할 두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그 두 사람은 그저 행복하게 미소를 그리고 있을까.

죽기 직전까지도 고작 그러한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시야가 점차 흐려져 갔다. 끈적한 붉은 액체가 바닥에 퍼져 가기 시작했다.

왜 이런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을까, 뛰어내린 몸보다도 분한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지금 내 선택을 후회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옆에 있고 싶어서, 대체되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끝내 발버둥 치던 내 온몸에는 이미 상처가 가득했기에.

고작 그 남자 때문에 변해 버린 내 모습으로 더 살아가고 싶지 않아서 한 결정이라.

이리 생각하면, 아예 나쁜 길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제 더는 그의 눈에 띄기 위해 안달 내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내 시야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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