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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나는 당신이 싫어 (5)화 (5/61)

〈5〉

헤일론과 함께한 시간이 5년. 그중 황태자비로 살아간 시간이 4년.

황궁 안에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밖에서의 나는 누가 뭐래도 제국의 황태자비였다.

단순히 앞으로 걸어가는 것 정도를, 몇 분짜리 행사 순행을 위해 수백 번을 연습했다.

그때와 비교했을 때 이 좁은 연회장에서의 고작 몇 초짜리 걸음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걸음을 떼어 나가며 훑어본 연회장에는 여러 의미를 지닌 시선들이 있었지만, 그것들과 달리 유독 한 가지 이유를 진하게 그을린 이들의 모습이 선명히 시야에 꽂혔다.

“베리안 클로디라고 합니다.”

내 말에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것참 가관이네.’

특히나 그들의 한가운데에서 이야기를 주도하는 이들의 얼굴은 꽤나 익숙한 편이었다.

“클로디 영애. 오랜만이네요?”

“네. 오랜만이네요, 포르티안 영애.”

로웬 포르티안 자작 영애. 그리고 그 주위의 얼굴들까지.

제 끔찍했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들이었다.

‘그깟 후궁한테도 밀리는 태자비라…… 풉.’

‘능력이 없으니 전하께서 눈길 한번을 안 주는 거 아니겠어요?’

‘저라면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겠는걸요?’

로웬,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헬렌보다도 오래 나를 괴롭힌 이.

그녀는 헬렌과는 달리 태자비라는 이름 덕에 앞에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교계 속 나를 향한 다른 영애들의 속이 훤히 보이는 비웃음과 조롱, 출처 불문한 소문들까지. 그 모든 것들 뒤에는 항상 그녀가 서 있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미소를 띠고서.

그렇지 않아도 좋은 감정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그녀가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다 확신했고, 이미 알고도 있었으나 나는 그저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참 아름다운 드레스네요, 베리안.”

지난번과는, 조금 달라진 시작인가.

어쩐지 어색하기도 했으나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처음엔 소란을 피울 생각도 없었다.

가문을 대표한 자리에, 그것도 황실에서 그다지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으니까.

“고마워요, 영애도 오늘-”

“그런데…….”

로웬이 그런 내 말을 끊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에스코트도 없는 등장이라니…….”

‘그럼 그렇지.’

로웬은 그 누구의 에스코트도 없이 등장한 나를 동정하듯 비웃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선 이들도 입만 다물고 있지, 저 부채 아래 어느 표정이 그려졌는지는 너무도 선명했다.

‘여전하구나, 정말.’

로웬 같은 부류는 이 사교계에 넘치도록 많았다.

자신의 아래라 생각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데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그런 로웬의 말을 들으며, 나는 로웬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신에게까지 화가 났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왜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고만 있었을까.

정작 제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면서까지 대체 무엇을 지키고 싶어서.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러자 일전 헤일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원치는 않은 회상이었으나 그날 보았던 그의 눈빛이 짜증나리만큼 이해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점에서는 정말 내가 한심했던 것일지도.

“영애.”

그렇게 생각한 베리안은 순식간에 자신의 눈빛이 변해 버린 것을 느끼지 못했다.

“네, 클로디 영애.”

“영애는 정말, 여전하시네요.”

“네?”

로웬은 서늘해진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베리안의 언행에,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랑, 하나같이 변한 게 없어 보여서요.”

베리안의 시선이 로웬의 발끝부터 눈동자 깊게까지 훑어 내려갔다.

묘한 분위기에 로웬은 잠시 당황해 어깨를 굳혔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풉.”

로웬의 얇은 입술 사이로 공기 섞인 웃음이 터졌다.

그녀에게 베리안은 이런 행동 정도로는 그다지 위협이 되는 이가 아니었다.

“저택 안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나 봅니다, 베리안. 이렇게, 표정도 굳힐 줄 알고 말이지요.”

톡, 로웬의 검지 손끝이 베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근데 어쩌죠, 이제 여긴 그 따스한 미소만 보여 주는 저택이 아닐 텐데요. 이런 모습을 보이면 좋지 않을 텐데, 멍청하기는. 클로디 저택에서 사교계 규칙 같은 건 안 알려 주나 봐요?”

“…….”

“베리안도, 너무 변한 게 없네.”

돌아온 침묵에 로웬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제 무리 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웃기지도 않지.’

항상 조용하고,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는 베리안 클로디.

그녀는 어떠한 조롱을 들어도 화 한번 내지 못했었다.

그런 성격에 사교계에서도 배척을 당하기 일쑤, 그녀를 보며 웃어 보이는 것은 항상 로웬 포르티안,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로웬은 이 모든 관계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분명 그래야 하는데.

“그러는 포르티안가에서는 귀족가의 예절법도 안 가르치나 봅니다.”

“……?”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로웬은 두 눈을 크게 뜨고서 고개를 돌렸다.

또렷이 저를 바라보는 베리안의 눈동자가, 그날따라 왜인지 더 짙은 푸른색이었다.

“감히 백작가의 일원에게 함부로 말을 놓으시다니, 이 무슨 모난 예법인지.”

신흥 남작가의 영애들도 이보다는 더 좋은 가르침을 받았겠습니다, 덧붙이는 한마디가 콱 로웬의 머리에 박히는 것이 눈에 선했다.

뭐, 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베리안이 한 말은, 그녀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제 가문을 욕보이는 짓이었니까.

“하, 그게 대체 무슨…….”

“아, 잘 모르실 수도 있을까요? 그러네요, 하긴 그게 잘못인 줄 아셨다면 그리 행동하시지 못했을 텐데.”

한껏 비꼰 목소리에 로웬의 얼굴에 훅 붉은 기가 올랐다.

“제 실수에요. 그래도 명색이 자작가가, 그 정도 교육도 받지 못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요.”

“베리안.”

“예법 선생이라도 하나 붙여 달라 하시지 그래요?”

“베리안!”

“제 이름을!”

삽시간에 퍼진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에 시선이 따갑게 부딪혔다.

“함부로 부르는 것 역시도, 잘못입니다.”

“잘못?”

하, 헛웃음을 뱉은 로웬은 덥석 양손으로 내 팔뚝을 잡고는 그곳에 힘을 주었다.

“영애가 지금 내 가문과 예법을 논할 위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지금? 이젠 제대로 교류하는 가문도 없는 주제에 뭘 믿고 이러는 거지?”

꽤 흥분한 탓인지 제 팔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으나 이젠 나도 더는 그녀가 무섭지 않았다.

“진짜 우습다, 로웬.”

낮아진 목소리는 그녀와 나 단둘 사이에서만 들릴 정도였다.

“왜 이렇게 흥분해? 네 말마따나 고작 내가, 몇 마디 한 것뿐이잖아. 그냥 평소처럼 무시하고 욕하면 되는 일인데.”

이전부터 특히나 나를 더 싫어하고 경멸하는 게 뻔히 보이는 그녀였다.

“근데 오늘따라 왜 이리 나한테 신경을 쓰실까?”

예전부터 굳이 내게만, 묘하게 시선을 보내면서.

예전에는 그 이유가 참 궁금했으나 몇 년을 더 살아 보고 나니, 사실 정말 별것도 아닌 이유였다.

“무섭니? 내가 돌아올까 봐.”

너보다 높다면 높을 자리에 있던 그 시절의 나로, 당시의 우리로 돌아갈까 봐, 그녀는 두려운 거다.

“넌 내가 행복해 보일 때마다 내 앞을 막았어. 그래, 고작 몇 년 전 내게 한 짓만 해도 말이야.”

그때 아마 파티에서 내 머리에 물을 끼얹었던가.

그녀 역시 같은 모습이 떠올랐는지 로웬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말을 이으며 괜히 훅 눈꼬리를 내려 여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네 부모님이 그러셨지. 그저 아이의 실수에 뭘 그리 호들갑을 떠냐고.”

‘이미 열셋은 족히 넘었던 나이였지만 말이야.’

“…….”

“울음을 참으며 돌아가는 나를, 어머니를 보며 만족했나 몰라. 이제 와서 보면 그냥 귀족 모욕죄가 따로 없는데 말이지.”

“……고작 옛일로 나를 협박할 생각이라면-”

“협박은 무슨. 물었잖아? 나는 그저, 네가 만족했길 바라는 것뿐인걸.”

또각, 두 사람의 거리가 그 한 걸음에 좁혀졌다.

성큼 제게로 다가오는 모습에 어느새 로웬의 입가에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성년식까지 지나 버렸으니, 더 이상 그런 모난 행동은 하지 못할 테니까.”

탁.

그녀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자 로웬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저를 바라보았다.

“무슨…….”

“네가 못나 남을 깎아내리는 행동들을,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의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말로 덮어 줄 수 없다는 말이라고.”

태자비 시절 무진하게 연습한 것 중 하나가 표정 연습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굳이 그 성과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손끝으로 입을 가리고는 세상 누구보다 밝게 웃어 주었고, 스쳐 가는 그 모습이 너무도 어여뻐 그것을 본 주변 이들은 차마 그 머릿속에 다른 생각을 담지 못했다.

“베리안!”

단 한 사람, 로웬만을 제외하고.

“목소리 좀 줄이지. 여기가 어디라는 자각 정도야 남아 있을 거 아니야? 뭐,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이미 포기한 거라면 계속 질러 대도 상관은 없지만.”

‘전하께 어떻게 보일지 이미 포기하신 거라면 뭐, 말은 되네요.’

네가 내게 했던 말인데. 어떠니, 네가 듣기엔.

“이게 무슨……!”

로웬의 표정이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다행히,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생각보다 더 반응이 격한 그 모습에 입가의 미소가 자꾸만 진심으로 짙어지려는 것을 막아 냈다.

평소에 이리 흥분하는 이는 아니었건만, 그 대상이 나였기에 더욱 그리 보이는 듯했다.

하나 경악과 경멸 그 사이 어딘가의 표정을 바라보는 나는, 그리 착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동정심 따위는 품지 않았다.

“진정해요, 포르티안 영애!”

로웬이 목소리를 높인 직후부터 모여든 이들이 점점 불어나자 황급히 그녀를 막아선 친구, 가리안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의 성년식에서 난동을 피운 이가 고운 눈초리를 살 리가 없었다.

더불어 그이와 함께 다니는 이들 역시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사람들이 오잖아요, 로웬. 목소리를 죽여야죠. 저 어디에 영애의 그 멋진 약혼자분도 계실 텐데요.”

놀림조의 어투에 로웬은 제 아랫입술을 꾹 짓눌렀다.

“베리안, 너는…….”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드디어 성년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연회장 가득 울려 퍼졌다.

우리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그 종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녀에게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시간이 되었네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로웬?”

그렇게 휙 뒤돌아선 나는 연회장의 가장자리로 걸어가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로웬은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나는 그런 그녀에게 가볍게 눈매를 접으며 내가 원래 향하던 곳으로 다시 나아갔다.

걷는 곳마다 쏟아지는 시선이 아까보다 더 불어나, 조금은 따갑게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아가는 발걸음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벗어났다.

‘저딴 게 무슨 황태자비라고.’

매번 두려워만 하던 그녀에게서 드디어 벗어났어.

그 생각만으로 차갑지만 시원한 바람이 훅 머리칼을 파고들어 오는 착각이 들었다.

저조차도 놀란 그 느낌에 발길은 와인 테이블 앞에서 멈춰 섰다.

자꾸만 배시시 웃음이 났지만 애써 태연한 척, 집어 든 와인을 입에 가져다 대며 그것을 가렸다.

‘……달다.’

그냥 어색한 손을 채우기 위해 잡은 것이었는데 처음 먹어 보는 달콤한 와인의 맛이 입 안을 맴돌았다.

매번 쓰디쓴 와인만을 먹어 온 내게는 너무도 신선한 느낌이었다.

조금은 후련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기분에 나도 모르는 새에 또다시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으나,

“헤일론 데 오베르샤 황태자 전하와 시에리나 데 오베르샤 황녀 전하 드십니다!”

연회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순식간에 그 감정마저 식어 버리고 말았다.

‘왔구나.’

내 이전 생에서 가장 도려내고 싶던 기억, 그날의 헤일론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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