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연회장 가득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 시선의 끝에 닿은 두 남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여러 귀족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모두가 그들의 눈에 한 번이라도 더 닿기 위해 애쓰는 사이, 나만은 그런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헤일론 데 오베르샤.
그만큼 잊고 싶던 기억도 없었고 가장 되돌리고 싶던 관계였기에.
‘한심하기 짝이 없군.’
‘내가 정녕 그대를 사랑할 것이라 생각했나?’
‘헬렌을 함부로 대하지 말거라.’
가슴 깊숙이 들어섰던 말들이 나도 모르는 새에 또다시 상기되어 심장이 갑갑해졌다.
다 지난 일이고 이번 생에 다시 반복하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건만 심장 박동은 점차 더 빨라지고 있었다.
내가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계단을 모두 내려온 두 사람은 귀족들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건넸다.
곧이어 황제와 황후까지 그 자리에 당도하자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귀족들은 황제와 헤일론이 선 곳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그곳을 둘러쌌고, 그 사이에서 그는 황제에게 직접 성년식의 증표를 받아 들었다.
복잡하거나 유래 깊은 관례들은 이미 마친 뒤 보여 주기 식으로 행한 관례들이었기에 그것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마지막 관례인 검까지 쥐여 준 황제는 그를 향해 인자하게 웃어 보였고, 황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헤일론이 일어서 귀족들을 향해 뒤돌자 크나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박수와 환호는 끝을 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에 황제의 손짓으로 겨우 소리가 멎을 수 있었다.
헤일론의 인사까지 끝을 맺자, 곧이어 홀의 한가운데로 걸어 나온 그와 황녀의 춤이 시작되었다.
오늘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곡이니만큼 부드러운 선율이 연회장을 가득히 감쌌다.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아름다운 두 사람의 움직임은 그들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것은 물론이며 더욱이 지금껏 등장하지 않았던 헤일론의 자태에 몇몇 귀족 영애들은 벌써부터 마음을 빼앗겨 앓는 소리를 냈다.
모두가 집중한 나머지 그 누구의 말소리도 없이 조용하던 첫 곡이 끝나자 역시나 박수갈채가 이어졌고, 그와 함께 귀족들 간의 눈치 싸움도 막을 올렸다. 은밀한 긴장감이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기존 예법에 따라 황녀와의 첫 곡을 마무리한 황태자.
이제 그는 다른 영애와 두 번째 곡을 준비할 것이다.
성년이 될 동안 단 한 번도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황자.
뛰어난 능력의 시에리나 황녀가 직접 계승권을 넘겨준 이이자, 현재 제국의 제1 황위 계승권자.
그 모든 수식어들이 가리키는 헤일론은 그 관심에 부응이라도 한다는 듯이 관례를 다 하고 춤을 추는 데까지 그 어떤 흠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황제 부부까지 흡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역시나 그곳에 모인 귀족들은 탐욕에 눈을 번뜩였다.
그 덕에 영애들뿐 아니라 그곳의 모든 이들이 그의 발걸음에 집중했다.
그가 두 번째 곡을 함께할 사람은 곧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었다.
제 혈연이 되면 좋고 만일 아니더라도 어디에 붙어 줄을 서야 할지도 중요했기에 곁눈질로, 혹은 대놓고 헤일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눈길을 산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내게로.
모두가 놀란 가운데 나는 홀로 기복 없는 표정을 유지했다.
헤일론이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는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클로디 백작가.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면서도 정치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가문.
자작가 출신의 어머니와 기사단의 단장인 아버지.
그리고 아직 약혼자가 없는 여식 하나.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찾고 있는 정략결혼 상대로서 너무도 완벽한 조건이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들지도, 말하려 들지도 말거라. 그게 네 일이고 역할이니.’
그 말을 하던 헤일론의 얼굴이 아직도 내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채로 그저 그의 곁에 앉아 웃고만 있던 삶 따위-
‘죽어도 다시 돌아갈 생각 없어.’
“영애, 저와 춤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내게 손을 내민 그는 옅지만 곱게 휜 두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모습이었다.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반했던 모습이.
사교계에서 배척되어 홀로 남겨진 자신에게 건네준 손이, 나를 보며 웃는 눈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었다.
가문의 일과 사교계의 시선으로 지쳐 있던 내게 그의 손은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과도 같았다.
그것을 잡기만 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겪고 돌아온 나는 알았다.
그 동아줄은 지금까지 그 모든 시련들과 엇비슷한 불행을 안겨 줄 정도의 썩은 동아줄이라는 것을.
한번 높은 곳에서 떨어진 내게, 다시 그에게 속아 줄 자비 따위는 없었다.
난 나를 바라보며 웃는 헤일론에게 그와 같이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싫어요.”
“!”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숨 막히는 눈치와 날아드는 시선들.
찬찬히 퍼진 목소리가 이 상황을 직시시켜 주자마자 그 주변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하는 일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두 손 들고 환영하는 일이었다.
황실과 아주 작은 연을 맺는다는 것만으로도 딸려 들어오는 혜택이 어마어마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술렁인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무 세게 말했다…….’
조금 전 내 언행은 헤일론이 아닌 그 어느 귀족에게 행한다고 해도 실례가 될 정도로 무례했다.
이전 기억들을 되짚다 보니 순간 감정이 격해져 뱉어 버린 말이었다.
정작 말해 버린 뒤 그것을 깨달았지만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귀족들끼리는 빠르게 말이 오고 가며 시끄러웠지만 정작 나는 다른 것에 더 시선을 빼앗겼다.
바로 헤일론의 표정.
그의 두 눈이 내 눈동자와 닿았다.
분명히 곱게 자라 온 그에게는 그리 익숙한 대우가 아닐 텐데도 그는 내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떻게 저리 반응 하나가 없을까.’
그 반응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마음에 들지도 않았기에 조금 더 날카롭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한 가문의 영식, 영애들은 언제나 가문의 이름을 지닌 채 다녔고 자신의 모든 행동들은 결국 가문의 명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오늘 일로 인해 내 가문에 피해가 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난 결국 작게 몇 마디를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송구합니다, 황태자 전하. 설마 전하께서 제게 신청을 하실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말이 헛나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 춤 솜씨는 분명 전하의 솜씨에 따라가질 못해 혹여 전하께 피해가 될까 춤은 함께할 수 없을 듯합니다.”
헤일론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부드럽게 휘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가 아닌 것 같은데.”
“…….”
이 정도면 눈치껏 다른 영애를 찾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내 생각과 달리 그는 내게 내민 손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제가 잘 이끌면 되는 것이니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혹 제가 발을 밟지는 않을까…….”
“상관없습니다. 그깟 발 한번 밟힌다고 부러지기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좀처럼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고 심지어는 내게 얼른 잡으라는 듯 손을 더욱 가까이 내밀었다.
이렇게 되니 그의 청은 더더욱 거절하기 힘들어졌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헤일론의 제안을 이미 한번 거절하고 또 그것을 여러 번 반복했다가는 가문을 위해 나온 곳에서 되레 가문의 피해가 생길 수도 있었다.
춤 한 번과 가문. 비교할 것도 없는 우선순위에 나는 결국 푹 한숨을 쉰 뒤 드레스 끝을 가볍게 들어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전하.”
영광은 무슨.
내 이중적인 모습에 나조차도 마음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었다.
드디어 그의 입가에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리가 무대의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곧이어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와 헤일론은 자연스럽게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춤을 추기 시작하자 익숙한 그의 모습이 더 진하게 눈에 들어왔다.
새벽의 하늘같이 짙은 흑발에 푸른 눈.
예전에는 나와 비슷한 저 푸른 눈이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다.
그 눈이 나를 향할 때, 얼마나 매서워지는 줄도 모르고.
‘또 이 생각이네.’
그를 가까이 마주하자 점점 짙어지는 그에 대한 생각에 난 일부러 그의 눈을 피해 버렸다.
노래는 곧 절정에 달해 갔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마주 보는 부분에서, 헤일론의 입이 작게 열렸다.
“영애는 참, 이상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또 그 무덤덤한 표정.
나는 이렇게 필사적인데 그는 이 상황조차 제 손안에서 굴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역시도 저 혼자 발버둥을 치는 기분에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고개가 자연스레 바닥을 향했다. 그런 와중에도 춤에 익숙해진, 가볍게 스텝을 밟고 있는 구두 끝이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그의 구두까지도.
확 발이라도 밟아 버릴까.
……?
별생각 없이 굴린 생각의 흐름에 나조차도 놀라 두 눈이 커졌다.
생각해 보니 안 될 것도 없었다. 춤에 익숙하지 않은 영애가 스텝을 밟는 도중 실수하는 것은 예삿일에 가까우니 설령 밟는다 하더라도 뭐라 말은 못 하지 않을까.
아니, 이미 춤을 못 춘다고 말을 해 놓은 이상 여기서 잘 추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입꼬리가 사르르 올라갔다.
노래는 점차 끝부분에 다다랐다. 그리고 음악의 후렴에 두 사람이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그 순간에,
꾹.
내 구두 끝이 헤일론의 구두 위에 빠르게 올라섰다.
흰 구두가 그의 검은 구두 위에 겹쳐졌고 곧이어 그 발에 작게 힘이 들어갔다.
주위 귀족들이 못 본 틈을 타 순식간에 발을 떼어 내긴 했지만, 나는 그의 발을 밟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그를 보며 방긋 웃어 주었다.
물론 바로 뒤돌아서 도는 구간이 있어,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좋은 표정만은 아닐 거란 생각에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으로 두 번째 곡의 마지막 구절이 울려 퍼졌고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발을 멈췄다.
“즐거웠습니다, 영애.”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겉치레에 불과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획, 뒤돌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던 시선이 한층 더 두꺼워진 듯했지만 굳이 상관하기에는 제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 무시하기로 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이전에는 서임식 이후 헤일론의 약혼서가 저택에 왔었고, 내가 그곳에 서명을 하며 그 악몽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내가 그 약혼서만 거부한다면 그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낼 수 있다는 거다.
전과 달라진 행동들이 조금은 어색하게도 느껴졌고, 앞으로 달라질 일들에 대한 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입가에는 미소가 지워지질 않았다.
이제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