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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나는 당신이 싫어 (9)화 (9/61)

〈9〉

한여름의 오전.

가장 화창하게 햇살이 스며들고 있을 그 시각에도 황태자비의 처소는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정확히는 달그락, 식기를 치우는 소리와 사그락, 침대 맡을 정리하는 소리만이 방 안을 의미 없이 메우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제 일만을 찾아 움직이는 하녀들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린 태자비, 베리안은 멍하니 창가 옆 테이블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미 며칠은 반복된 그 한적한 분위기가 익숙해지려던 찰나, 어느 낯선 발걸음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비전하. 오늘부터 전하를 모시게 될 라엘 벤디즈입니다.”

단정한 차림에 큰 가방을 가지고 문을 넘어온 이가 제게 인사를 보냈다.

그날은, 내 두 번째 시녀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라엘 벤디즈.’

내가 데려온 메이샤와는 달리 직접 지원해서 황실로 들어온 벤디즈 자작가의 부인.

가끔 사교계에서 보긴 했지만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눈에 띄게 화려한 외모와 반듯한 자세는 그녀가 얼마나 귀하게 자라 왔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네, 벤디즈 부인. 앞으로 잘 부탁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네자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잠시 바닥을 굴렀다.

“음…… 혹시 그냥 라엘이라 불러 주실 수 있으실까요? 부인이라는 단어는 아직 익숙지가 않네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는 라엘은 입꼬리만 겨우 당기고 있는 정도지, 그녀의 눈동자는 제 역린을 잃은 이의 것마냥 초점을 잃은 듯이 보였다.

“……좋아요, 라엘.”

그 모습에 아주 조금, 마음이 쓰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녀도 다른 하녀들처럼 저와 상관없는 이일 뿐이었다.

그녀 역시도 그리 생각할 거고.

그렇기에 그녀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려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항상 궁에만 있으시면 건강에 안 좋아요. 오늘은 산책을 나가 보는 게 어떠세요? 햇살이 정말 예쁜 날이거든요.”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많았고,

“전하의 분위기에 그 옷은 그다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차라리 조금 덜 화려해도 이편이 더 어울리겠어요.”

조금은 더 단호했으며,

“감히 비전하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이들은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지 궁금하네요. 황실 무서운 줄 모르고.”

“큼. 가, 가요.”

너무도 당연히 내 편에 서 있는 이가 되어서.

“일부러 안 그래도 되는데.”

“일부러 이렇게라도 해야죠. 앞으로 황실 행사가 적으니 더더욱요.”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도 이만 들어가자, 시간이 늦었네.”

“네, 좋은 밤 되세요, 전하.”

“응, 라엘 너도.”

어느새 내게 한없이 밝은 사람이 되어 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는 달랐기에. 조금 더 알아 가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한 바로 다음 날.

벤디즈 자작의 비리와 뒷거래 장부가 세상에 퍼졌다.

얼마나 넓게 손을 뻗고 다녔는지 수도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소문은 그 파급력 또한 어마어마했다.

자작 또한 여러 죄목으로 황실 감옥에 구금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정작 그의 아내라는 이유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라엘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억울해하지 않았다.

“라엘, 그-”

“제가 죄송해요. 비전하의 시녀가 되어선, 전하께 피해를 끼쳤네요.”

먼저 내게 사과를 건넸고,

“전 괜찮아요, 전하. 그와 사랑을 한 것도, 보살필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괜찮냐는 물음에도 힘들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그녀는 정말 괜찮아 보였기에, 나는 멍청하게 그것을 믿어 버리고 말았다.

아마 그날 밤, 라엘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울음소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끝까지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흐윽, 윽…….”

흘러나오는 소리는 자꾸만 무언가에 걸렸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있는 듯했다.

새벽 밤에 고작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가 제 귀를 전부 막아 버릴 듯이 크게 닿았다.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등잔이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몰랐을까. 왜 막지 못했을까.

조금만 더 일찍 라엘에게 관심을 주었다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몰랐다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처럼 위로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바라보지만은 않았을 테다.

나는 그날 밤, 방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당시의 후회를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까-

“도와줄게요.”

이번에는 당신을 도울 수 있도록 해 줘요.

나를 바라보는 라엘의 눈동자가 잠시 떨려 왔다. 하지만 곧 힘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모른 척하시는 건가요?”

제 물음에 그녀는 훅 고개를 돌리고는 숨을 뱉었다.

“정말 모르는 거예요. 자작님과의 약혼, 그게 뭐라고 영애가 도와요?”

“약혼이 아니라, 정확히는 약혼의 파기를 돕는 거예요. 영애는 그 약혼이 싫잖아요.”

움찔, 라엘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뜻 모를 소리 그만하세요. 제가 왜 그 일을 반대하겠어요? 집안 좋고 황실 공무원으로 일하는 성실한 사람인걸요.”

이를 악물고 하는 말에는 꾹 욱여넣은 힘이 담겼다.

“영애는 그 사람이 싫은 게 아니니까요. 영애가 바라던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해야 하는 약혼과 결혼 따위가 싫은 거지.”

“그걸…….”

결국 라엘은 나를 피하던 고개를 바로 했다. 두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와줄게요.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이 말을 하는 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녀의 아픈 곳을 내가 건드리는 것은 아닐까.

“영애가 어떻게요?”

“결혼은 전부 포르한 부인의 결정이니, 부인의 마음을 바꾸면 되지요. 부인께서 먼저 자작님을 반대하게 만들면 돼요.”

“그런 방법은 없어요. 저라고 그 생각을 안 해 봤을 거 같나요? 그 사람의 모든 조사를 다 했는데도 아무런…… 하,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라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아니요, 있어요. 그저 아직 못 찾은 것뿐이에요. 내가 찾을 수 있어요. 믿어 봐요.”

그가 지난 생에 저지른 비리를 알고 있는 나는 그 행적을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영애를 어떻게 믿어요? 애초에, 자작님과의 결혼은 어떻게 알아낸 건데요. 처음부터 내 약점을 쥐러 온 게 아닌가요?”

우선은. 라엘이 저를 믿어 주는 것이 먼저였지만.

조곤조곤 말을 잇는 라엘은 무언가를 더 따지려는 듯싶었으나 내가 내려놓은 서류 한 장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가벼운 비리 정보예요. 이 정도로 별 타격은 가지 않겠지만.”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본 그의 비리들.

“아는 정보상이 있어요. 그곳에서 영애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고요.”

“정보상?”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시겠지만 영애들이 정보상과 만나는 게 그리 좋게 보이진 않잖아요. 이로써 영애도 내 약점을 하나 쥔 걸로 해요.”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요? 내가 뭐라고. 지금껏 알던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그녀의 표정은 조금 상기되었으나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심하듯 보지 말아요. 저도 영애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요.”

“부탁이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그녀를 찾아온 또 다른 이유를 꺼냈다.

“전 다시 사교계에 복귀하고 싶어요. 하지만 제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을 테니, 제가 사교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그거면 돼요.”

라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걸려도 좋아요. 대답 기다릴게요.”

‘이거면 됐어.’

어차피 바로 수락을 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돌아서려던 순간,

“좋아요.”

라엘의 짧은 한마디가 내 발길을 잡았다. 휙 고개가 돌아갔다. 눈을 마주친 그녀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대신 계약서 정도는 써요. 아직, 난 영애를 전부 신뢰할 수 없으니까.”

나는 미소를 띠며 그녀와 손을 잡았다.

“물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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