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황녀를 따라 들어온 웬만큼 호화로운 방에는 그녀와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없었다.
“피곤하지는 않나요?”
서로 마주 본 소파에 자리한 황녀는 그 맞은편에 앉은 나를 보며 귀 뒤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네네, 괜찮아요. 그런데 저는 왜 부르셨어요?”
그 물음에 왕녀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이내 미소 지었다.
“음, 왕녀와 황태자 분위기가 이상한 거, 느끼고 있죠?”
“네?”
조금 전 내 기분을 정확히 짚은 황녀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이전에 둘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러니 분위기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영애가 이해해 줘요. 황태자에게 그다지 좋은 일도 아니라.”
황녀는 내가 보는 일들의 진상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대화를 계속했고, 그것을 듣던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혹시 황녀님, 제가 어제 왕녀님께 팔찌를 하나 받았는데요.”
“팔찌요?”
내 말을 되묻는 황녀는 어느새 미소를 잃은 채였다.
“네, 붉은 루비와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팔찌인데……. 이것도 그 두 분 일에 관련이 있는 건가요?”
황녀가 이것에 대해 알고 있을 거란 느낌을 아주 강하게 받은 것은, 내 말에 황녀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진 그 순간이었다.
“그걸, 영애에게 주었다고요?”
그리고 그렇게 되자, 나는 결국 그녀에게 그 답을 재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녀님, 팔찌랑 두 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아시다시피 저도 어느 정도는 연루된 상태라서요.”
“……네, 이 정도면 어차피 알게 될 거 같으니까요.”
황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사실 왕녀가 제국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한 10년쯤 되었을 거예요. 리카 왕국이 처음으로 제국과 손을 잡으려던 순간에 왕과 왕녀가 제국에 방문했었어요. 그리고 그때 왕녀가 처음 황태자를 만났었고요.”
10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들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 황태자가 검술을 연습하던 시기라 왕녀가 그걸 보여 달라 했었는데, 황태자 역시 어린 나이였기에 검기를 잘 다룰 줄 몰랐거든요. 하필 검술을 시연하던 와중에 검기가 발현되고, 왕녀가 차던 팔찌에 걸린 보호 마법이 그걸 공격으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바람에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 왕녀가 조금 다쳤어요.”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런 사고에 엮였다기에 두 사람 사이는 훨씬 더…….”
“적대감이 보였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때, 사고가 나 두 사람이 모두 정신을 잃고, 그래도 보호 마법에 갇혀 있던 왕녀가 먼저 눈을 떴는데, 왕녀는 자신이 황태자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거든요.”
“네?”
“폐하와 어머니, 왕국의 왕이 모인 자리에서 그 말을 하니 파급력은 장난이 아니었죠. 왕은 무슨 일이냐며 난리를 피웠고 모두가 당황했어요. 특히나 왕녀가 차고 있던 것이 보호 마법이 걸린 팔찌라 모두가 그 말을 믿는 분위기였고요.”
그리고 황녀는 그 팔찌가 바로 내가 선물 받은 팔찌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전하는…….”
“일어나자마자 자신은 죄인이 되어 있고 모두가 그렇다 믿고 있는 중이니 아무 말도 못 했죠. 그 일로 왕국은 제국의 우위에 섰다는 듯이 굴었고 그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었어요. 그리고 황태자는…… 그 일로 대부분의 황실 인원들의 눈 밖에 났었죠.”
“…….”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했네요. 어쨌든 왕녀는 그때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걸 약점으로 황태자를 건드리고 있는 것 같아요.”
“저, 그런데 모든 분들이 왕녀님의 말을 믿었는데, 황녀님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계세요?”
내 물음을 마주한 두 눈은 씁쓸하게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모든 걸 보았거든요. 두 사람이 사고가 났을 때도, 왕녀가 거짓말을 할 때도.”
“네?”
“웃기죠? 그 상황을 전부 다 알고 있었는데도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요. 감히 폐하 앞에서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어요. 지금까지 그렇게 배워 왔으니까.”
문득 이전 기억을 다시 떠올리듯 깊어진 눈동자가 이내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뒤늦게 사람들에게 말해 보았자, 다시 일을 키운다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어요. 멍청하게 고민하다 늦어 버린 거죠.”
그 뒤로의 일들은 자연스레 제 머리에서 맞춰졌다.
남자아이라는 이유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황태자에 오른 헤일론. 그런 그를 경멸하던 황녀의 추종자들은 그 일을 계기로 직접적으로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무리 황태자가 어린 나이였다 하더라도 그 많은 이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테니 본인이 죄인이라 생각했을 거고, 아마 그 이후 황제의 말에 잘 거역하지 못한 거겠지.
이야기를 마친 황녀는 가볍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이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내 말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는 말아요. 영애만 더 힘들 거니까.”
자리로 돌아온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두 사람이 행동하는 건 조용히 넘겨 주세요.’
황녀는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냥 조용히.
“뭐 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네.”
“왜, 서로 좋은 일 아닌가?”
내 시야에 들어오는 헤일론의 앞에는 왕녀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 또한 어느 정도 들려왔다.
속뜻이 보이는 표정들과 이제야 이해되는 대화의 내용들.
그건 어린아이가 겪기에 너무도 큰 트라우마가 되었을 걸 알았기에.
그렇기에 나는, 이 모든 일의 전말을 듣고도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그러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또각. 또각.
그들에게 걸어가며 굳이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 영애.”
두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의 시선이 내게 모일 때에도,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고 계신가요.”
내 한마디에 그 시선들이 각각 다른 의미로 물들어 갈 때에도.
“아, 별거 아니었어요.”
왕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제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겼다.
“……그런가요.”
“무슨 일 있습니까, 영애.”
숨을 뱉으며 답을 읊조리는 내 모습에 헤일론이 왕녀를 제치고 내 앞에 섰다.
장갑을 벗은 하얀 손등이 가볍게 내 이마 위로 올라왔다.
“열은 없는 듯한데…….”
약간 낮아진 시선. 조금 구겨진 눈썹 끝.
‘날 걱정하고 있나.’
그 생각과 동시에 열을 재던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내가 그의 손을 잡으며 올린 팔을 다시 내릴 때까지도 떨어지지 않는 손에 헤일론은 놀란 듯이 눈을 깜박였다.
“전하, 저랑 나갈래요?”
홀린 듯이 뱉은 그 말에 내 앞의 두 사람 말고도 이쪽을 주시하던 이들의 시선이 화려하게 움직였다.
“영애, 그게 무슨 말이신지-”
“저랑 여기서 나가자고요, 지금.”
여기에 그를 두고서 왕녀와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을 쥔 내 것에 자그마한 힘이 실렸다.
“잠깐, 영애 지금 뭐 하는 거죠?”
그리고 그 곁에서 어이없다는 듯이 하, 헛웃음을 터트린 왕녀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저와 전하가 이야기 중이잖아요, 영애.”
나보다 키가 큰 그녀의 눈이 매섭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제 일을 망치기라도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 말하는 듯이.
‘오늘 이후 이처럼 가벼운 연회는 몇 번 없어. 황태자와 독대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게 뻔하니 지금에 집착하는 거겠지.’
정식 행사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긴 어려울 테니까.
왕녀의 것을 똑바로 올려다본 새파란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하지만, 별말 아니시라면서요?”
“네?”
왕녀는 황당하다는 듯 내 말을 되물었다.
“제가 처음 물었을 때, 왕녀님께선 별말 아니라하셨잖아요. 그 정도 일이라면 부디 왕녀님께서 미뤄 주세요.”
그 말에 그새 왕녀의 입가에 스며든 미소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안타깝게도 그건 어렵겠네요. 무척 중요한 일이거든요. 조금 전 그건 예의상 한 말이었어요. 제국 사교계에 계신 분이 이 정도 대화를 그리 직설적으로 받아들이실지는 몰라서요.”
입술 끝을 올리고 있는 게 고작이 된 왕녀는 정말 화가 난 듯이 보였다.
“그럼 무슨 일이신데요?”
“영애가 몰라도 되는 일이에요.”
“알고 싶어서요.”
툭툭 말꼬리를 잡는 투는 언젠가 자주 들었던 황실 하녀들 싸움 소리에 배운 것이었다.
“하.”
숨을 툭 뱉은 왕녀며 아직까지 내게 손을 잡힌 헤일론 역시 그 손끝에서 당황한 게 느껴졌다.
“내가 왜 영애에게 이걸 설명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전하와 제 일이에요. 영애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한 왕녀는 손에 들린 부채로 제 입술을 가린 채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 마지막 말, 이전에 들었다면 정말 말문이 막혔을 텐데.’
나는 잠시 헤일론의 손을 놓고서 그녀에게 다가가 그 부채를 가볍게 잡아 내렸다.
“상관할 바가 아니긴요. 전 전하의 파트너인걸요.”
황태자의 연회 파트너, 그것으로 그에 대한 명분은 끝이었다.
“제 앞에서, 남들 앞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라면 하지 마세요.”
“뭐라고요?”
“다 들으셨잖아요. 또다시 이번 같은 일로 찾아오지 마세요. 오늘 이후 다른 곳에서 이야기 꺼내는 것도, 싫어요. 전하의 파트너로서 말하는 거예요.”
“질투라도 하는 거예요? 나는-”
“아뇨.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요. 전 그저…….”
고개를 돌려 헤일론을 바라보았다.
여러 복잡미묘한 감정이 서린 눈동자가 평소보다 몇 배는 서글프고 아름답게 보였다.
“오늘 제 파트너인 전하가 행복하기만 했으면, 싶어서요.”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몸을 돌려 헤일론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매번 도움을 받던 이에게 이제는 내가 손을 건넸다.
“가요.”
멍하니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을 끌었다.
그리 큰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따라오는 걸음은 가벼웠고 우리는 천천히 그곳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