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당할 자가 없으니 (2)
평가가 있기 바로 전날 밤.
관주의 집무실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내일 있을 평가를 위해 무사부들이 모두 모여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대화의 중심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청운무관의 관주 복태동.
정무맹 호심당의 부당주 유청인.
그 둘이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번에 갑급에 있는 여섯 명이 모두 평가를 받겠다고 신청했습니다. 을급에서는 신청이 없었기에 여섯 명 중에서 선발하시면 될 것입니다.”
관주 복태동은 종이를 보면서 부당주 유청인에게 보고하듯이 말했다.
종이에는 여섯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일, 만총.
삼, 허자풍.
오, 매영령.
칠, 전광.
팔, 진우선.
십, 반효.
유청인은 이름이 적힌 종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여섯 명이군요.”
목소리가 너무 단조로워서 마치 실망한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순간 복태동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에 친히 부당주님을 청운무관으로 모신 것은, 저희 제자들이 다들 지닌바 실력과 품성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내일 보면 자연히 아시겠지만, 저와 무사부들은 한마음으로 뛰어난 제자를 길러내는 데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관주와 무사부들께서 수고가 많았군요. 맹주님을 비롯해 수많은 강호 동도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뻐할 겁니다.”
“다 강호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지요. 부당주님께서 잘 알아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는 정말 많이 노력했습니다.”
복태동이 입에 발린 소리를 막힘 없이 술술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번에 제자들을 잘 키워냈다는 걸 업적 삼아, 정무맹에 복귀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정무맹에서 청운무관으로 온 지 햇수로 오 년.
맹에서 좌천되었다고 느낀 복태동에겐 충분히 안달이 날 만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성과를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설득하여 부당주를 직접 청운무관에 모시고 온 것이다.
욕심 많은 복태동은 이처럼 중요하고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면 이들 중에 내가 특별히 눈여겨볼 만한 제자가 있습니까?”
유청인이 물었다.
복태동이 즉각 대답했다.
“가장 눈여겨보실 만한 제자는 만총입니다. 그는 만금전장의 아들로, 갑급에 온 지 이 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곽 사부가 그에게 무공을 지도하는 동안,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습니다.”
복태동이 마치 외워두었던 것처럼 줄줄 읊었다.
“또한, 성격이 차분하고 책을 가까이 하니 문무에서 탁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당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벽력신창 탁무위 대협에게서 창을 사사했습니다.”
“벽력신창 탁 대협!”
유청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벽력신창(霹靂神槍) 탁무위.
약 삼 년 전까지 숭의각주를 지낸 인물로, 정무맹의 십장로까지 오른 바 있었다.
그에 비하면 호심당 부당주는 말단에 불과했다. 유청인의 입장에선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복태동이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알다마다겠습니까? 갑자기 은퇴하시는 바람에 저도 그렇고 맹의 많은 사람이 아쉬워했는데…… 이곳에서 제자를 키우고 계셨을 줄이야!”
“하하. 그렇지요. 저도 처음에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만총은 탁 대협께 많은 칭찬을 받았다고 하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구려. 좋소. 그럼 다음은?”
유청인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복태동이 말을 이었다.
“이어서 반효가 있습니다. 그는 막 사부에게 도를 배운 지 삼 년이 되었고, 그 실력이 출중하여 또래 중에 상대할 자가 없습니다. 또한 맹호도(猛虎刀) 추선에게서 사사했고…….”
유청인이 소개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맹호도라는 별호를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러나 별호가 있을 정도면 강호에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고수일 테니, 충분히 기대할 만하리라.
복태동은 끊임없이 말했다.
“허자풍 역시 막 사부에게 도를 배웠고, 잔양도(殘陽刀) 왕평에게서 사사했고…….”
매영령은 송 사부에게 장법과 지법을 주로 배웠으며, 홍의선자(紅衣仙子) 백휘향에게 사사했다.
전광은 갑급에 올라온 지 한 달이 되었고, 홍 사부에게 검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는 따로 섬전검객(閃電劍客) 양중경에게서 사사하고 있었다.
“……이들의 실력이 출중할 것은 말할 것도 없으니, 부당주께서 눈여겨보셔도 좋을 것입니다.”
복태동이 갑급 제자들의 내력을 쏟아내듯 단숨에 말했다. 숨도 쉬지 않고 말한 듯했다.
유청인은 복태동의 설명을 집중하며 듣고 이름을 기억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럼 이 진우선이란 제자는 어떻소?”
종이에 적힌 이름은 여섯인데, 자신이 들은 이름은 다섯이었다.
진우선은 없었다.
그 질문에 복태동이 애석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우선이는 검에 재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청제자로 갑급이 되었기는 하나…… 이제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아 무사부를 두지 못했습니다. 아직 백학검법조차 배우지 못했습니다.”
백학검법은 검을 주로 쓰는 갑급의 제자가 배우는 무공이었다.
병급의 삼재공, 을급의 유운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적인 검법인지라, 그것을 배우고 배우지 않고는 차이가 컸다.
“따로 모신 스승도 없는 겁니까?”
“네. 제가 알기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진우선은 다른 제자들과 실력의 격차가 크겠군요. 그의 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내일 평가에 나올 만합니까?”
유청인이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
복태동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곧 몇 번 봤었던 진우선의 모습과 실력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우선이는 삼재공과 유운공을 그 누구보다 훌륭히 펼쳐냅니다. 비할 바 없을 만큼 뛰어나지요. 하지만 백학검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다른 제자들에게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도 청운무관에 왔고 정무맹을 꿈꾸고 있을 테니, 이번에는 참가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네. 그렇지요.”
유청인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복 관주는 아까 전광이라는 제자도 분명 갑급에 올라온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와는 다르군요. 관주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분명 누구든 먼저 가르치고 싶었을 텐데…….”
유청인이 혼잣말하듯이 작게 말했다.
하지만 조용한 가운데서 그 말을 못 들었을 무사부는 아무도 없었다.
“…….”
순간적으로 적막이 흘렀다.
무사부들은 여기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으니까.
유청인은 이름이 적힌 종이를 접어 품에 넣고, 대화를 마무리하는 말을 던졌다.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이 여섯 명에 대한 무사부들의 의견도 이와 같습니까?”
“……네.”
무사부들 사이의 어디선가 작은 답변이 나왔다.
그러고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분위기 때문에라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 침묵이 회의의 끝을 알렸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에,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일각(一刻, 약 15분) 후.
관주의 집무실 밖에서 한 무사부가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양문곽이었다.
그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회의하면서 미안함과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온 까닭이었다.
‘삼재검이나 유운공으로 따지면 상대가 없겠지만…… 그래도 백학검법을 익히고 못 익히고는 차이가 큰데…….’
진우선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했다.
‘대련도 많이 안 해봤을 텐데. 내가 대련해주면서 싸우는 법이라도 가르칠걸…….’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모든 게 다 아쉬움이었다.
“하아-!”
양문곽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집으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이 가까워져 오는 시각이라 세상이 모두 잠들어 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침 해가 밝았다.
진우선이 고서점을 나섰다.
“우선아. 잘하고 와!”
황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청운무관에서 평가가 있다는 걸 진우선이 미리 말해두었기에, 황호가 고서점에 일찍 나와 있었다.
“네. 그럴게요!”
“이렇게 슉-!슉-! 하면, 무조건 뽑히는 거야. 알지?”
황호가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마치 검을 들고 찌르는 듯 행동을 보여주었다.
진우선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황호만의 방법이었다. 그는 여전히 유쾌했다.
“하핫. 넵! 그렇죠.”
진우선이 웃었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난 이미 알고 있지.”
“네! 그럴게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황호가 보기에 진우선은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 오늘 괜찮아 보이네. 이거 아무래도 나를 걱정해야겠어. 우선이 네가 정무맹에 가게 되면 점원 없이 하루 종일 일해야 하잖아. 힘들겠군.”
황호가 계속 너스레를 떨다가 간단히 말을 마무리했다.
“농담이고. 얼른 다녀와!”
“네!”
진우선이 밝게 대답했다.
그리고 청운무관으로 향했다.
청운무관 대연무장.
이곳은 연무장 중에 가장 큰 곳으로,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처럼 정무맹을 위한 제자를 선발하는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우선 오라버니, 오셨어요?”
진우선이 대연무장에 들어서자, 무사부와 함께 있던 매영령이 먼저 다가와 알은체했다.
“일찍 와 있었네?”
“아녜요. 저도 조금 전에 왔어요.”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나 표정이 평소와 뭔가 달라 보였다. 아무래도 꽤 긴장한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저 잘할 수 있겠죠?”
“응. 수련 열심히 했잖아. 잘할 거야.”
“맞아요. 저 반드시 합격할 거예요!”
매영령이 굳은 얼굴 가운데 눈을 빛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대화를 나눌 때, 전광, 허자풍, 반효도 각자 무사부와 함께 나타났다.
세 사람 뒤로 도와 검을 든 다른 중년인들도 보였다. 각자 따로 모시는 스승인 모양이었다.
그 뒤로 만총도 그의 무사부와 함께 들어섰다.
진우선의 시선이 저절로 만총의 손에 쏠렸다.
기다란 창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총이 너는 창을 썼구나!”
진우선이 놀람을 토했다.
창을 든 만총의 모습이 꽤 낯설어서였다. 진우선이 종종 봐왔던 만총은 항상 책과 함께였던 까닭이었다.
그가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아! 우선이 너는 내가 창 든 거 처음 보겠구나. 나는 주로 창을 쓴다.”
“그렇구나. 아주 잘 어울리네.”
책을 쥔 모습을 보면 천생 서생이었는데, 이렇게 창을 든 모습을 보니 천생 무인이었다.
특히, 눈빛이 그러했다.
평소에는 지적이면서도 고지식해 보였는데, 지금은 단단하고 짙은 흑색의 눈동자에서 산도 쪼갤 듯한 기세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문무겸전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근데 청운무관에서 창을 쓰는 사람은 거의 못 본 거 같은데?”
“맞아. 아무래도 무사부님들 중에는 창을 주로 쓰시는 분이 안 계시니까 본 적 없을 거야. 근데 다행스럽게도 집에 계시는 빈객 중에 창으로 일가를 이루신 분이 계셔서 스승으로 모시며 배우고 있지.”
창으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엄청난 스승을 모신 것일 텐데 만총은 그것을 너무도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관주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대연무장으로 들어섰다.
검붉은 창을 든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창 때문인지 시선이 끌렸다.
그는 관주와 살짝 이야기한 뒤 만총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헛! 벽력신창 탁 대협?”
“벽력신창이라고?”
“정무맹 십장로잖아?”
벽력신창이라니, 별호부터가 어마어마하지 않은가?
들어보면 정무맹 십장로 출신이라고도 했다.
그가 바로 만총이 모신 스승님이었다.
그때, 대연무장 중앙에 한 중년인이 자리를 잡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호심당의 부당주 유청인이라고 한다.”
그 말에 갑급의 여섯 제자가 시선을 모았다.
유청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 대결은 내가 주관할 것이다. 대결 방식은 이미 알려진 대로 비무이며, 두 사람이 대결하는 모습을 보고 결정할 것이다.”
평가의 규칙이었다.
다들 귀를 기울여 들었다.
“실력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긴다고 무조건 합격이 아니고, 진다고 다 떨어지는 게 아니다. 실력이 된다면 둘 다 붙을 것이고, 실력이 안 된다면 둘 다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각자 가진 실력을 발휘하기 바란다.”
유청인은 말투가 참 딱딱했다.
“그리고 상황이 과열되어 크게 다치는 경우가 없도록 살초는 금한다. 절대로.”
그렇게 유청인이 말을 마친 뒤, 대연무장의 측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관주가 말을 이었다.
“첫 비무는 반효와 진우선이다. 호명된 제자들은 연무장 가운데에 서도록.”
관주의 말에 두 사람이 대연무장 한가운데에 자리했다.
진우선은 반효를 마주보고 섰다.
곧바로 분노가 올라왔다.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얼마 전, 자신을 빈정거린 것도 모자라 눈을 찌르려고 한 놈이었다.
그는 적이었다.
“너네. 반가워. 여기 나온 게 부끄러워지도록 한 초식 만에 끝내주마.”
반효는 여전히 이죽거렸다.
진우선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검을 쥐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관주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비무를 시작하라!”
콰앙-!
폭음과 함께 반효가 나가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