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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로운 나무 (3)
진우선과 우문혁이 돌아왔을 때는 일행 중 상당수가 잠자리에 든 시각이었다.
잠이 들지 않은 사람들은 모닥불 가에 모여 있었다.
양지명과 상관적, 민연하도 거기에 있었다.
“우선아. 이제야 왔구나. 갑자기 안 보여서 놀랐어.”
“상관 형,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끼쳤네요. 잠시만 둘러보고 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흐를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괜찮아. 다들 걱정을 좀 했지만, 혁이가 금방 데려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었거든.”
상관적이 진우선을 보고 안도할 때, 양지명이 감탄한 표정으로 우문혁을 보았다.
“우문 소협, 정말 말씀하셨던 대로 금세 다녀오셨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찾으러 갔는데, 진 소협이 오히려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빨리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문혁의 말에 양지명이 진우선을 슬쩍 쳐다보았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오래 비우실 거면 미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양지명이 이렇게 당부한 것은, 공식적으로 호심당 제자들의 임무와 안전이 그에게 맡겨져 있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할 말을 전한 양지명이 진우선과 우문혁을 모닥불 가로 데리고 갔다.
“소협들께서는 이리와 앉으시지요. 여기서 잠시 불 좀 쬐면, 몸이 노곤해져서 잠이 솔솔 오실 겁니다.”
자리에 앉은 진우선은 모닥불의 상태를 바로 알아보았다.
‘화기에 꽃이 피었구나.’
불꽃이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까 빠져나간 목기가 모닥불에 스며들어, 모닥불의 기운을 왕성하게 한 것이다.
그 빛깔도 매우 맑고 선명했다.
목생화(木生火)의 이치가 일으킨 변화였다.
그때, 양지명이 뜬금없이 자신의 기분을 감상적으로 표현했다.
“아까부터 든 생각인데, 불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리 말하는 게 좀 어색한데, 불꽃이 참 맑은 것 같습니다.”
양지명의 우측에 앉아 있던 상관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왠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충만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물론, 느낌뿐이긴 합니다만.”
“맞습니다. 맞아요. 저도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양지명이 격하게 동의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진우선과 우문혁더러 불 좀 쬐면 잠이 솔솔 온다고 말했었는데, 그렇게 말한 이유가 이런 기분에서 유래된 모양이었다.
둘의 대화를 우문혁이이었다.
“이곳이 상서로운 곳이기에, 불을 피워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문혁은 벽조목 나뭇가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는데, 아무래도 상서로운 기운에 관한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상서로운 곳이니까.”
“상서로운 곳이라……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나 오늘 더 그런 모양입니다. 여태껏 본 불꽃 중에 지금이 가장 깨끗하고 산뜻하거든요.”
상관적과 양지명이 우문혁의 말에 맞장구쳤다.
“정말로 신기합니다. 살다 보니 불꽃에서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다 있네요.”
“맞습니다. 동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모닥불 가에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타오르는 불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그들과 시선은 비슷하지만, 불꽃에서 다른 걸 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진우선이었다.
‘불꽃이 생생하게 타오르는 것은 목생화의 이치인데, 이 불조차 상서로운 느낌을 주는 건 벽조목이 가진 특별한 기운 때문이구나.’
진우선은 명확히 알았다.
그는 남들과 달리 불에서 전해지는 기운을 제대로 구별하여 느낄 수 있었다.
화기는 평소보다 강렬했는데, 그 가운데 불꽃이 생생한 것과 선명 한 것은 원인이 달랐다.
생생한 건 목생화의 이치였고.
선명한 것은……
[벽사의 이치지.]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친다는 뜻의 벽사(辟邪), 그게 벽조목의 기운이었다.
정체를 알았으나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던 진우선에게 검노야가 확정을 지어주었다.
즉, 상서로운 기운의 이름은 벽사였다.
‘목기의 내력에 벽사의 기운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흐릿한 환영의 모습으로 모닥불을 쬐고 있던 검노야가 진우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노야는 진우선의 생각에 동의했다.
목기의 형을 이룰 때 벽조목의 목기가 근간이 되었으니, 벽사의 힘도 함께 온 게 틀림없었다.
‘항마에 이어 이번엔 벽사구나.’
벽사를 생각하면서, 진우선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내력이 가진 항마의 능력이 떠올랐다.
수기는 상선약수의 성질이 있어 항마의 능력이 있었다. 직접 경험했기에 그 기억이 더 선명했다.
그렇다면 수기와 목기만이 아니라, 화기, 토기, 금기의 형을 이루면 어떻게 될까?
‘아직은 알 수 없지.’
하지만 기대는 되었다. 아마도 예사롭지 않을 터였다.
‘천지간의 기운…… 알면 알수록 대단한 것 같습니다.’
진우선이 깊이 탄복했다.
[허허. 우선아. 나는 그것을 깨닫고 형을 이루어가는 네 모습이 더 대단하구나.]
검노야가 흐뭇한 얼굴로 진우선을 바라보며 칭찬해주었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진우선이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 남가철방에서 수련하는 게 좋을 수도 있겠어.’
남가철방은 화기와 금기를 한꺼번에 얻었던 장소였다.
그러니 그 기운들을 수련하기에도 좋을 터였다.
특히나 남가철방의 주인인 남회로부터 부담 없이 와도 된다고 들었기에, 진우선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생각은 이제 토기로 이어졌다.
‘근데 토기는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천지간의 기운을 얻는 것은 그때그때 달랐다.
수기는 장강의 세찬 물결을 따라 가던 중에 처음 느끼게 되었다.
목기는 수기의 형을 이루었을 때, 수생목으로 이어지며 얻었다.
화기와 금기는 남가철방에 방문했다가 특별한 상황을 겪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제 토기 하나만 남았다.
진우선은 토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때, 양지명이 하품했다.
“하암-!”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하하! 몸이 따뜻하게 녹아내리니, 졸음이 밀려오나 봅니다. 조금 전에 뭐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네요. 불꽃을 보다가 잠시 감상에 빠진 것 같기도 하구요. 아무튼 이제 진 소협도 돌아오셨고 하니, 저는 그만 자러 가봐야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상관적이 곧장 양지명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소협들께서는 언제 주무실 생각입니까?”
“저희도 곧 자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이참에 일어날까 싶습니다. 잘 잠드는 것도 임무의 하나일 테니 말입니다.”
우문혁이 양지명에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닥불가의 분위기가 급격히 바뀌었다. 대화는 곧 마무리되었고, 다들 잠자리로 들었다.
진우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자리로 가서 잠자기 시작했다.
그런 진우선의 머리 위로 희끄무레한 환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노야였다.
검노야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진우선을 내려다보았다.
[토기는 어쩌면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허허허.]
검노야가 싱긋 웃으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진우선은 이미 잠들어 있어 그 말을 듣지 못했다.
***
살랑-.
뺨이 간지럽다.
무언가 닿은 느낌은 전혀 없다.
바람이 불어 뺨을 스쳤나 보다.
잠결에 그렇게 느꼈다.
촉촉-.
피부가 시원하다.
물기가 닿은 게 아닌데 그렇다.
아니, 아무것도 닿아 있지 않다.
공기가 차가워진 것이려나.
밤이니까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을 잠시 하며 잠을 이어갔다.
폭신-.
포근하고 보드랍다.
무언가가 온몸을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전히 닿아 있는 건 없는데 아늑하고 편안하다.
뭘까?
상황이 기묘하다.
느껴지는 게 없는데, 느끼고 있으니까.
이번엔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다.
슬쩍 스친 게 아니고,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다.
결국, 진우선이 눈을 떴다.
일어나 보니 아직 하늘은 어둡고, 자신은 노숙하는 중이었다.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밤이고, 모닥불만 타고 있었다.
‘느낌은 그대로인데!’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느낌이 있었다.
이제 진우선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잠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사방에서 둘러싼 따스한 기운이 온몸을 더욱 감싸 안았다. 태아가 어미의 배 속에 있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따스한 기운은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안아줄 것만 같다.
외형만이 아니라, 내 안의 모든 것마저도 그대로 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문득, 청량한 향기가 어디선가 스며들었다.
산내음이었다.
‘흙냄새구나.’
그리고 알았다.
‘토기!’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 순간, 진우선은 누워 있던 상태 그대로 단전의 내공에 집중했다.
과연 때맞춰 단전을 톡톡 두드려 오는 기운이 있었다.
흙냄새 잔뜩 풍기는 기운, 토기였다.
‘들어와.’
진우선이 마음을 열고 기운을 받아들였다.
토기가 진우선의 단전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토기는 단전에 자리하고 있던 수기와 목기, 화기와 금기를 두루 만났다.
때론 당기고 때론 밀어내지만, 그 모든 기운과 한데 어울리려 하고 있었다.
단전으로 스며든 토기가 조금씩 조금씩 쌓이며, 이미 쌓인 기운들 사이에서 존재를 갖춰갔다.
진우선은 가만히 관조하며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문득, 토기에서 익숙한 면을 발견했다.
‘토기도…… 상서롭구나.’
벽조목의 향기가 토기에서도 풍기고 있었다.
그 순간 검노야의 음성이 전해졌다.
[허허. 상서로운 기운이 봉우리에 가득하여, 그 땅마저 상서롭게 만들었으니 대단하도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기운이 곳곳마다 가득하구나.]
진우선의 의문이 단숨에 풀렸다.
검노야의 말대로 벽조목의 상서로운 기운이 땅마저 변화시킨 상황이었다.
‘귀물이라 하신 이유가 있었어.’
벽조목의 숨결이 닿는 모든 것이 상서로워지니, 귀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벽조목의 숨결은 진우선에게도 닿았다.
목기의 형을 이루고, 토기를 느낀 그 근원에는 벽조목의 숨결이 있었다.
검노야가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말할 만했다.
비단 진우선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이곳에서 머물고 가면 잠자리가 편하고 아침이 상쾌하다고 한다지 않던가.
실로 벽조목이 자리 잡은 봉우리는 상서로운 곳이었다.
그런 가운데 진우선은 계속 내력에 집중했다.
이곳에서 토기를 잘 쌓으면, 앞으로 수련해 나가는 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런 진우선의 마음속에 검노야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서로 맞물려 상생하고 상극하니, 이제야 천지간의 기운이 제대로 운행하는구나. 비로소 오행(五行)이라 부를 만하고, 자연을 담아내어 오행진기(五行眞氣)를 시작했다 할지니……]
검노야가 오행진기라는 이름을 주었다.
오행진기는 천지간의 기운인 수기, 목기, 화기, 토기, 금기를 아우르는 말이었다.
다섯 기운이 서로 맞물려야 그 시작이라 말할 수 있었다.
검노야가 여태껏 오행이라 말하지 않았던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한데 검노야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우선아. 너는 이제 진정한 광영무를 볼 수 있게 되었구나.]